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79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2/16
    쌍용차 희망텐트촌 노동자 참가단에 다녀와서 2
    간장 오타맨...
  2. 2012/02/16
    이주노동자 노동현실
    간장 오타맨...
  3. 2012/02/08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 참가단을 다녀와서(2)
    간장 오타맨...
  4. 2012/01/31
    이주노동자 도입, 그리고 이주노동자 꿈과 미래
    간장 오타맨...
  5. 2012/01/31
    어느 중국동포 H아저씨의 귀향
    간장 오타맨...

쌍용차 희망텐트촌 노동자 참가단에 다녀와서 2

  • 등록일
    2012/02/16 17:59
  • 수정일
    2012/02/16 17:59

 2월 2일(목)  -  2일차

아침 6시 현자 민투위 사무실에서 기상을 하고 현차 울산공장 앞 출근선전전을 위하여 2일차 일정을 시작하였다.

현자 울산 민투위 사무실에서 일어나 추운날씨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세면을 하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문을 나서는 순간 추위가 몸을 때리는데 추위가 몸속 깊이 각인되도록 몸으로 엄습해 왔다.

 

울산에서 효성과 저녁 출투로 추위를 경험한 터라 출근 선전전에 앞서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겨울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껴보았다.

추위보다 더 힘든것은 일하던 일터를 두고 출근선전전을 진행하면서 현장에 복귀를 외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울타리 사이로 노동현실과 노동조건이 다른 형태로 벌어지는 자본의 지배구조에 노동자는 하나라는 정신은 자본의 탄압에 가로막혀 노동자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오전 7시 출투를 위하여 울산공장 정문으로 나갔다. 현대울산공장 정규직, 비정규직, 연대단위,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이 공동으로 아핌 출투를 진행하면서 쌍차의 현실과 투쟁하는 제3차 행동의 날 참여를 독려하였다. 

현대 울산공장의 아침은 춥지만 뜨거운 동지애로 함께 선전전을 진행하였다.  

울산 현태 정문 선전전을 진행하면서 비정규직 펄폐! 정리해고 박살! 민주노조 사수! 원하청공동투쟁이라는 노동자 단결투쟁으로 자본에 맞선 투쟁을 전개할 것을 마음속으로 결의해 보았다.

 

출투를 마치고 언 몸을 녹이기 위하여 울산 현대 비지회 사무실에 들린 후 아침 식사를 위해 정문 근처 식당으로 향하였다. 식당에서 동태찌개와 김치찌개를 시켜 먹고,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약간의  반주를 하며 추위로 언 몸을 녹였다. 아침 따스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다음 일정을 위해 이동 준비를 하였다. 

 

울산 효성 플랜트 박현정 열사 추모제, 울산 현차 비지회 출투, 현대 울산위원회 방문, 현자 민투위 사무실 뒷풀이를 뒤로하고 현자 신승훈 열사가 있는 영락원으로 이동하였다. 

 

영락원엔 야간작업을 마치고 나온 현자 정규직노동자들이 팀별로 열사에게 분향을 위해 오고가고 있었다.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 또한 영락원 3층에 올라가 분향을 하고 노동해방 세상을 위한 투쟁을 다짐하였다. 

 

영락원 분향을 마치고 울산일정을 뒤로하고 경주 다스지회로 이동하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주노동자 노동현실

  • 등록일
    2012/02/16 17:47
  • 수정일
    2012/02/16 17:47

 

이주노동자는 다양한 업종에서 일을 하고 있다. 제조업, 건설, 농축산업, 어업, 선박선원 등 한국인이 가기꺼려하는 업종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제조업을 제외하면 특례고용노동자로 노동법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

 

 

특레고용제도로 노동자성 부정 당하는 이주노동자

김포이주민센터에서 상담의뢰 한 베트남 이주여성은 농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였지만 노동부를 통한 진정과 사업장변경은 요원하지 않았다. 회사를 현재 고소장을 접수한 상태이다. 일하는 형태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하루 10시간 노동)까지 일하고, 한 달에 1번 정도 쉬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임금은 85만원에서 100만원의 임금을 지급받고 있다.


농어촌이 어렵다는 이유로 특례고용을 하는 것은 이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처사이다. 농어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주5일제는 꿈도 꾸기 어려운 현실이다.  한 달에 번 일요일 쉬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다. 


산재보상 받기 어려운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의 경우 산업재해보상을 받기가 쉽지 않다.

 

 

200871일부터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 직인날인거부 사유서없이 산업재해를 받을 수 있지만 법은 유명무실하다. 대부분 이주노동자는 산업재해 신청하기 위해 이주노동자센터를 찾아오지 않으면 사업주의 공상처리 산업재해 처리를 하지 않아 산업재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태국이주노동자들이  골병이 들어 출국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산업재해 보상제도에서도 이주노동자는 차별받고 있다. 특히 장애등급 1-4급 판정을 받을 경우 한국인 노동자들은 의무적으로 연금을 수령하고, 5-8등급의 경우 연금을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이주노동자는 일시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산업재해보상에 있어서 업종에 따라 다르지만 미등록이주노동자는 정보가 없으면 병이 들어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병든 몸을 이끌고 회사에 의해 강제 출국되는 경우가 많다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사업주들이 많다. 5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외국인과 내국인이 동일하게 가입하여야 하지만 현재 20만명(EPS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중 해고에 따른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업주가 외국인고용보험을 가입하겠다는 신청서를 작성해야 가능하기에 고용보험을 한국인과 동일하게 가입하였더라도 외국인고용보험을 가입신청서를 내지 않으면 고용지원센터를 통해 실업급여를 받을수 없다. 

 

5인 이하 사업장에 고용된 이주노동자는  4대 보험(국민, 건강, 고용, 산재)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는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할 뿐더러 질병이나 감기 몸살로 병원을 찾게되면 의료보험 혜택이 되지 않아 비싼 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열악한 컨테이너 기숙사

벌집으로 비교되는 2.5평 방에서 이주노동자 2명이 살아가고 있다. 여름철이면 더위로 혹사당하고, 겨울철이면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이주노동자 기숙사는 대다수가 컨테이너이다.

 

이주노동자 기숙사는 대다수가 컨테이너 기숙사이다.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이주노동자는 한국의 고된 노동을 담당하고 있다.

 

컨테이너 기숙사는 화재의 위험과 전기차단으로 더운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얼어죽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매년 컨테이너 기숙사 화재, 전기장판 전기차단으로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가 화상 및 얼어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최소한 안락한 주거환경 제공이 이주노동자에게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끊이질 않는 이주노동자 강제단속

미등록이주노동자(일명 불법체류자)들은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단속에 의한 강제출국이 이루어 진다.

대다수 숙련인력으로 인력수급이 어려운 영세사업장에서 야간노동을 담당하고 있다. 사업주는 한국인 구인란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를 통해 영세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미등록이주노동자가 없으면 사업체를 유지하기 힘든 곳에서 미등록이주노동자는 사업체를 이끄는 노동자로서 전국에 분포하여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늘어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단속으로 이주노동자 강제정책으로 단속추방하고 있다. 지금도 영세사업장에 출입국 단속반의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에 의한 강제추방이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강제단속 중단. 사업장 이동의 자유보장, 노동권리와 노동비자를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일회용 비정규직노동자이다. 한국에서 근로기준법 보호를 적용받지 못한다.

산업재해 보상, 컨테이너 기숙사, 부당해고, 실업급여 미지급, 사업장변경의 자유제한, 강제단속이 이주노동자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우리사회 이웃으로 다가서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 참가단을 다녀와서

  • 등록일
    2012/02/08 20:44
  • 수정일
    2012/02/11 13:19
2월 1일부터 7일까지 연차휴가를 사용하여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에 참가하였다.
작년 1차 노동자 참가단에 참여하였고, 2차 경향신문 광고 조직화, 3차 전일정을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7일간 함께 전국의 투쟁사업장과 민주노조 사업장을 참여하였다.
 
전국순회투쟁을 진행하면서 민주노조 사수 투쟁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였다.
조합원의 언어와 지도부의 언어 그리고 행동이 다르다는 99년 국제노동미디어 행사에서 세기말현장보고서(Lan)이 제시한 현대자동차 현장에서 벌어진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평조합원과 지도부 언어아 통이라는 주제의 워크샵 발제문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과연 민주노총과 산별노조가 평조합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노동자 단결 투쟁으로 민주노조 사수한 조직도 있지만 무수히 이름없이 사라져야 했던 민주노조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많던 민주노조는 과연 그들이 투쟁력이 노동자 단결력이 사회적 연대가 없어 사라져야 했던 것인가? 라는 물음을 해보았다.

87년부터 시작된 조직노동자운동이 지금 시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화두와 지금 민주노총과 산별노조가 민주노조를 위한 조직적 활동으로 매진하고 있는지 등등 무수한 의문이 머릿속을 꽉채워 주체할 수 없었다.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 전국순회투쟁을 하면서 만난 민주노조와 전국 투쟁사업장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은 민주노조는 노동자 단결과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간명한 진리를 다시금 각인시켜주었다.
노동자 투쟁 하나하나가 한진이고 쌍차이다. 그리고 자본의 무능으로 빚어낸 경영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종을 위시한 산별노조는  민주노조 활동가에게 너마나 먼 당신으로 단위사업장에 다가오고 있다.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사회적 파급력이 작은 장기투쟁사업장과 투쟁 시일이 적기에 투쟁이 전국적으로 알리지 못하다. 사회적 투쟁으로 의제화 되고 있지 못한 현장 노동자 투쟁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텐트농성장에 전기장판 침낭을 의지해 자본과 정권에 맞선 노동자 투쟁은 눈물겨운 투쟁이다. 장기 투쟁하는 사업 곳곳에 자본은 돈을 앞세워 노동자를 회유와 협박을 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고, 민주노조에서 조합원 탈퇴하는 현실.....그래도 노동자 자존심과 깡다구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는 자신의 심신이 다 소진하며 깡다구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 깃발을 부여잡은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는 지방이 갈 수록 조직률이 적을 수록 노동자 단결투쟁은 어려운 현실임을 목포 보워터코리아 투쟁현장을 방문하면서 더욱더 크기  느낄 수 있었다.
 
쌍차 해고자 동지들이 오히려 저희들이 연대투쟁을 해야 할 곳이라도 이야기할 정도로 지역 민주노조 활동은 미미하였다. 특히 현대삼호중공업 노동자의 연대가 간간히 이루어져 있다. 현대삼호중공업 또한 민주노조 깃발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버거운 현실과 조선소 사내하청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본은 이리도 일치단결되어 노동자와 민주노조를 탄압하는데 민주노조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투쟁을 조직하기 보다는 어려운 현실과 상황에만 안주하여 몸짓 불리기와 탁상에 앉아 관료화 되어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전국순회단을 진행하는 쌍차와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 모두가 공감하고, 투쟁의 의지를 다지고 힘을 복돋아 주었다. 그리고 3차 행동에서 보워터코리아 투쟁 상황을 전국의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에게 알리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 노동자 연대의 기초가 다질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쌍차 문기주 정비지회장님이 직접 지부에 이야기하여 만들었다.
 
한진과 쌍차투쟁을 시발로 문제시 되고 있는 사업장들이 모두가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쌍차 희망텐트촌 투쟁을 통해 사회적 희망투쟁 사업장을 확대시키고 전국의 노동자 민중에게 알려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쌍차투쟁이 이를 위한 계기가 되어 쌍차투쟁에서 사회적 연대가 미약한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3차 쌍차 희망텐트촌 투쟁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다.  
 
민주노조의 현주소가 무엇인지.... 복수노조를 시발로 기업노조를 앞세운 자본의 민주노조 파괴 공작이 일어나는 사업장과 정리해고 분쇄를 위해 장기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사업장들이 민주노총를 위시한 각 산하 산별연맹을 버티는 힘임을 각인하였다.
노동자 단결 투쟁이 무엇인지 조직된 노동자들이 이제는 나설 때이고,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과 노동해방 세상을 간명하고도 어려운 화두를 이제 실타래 풀어가듯 단사를 넘는 노동자 투쟁의 힘을 자본가들에게 이제는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1. 1월 31일(화)   저녁
사무실에서 오후 9시에 퇴근하여 집에 들려 순회투쟁 물품을 배낭에 집어넣고 평택으로 향했다. 1월 31일 함박눈이 내리는 늦은 저녁 쌍용차 희망텐트촌에 오후 11시 40분에 도착하였다.
희망텐트촌 마을회관 화로 주변으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쌍차지부와 연대단위 동지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간단한 인사 그리고 주변에 모여 내일있을 출투와 전국순회투쟁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었다.
 
인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한 후 출발을 위해 모인 동지들 각자가 마음회관, 쌍차 거점으로 향해 기나길 순회투쟁을 위해 숙면을 취했다.
 
 
2. 2월 1일(수)
아침 6시 기상 전국순회투쟁을 위해 쌍차지부동지들과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 동지들이 울산공무원노조에 빌려온 차량에 순회투쟁 농성물품을 챙겼다.
아침 눈이 많이 내려 도로는 온통 염화칼슘을 뿌려서 얼음빙판이 되었다. 추위도 한몫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힘차게 모여 아침 7시 30분 첫 방문지인 유성 영동지회 사무실로 향하였다.
설레인 마음을 주체하고 차량에 타면서 주변 풍경을 보았다. 온통 하얀색의 눈꽃들로 주변이 휜색 일변도 였다.
 
도로는 새벽 재설작업을 하였는지 고속도로 상황은 국도에 비해 괜찮았다.
 
첫 도착지 유성영동공장 재설작업을 하지 않아 국도상태는 눈길이었다. 길을 해치고 찾아온 영동공장 공장 입구 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전국순회투쟁단이 방문하니 급작스럽게 정문에 바리케이트를 관리자의 지휘하에 정문 통제를 하고 있었다.
총회를 하다 나온 유성 영동지회 간부들이 정문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노동조합 방문한 전국순회단이 조합사무실에 올 수 있도록 바리케이트를 철거하고 관리자에게 항의를 하며 짤막한 언쟁과 몸싸움을 하였다.
 
유성 영동지회 도착 총회를 마치고 나온 동지들과 조합사무실에서 간담회를 하고, 유성 영동지회 상황을 공유하였고, 전국순회투쟁단 활동과 쌍차지부 상황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첫방문한 유성 영동지회에서 자본의 복수노조를 활용한 기업노조활동으로  민주노조 말살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였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성 영동지회는 조합원의 일치단결된 투쟁으로 민주노조 깃발을 사수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뜨거운 노동자 동지애로 맞이해주었다.
다음 일정이 울산이라 짧은 만남을 아쉬워 하며,  울산 효성 공장으로 향해 나왔다.
 
오후 2시 울산 효성플랜트 석유화학 공장에 도착하였다. 식사를 하지 않아 일단 울산지역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 동지들이 마련해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였다. 바닷바람이 부는 플랜트 현장에서 밖에서 바람을 맞으며 먹는 밥 또한 노동자투쟁의 현실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늘 편안한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동지들과 술한잔 기울이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호희호식하고 있음을 느끼기게 해 주었다.
 
울산지역동지들이 먼저와서 출근 선전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근 선전전과 울산 효성위원장이었던 박현정 열사의 1주기 추모제도 있었다. 박현정 열사의 추모 분향소는 참으로 조촐하였다. 간단히 차려진 분향소에 열사 영정과  국화꽃이 눈에 들어왔다.
 
동지 옆을 지키고 있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함께한 동지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효성동지들에게 지인이고,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박현정 열사에게 술한잔 따라줄 것을 효성노동자에게 호소하였다. 출근집회를 진행하는 내내 사측은 무엇이 두려웠는지 집회 엠프 소리보다 크게 확성기를 크게 틀고 투쟁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차단하였다.
 
박현정 열사 추모 1주기 효성 자본의 극악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
 
울산 효성플랜트 사업장을 뒤로하고, 울산 현차 앞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울산 현대차 민투위사무실에 쌍차 후 처음을 본 함동지를 만났다. 간만에 만남이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추위로 언 몸을 녹였다. 
 
현차 울산 민투위 사무실에서 휴식을 취한 후 일정 체크를 위하여 울산 현차 비지회 사무실로 이동하였다. 비지회 사무실에선 지역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 동지들이 유인물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인물 작업을 하는 동지를 보고, 현차 비지회 사무실로 들어가 향후 일정을 공유한 후 비지회 수요집회를 위하여 현차 울산공장 정문 앞으로 갔다.
 
오후 5시 울산 현차 정문 잎 추위는 가실 줄 모르고, 강추위 속에서 현차 비지회 수요집회를 개최하였다. 현자 비지회 조합원, 민투위, 현차 노조,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 지역동지들이 함께 수요집회를 전개하였다. 수요집회를 마치고 난 후 현차 울상공장 노동조합 사무실에 방문하여 언 몸을 녹이고,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 후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현차 식당에서 순대국밥을 먹고, 식사를 마치고 야간조 출근 선전전을 위해 정문으로 이동하였다. 정문 앞에서 출근선전전을 지역동지들과 전개하였다.
울산지역 선전전 겨울철 들어서 가장 춥다는 날씨에 선전전을 진행하였다. 그래도 쌍차 투쟁을 통하여 전국지역의 투쟁하는 동지들을 만나면서 노동자 연대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출근선전을 마치고, 울산지역동지들과 현차 민투위 사무실에서 간담회를 개최하고, 뒷풀이를 하며 현차 비지회 투쟁 쌍차 희망텐트촌 노동자참가단이 전국순회를 하면서 느낀 소회를 나누면서 오후 11시 40분 이틀날 일정을 모두 마쳤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주노동자 도입, 그리고 이주노동자 꿈과 미래

  • 등록일
    2012/01/31 13:06
  • 수정일
    2012/01/31 13:06
과연 이주노동자 도입은 누가한 것일까요?
값싸고,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정부(현 고용노동부)가 각 아시아 국가 노동부와 협약(MOU)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초기 산업연수생제도라는 노예적 노동의 문제점이 있었고, 현행 고용허가제 또한 사업장 이동의 자유, 단기순환제, 이주노동자 자유로운 노동권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헌법재판소에서는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제한은 합헌이라는 판결을 보면서, 우리사회 성숙되지 않은 이주노동자 그리고 이주노동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 브로커에 속아 전재산을 탕진하여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중국동포에게 한국에 가면 돈을 벌게 해준다고 접근하여 브로커 비용만 챙기고 도주한 한국인 브로커가 많습니다. 이주노동자 한국 입국을 미끼로 이주노동을 부추긴 것 또한 한국인입니다.

지금 시간이 지나 자국에 브로커가 생겼지만 2000년도 초중반까지 한국인 브로커에게 이주노동자가 송출비용을 지불하여야 한국에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중국동포 3,000여명이 한국 브로커에 속아 빚을 갚을 길이 막혀 자살하거나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산업현장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매년 300여명이상이 산업재해를 당하고, 10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사망하여 질병, 자살로 망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경제발전으로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이주노동은 엊그제 한국 현실입니다.
이주노동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사회 또한 이민과 이주노동을 하고 있는 유입국이자 송출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에 한국 이주노동자가 70만명이 있습니다. 일본사회 차별을 받고 있는 재일동포를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한국사회가 이제 아시아를 통해 전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국사회 경제발전은 한국사회만의 노고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수한 아시아의 경제협력과 지원으로 이루었습니다.

아시아 각 나라들은 한국사회가 함께 걸어가야 할 파트너입니다.


한국사회가 이주노동자에게 손을 내밀고, 더불어 살아가기를 통해 한류를 넘어 아시아 아니 세계속 한국을 만들어가는데 일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주노동자 꿈과 미래....
이주노동자는 가족의 삶을 책임지는 가장입니다.
한명의 이주노동자 자국 8촌의 경제생활과 교육, 의료를 책임집니다.
이런 현실은 이주노동자가 무섭고, 고통스러운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합니다. 이주노동자는 자신의 미래만을 짊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의 삶을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 그/녀들 어깨는 늘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다문화사회라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낮설고, 시혜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이주노동자 그/녀에 대한 인식의 무지를 벗어던지도 한국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주노동자는 앞으로 더욱더 늘어날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도래한 저출산 고령화 사회 이 사회의 노동을 책임질 이주노동자 우리와 함께 살아갈 친구요., 동생이며, 언니, 누나, 형, 오빠입니다.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소망은 간단합니다.
한국에서 가족의 삶을 이끌 수 있도록 지속적인 일자리와 체류자격을 부여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삶을 영위하고 자녀들을 한국교육현장에 차별받지 않고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작은 소망이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 바램하는 미래입니다.
늘 불안한 삶에서 단속이 되지 않게 기도하는 초등학생 자녀의 기도를 직접 이야기 들어보세요. 우리와 같이 숨쉬고 생각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이주노동자 그/녀들과 자녀의 모습을......



한국사회 이주노동자를 통해 아시아를 바라보기....
이제 한국사회가 말만인 글로벌 시대 리더가 아니라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가깝게 다가온 이주노동자 그/녀들과 아시아 속의 한국이라는 미래지향적 고민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유목민의 역사에 의해 진화해 왔듯 우리 또한 잠재된 이주노동자입니다.

과거 조선말기와 일제식민시대 더 낳은 삶을 찾기 위해 하와이,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과 만주와 연해주 동토의 땅을 일구며, 독립운동을 하였던 것이 한국사입니다. 또한 60년대 탄광현장과 간호사로 독일에 갔고, 70년대부터 중동의 작열하는 태양속에 구슬땀 일구기 위해 이주노동을 간 역사가 우리 근현대사와 현대사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어느 중국동포 H아저씨의 귀향

  • 등록일
    2012/01/31 12:54
  • 수정일
    2012/01/31 12:54

어느 중국동포 H아저씨의 귀향

 

 

중국동포 H아저씨를 만나다.

 

1년이 넘게 건설현장의 체불임금으로 인하여 여러 상담소를 거쳤지만 번번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중국동포 H아저씨를 중국인 상점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국동포 H아저씨가 한국에 온 이유

중국 만주 흑룡강성에서 H 아저씨가 한국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

"꼭 한국에 가서 고향땅 흙을 내 무덤에 올려 달라"는 부모님의 유언 때문이었지요.

 

H아저씨의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밀양, 어머니의 고향은 경남 합천이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때 H아저씨의 아버지는 일제 부역과 공물수탈에 더이상 먹고 살 거리가 없어서

간도땅으로 이주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동네 절반 이상이 일본인들 탄압을 피해 1918년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이였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부모님의 유언에 따라 무작정 한국행을 결심했다는 중국동포아저씨.  

아버지가 고향을 그리워 했는데 고향에 찾아오지 못했다며 H아저씨는 눈시울을 붉히십니다.

중국에서 짐을 챙겨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북한에서 국경이 열리지 않아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에 찾아가 산에서 흙을 퍼다 중국 묘역에 뿌려주었다고 말하며 

그래도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찾아온 고국은 H아저씨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매일 쑤시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아내의 지병을 걱정하며 열심히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유언으로 찾아온 고국은 어느 새 아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한 일로 변해 있엇습니다.

6개월의 치료로 3년간 번 돈을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더더욱 문제는 아저씨가 다녔던 회사가 공사 부채를 이기지 못하고 공사가 중단되면서

일거리가 없어지고, 체불임금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작년 2월, 3월, 4월, 5월 밀린 임금 610만원....

그리고 이 와중에 중국으로 돌아간 아내는 귀국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작년 4월 15일 중국에서 사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내의 죽음에도 체불임금을 받지 못해 떠나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H아저씨. 

 

그 후로 1년이 넘게 걸린 체불임금상담...

한국에서 법을 몰라 물어물어 간곳에서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빨리 돈 받아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자식들에게는 돈을 받으면 곧 돌아갈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고,

다녔던 현장소장에게 애원을 하며, 밀린 체불임금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소장이 곧 준다는 말을 믿고 기다렸지만 소장은 이내 연락이 되지 않아

고용노동부에 진정서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고용노동부에서 이곳 저곳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H아저씨는 하루 빨리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못받으면 돈이 없어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에게 빌린 돈도 대략 200만원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를 꽉물고 먼저 하늘나라로 간 부인 곁으로 갈 생각까지 가졌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H아저씨와 고용노동부에 함께 동행하여 근로감독관과 면담을 했습니다.

H아저씨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체불임금으로 겪었던 이야기를 근로감독관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근로감독관도 H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건에 대하여 꼭 받을 수 있도록 처리해주겠다며

아저씨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습니다.

H아저씨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좋은 소식을 기다리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H아저씨는 근로감독관에게 한국에 와서 이렇게 고마운 말은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과 인사를 했습니다.

 

                                 

 

먼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몰라서 당하고, 천대로 인해 마음이 미어지는 낮선공간을 찾는 이들.... 

상념과 마음의 고통을 간직한 사람들이 비단 H아저씨 뿐이겠나하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드디어 중국으로 갑니다.

 

얼마전 H아저씨가 밝은 얼굴로 왔습니다.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며 돈이 입금되었다며

드디어 치루지 못한 아내의 장례식을 치룰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드디어 이제 가족에게 돌아간다고 인사차 방문하였다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십니다.

  

오늘 아저씨의 웃음속에서

한국에 찾아온 중국동포 삶의 단면을 느껴보았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