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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비정규직화....

  • 등록일
    2005/04/07 13:58
  • 수정일
    2005/04/07 13:58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넘어선 의제를 남기자.] 에 관련된 글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그렇게 소망하였던 청계천 다락방과도 같은 공간의 어린 시다와 미싱사 언니들의 모습... 다락방에 실먼지 날리면서 일을 하였던 시다는 미싱사가 되면 돈을 더 벌고 대우도 받을 수 있다는 희망.... 꿈에 그리던 돈을 벌어서 고향에 내려가리라는 소박한 꿈들을 간직하고 살아갔다. 60년대말 한국의 주력산업은 섬유화학산업... 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중에 여성노동자 비율이 꽤 높은 산업이었다. 70년대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을 부응하며 지금 금속노조 사업장의 제조업이 고착화 되기전 산업의 분포도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낮은 임금과 고강도 노동시간... 라면을 먹어가며 일하던 산업역꾼.... 건설노동자들이 태동하기전 여성노동자의 사회적 비율은 매우 높았다. 작은 단위의 마쯔꼬바에서부터 중소규모 단위 섬유공장이 전국에 분포하였다. 개인적으로 우리 동네(전남 영암... 초등학교 졸업후 취업한 현장...) 누나들이 지금 양주 덕계리, 덕절리 섬유공장에서 일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중학교를 나온 누나들은 고속버스 안내양을로 근무하였던 기억이 난다.(이 누나들이 입은 광주고속(현 금호고속)과 중앙고속 안내양으로 근무하였던 기억들....) 동일방직노동자 투쟁, YH 노조 투쟁, 대우 어패럴... 등등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사회적 진출이 이루어졌다. 엄밀히 말해 사회적 진출이라기 보다 농촌의 피폐화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어 나아갈 수 없어 많은 빈농들이 도시로 도시로 밀려왔으며(정확히 말해 도시에서 도주하여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화학섬유산업에 있어서 여성노동자들의 취업의 문은 열려 있었다. 60년대 기독교 중심의 도시빈민선교와 도시산업선교의 출발점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의 태동과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주력산업인 섬유산업과 늦게 출발하였지만 전자산업에 있어 여성노동자의 고용분포도는 높았다. 그러나 문제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독점자본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이윤 증대는 날로 높아져 갔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투쟁을 조직하게 하였고, 박정희 유신정권은 새마을 운동이라는 기형적 산업화를 내걸며 노동자들에게 허구적 미래를 약속하여 일할 것을 강요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70년대 말 이 말의 허구성임을 직시한 여성노동자들 동일방직과 YH 노조의 투쟁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결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음을 각인하고 각성하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노동운동이 6.25 분단이후 새롭게 태동하는 투쟁의 발판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후 기나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노총은 노동조합은 그 당시 나름데로 열심히 한다지만 정부의 정책과 내용에 대해 구색맞추기 위한 정부 출현기관과도 같았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그리고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 등 투쟁은 노동해방운동의 홀씨를 날리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의 한계는 분명하였다. 사회적 노동운동세력이 부재하였고, 한국노총이 이 문제를 받을 수 없는 조직이라는 사건이다. 그 여성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창구는 신민당사와 공장점거 투쟁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정치적 투쟁으로 승화시키며 사회적 이슈화와 정치적 쟁점을 형성하면서 나아가는 중요한 투쟁을 하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제기 할 수 있다. 1.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해방의 불씨를 만들다. 전태일 열사 이후 노동운동의 중요성은 대두되었으나 현장에서 직접 노동자들이 공장점거나 당사점거 투쟁을 하였던 적은 드물 현실이다. 전태일 열사로 부터 출발된 분단 이후 남한의 노동운동은 동일방직, YH 노조 사건으로 인하여 노동자 계급으로서 각성해 나간다. 노동해방이라는 담론이 추상적이나마 태동하는 빌미와 노동해방운동의 중요성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나큰 영향력을 제공하였다. 사회적 이슈 투쟁을 노동운동이라는 이념적 운동을 태동시키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 계기를 통해 유학파들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구체적 접근을 한다. 학원가에서 일본서를 번역하여 서클 학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거나, 공동체 집체운동을 통한 노동자들과의 조직화 등을 이루는 성과였다. 이 사회적 성과는 피의 광주를 이끄는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토양들이 학생 서클운동의 태동과 진보적 재야 학자들의 연대를 낳았으면 노동해방 투쟁의 밑바탕 그림을 그려내였다. 2.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의 장벽 이 투쟁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는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폭압적 상황을 낳았다. 이 투쟁은 또한 학생운동의 학도호국단 폐지, 민주적 자주적 학생회 건설 투쟁의 도화선을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초기적 논의이지만 MC-MT(무림/학림)논쟁의 도화선도 제공하였다 볼 수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 실천태로서 중요한 역활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도부 정치적 탄압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80년대 노동자들의 조직적 힘을 응축시키고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열망을 만들어내게한 원동력임을 틀림없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역차원에서의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몸짓을 남기는 현상을 낳았다. 또한 이 투쟁의 주역들은 노동상담소나 여러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곳을 만들어 경험과 노동운동의 중요성들을 하나둘 만들어나갔다. 이 투쟁의 성과는 지금 한여노(한국여성노동자회)를 만드는 정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성조직이 아닌 여성노동자 정체성을 확립하는 운동으로서의 큰 의미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계는 이 투쟁의 평가와 한계에 대한 투쟁 당사자들의 평가를 통한 노동운동의 방향성을 제출하고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방향성을 찾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에는 정치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을 선도투를 통해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사건이다. 이는 노동운동이 단번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3. 80년대 한국산업지형의 변화 80년대 말 한국산업 지형의 변화는 새로운 계기로 접어든다. 60년대 초반부터 중심산업이었던 섬유산업의 쇠퇴는 여성노동자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실현이었다. 그리고 서비스산업에서의 여성노동자들의 일자리 감소와 새로운 서비스직의 신설이라 할 것이다. 80년대 주로 여성노동자들이 진출하였던 산업은 섬유, 신발, 고속버스, 전자 등 산업에 높은 비율로 분포하였다. 그러나 섬유산업의 쇠퇴는 대공장 몇몇의 집중되면서 일종의 중소영세사업장들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고속버스와 버스에서 안내양은 사라진다. 사회적 여성 일자리가 8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히 늘어난다. 그리고 산업단지의 이전으로 인한 일자리에는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여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산업이 사라지고 중공업중심의 산업이 70년대 육성되면서 철강, 자동차, 조선, 항공 등 대두로 인해 남성중심의 사업장들이 대거 늘어난다. 산업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균등하였던 비율이 여성노동자 분포된 사업장들이 줄고, 중공업 중심의 산업이 육성되면서 서서히 바뀌어져 간다. 이로 인하여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서비스직으로 대거 이직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여성의 일자리는 찾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80년대 말 고착화... 일정정도의 여성노동자들은 또한 그전과 다르게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이 대체하면서 기간 숙련된 노동자들은 서비스 산업 또는 다른 산업으로 치환된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가로막는 장막이 되었으며, 여성노동자들이 불안정노동자로 치환되거나 단순업무에 종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산업을 유지하는 주도세력에서 여성의 지위는 추락하는 현상을 9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 고착화되어져 간다. 이 남은 여성인력은 서비스직이 고스란히 편입시키거나... 외주하청업체가 등장하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을 위한 노동자로서 여성노동자들이 묶이게 된다. 여성은 산업의 변화에 따라 일자리를 사회로부터 박탈당하는 사태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4. 여성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부재 노동운동의 대모 이소선 여사와 동일방직, YH 노조 지도부등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이들이 존재하였지만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불리는 사건이 있어서 이소선 열사와 동일방직 이총각 씨 이외에는 크게 이 투쟁을 통하여 여성노동자 아니 전체노동자 운동을 이끌어 나가는 이는 극히 일부였다. 이는 노동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때 크나큰 손실이었다. 이소선 여사의 헌신 그리고 노동운동의 투쟁을 경험하였고, 조직하였던 노동운동을 이끄는데 있어서 시간을 지체하는 요소로 남게된다. 그리고 87년 대투쟁이후 여성노동자 운동의 의제화를 하는데 있어서 한여노와 같은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나아갔어야 하지만 지금과 다르게 그렇지 못하였다. 다만, 노래 딸들아 일어나라 라는 노래와 같이 조직화하기 버거운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남성중심 노동운동에 대한 균형적 그리고 방향적 내용들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호기를 놓쳤다. 투쟁을 이끌던 여성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조직할 활동가가 턱없이 부족하였던 전노협 당시 그리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민주노총의 현실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성노동자의 불안정성은 현재진행형이다. 산업의 골간으로 자리매김 되기보다는 불안정 노동자로서 필요한 자리에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착취와 억압으로서 지금도 가장 첨예하게 내몰리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담론이 만들어지고 이 불안정성을 끊어낼 고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나 여성노동자에 대한 인식의 틀은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 없다. 간장 오타맨이.... P.S 여성단체들의 여성부화는 두 말할 논지가 없지만, 여성운동의 또다른 카르텔을 준비할 때가 아닌가 감히 이야기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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