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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9

 

(§9) 이와 같이 [속이 텅 비어있어] 구할 줄도 모르고 [시시콜콜한 것만 받아도 만족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줄줄 모르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옹졸한 태도가 도사리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학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자세나 가다듬는 일에만[1] 몰두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갈라지는 자신의 삶과 사상은 신성이라는 두루뭉실한 안개로 덮어놓고 그런 불분명한 신성이나 어떻게 든 향유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런 것을 찾아 나서라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2]. 아무튼 그는 쉽게 뭔가 고무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이것을 수단으로 하여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고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양 으쓱거릴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을 지켜 경건한 자세나 가다듬는 일에[3] 빠져서는 안된다.



[1] 원문

[2]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3]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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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8

 

(§8)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억지에 가까운, 다른 이에 뒤질까 봐 앞을 다투듯이 하는, 그리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노력이 있다. 아무튼 이런 노력으로 관능적이고 비속하고 개별적인 것에 뿌리를 내리고 기생하는 사람들을 뽑아내어 그들의 눈길을 하늘높이 떠 있는 별들로 향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배후에는 사람들이 신적인 것은 모두 망각하고, 흙과 물만으로 모든 욕구를, 발생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충족시키는 지렁이와 같은 존재로 떨어졌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예전에는 하늘은 온갖 사상과 형상으로 충만하게 꾸며진 상태였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의미를, 그것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빛의 줄기를 통해서 부여 받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승의 지금 이 자리에[1] 머무르는  대신 늘 하늘에 머물렀고, 이승을 넘어서 신적인 존재들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저승의 영원한 현재로[2] 늘 흘러 올라갔다. 이러한 정신의 눈을 하늘에서 떼어내  이승을 바라보게 하고 거기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행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천상계에서만 가능했던 명료함을[3] 몽롱하고 어지러운 것[4] 외 아무런 다른 의미가 없었던 이 세상에도 스며들게 노력하여[5] 현재적인 것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것, 즉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중요하고 유효한 것으로 수용되도록 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젠 다시 그와 정반대 되는 빈곤을[6]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7] 지상계에 너무 강하게 뿌리를 내린 상태여서 이를 다시 위로 치켜 올리려면 예전과 같은 강제력이 필요해 졌다는 것이다. 정신의 빈곤함은 사막을 헤매는 자가 한 모금의 물 외 다른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극심한 상황이 되어서 신적인 것을 한번 느껴보기만 하자고, 이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갈증을 축여보자고 애타게 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이 이따위 것에 만족하는 데에서 그의 상실이 얼마나 큰가를 가름할 수가 있다.



[1] 원문 현재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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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7

 

(§7) 철학에서 이와 같은 요구가 등장하는 것을 보다 더 보편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자기자신을 자각하는 정신이 현재 처해 있는 단계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자각적인 정신은 주어진 삶에 온전히 순응하는 삶에서 교양에 의해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사상의 터전에서는 바탕이 견고한 삶을 영위해 왔었는데[1] 이제 와선 사상의 터전에서도 그런 견고한 바탕을 상실하고 거기서 벗어나 떠도는 상황에[2] 처해있다. 다시 말해서 [루터와 같은] 믿음의 직접성[3], 또는 [데카르트와 같은] 확신이 주는 안정과 안심[4],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면서 뭔가 확실하고 견고한 것을 찾아 나섰던] 의식이 다시 신과의 화해를[5] 통해서 신이 대내외적으로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다는 만족에서 벗어나 있다. 자각적인 정신은 위와 같은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젠 아무런 바탕도 없고 아무것에도 기대지 못하는[6]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붙들어 쥐는 반성이라는[7] 반대의 극으로 흘러 갔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반성에서도 머무르지 못하고 뛰쳐나간 상태다. 자각적인 정신은 본질적인 삶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상실과 더불어 자신의 내용이 되는 것은 이젠 단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남은 것이라고는 죽는 일밖에[8] 없다는 점도 의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에 맞선 정신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갈 곳을 모두 상실하고 부랑하는 찌꺼기와 함께 방황하는 일은 그만두고 이젠 덜덜 떨고만[9] 있다고 자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굴욕적인 자기 모습을 한탄하면서 철학에게 요구하기를 현존하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게 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예전과 같이 알차고 견고한 삶의 터전이[10] 먼저 철학을 통해서 다시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욕구를 받아들여 철학은 이제 침강한 실체성을[11] 열어 젖혀 다시 자각으로 끌어 올리고 어지러운 의식이 사유된 질서와 개념의 단순성으로[12] 다시 입도하도록 하는 일은 그만두고, 사상의 배설물을 모두 한데 쏟아 부어 잘 흔들어서 구별을 두는 개념은 제어하고 위대한 존재자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만을[13] 만들어 내어, 심층적인 자기통찰보다는 뭔가 위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무너진 마음을 다시 수습하는데[14]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 성스러운 것, 영원한 것, 종교, 그리고 사랑은 모두 위와 같은 것을 덥석 물게 하는 충동을 주는데 요구되는 미끼일 뿐이다. 개념이 아니라 망아의 경지가, 냉정하게 전진하는 사태의 필연성이 아니라 부글부글하는 영감이 알찬 삶의[15] 풍요함을 영위하는 태도이며 그 풍요함의 지속적인 확대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1] 원문

[2] 서론 §8와 비교해 볼만 하다.

[3] 원문 . <아무런 중매가 없는 믿음의 직접성>. 헤겔은 이것을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신이 주는 안정과 안심>도 폄하하지 않는다. 전자는 루터를 두고 하는 말이고, 후자는 데카르트를 두고 하는 말이다. 헤겔이 폄하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더 높은 단계의 사유를 요구하고 또 그럴 바탕이 마련되었는데, [헤겔이 보기에] 그 밑을 기면서 그것을 별난 것으로 내놓은 동시대의 글쟁이들이다. 루터의 <믿음의 직접성>, 즉 신과 나 사이에 아무도 중매자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즉 교황도 그럴 수 없다는 믿음이 루터로 하여금 1521.4.17보름스 종교재판에서 황제와 교황사자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게 하고,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있는 힘이 되었다. <믿음의 직접성>이 의식에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양심>이다.

[4] 원문 . 여기서 테마가 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다. 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신이 있다면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다루는 제3성찰까지 한번 살펴보고 지나가자. 데카르트의 사유에서 신의 사기꾼여부문제는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1성찰에서 학문에서 뭔가 견고하고 항구적인(“firmun et mansurum”) 것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조금이라고 의심이 가는 것이 있으면 완전히 없는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방법을 (“Satis erit ad omnes rejiciendas, si aliquam rationem dubitandi in unâquâque reperero.”) 세운다. 2성찰에 들어가 제1성찰에서 세운 방법을 적용하여 무너지지 않는 것”(certum inconcussum)을 찾아 나서는데 무너지지 않는 것이 없다. 사기꾼 신이 나를 갖고 놀 수 있다는 개연성(Sed est deceptor nescio quis, summe potens, summe callidus, qui de industriâ me semper fallit)과 오성의 오류를 보면 확신할 만한 것이 없다. 이런 와중에 확실한 것이 나타난다.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기꾼이 나의 혼을 가지고 장난질한다고 해도 그가 달성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는 뭔가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Haud dubie igitur ego etiam sum, si me fallit; & fallat quantum potest, nunquam tamen efficiet, ut nihil sim quamdiu me aliquid esse cogitabo). 그래서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나를 의식적으로 파악할 때 필연적인 진리는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라는 (quoties a me profertur, vel mente concipitur, necessario esse verum.) 것이다. 이제 문제되는 것은 내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것인데 이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데카르트는 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내 몸을 포함해서 다 떼어놓을 수 있는데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cogitatio. (“Cogitare? Hic invenio, cogitatio est, haec sola a me divelli nequit.”/생각? 여기서 나는 찾는다. 바로 생각이다. 이것만이 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res cogitans”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Res cogitans <> <바탕/본질>(Substanz).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세계다. 모든 것이 의심이 되어서 없다고까지 했는데 그럼 외부세계에 대한 확신은 어떻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서 신은 존재하고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신이 될 수 없다는 성찰이 이루어지고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res extensa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안심과 안정이 되는 바탕을 신과의 화해를 통해서 얻게 된다. 신에 대한 논리전개는 다음에 살펴보자.

[5] 원문 öhnung mit dem Wesen>

[6] 원문

[7] 원문

[8] 원문 유한성. 죽음. 의미 없는 것.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 Substanz를 의식으로 만드는 문제, 즉 주체로 만드는 문제는 §17에서 다루어지는데 <정신현상학>, 아니 헤겔 철학의 정곡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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