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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 등록일
    2005/05/05 01:08
  • 수정일
    2005/05/05 01:08
2000년 06월 29일 16시 48분 24초 정말 간만에 고향집을 찾아갔더니 정말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고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고향은 나의 추억이 세긴 그런 아련한 공간을 모두 지워버렸더군요. 그렇게도 무성하던 산은 목장으로 바뀌어 있고, 내가 뛰놀던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거의 사람들의 인적이 뛰문 그런 음산한 곳으로 변해있더군요. 정말 오랫동안 찾아가보지 않은 그런 나의 고향이라는 곳은 정말 세월의 흔적을 다 잊어버린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나마 시골의 5일장이 폐쇄되지 않아 그 시골장터의 풍성함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이더군요. 기대를 하고 내려간 시골.... 그곳엔 벗들도 그리고 시골 어르신도 또 부모님도 없는 그런 그냥 시골의 한마을로 바뀌었다는게 요즘 저를 서글프게 하더군요. 시골에 내려가 그동안 힘들었던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고자 하였는데.... 나에게 있어 소중한 것들이 모두다 떠나버린 시골은 이제 나이 많이 드신 문중어른 몇분만이 농사를 짖고 있는 그런 아주 인적이 드문 그런 곳이 되어버렸더군요.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도 있더군요. 내가 살던 시골집 누가 그렇게 정성스레 관리를 해주어서 내가 그곳에서 살았을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더군요. 또 무성히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라도 하듯 하늘높이 치솟은 감나무와 땡자나무 나보다 키가 작던 탱자나무도 어느세 키가 훌쩍 커버렸더군요. 정말 그나마 내가 살던 집이라도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시골의 넉넉함이라도 위안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흔하디 흔한 농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인지 시골 어르신들의 농사일은 더욱 힘들게 보이더군요. 나이가 많이 들어 밭농사일만 하면 허리와 다리가 쑤신다던 당숙의 말을 듣고나서야 농촌에서 도시로 떠난 친구들이 생각이 나더군요. 열심히 일해도 남는것 하나 없는 그런 농사일 그래도 그게 천직인줄 알고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더군요. 돈이 많아서 도시의 사람들 처럼 공부라도 할 수 있었으면.. 아마도 지금 여름의 때앗볕 아래서 그리 힘들게 일하지 않을텐데... 도시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펜대를 굴리면서 밀려오는 낮잠도 자고, 어제 먹은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사우나 땅에서 땡땡이를 치면서 다른 도시의 그나이의 사람들 처럼 넉넉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그나이에 아직도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죄스러움들이 들더군요. 난 단지 나의 그런 안위만 생각하고 시골에 내려와 그냥 빈둥빈둥 놀생각만 했다는게 정말 미안하더군요. 미안함을 너머 정말 죄스럽더군요. 난 대학교때 농활은 가봤지만 시골일은 정작 도와주지도 못했다는 그런 죄스런 마음이 들더군요. 나의 주변 사람도 챙기지 못하면서 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그런 발상 자체를 했다는게 못내 저를 괘심한 놈으로 만들지 않을까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도 들더군요. 정말 삶이라는 작지만 큰 의미들을 배울 수 있었던 계기인것 같습니다. 자신을 보기전에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말을 사람들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제자리가 어디인지 좀 알 것 같습니다. 못내 미안해 그냥 일주일 동안 있다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온게 지금도 후회스럽 군요. 올 여름 추구의 기쁨을 고향에서 친지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땀의 진정한 의미를 일이라는 걸 통해 조금히 나마 알 수 있었으나 그 의미도 또 지나는 시간과 함꼐 잊어버리지 않게 늘 정진하여야 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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