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안이한' 노동운동이라면, 두들겨 깨워라

  • 등록일
    2005/01/07 19:40
  • 수정일
    2005/01/07 19:40
[특별기고] 전국비정규연대회의 그 1년의 투쟁기록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오민규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사무국장 올 여름 정부가 도입하려 한 비정규법안이 수면 위로 부상하자, 2004년 노동운동은 순식간에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선언하였습니다. 비정규직 관련법안을 두고 정규직이 총파업을 결의한 것은 그야말로 '세계최초'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숱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죽음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모여 열린우리당사를 점거하는 등 적극적으로 싸움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아마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한편 '총파업' 정국 속에서 정규직 노조의 '허약성'이 유감없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오민규 국장의 글은 그 치열했던 1년의 가장 생생한 증언일 것입니다.(편집자) 두 죽음과 함께 탄생한 비정규연대회의


전국비정규연대회의 탄생시점을 가장 멀리 잡자면, 아마도 2003년 9월27일일 것이다.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에서 16개 비정규노조들이 모여 연대체 구성을 논의한 시점인데, 당일 회의에서 가장 핵심은 "비정규노조들의 독립적인 연대체가 과연 필요한가" (즉, "비정규노조들이 연맹과 지역본부에 다 속해있으니 기존 정규직 노조 속에서 녹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었다. 논의 끝에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라는 이름을 확정하고, 10월26일로 예정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 모이기로 결정했다. 10월 26일 양대노총 비정규노조들이 중심이 되어 치러진 이 대회에서, 총파업을 앞둔 근로복지공단비정규노조 이용석 광주전남본부장이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바로 우리들 눈앞에서 분신자결, 산화해 가셨다. 이용석 열사의 죽음은 이미 전사회적 문제인 비정규직 사안에 대해,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 스스로는 얼마나 책임있게 이 문제를 다뤄왔던가"라는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졌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 탄생시점을 가장 가깝게 잡자면, 2004년 1월30일~31일 유성 동학산장에서 진행된 전국비정규노조 간부수련회일 것이다. 이날 수련회에서는 운영위원회와 대표자회의 등 조직체계를 확정됐다. 그런데 공식체계를 출범시킨 지 2주일만인 2월14일, 울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인 박일수 동지가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결하고 말았다. 연대회의는 곧바로 상황실을 설치하고 스스로 열사투쟁의 한 주체임을 선언했다. 연대회의는 울산에서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를 열기도 하고 서울 계동사옥과 대한축구협회 앞에서 항의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미진한 조직력으로 인해 투쟁에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진 만큼 솔직하게 연대했고 부족한 만큼 반성하고 되새김질하려 했다. 확실한 것은, 전국비정규연대회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조직의 내면에 바로 이용석 열사의 정신과 박일수 열사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정신은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가 하나라는 마음으로 전국적인 공동투쟁을 일궈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머지 않아 파견법 개악을 비롯한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에서 실현되게 된다. 민주노총의 안이한 정세인식 정부가 최근에 내놓은 이른바 '비정규직보호법안'은 사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온 것이다. 2001년 7월에 노사정위원회에 비정규직특위를 신설하여 법안 마련을 준비해왔으며, 노무현 정부 들어선 직후인 2003년 5월에는 공익위원 안을 중심으로 입법안의 틀이 일부 공개되기도 했다. 2004년에 들어서자 정부는 연내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누누이 밝혀왔다. 이미 상반기에 부처간 협의를 거의 마쳤으며, 지난 4년간 논의해온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어떠한 형태로든 법제화하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쳐왔다. 정부가 준비하고 있던 비정규직 보호입법은 파견업종 확대, 특수고용노동자 기본권 제한, 기간제 기간 확대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개악안이며 일부 차별해소 방안은 매우 미흡하고 실효성이 없는 법안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파견법 개악으로 간접고용 중간착취를 양성화, 제도화하고 기간제 법안 제정으로 기간제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차별을 영구화할 뿐 아니라, 지난 4년간 노사정위에서 논의되어왔던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에 대한 부분은 완전히 누락된 채 또다시 노사정위로 넘겨지는 등, 이번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노무현 정부의 반노동자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재계의 움직임이 이토록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들이 준비하는 개악안 내용이 엄청난 것이었음에도, 민주노조운동진영의 정세인식은 한마디로 '안이함' 그 자체였다. 특히 2004년 1월, 새롭게 민주노총의 지도부로 들어선 이수호 집행부는 "문제가 많은" 기존 노사정위원회와 다른 새로운 사회적 교섭구조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정책 제도개선 요구를 관철시켜 나가기 위해선 사회적 교섭구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의지를 표명하자, 노사정위원회 개편 내지 '새로운 노사정 대화의 틀'을 만들기 위한 노사정 간의 논의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논의의 주역은 5월 31일 청와대가 주재한 노사정 토론회를 계기로 만들어진 '노사정 대표자 회의'인데, 그 회의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이수영 경총 회장,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김대환 노동부 장관, 김금수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등 6인으로 구성되었다. 엄청난 노동법 개악안이 준비되던 시점에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새로운 노사정 대화 틀'이라는 사회적 교섭구조를 둘러싼 논의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비정규직 내부에서는 광주 금호타이어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과 타워크레인기사노조의 투쟁 등 스스로 비정규문제를 사회 쟁점화시키고 전선화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전체운동 차원에서 보자면 '비정규문제'는 "중요하긴 하지만 내 고민과 노력이 선뜻 가지는 않는 문제"로 인식될 뿐이었다.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총파업에 불을 당기다 9월 초, 정부와 여당이 '파견법 전업종으로 확대' '기간제 사용기간 3년으로 확대' 등 최악의 노동법 개악을 당정협의를 통해 진행하려는 정황이 포착되자, 그제서야 양대노총 위원장이 이부영 의장을 항의면담하는 등 민주노조운동진영에 '비상'이 걸리기 시작한다. 양대노총 위원장의 항의방문을 받은 이부영 의장은 '노 사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에 따라 9월 16일 열린우리당 대회의실에서 공청회가 열리게 되었다. 양대노총과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한 차별철폐 대행진을 오후 1시에 마치고 행진에 참석했던 비정규노조 간부와 조합원들 다수가 공청회에 참관을 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노동부 측의 기조발제 직후,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15명을 비롯해 40여명의 비정규노조 간부와 조합원들이 2층의 당 의장실로 들어갔다. 기습 점거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노동법 개악안 즉각 철회!""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쟁취!" "노동3권 보장 등 노무현 대통령 비정규직 대선공약 즉시 이행!" "이 모든 요구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당 의장 및 대통령과의 직접면담!"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벌인 점거농성이라는 고강도투쟁은, 그동안 노동법 개악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진영 내부에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했고, 하반기 노동법 개악안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가장 핵심적으로 벌여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을 가져왔다. 농성 4일차인 19일, 농성장을 찾은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점거농성투쟁을 두고 "정부의 개악안에 맞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장 적절한 투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자리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농성단의 요구를 최대한 받아안고 총파업 조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처음으로 밝혔다. 또한 이수호 위원장은 사회적 교섭 혹은 사회적 대화에 대해서도 "쓰레기같은 개악안이 나온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 노력은 의미없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농성 6일차인 21일에는, 전국의 지역일반노조를 비롯한 비정규노조 및 지역본부 간부들의 열린우리당 시도지부 동시다발 점거농성이 진행되었으며, 같은 날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파견법 개악안 국회 상임위 상정시 총파업"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에 이르렀다. 농성 7일차인 22일, 농성단은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을 면담하고 "노동부의 입법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사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입법안을 만들겠다"는 등의 답변을 끌어내고 농성자에 대한 사법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명확하게 받아낸 후에 일주일간의 점거농성을 해제했다.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벌인 일주일간의 점거농성은,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만의 이해가 아니라 개악안이 핵심적으로 노리고 있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에 문제제기를 하는 등 1,400만 전체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내걸고 비정규직노조의 대표자들이 구속과 희생을 각오한 선도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노동법 개악안의 심각성에 비해 긴장감이 걸리지 않고 안이한 정세인식 속에 빠져있던 민주노조운동진영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며, 답답했던 노동법개악 정세에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 결의를 이끌어내는 등 후련한 파열구를 낸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비정규직 최초의 정치파업과 국회 타워크레인 농성 민주노총의 총파업 돌입 이전인 11월24일, 전국의 비정규직노조가 일제히 간부파업에 돌입하고 국회 앞으로 상경투쟁을 전개했으며, 비정규노조 대표자 20여명의 집단삭발과 1천여 명에 달하는 비정규노조 간부들의 구속 해고 결단식을 가졌다. '결전의 날'이었던 11월 26일,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에서 건설운송(레미콘)노조와 타워크레인기사노조를 필두로 레미콘차량을 동원한 상경시위 등 위력적인 파업전술을 구사하며 건설현장을 마비시키는 총파업투쟁을 전개했다. 사내하청노조들은 정규직노조와 함께 원하청 공동총파업에 돌입했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가 전개한 24일 간부파업과 26일 총파업투쟁은, 민주노조운동 역사상 비정규노조들이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걸고 벌인 최초의 정치총파업으로 기록될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 총파업 돌입과 동시에 시작된 비정규노조 대표자 4명의 국회안 타워크레인 고공농성은 자칫 정부 개악안 유보로 전선이 흔들릴 수 있었던 정세 속에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전선을 "개악안의 유보가 아닌 완전 철회"와 "비정규권리입법 쟁취"라는 성격으로 명확히 하는 계기였다. 아울러 비정규'보호'입법이라는 미명 하에 마치 비정규직을 위한 법안인양 호도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사기행각을 폭로하고,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정부 입법안에 가장 처절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을 던져 선언하는 등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주일간 지속된 타워크레인 농성단이 사수하고자 했던 것은 "개악안 완전 철회"와 "비정규권리입법 쟁취"라는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전선이었고, 그들이 들고 올라간 현수막에 담긴 문구들은 열린우리당 점거농성단이 채택했던 것의 연장으로서 전체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를 담고 있었다. 크레인 농성단의 요구에는 열린우리당 농성단의 요구에 한 가지를 더했는데, 그것은 "이주노동자 노동허가제 쟁취"라는 요구로서 가장 낮은 곳의 노동자 요구까지를 포함하려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정신을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노동자들 스스로의 노력과 기대와는 달리,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전선은 정부 여당의 '유보'설 하나에도 휘청휘청댔던 것이 사실이다. 크레인 고공농성단이 희생을 각오하고 지키려했던 전선이 바로 '개악안 완전 철회와 권리입법 쟁취'였음에도 말이다. 민주노총, 개악안 유보 설에 금새 '휘청' 11월19일, 총파업 실행을 위해 긴급하게 소집된 민주노총 중집 중앙위원 합동수련회에서는 '무기한 총파업 전술'을 놓고 장시간 토론이 전개되었으나, 일단 26일과 29일 총파업 전술까지를 결정하고 나머지 구체적인 전술은 24일 투쟁본부 대표자회의에 위임되었다. 어느 사업장, 어느 연맹 하나 자신있게 "총파업을 밀어가자. 개악안 통과되면 다 죽는다"는 입장을 제출하지 못했으며, 서로가 "다른 사업장이나 다른 연맹 분위기는 어떠한가"를 묻는 불필요한 눈치보기와 책임 떠넘기기가 진행되었다. 11월22일, 양대노총 위원장이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을 면담하게 되고 면담 자리에서 당 의장으로부터 "일정에 쫓겨 비정규법안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듣게 되자, 언론들 뿐 아니라 운동진영 내부에서조차 "총파업수위가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부영 의장의 발언은 법안이 잘못되었으니 폐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유보' 발언에 불과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11월24일 총파업투쟁전술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투본대표자회의에서는, 26일 총파업 전술을 놓고 투본대표자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일 중집 중앙위 합동수련회에서 결정된 29일 총파업 전술은 거의 논의대상조차 아니었다. 투본 대표자들은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의 발언 한마디로 "개악안이 29일 처리유보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했고, 그래서 29일 국회논의를 지켜본 뒤에 투본 대표자회의를 열어 추후 투쟁전술을 결정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히 금속연맹 측은 "하루 총파업을 진행하면 조합원들 출근률이 저조해질 수 있으니 6시간 파업을 통해 2시간 일한 후 전체 조합원을 파업대오로 모아 힘있는 파업집회를 진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결론은 금속연맹의 제안대로 '6시간 파업'이었다. 또한 11월 29일 투쟁 역시 '간부 상경투쟁을 통한 국회방청투쟁' 수준으로 투쟁수위는 뚝 떨어졌었다. 게다가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핵심주력사업장인 현자노조의 경우 21일 대의원대회에서 "26일, 29일 주야 공히 전면총파업 및 27,28일 철야특근거부"를 투쟁지침으로 결정하였으나, 투본 대표자회의 결정이 있은 직후인 25일 오전 긴급하게 쟁의대책위를 소집하여 "26일 주야 6시간 파업, 29일 간부상경투쟁"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그뿐 아니라 27,28일 예정되었던 '철야특근거부'까지 철회하게 된다. 현자노조의 결정은, 비록 투본 대표자회의 결정사항에 따라 민주노총 지침대로 전술을 바꾼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결정된 철야특근거부 전술까지 철회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높지 않은 현장의 투쟁열기가 가라앉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의 핵심주력사업장이라 할 현자노조의 결정이기에 미치는 파장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 11월 29일 국회에서 '유보 선언'이 되리라는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환경노동위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간사(배일도, 제종길) 및 법안심사소위장(이목희) 모두 빨리 법안심사소위로 개악안을 넘기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부영 의장의 발언은 '립써비스'였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비롯한 투본 대표자들은 그 발언에 헛된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물론 개악안이 곧바로 법안심사소위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는데, 29일 환경노동위 논의 결과는 "12월6~7일 공청회를 거친 후 의견수렴을 거쳐 법안심사소위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을 뿐 개악안의 국회통과를 위한 절차를 밟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여기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지속해서 정세인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국회방청이 끝난 후 방청보고를 하던 이수호 위원장은 "개악안 연내처리는 저지했다. 동지들, 수고하셨다. 이제 권리입법 쟁취의 길로 나아가자"는 요지의 발언을 하게 되는데, 29일 환노위 논의는 결코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단지 물리적으로 정기국회 통과가 불가능해졌을 뿐 정기국회 직후 소집될 임시국회에서도 얼마든지 처리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이번 투쟁의 목표와 전선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민주노총의 공식결정사항일 뿐 아니라 크레인 고공농성단이 온몸으로 사수하고자 했던 전선, 즉 "개악안의 완전 철회" 및 "비정규권리입법 쟁취"가 이번 투쟁의 목표라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목표와 전선이 불분명해지는 순간, 정부 여당의 '유보가능성 시사'만으로 총파업전술이 흔들리고 말았다. 목표와 전선이 뚜렷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정부 여당은 단순한 '립써비스' 한마디로 민주노총의 투쟁전선을 교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개악안을 저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총파업투쟁은 내년 2월을 기약하며 유실되고 말았다. 물론 비정규연대회의는 출범 당시부터 지켜왔던 원칙, "비판을 앞세우기 전에 스스로의 실천을!"이라는 자세로 전체 투쟁전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비상한 각오로 임할 것이다. 연대회의가 아껴왔던 비판과 문제의식은, 아마도 2월 총파업투쟁을 경과하고 총체적인 평가가 이뤄지는 시점이 되면, 자연스럽게 연대회의의 실천을 평가하며 등장할 것이라 믿는다.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