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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 등록일
    2005/05/07 15:21
  • 수정일
    2005/05/07 15:21
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서 내려 3215번 지선버스를 타면 10분이 채 못 돼 서울 전농 SK아파트에 닿는다.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20m쯤 걷다 왼쪽으로 마주치는 가파른 계단을 기준으로 위쪽 201~203동은 임대아파트, 아래쪽 101~116동은 분양아파트다. 젊은 사람들이 돈 벌러 떠나 텅 빈 대낮의 임대아파트는 코흘리개 손자·손녀의 손을 잡고 오가는 노인들의 헛기침 소리만 들릴 뿐 평온했다. ‘주거권’ 아닌 ‘계급적’시각에서 접근 8년 전 이곳에서 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철거민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1997년 7월25일, 서울 동대문구 ‘전농3동 전농4재개발구역’ 철거민들은 악명 높았던 철거용역업체 ‘적준’과 마지막 대결을 벌였다. 이날 오후 6시께 주민들이 “적준의 침탈을 막기 위해 만든” 고공 망루 ‘골리앗’에 불이 붙었다. 박씨 등 전국철거민연합 소속 주민 10명이 열기를 이기지 못해 10m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을 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바닥에 부딪쳐 ‘뇌사’ 상태에 빠진 박씨는 이튿날 숨을 거뒀다. 201동을 빙 돌아 후문으로 향하니 “여기 자본의 수탈, 관료들의 억압에 온몸으로 맞선 당당한 여인이 있었습니다”라고 쓰인 추모비가 남아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을 전한다. 지난 4월16일 새벽, 경기 오산시 수청동 세교택지개발지구 안에 있는 4층짜리 우성그린빌라 옥상에 또 하나의 ‘골리앗’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어, 저게 뭐지?” 철거민들에게 허를 찔린 철거용역들은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옥상 진입을 시도했다. 화염병과 골프공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철거작업을 벌이던 이아무개(26)씨가 화염병을 맞고 불에 타 숨졌다. 전국철거민연합 간부 성아무개(39)씨가 “내가 화염병을 던졌다”며 자수해 살인 혐의로 4월26일 구속됐지만, 모두 집주인으로 알려진 철거민 8가구 10여명은 농성을 풀지 않고 벼랑 끝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1987년 이후 도시 철거민의 가열찬 투쟁 속에는 늘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옛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이 있었다. 이들은 “철거민은 곧 노동자”라는 명제 아래 철거민 문제를 단순한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로 보지 않고, ‘계급적’인 시각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철거 뒤 주민들이 자유롭게 들어가 살 수 있는 영구임대아파트 수준의 싼 집과, 그 집을 지을 때까지 주민들이 임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가이주단지 제공’ 등이다. 남경남 전철연 의장은 “철거민 운동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주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며 “희생 속에서 운동이 발전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철연쪽은 그동안 “우리와 함께 투쟁해 50곳이 넘는 지역에서 공증된 문서로 요구사항을 관철해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민중진영 내부나 다른 철거민 단체들은 “전철연의 과격한 구호가 단지 구호로만 남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22일 전국철거민협의회 중앙회(전철협)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철연과 같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은 더 이상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호승 전철협 지도위원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으로 철거용역 회사에 돌아가는 용역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며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든다”고 말했다. 80년대 논리와 관성 바꾸지 않았다 폭력 대결도 불사하는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지도부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현재 전철연은 남경남(51) 의장, 고천만(47·구속) 부의장, 양해동(59) 집행위원장 등 3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전철연에 몸담았던 철거민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들은 모두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철거운동에 뛰어든 지역 철대위원장 출신으로,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의 전성기를 이끈 철거운동 1세대와 김수현 청와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기획운영실장 등 이른바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에게 교육을 받고 10년 넘게 전철연을 이끌어왔다. 1세대 운동가들은 운동을 접었거나 ‘주거권 실현을 위한 전국연합’(주거연합) 등 다른 운동단체나 학계로 진출했다. 남경남 의장은 경기 수지 풍덕지구 세입자대책위원회 위원장 출신으로 1991년 철거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경기도철거민협의회 의장으로 발돋움한 뒤, 1994년 만들어진 전철연 의장이 됐다. 부의장 고천만씨는 경기 용인구갈 세입자대책위원장 출신으로 남경남씨와 함께 경철협 부의장을 지냈다.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양해동(그는 몸이 아파 활동을 잠시 중단한 상태다)씨는 서울 청량리1동 철거민 출신으로 1989년 길거리에서 서울시철거민협의회 유인물 한장을 우연히 집어들면서 빈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한다. 그는 청계천 노점상 출신으로 민주노동당 후보로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2번이나 출마한 양연수씨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전국빈민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란히 1999년 경기 수원 권선4지구 사제총 사용 사건과 구리 최촌마을 화염병 투척 사건 등으로 한두 차례씩 옥고를 치렀다. 이들을 잘 아는 옛 동지들은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를 이끌던 1세대 활동가들이 빠져나간 뒤 아직도 80년대 운동 논리와 관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운동의 주체세력이 바뀌면서 서철협을 이끌었던 활동가들에게 교육받았던 논리와 투쟁 방법을 발전적으로 해체해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2002년 8~9월 <말>의 보도로 전철연 중앙이 지역 철거민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를 장악하기 위해 저지른 ‘악행’이 폭로되고, 돈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또는 ‘확인하기 힘든’) 추문들이 겹치면서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철연은 그야말로 수많은 사건·사고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들만 꼽아도 △1996년 신연숙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7년 민병일씨 폭행 사망·박순덕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9년 수원 권선4지구 사제총 사용 △2000년 민주당 화염방사기 난입 △2003년 서울 상도동 컨테이너 추락 △2004년 고양파출소 화염병 투척 등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투쟁중 숨진 35명, 전철연과 직·간접적 연관 한국도시연구소가 1998년 펴낸 <철거민이 본 철거>를 보면 1998년 현재까지 철거투쟁 과정에서 숨진 철거민은 모두 29명이고, 전철연은 이후 7년 동안 숨진 ‘열사’가 모두 6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동안 철거투쟁으로 숨진 35명 대부분이 전철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철거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갔는데도, 전철연은 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까. 경기 수원 권선3지구 철거대책위원장 홍경희(40)씨는 “전철연 같은 철거민 조직 말고는 철거민들이 기댈 데가 없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집회 때마다 앞장서 시위를 주도하는 전철연의 대표 ‘투사’다. 그는 1988년 울릉도에서 푸른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섬처녀’다. 울릉도 처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도시는 ‘이촌향도’ 마지막 세대인 홍씨를 반겨주지 않았다. 16년 전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딸 셋을 낳아 기르는 10년 동안 “이삿짐을 채 풀지도 못한 채” 수십번도 넘게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1996년 수원 권선동에서 보증금 100만원, 월세 15만원짜리 방에 살고 있을 무렵 “주변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갈 데가 없었다”는 홍씨는 자연스럽게 전철연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실천은 성과를 낳았다. 3개월 투쟁 끝에 8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가이주단지에 입주할 때는 감격에 겨워 엉엉 울었다. 그는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고통을 보면, 꼭 내 일 같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모두가 홍씨처럼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최국자(45·여)씨는 “이제는 전철연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경기 의왕시 내손택지개발지구 철거민인 최씨는 2000년 6월9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 소형 화염방사기를 들고 난입 농성을 벌여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아무리 투쟁을 해도 세상에서 관심을 안 가져주니까 항의집회를 하자는 것인 줄 알았죠. 그런데 현장에서 화염방사기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최씨는 “1999년 12월 한겨울에 강제철거가 됐는데도 관심 있게 지켜보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전철연에 많이 의지를 했었다”며 “생업을 포기하고 투쟁에 나서는 과정에서 수천만원씩 빚만 졌다”고 말했다. 최씨의 남편(42)은 최씨의 구속에 항의하다 잡혀 부부는 영등포 구치소 감방 동기가 됐다. 많은 지역에서 철거민들은 전철연식의 극단적 투쟁 전술에 혀를 내두른다. 안암동 재개발지구 철대위원장을 지낸 이영철씨는 “전철연의 의사결정 방식이 지나치게 폐쇄적이어서 불만을 품는 철거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골리앗 만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 넘어 “전철연 지도부가 지역 철거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하는 말이 뭐냐면, 평생 살 집을 만들어줄 테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럼 사람들이 생계가 막막해지니까 절반 정도 떨어져나가. 남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 다른 지역 집회에 쫓아다니라고 하거든. 그럼 사람들이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또 절반 정도 떨어져나간다고. 그 과정을 거치면 철대위에 남는 사람들은 5~10가구밖에 안 돼. 거기서 이제 골리앗을 만들어야 하니까 돈을 걷자고 한다고.” 골리앗은 만드는 데 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을 훌쩍 넘긴다. 철거민들이 카드빚을 내 그 비용을 댄다. 그가 속한 안암동에서도 2002년 2월 철대위가 꾸려질 때 50명이었던 주민들이 3개월 만에 20명대로 줄어들었다.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성실하게 따르다 보면, 생계를 포기한 주민들은 수천만원씩 빚이 쌓이고 곳곳에서 휘두른 폭력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투쟁에 더 매몰될 수밖에 없고, 점점 전철연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지금 경기 오산에서 ‘골리앗’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벼랑으로 몰린 철거민들에게 전철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제명’이다. 취재 중에 만난 철거민들은 “철거민에게 ‘제명’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특히 아직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의 경우, ‘제명’을 당하면 철거민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협상이 잘 끝나면 살 집과 약간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민사상의 고소·고발 사건이 모두 유야무야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는 상황에서 철대위에서 쫓겨나면, 철거민들은 수천만원의 빚을 떠안은 채 범죄자로 전국을 떠돌아야 한다. 그 와중에 사람이 죽기도 한다. 2001년께 최덕자(45·사망 당시)씨 등 경기 의왕 오전동 재개발 지역에 남은 철거민 3가구가 싸움이 붙었다. 주민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모아둔 운영자금 700여만원을 전철연 중앙에서 “간부 도피자금으로 사용한다”며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친 주민들은 전철연이 요구하는 연대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3가구 가운데 최씨네 가족을 뺀 나머지 2가구는 지역을 떠났다. 전철연은 이 지역 철대위원장이던 최씨를 ‘제명’했다. 최씨는 아파트 숲으로 뒤덮인 마을에서 움막을 지어놓고 3년 넘게 생활했다. 남편과 말다툼이 잦아졌고, 2003년 11월 최씨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씨가 죽을 때 그의 집은 300만원, 보증금 20만원짜리였다. 전철연은 이미 비민주적인 전위 조직으로 퇴화해 서철협 시절의 활력을 잃은 모습이었다. 현재 전국 35개 철대위와 공동 투쟁을 하고 있다지만, 적극적으로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100명 안팎에 불과하다. 경기 안양 유진상가 세입자대책위원장으로 전철연과 6년 동안 같이 활동해온 정동열(62)씨는 “운동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운동의 순수성이 결여돼 있다”고 말했다. “철대위원장이 중앙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철저하게 배제를 합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빨리 투쟁을 끝내고 생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큰데, 주민들이 직접 상대쪽과 협상을 못하게 하거든요. 철거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장 주민이고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는데, 비타협 투쟁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저마다 확인 불가능한 전철연 간부들의 비리를 제보해왔다. 그렇지만 전철연 때문에 고통을 겪은 이들도 대부분 이들의 결벽성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왜 전철연을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을까. 어렵게 수소문해 만난 옛 철거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운동을 진행하다 보면, 건설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는 건설자본들이 돈을 미끼로 협상을 제안해옵니다. 여기에 굴복하면 운동이 끝나는 거고, 이겨내더라도 주민들 사이에 분란이 생깁니다. 전철연도 중앙에서 나온 2~3명의 핵심간부가 건설회사나 재건축 조합과 밀실협상을 합니다. 돈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밝혀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비판에도 전철연은 아직 변화를 모색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변화를 이끌 내부 역량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4월24일 밤 어렵게 만난 남경남 의장(그는 지금 수배 중이다)은 “사람을 죽이는 정부의 철거민 대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흡사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반복해 듣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들었다. 200만 철거민 투쟁에 앞장서 피흘려온 전철연.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울 전농 SK아파트 201동 뒤. 박순덕씨 추모비에 한가롭게 내리쬐는 4월 봄 햇살이 무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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