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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3

(§13)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갓 등장하는 단계에서는 전체가 단순함 속으로 침강하여 아직 그 안에 갇혀 있는 상태로만, 달리 표현하면 일반적인 토대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식의 기억 속에는 지나간 삶에서 영위했던 다채로움이[1] 아직 그대로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이다.[2] 그래서 의식은 새로 등장한 형태에서 전개된 내용과 내용이 전개되는 가운데 [보편이 자기 안의 구별을 통해서] 특수한 내용으로 [망울망울] 어우러지는 것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의식이 이보다 더 그리워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형식인데, 이런 형식에 의해서 비로서 내용적인 차이들이 엄밀하고 구별되고 그들 간의 관계가 [전체 안에서] 확고하게 정립된다.[3] 이와 같은 형식의 연마가[4] 없는 학문에는 보편적인 이해가능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5] 단지 소수의 몇 명이 그들만 소유하고 그들에게만 전수되고  그들만 알아볼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6] 우쭐거림이[7]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우쭐거림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소유물이라는 주장의 실체는 학문이 이제 겨우 [/껍데기]개념으로, 달리 표현하면 개념 속에 깃들여 있는 내면으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고, 소수의 몇 명만의 소유라는 주장의 실체는 등장하는 단계에서 확산되지 않는 학문이 존재하는 양식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문은 완벽하고 명료하게 구별된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서 공교(公敎)적이고 이해될 수가 있으며, 이렇게 되어야만 또한 학습이 가능하고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가 있다. 학문의 이해 가능한 형식이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거쳐야 하는 학문을 향하는 공평한 길이다. 그래서 오성을 통해서 이성적인 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는 학문으로 나아가는 [학문의 편으로 들어오는] 의식이 내세우는 합당한 요구다. 왜냐하면, 오성이란 사유로서, 순수한 자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능한 것이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고 학문과 비학문적인 의식이 공유하는 것이다. 이 공유를 통해서 비학문적인 의식은 바로 학문에 들어갈 수가 있다.



[1] 원문

[2]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하는 의식의 현재와 발맞추지 못하는 동시성(Ungleichzeitigkeit)이 착안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는 고리타분한 수구보수의 성격, 나아가서는 파시즘과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3] 헤겔의 보편에서 특수를 거쳐 개별로 나가는 운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성급한 사람들을 위한 지적이고, 이것은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 될 것이다.

[4] 원문

[5] 원문 <설명하는 그리고>(explikatives Und)

[6] 원문 . 비교(秘敎)·비전(秘傳)

[7] 원문 . 실체가 없는 사이비 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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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2

 

(§12)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나타난 세계는 갓난아기와 마찬가지로 완성된 자기모습을[1] 갖춘 상태가 아니다. 이 점을 놓치지 않아야 [생성운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갓 등장하는 것은 다만 그것의 직접적인 존재양식, 달리 표현하면 개념만을[2] 갖춘 것이다. 건물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해서 건물 전체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듯이 전체의 개념을[3] 얻었다고 해서 전체가 다 되었다고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떡 버티고 서있는 줄기에 활짝 펼쳐진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참나무인데, 이렇게 완성된 나무 대신 도토리만 불쑥 내놓고 <참나무 봐라> 하면 누가 만족할 것인가[4].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세계의 정상인 학문이 등장단계에선 완성된 자기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새로운 정신이 싹트는  터전은 다양한 교양형식이 지속적으로 변하여 폭 넓은 변혁을 이룸으로써 생산된 것이고 정신이 미로와 같은 도정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이것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이리저리 도전하고[5]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새로운 정신의 싹은 정신이 [그전 단계에서] 차례차례 자기모습을 펼쳐나가는 가운데 확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전체를 이룩하고 나서 다시 그 전체를 자신 안으로 움켜쥐어 복귀시킨 것으로서, 말하자면 전체가 다시 단순한 개념으로 생성된 것이다. 이 단순한 개념에 깃들여 있는 전체가 다시 완성된 자기모습으로서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개념 속의 마디마디로[6] 응집되었던 정신의 갖가지 형태들이 새로운 지평 위에서 [이전 단계에서] 생성된 방향성에 맞춰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 나가야 한다.



[1] 원문

[2] 원문. 이 부분은 서론 §6 <자연적인 의식은 단지 지의 껍데기일 뿐이지 실제적인 지가 아니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될 것이다.>비교된다. 여기서 <껍데기>란 유적개념과 같은 틀로 생각할 수가 있겠다. 유적 존재(Gattungswesen)와 비교해 볼 필요도 있겠다. 사람은 갓난아기로 태어나자마자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 사람이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괴물은 되지 말자. 진보넷 블로거 배여자] 단지 유개념만 갖고 있을 뿐이다. 또 낙태법과 관련해서 보면 직접성”(“Unmittelbarkeit”)이란 태아에게 사람이라는 유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냐라는 문제다.

[3] 원문

[4]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다윗상과 관련하여 한 말은 여기에 대조되겠다. 동상은 내가 끌을 갖다 대기 전에 이미 대리석 블록 내부에 들어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란 단지 불필요한 돌을 쳐내는 일이다. 관련 재미있는 사실은 부오나로티가 카톨릭이 이단으로 규정한 정신의 무리(Sprituali)의 일원이었고, 이 이단은 청교도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부오나로티가 다윗상 조각을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하고 그 진행작업에 관한 것들을 거의 다 파괴함으로써 그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가 숨겨버린 사실이다.  

[5] 원문

[6]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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