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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형도] 진눈깨비

  • 등록일
    2004/09/05 21:37
  • 수정일
    2004/09/05 21:37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드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어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못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기형도 전집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이 공간을 방문한 azrael님이 좋아하는 기형도 시를 한번 읽고 써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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