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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

(§4) 일어나서 먹고 자고 이러기를 반복하는 삶의[1] 모습은 마치 동식물이 자기속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묶여 사는[2] 그런 모습과 같은데[3] 이런 자연[시간]의 흐름 속에 가둬진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4] [한 개인이] 교양을 쌓아나가는 첫 디딤은[5] 언제나 보편적인 원칙과 관점을 사용하는 능력을[6] 훈련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7]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무튼 [보편적 원칙과 관점이 드리우는 빛 속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사상의 수준으로 [8], 즉 대상에 대한 사유행위의 결과로서 사유행위 안에 내재하는 사상의 수준으로 뛰어 올라가야 하고 이에 못지않게 근거를 제시하여 그런 보편적 원칙과 관점에 대한 지식을 뒷받침하거나 논박하고, 구체적이고 넘쳐 나는 대상의 내용을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고[9] , 그리고 이렇게 사유된 것들을 따로따로 잘 정리함으로써 대상에 통달하여 진지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양의 초기 단계는[10]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이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고  성장하는 소년이 철이 들어 어른이 되면 교양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충만한 삶을 향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회생활에[11] 자리를 비켜주게 된다. 이런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인은 사태를 몸소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세상살이를 하는 가운데 지식과 판단능력에 개념이 갖는 진지한 운동이 일어나 [12] 사태의 심층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이 추가된다면, 이런 것은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사는, 마치 마르틴 루터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탁상담화에 잘 어울리는 지식과 판단능력이 될 것이다.[13]



[1] 원문

[2] 원문 . <덜 떨어진 놈>이란 문구에서 <덜 떨어진>이 갖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3] 서론 §8 내용을 여기에 삼입함

[4] 원문 우선 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양자를 시간의 진행에 따라 나열한 것인지 아니면 앞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역자는 우선 <교양> <무의식적인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의 본래 의미가 <붙들어 쥐어 어떤 일에 착수하다>라는 점에서 은 교양은 어떤 기회를 포착하여 시작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다. 덧붙이자면, 왜 우리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먹고 살다가 죽는 그런 반복에서 헤어나와 교양을 쌓는가라는 질문에 인간에게는 이미 그런 기회가 주어진 상태에서, 즉 교양을 쌓아갈 수 있는 학교, 선생 등 교육제도가 있고, 학교를 보내지 않으면 처벌을 주는 법규 등 제도(Institution) 안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이 갖는 의미에서 유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해석의 연장선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동식물상태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사회적인 인간으로 볼 때 이미 그런 교양 안에서, 즉 제도 안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겠다. 이것이 <문화>를 인간의 제2 <자연>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는 것 같다.

[5] 원문. 개념은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이다. <교양>이전의 상태에서 <교양>이 시작되는 상황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직관은 아마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역자의 경우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는 날 이후의 일부터, 그것도 학교정문을 딱 들어서고 난 이후에 일어난 사건에만 자아의식이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전에 일어났던 일,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문에 들어서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자아가 섞인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 일들은 단지 꿈속에서나 종종 나타나는데 햇빛, 따스함, 소리 등 아주 원초적인 감각의 대상으로만 되살아 날 뿐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로 만든 학교정문, 그리고 운동장으로 가는 길 양쪽에 일렬로 심겨진 키 높은 포플라나무 등이 주는 위엄이 산과 들에서 그저 뛰놀기만 한 어린이의 뇌와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겨 둔 모양이다. 과 그 시작을 개념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우선 이렇게 직관에 기대어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6] 원문 ätze und Gesichtspunkte>. 여기서 소유격은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카테고리와 같은 것을 먼저 습득하는 것이라고 수가 있겠다. 아이들이 말을 시작하면 우리는 <이사람 누구야> <이건 무엇이야> <이건 무슨 색이야> 등 카테고리를 습득하는 연습을 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이 사과는 둥글다>라는 사상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발전한다. 그래서 여기서 Kenntnisse <지식>보다 <습득>으로 번역해야겠다. 대장장이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날이 쉽게 문드러지지 않는 낫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지식은 에 가깝다. <몸에 베인 기술/능력>이라고 하자. 임석진 교수는 이것을 <지식 획득> <훈련>으로 번역하고 있다. (정신현상학 1, 38) 

[7] 원문 .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지목했다. 

[8] 원문 . 사실 무슨 말인지 어렵다. 살펴보자. 로서의 <사상>은 오성행위를 이야기하는데 데가르트는 <사상>을 사유행위 일반으로 확장한다 (cogitatio interdum pro actione ... sumitur/사유는 어쩔 때는  사유행위 대신 쓰여진다). <사상>은 또한 , 즉 영미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과 같은 것으로서 사유의 내재적 결과를 의미하고 문장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상>은 사유된 것으로서 사유 안에 내재하는 와 같은 것이 된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3, 53쪽 참조.) 아무튼 여기서 사용되는 소유격을 동시에 주격적 소유격과 [사상에 내재하는 사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사태에 대한 사상] 이해해야만 하겠다.

[9] 원문 . 무슨 말인지 또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다. Tugenthat (etwas von etwas)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하이데거 식으로 etwas als etwas, 즉 존재론적인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로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형이상학을 가서 다시 한번 봐야겠다. 보다 정확해지면 위에서 지껄인 것들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이겠다.

[10] 원문 . 교양은 한번의 시작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11] 원문 üllten Lebens>. <철이 들어 ... 사회생활로>로 옮겨 보았다.

[12] 원문 . 또 소유격이 문제다. <개념>이 갖는 <진지>인지 아니면  <개념>에 대한 <진지>, <개념>을 획득하려는 <진지>인지 뭐가 뭔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뭔가 <개념>이 갖는 <진지>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럼 <개념>이 갖는 <진지>란 뭐란 말인가. 우선 주관적인 오성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시작하고, 뭔가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운동이 진짜 그러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진지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자. 이 문제를 또 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3] 헤겔은 이런 지식을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를 번역문에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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