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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어떤 철학이 있을까.

바람소리님의 [제 7의 인간, 존버거의 시선을 느끼다] 에 관련된 글.

고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생각나는 것은 Larry Sultan이 "사진작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가짐은 tenderness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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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

(§2)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철학작품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것이 동일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다른 연구결과와[1]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가운데 이렇다라고 확신하는 것도[2] 철학 외적인 관심을 끌고 들어와 진리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어둡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참다운 것과 그릇된 것은 서로 대립한다는 천박한 생각에 젖어있는데[3], 이와 같은 대립이 사람들의 생각에 뿌리를 내려 견고해지면 철학에 대한 기대는 이원논리로 전락하여 기존의 철학체계를 놓고 찬반으로 갈라지고 기존 철학체계에 관한 설명에서도 찬이냐 반이야 둘 중에 한쪽만을 보려는 자세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차이를 단지 모순으로 생각하는 한  다양한 철학 체계간의 차이를 결코 진리의 점진적인 발전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꽃이 피어남으로써 꽃봉오리는 사라진다. 이것을 보고 위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꽃봉오리가 꽃에 의해서 반증되었다고[4]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5] 열매는 꽃을 식물의 거짓된 존재로[6] 선언하고 스스로 꽃이 차지하던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나열된 형태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간에는 결코 어떠한 타협과 화해가 있을 수 없으므로 공존하지 못하고 완전한 상호배척을 이룬다. 그러나 자연의 흐름을 속성으로 하는 식물은 위의 형태들 간의 상호배척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을 다 유기적인 통일로 이끌어 내어 거기서 한자리[7] 하게 만든다. 이런 통일 안에서는 각 형태들이 서로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모든 형태가 똑 같이 누리는 필연성이 완성되어야 비로서 삶이 완성되고 전체가 숨쉬고 살아있는 것이[8] 된다. 그러나 어떤 철학체계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체계를 제시하는 철학자 자신이 모순을 위에서 이야기된 것과 같이 이해하지 않는 자세로 굳어져 있는가 하면 뭔가를 좀 안다고 하면서 그런 철학작품을 읽는 사람조차[9] 천박하게 사유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10] 그들 역시 모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순을 자신의 편협성에 구속시켜 이해하지 절대 모순을 자기의 편협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유롭게 [운동하는 것으로] 보존할 줄 모르고, 결국 갈등과 대립의 구도로 나타나는 외형에서[11] 서로가 서로에게 필연적인 계기가[12]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 자기[]의 생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 평균적인 생각.

[4] 원문 . <부정>은 존재자의 운동이 갖는 특성을 이야기 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반증>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헤겔이 지적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존재자의 운동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반증>이란 범주에 묶여있다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의 사유에 존재자의 특정인 부정[운동]을 적용하는 것은 뭔가를 헷갈리게 만든다.

[5] 원문 . 여기서는 논쟁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 즉 상대방의 생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헤겔의 사유방식과 관련해서 내다볼 수 있는 것은 생각을 존재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오는 것이다. 본문의 예를 보면 꽃을 통해서 꽃봉오리가 반증되었다는 사유를 존재차원으로 끌고 내려와 사유의 대상, 즉 현존재[Dasein]가 사유의 운동을 실지로 하는 것으로 만든다. 사유의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운동에도 논리가 있다는 점을 엿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내용이 에 들어있다. 이런 시각전환은 본문이 세미콜론으로 [끝나지 않고] 시작하는(!) 점이 이미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여기서 사유에서 존재 차원으로 좀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 같다. 수사학에서나 사용되는 반증방법에 기대어. 일단 그냥 넘어가지만 헤겔한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냐고 엄밀히 따져봐야 할 문제다.

[6] 원문

[7] 원문 .이놈의 는 그림자같이 계속 따라 다닌다. 혹시 자체가 그림자 같은 것은 아닌지...  

[8] 원문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또 소유격인데, 역자는 이 소유격을 동시에 주격적 및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옮겼다. 이와 관련 을 동시에 살아있는 생명과 결과로서의 삶이라는 의미로 옮겼다. 

[9] 원문 . 누군가를 까는 말투인데, 누군지 모르겠다.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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