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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 소외, 여가

  • 등록일
    2004/10/12 10:06
  • 수정일
    2004/10/12 10:06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을 자신의 본질, 곧 자신의 생활표현의 대상으로 삼거나 인간이 오직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에 직면해서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인간적 자연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적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이 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노동은 대상화라는 형태를 취한다.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대상으로부터  자연적  형태를  제거하여 그것을 인간적 욕구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적  형태를  각인받음으로써  대상은 자립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것에서  인간세계로의  통합을  통해 산출된 것으로 전화한다.



자연적 대상이 인간적 욕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된 것이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대상이 또한 인간의 목표, 상상, 의지를 구현한 것이 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대상화는 그에 선행하는 의식상의 관념적 대상화를 전제한다. 이러한 관념적 대상화 속에서 인간은 이미 자연적 대상들을 그것들의 객관적 척도에 대한  지식이라는  형태로  전유하고  있다.  한편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동시에 인간적 욕구, 즉  인간화된  자연적  욕구와  고유하게 인간적인 욕구가 산출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식욕이라는 자연적 욕구는 자연 속에 주어져 있는 형태 그대로의 음식이 아닌, 조리된 음식에 대한 식욕이 되며 미적 욕구 등 생활의 직접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수준의 문화적 욕구가 탄생한다.

 

노동은 욕구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대상 사이의 거리를 확립함으로써 욕구를 인간화한다. 오로지 자연적 존재이기만 한 동물은 즉각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롤 때만 생산하며 오직 그때만 자유롭게 생산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그 자체로 이미 순수하게 자연적인 욕구로부터의 해방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의 도야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발전을 통해 가속화된다. 대상적으로 전개된 인간의 본질의 풍부성을 통해 비로소 풍부한 주관적인 인간적 감성, 음악적인 귀, 형식미를 보는 눈이 생성된다. 왜냐하면 오감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인 감각들, 실천적인 감각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적 감각들 곧 감각들의 인간성은 그 대상의 현존재 곧 인간화된 자연을통하여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사 전체는 인간의 노동에 의한 인간의 산출 곧 인간을 위한 자연의 생성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인간은 대상화로서의 노동을 통해 동물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성을 확립하고 확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노동의 질의 문제로 귀착된다. 인간이 노동 속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그 삶은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적 본질의 대상화라는 형태를 박탈함으로써 임노동자를 자신의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시킨다. 임노동자는 우선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타인, 즉 자본가의 소유가 되고 그 생산물의 축적은 자본의 축적으로 실현되어 그에게 점점 더 큰 적대적 힘으로 맞서 온다.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노동과정 자체로부터의 소외와 상응한다.
노동과정의 조직과 관련된 일체의 계획과  결정, 즉 관념적 대상화의 계기는 자신이 그 사용권을 구매 한 노동력이 인간의 몸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그 결과 임노동자는 기계의 명령에 순응하여 그 전체적 맥락을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적 동작만을 되플이하는 동물적 존재로 전락한다.

 

소외된 노동이 임노동자으로부터만 인간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소외된 노동을 낳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임노동자와  자본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사적인 이익과 무의식적인 자연적 필요성에 의해서만 타인에게  의존하는
독립적 인간들로 구성하며 따라서 인간이 인간의 기본목적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공동체적 향유를 저지한다. 이러한 관계 하에서 각 개인의 활동은 그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주로 상품의 양적 증가로 표현되는 욕구의 이러한 양적 증가는 개개의 인간에게 소원하고 적대적인 힘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팽창에 봉사하는 수단인 한 결코 진정한 욕구의 풍부함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그러한  욕구의  풍부함마져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에만 해당될 뿐 각 개인들은 자신의 계급 및 분업상의 지위에 따라 오로지 그 욕구들을 부분적으로만 자기화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진정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과 개인들 사이의 진정한 상호인정으로서의 공동체를 부정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행복한 삶이라 할 만한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삶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삶의 핵심에서 소외된 그들은 여가라는 그 가장자리에서 행복의 가상을 찾는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는  그  행복의 가상을  제공하는데 적극적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악무한적인 상품 소비와 그에  상응하는  온갖 쾌락에의 탐닉에서  그 행복을 발견한다. 그 숭고한 크기로 완성된 상품의 천국 속에서 넋을 빼앗긴채 잠시도 쉬지 않고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실천한다. 그들의 유일하게 진정한  자기표현은  소비활동이며  그들이  유일하게 그  성원으로  인정받는 공동체는 상품공동체이다. 다른 한편 그들은  삶의  모순으로부터의 도피나 그 모순의 가상적 해결에 탐닉한다. 소비 자 본주의에 들어서 그 수단은 지배적으로 문화상품, 즉 대중문화가 된다. 아주 가끔 이 도피나 가상적 해결은 오히려 바로 그 도피나 가상적 해결을 요구하는 현실적 삶 자체의 모순으로 의식의 초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계기를 지니고 있지만 지루하고 단조로운 노동에 의해 초래된 활력의 지나친 소모는 좀처럼 그들에게 그 초점을 유지할 만한 집중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가 시간의 질은 결코 노동 시간의 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출현한,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추구에 비우호적인 환경 속으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깊숙히 편입해 들어가고  있으며  그  전진운동은  조직화된 노동의 행보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가 현실적 삶의 불행을 완전히 봉합한 것으로 보이는 선진국형의 소비 자본주의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 소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저  대상화로서의  노동과는  완전히  단절된 뿔뿔히 흩어진 상품소비자들이 된 자신들에, 상품이 될 수 있는  무수한  것들의 그 상품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실현해 주는 도구들에 불과한 자신들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임노동자와 자본가의 차이는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질과 양에 있어서의 차이로 환원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어떤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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