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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은 세계의 달콤함?

  • 등록일
    2005/01/08 08:29
  • 수정일
    2005/01/08 08:29
* 이 글은 미류님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에 관련된 글입니다.

정성일의 영화세상 / 「수퍼스타 감사용」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옛날 옛적에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프로야구팀이 있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는 게임은 거의 대부분 졌으며, 삼미가 이기면 다음날 기삿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삼미 슈퍼스타즈 게임을 '일부러' 보러 가는 팬들마저 생겨났다. 이기기를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도대체 얼마나 점수 차를 벌려서 지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보러 가기도 했다. 그들은 다른 팀들의 새로운 기록을 세워주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기록을 세워 나갔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최소득점, 최소홈런, 최소도루는 물론이고 최다실점에 투수 연패기록마저 세웠다. 이 기록은 아직까지 어느 팀에서도 깨지 못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마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 것이다. 단 한 번의 '기회'가 주는 감동


김종현이 시나리오를 쓰고 처음 연출한 <슈퍼스타 감사용 >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처리 투수 감사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감독 자신의 프로덕션 노트에 의하면 실명 인물들과 기본적인 설정을 제외하면 '모두 픽션'이라고 밝혔지만, 하여튼 실화이다. 감사용(이범수)은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야구를 계속했지만, 실업야구 선수로 스카우트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졸업한 다음 삼미 특수강 구매관리과에 입사해서, 직장 야구단에서 취미로 야구를 한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삼미가 프로야구단을 창설하고, 여기서 투수모집 오디션을 본다는 말에 응시했다가 감사용은 선수가 된다. 그가 발탁된 이유는 팀에 좌완투수가 없기 때문. 프로 야구가 개막을 하고 삼미는 연전연패를 기록한다. 감사용은 대부분 팀의 패배가 돌이킬 수 없을 때 메인 투수 보호를 위해서 게임을 마무리하는 교체투수로 막판에만 등판한다. 그런 그에게 딱 한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프로야구 원년의 슈퍼스타였던 OB 베어스의 투수 박철순이 20 연승기록을 세우는 게임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와 맞붙게 된다. (실제는 18연승일 때 두 사람의 승부가 있었다고 한다.) 모두들 관심은 OB가 몇 점 차로 이기느냐에만 있을 뿐이다. 누구도 이 게임에 투수로 등판할 생각이 없다. 운동장은 모두 박철순을 응원하고 있다. 그때 감사용은 처음으로 선발투수가 되어 마운드에 선다. 감사용은 최선을 다해서 던지고, OB 베어즈의 타자들은 처음 보는 이 투수의 믿을 수 없게 '느린' 공 앞에서 차례로 삼진을 당한다. 감사용은 박철순을 이길 수 있을까? 물론 여기까지는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결국 (대부분의) 패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박철순은 보기 드문 야구 천재였고, 감사용은 지난 20년간 명멸해 간 한국 프로야구 투수 758명 중 한 명일 뿐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아니, 그렇지 않다. 그건 잘못된 비유이다. 왜냐하면 박철순은 천재적이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지만, 감사용은 재능도 없고 기회마저 얻지 못한 사람이다. 이건 단 한 번의 기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부터 영화의 운명은 감사용과 똑같아진다. 영화도 그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간다. 이기거나 지거나 그 '이후'에 아무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이 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일까? 우리 안의 주문, "노력했노라, 이겼노라" 사실 영화 자체는 따분하기 짝이 없다. 야구 장면들은 대부분 지루하게 찍혔으며, 감사용과 인천 야구장 매점 아가씨와의 연애 에피소드는 심심하다. 가족들은 항상 제 시간에 도착해서 감사용의 감정을 부추기거나, 혹은 그가 해야 할 말을 대신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 그런데도 영화관은 눈물로 넘쳐난다. 모두가 그걸 뻔히 아는데도 불구하고 홀린 듯이 빠져든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김종현조차 자기 자신의 센티멘털리즘의 나르시시즘에 말려들고야 만다. 말하자면 감사용은 모두를 홀린다. 더 정확하게 감사용의 저 안간힘과 운명지어진 패배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마술의 원리는 간단하다. 그것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 앞에서 무력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자기 변명으로서, '노력'에 대한 가여운 '믿음'이 지켜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서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혹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것을 정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건 최면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각색해서 자기 믿음 안의 허위 일관성 안으로 끌어들어야 한다.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영화가 개입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스크린의 주관성이 빚어낸 패배의 미학 말하자면 여기에는 패배에 관한 신화가 있다. 혹은 그것을 휴머니즘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바꿔치기가 있다. 거기에 대중들이 기꺼이 동의하고, 그것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이 영화와 스포츠의 다른 점이다. 영화는 패배를 미화하고, 스포츠는 승리를 찬양한다. 스포츠는 승리할 때까지만 관심을 보인다. 영화는 패배의 과정을 따라간다. 스포츠는 엄정한 규칙과 질서로 이루어진 승부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올리고, 영화는 삶과 경기장의 경계가 뒤엉켜버린 드라마의 세상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 둘의 자리바꿈의 놀이를 통해서 자신들과의 동화와 정화의 변증법을 즐긴다. 여기서 방점은 즐긴다는 말에 있다.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까닭은 그 둘 모두 모든 모순을 경기장에 올라선 한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계와 모순은 개인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그는 인간의 육신이 지닌 한계와 다투면서 세상의 질서로부터 떨어져 나와 초인적인 투쟁을 벌여야 하고, 영화의 세상에 오면 그 반대로 세상의 모순 안에 던져져 비극적 상황을 자기의 문제로 떠안고 하여튼 버텨야 한다. 서로 다른 자리의 두 인간이 마주하는 마지막 장소는 항상 세상 바깥의 경기장이다. 오직 규칙과 질서, 그리고 승부만으로 이루어진 세계. 스포츠가 주는 감동은 그것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감동은 그 비인간적인 세계에 부여한 세상의 모순에 대한 주관성 때문이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경기장에 들어가는 선수는 세상의 인연과 절연하고 오직 승부만을 위해 그 자리에 선다. 그 자리에 선 선수를 다루는 영화는 온갖 세상의 인연을 끌어안고 경기장에 혼자 들어간다. 그리고 여기에 구경꾼들이 자기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환상을 내맡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것은 대중의 정치학에서 스포츠와 스크린의 상호주관성이라는 환상의 변증법이기도 하다. 혹은 역사의 괄호 치기이다. 악몽 같은 세계의 달콤함 내 질문의 토픽은 여기에 있다. 이 따분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이 다루는 '감동적인' 세계는 악몽 같은 세계에 대한 달콤함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실이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결국에는 얻지 못할 것에 대한(일차 대상의 공허) 상실의 경험에 대한(이차 대상의 허위) 환상의 각색이다. 감사용은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우울한 결론이다. 그러나 그게 감동적이라고 설득한다. 혹은 설득당하려고 대중들은 스스로 애를 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은밀한 타협이 있다. 그러므로 왜 얻지 못할 것을 통해서 희망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매달리는 대중문화의 비겁한 리얼리즘 도착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감사용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와 맞선 박철순에게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들은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들이 몸담고 있는 프로 야구의 세계는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저 절대적인 규칙 앞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규칙에 대한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얼룩이 되어야 한다. 혹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규칙을 찌그러뜨려서 보게 만들어야 한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세상에 대한 얼룩은 규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아와 대상 사이의 거리의 상실이다. 그래서 감사용과 박철순의 시합은 그 자체가 아니라 원인에 대한 결과가 된다. 혹은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원인이 만들어진다. 이 역설의 구조 안에서 감사용은 패배의 기록만 남긴 삼미 수퍼스타즈에서 유일하게 피와 살을 지닌 환유가 된다. 모든 이야기는 감사용이 저 절대적인 야구 천재 박철순과 마주하는 순간에 집중하고 압축된다. 그 과정에서 그 반대로 한없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설명되고, 더해지는 '픽션'이 있다. 감사용은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 없이, 어물전을 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도박을 일삼다가 가까스로 마음잡고 택시운전사가 된 형과, 하는 일이라고 줄넘기뿐인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 집 한 채 갖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다. 그에게는 단 한 사람의 팬인 인천 야구장 매점 아가씨만이 진심으로 야구공에 사인을 청한다. 정말 신기한 점. 감사용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주변에 있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감사용에게 예외 없이 진심을 지니고 있다. 혹은 감사용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을 끌어내는 재능이 있다. 그의 곁에 오면 모두 진심을 내보이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런데 감사용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너무 늦게 알게 된다. 이 미루어진 사랑의 불일치야말로 감사용이 당신으로부터 사랑 받는 진정한 이유이다. 사실상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는 감사용과 박철순의 현실 속 경기에서 영화 속의 한껏 미루어진 사랑의 불일치가 마침내 일시적이고 동시적인 하나로서의 일치라는 기적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현실과 영화는, 혹은 스포츠와 영화는, 규칙과 모순은 단 한 순간 마치 번개와도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말이 번개와 같다는 말을 놓치면 안 된다. 번개가 치는 순간 우리는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서 현실을 보지 못한다. 패배, 허구의 중심에 서다.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 승부의 세계에서 정정당당한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패배를 붙들고 그것을 미화하기 위하여 '픽션'을 끌어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거기에 대중들이 동참하고, 그것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받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 패배를 세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패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다시 구성해내고, 규칙을 찌그러뜨려 보면서,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이미 던져진 현실에 드라마를 덧붙이고,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에 논리를 부여해가면서, 마침내 신기한 역설에 이른다. 감사용은 게임에서 졌지만, 그는 사실상 모든 것을 얻는다. 가족들의 진심 어린 응원과, 인천 야구장 매표소 아가씨의 사랑의 고백과,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마운드에 처음 등판하여 박철순과 끝까지 맞겨룬 한판의 게임을 얻는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결국 감사용은 진 것이다. (그렇다면 반문할지 모른다. 감사용을 승리한 투수로 바꾼다면 이 모든 것을 반박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정반대이다. 결론은 더 끔찍해진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허위가 되어서 감사용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은 세상의 모순을 도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준비론적 패배주의의 미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패배를 윤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 잔인함, 냉정함, 혹독함, 끔찍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원하건 원치 않건 이미 던져진 그 바탕으로서의) 1980년대의 알레고리가 있다. 1980년대, '삼미 슈퍼스타즈' 그리고 우리 우리들의 1980년대는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1987년의 '소동'은 노태우와 함께 웃음거리가 되었다. 전두환이 3S 정책의 하나로 만들어낸 프로야구 리그, 그리고 모기업인 삼미 철강의 파산과 함께 끝난 연전연패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얼마나 그 시대의 '엽기적'인 알레고리인가? 영화에서는 의미심장하게도 감사용이 시위 노동자들과 페퍼 포크로 무장한 전경들의 충돌에 쫓기다가 삼미 수퍼스타즈의 창단 벽화를 보게 된다. 장면 자체는 <모던 타임즈 >의 오마주이지만, '의도하지 않게'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후 자기의 시대적 배경을 완벽하게 지우거나, 혹은 스스로 잊어버린다. 산산조각 난 희망과 불투명한 미래와 버림받은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대중들은 패배를 멜랑코리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항상 패배한 자신들을 위로하고, 버림받은 자신들의 삶에 부여한 기만의 환상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패배를 멋지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의 삶은 항상 비참한 것이다. 물론 비참함 속에도 미학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참함의 미학은 패배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나는 1980년대가 이런 식으로 거듭해서 영화에서 불투명성의 미학 안으로 끌려 들어와서 다뤄지는 것이 정말 역겹다. 대중문화는 끈질기게 역사를 추억으로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자신의 패배의 역사를 즐기면서 울고 웃는 대중들의 고통의 망각은 불합리한 복종의 이데올로기적 왜상(歪像)효과에 대한 자기 최면에 다름 아니다. 패배의 해피엔딩? 그게 즐거우면 할 수 없이 계속 즐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즐겁지 않은데도 계속 즐긴다면 당신은 두 번 죽는 것이다. 한번은 역사 속에서, 다른 한번은 그것을 재현하는 당신 자신의 환상 속에서 무아지경으로 버림받을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데올로기 논쟁이 끝났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정말 전투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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