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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등록일
    2005/04/07 16:41
  • 수정일
    2005/04/07 16:41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어쩌면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떠난 뒤에 더 무성해진 초원에 대해 아니면, 끝날 줄 모르는 계단에 대해 우리 시야를 간단히 유린하던 새떼들에 대해 청유형 어미로 끝나는 동사들, 머뭇거리며 섞이던 목소리에 대해 여름이 끝날 때마다 짧아지는 머리칼, 예정된 사라짐에 대해 혼자만이 아는 배신, 한밤중 스탠드 주위에 엉기던 피냄새에 대해 그대,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나란히 접은 책상다리들에 대해 벽 없이 기대앉은 등, 세상을 혼자 떠받친 듯 무거운 어깨 위에 내리던 어둠에 대해 가능한 모든 대립항들, 시력을 해치던 최초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 그대, 내가 배반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첫번째 긴 고백에 대해 너무 쉽게 무거웠다 가벼워지던 저마다 키워온 비밀에 대해 눈 오는 날 뜨거운 커피에 적신 크래커처럼 쉽게 부서지던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느날 오후에 대해 아, 그러나, 끝끝내 , 누구의 무엇도 아니었던 스물살에 대해 그대, 내가 잊었을지고 모를 이름이여 그렁그렁, 십년 만에 울리던 전화벨에 대해 그 아침, 새싹들의 눈부신 초연함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행여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줄, 아직 한 사람쯤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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