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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에게 당할 만 하다

혁사무당파님의 [마광수가 더 왼쪽이다] 에 관련된 글.

법을 만드는데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를 사상하고 만들면 마광수 같은 사람의 마구잡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광수의 비판을 확대경으로 하여 여성계의 성법규화를 [먼 곳에서 추론해 보면] 그것도 역시 마구잡이 법규화가 아닌가 한다. 이 문제는 특히 마광수가 성희롱 문제를 다루는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성희롱의 문제는 임노동관계와 같이 사회구성원의 종속관계가 전제되지 않으면 마광수와 같은 예리한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성희롱문제를 따지면서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부부강간도 마찬가지다. 강간이란 무엇인가. 성을 수단으로 하여 상대에게 무력을 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력이란 피해자를 깔아뭉개는, 피해자의 의지를 꺾는, 그리고 남에게 자기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다. 여기에 추가해서 상대를 욕보이고 굴욕을 느끼게 하는 행위다. 그래서 강간범은 성행위를 통한 만족보다 이런 무력행사, 굴욕적인 지배에서 더 큰 쾌감을 느낀다. 이런 쾌감은 원칙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다. 지배관계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강간에서는 단지 이런 무력행사와 굴욕적인 지배를 통해서 얻는 쾌감이 성을 매개로 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여자와 남자간의 문제가 아니다.

 

강간은 성을 매개로 하는 폭행으로서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피해자의 자긍심을 파괴하고 피해자의 자아에 깊은 상처를 남겨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심한 경우 피해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자기 몸 위에 휘발유를 끼얹고 가도시위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부강간죄에서 우선적으로 성에 초점을 맞추면 마광수 같은 동전 세는 사람들에게 뜯기게 된다.

 

물론 여성이 주로 성을 매개로 한 무력행위의 피해자다. 중요한 것은 남성을 통한 무력행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FinkelhorYllo에 따르면 부부관계에서 행해지는 강제의 유형은 4가지로 구분된다: 사회적 강제, 즉 결혼을 함으로써 남편의 성요구에 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경제적 종속이나 또는 이혼을 하면 당해야 하는 수모, 남편의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협박 (특히 피해자가 겪은 과거 경험을 눈앞에 내놓으면서), 그리고 실재적인 물리적인 강제 등이다. 여성이 경험하는 강제가 사회적 종속관계에 있는 사람이 경험해야 하는 것과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자본에 몸을 팔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놈팽이로 낙인 찍히고, 실업이면 살 일이 까깝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총이 무섭고, 너 옷 벗을래, 왜 까불어하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회적으로 주종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경험과 같은 경험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종속관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그렇게 여성들이 그런 억압적인 관계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지 그것과 너무나 유사할까.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바탕에서 공순이 언니들이 있다. 그냥 언니가 아니고 공순이 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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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

(§1) 글쟁이들은 글을 쓸 때 몸에 베인 버릇처럼[1] 먼저 자기가 의도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글을 쓰게 된 동기와 더불어 그 글이 동일한 대상을 다룬 전시대나 동시대의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가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일을 설명이라고 따로 이름 지어 서설의 말머리에 내놓기 일쑤인데, 그 따위 행위를 철학 하는 데까지 와서 한다면 이것은 부질없는 행위로 보는 걸로 마무리 짓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밀하게 철학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붙들고 그 안에 푹 빠져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놓고 볼 때[2], 위와 같은 행위는 진정[3] 철학의 목적에서 빗나가는 아니 그 목적에 반하는 행위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행위에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는 철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진부하고 천박한] 생각이 아주 우아한 생각으로[4]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천박한 생각이 서설이란 곳에서 등장하여 철학 서술에 알맞다는 내용과 방식을 철학 밖의 관점에서[5] 내놓고 진리에 대하여 우왕좌왕하는 주장과 단언들을 엮어 짜 맞추기 식으로 시대의 경향과 각자의 입장, 즉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과 결론들을 나열하곤[6] 하는데 그 따위 식이 철학적 진리를 서술하는 방법으로 통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몸에 베어 굳어진 생각만이 이런 천박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한몫 하는 것은 다른 학문에서보다 유난히 철학에서 일어나는 사람을 확 사로잡는 광채와 같은 확증인데[7], 무슨 말인가 하면 철학은 본질적으로 특수한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이란 터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목적이나 최종 결과만 손에 쥐고 있으면 쓸데없는 껍데기는 다 제거하고[8] 나아가 사물의 완전무결한 본질만이 고스란히[9] 표현되고, 그에 반해 사물을 전개하는 과정은 여기에 비춰 따져보면[10] 있으나 마나 [11]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철학 외 다른 학문은 이와 대조적이다. 해부학의 경우 관념적인 정의로만[12], 예컨대 <해부학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신체의 각 부분을 생명 없는 물체로 다루어서 얻어낸 지식>이라고 정의하는 것만으로 사태 자체, 즉 해부학의 내용을 완전정복 했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해부학의 내용을 실지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체를 정말[13] 해부해 봐야 한다는 것에 딴말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지적하고 넘어가자면 이와 같이 잡다한 지식을 단지 한곳에 모은 것이지 학문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없는 해부학과 같은 취합물의 경우에도 목적 등과 같은 일반성을 운운하는데, 이때 이런 논의는 보통 눈에 보이는 이 신경, 저 신경, 이 근육, 저 근육 등을 내용 자체로 삼아 그저 나열하는[14] 몰개념적인 방식과 전혀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런데, 해부학의 이런 기술방식을 도입하여 철학을 이러쿵저러쿵하는 식으로 짜맞추고 또 그 목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사태를 전개하는 것이 껍데기일 뿐이라고 주장한 자기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되고 자기가 말하는 목적이 해부학에 대한 정의와 같은 것이 되어 스스로 자기가 사용하는 방식이 진리를 포착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고만다.



[1] 원문

[2] 원문 . 서설 §1 §2 참조

[3] 원문 . 여기서는 ßer Schein>이 아니다. 정반대다. 그래서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4] 원문 . <적절하다> <어울리다>란 의미인데,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 왔으니까> 라는 의미가 스며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의 바른>이란 의미도 된다. 란 낱말의 몸체를 보면 거기엔 (보내다)란 뜻이 스며있다. 외부로부터 어디 안으로 보내다 란 뜻이다. 그래서 <우아하다> <철학 밖의 관점>으로 옮겼다.  

[5] 역자주 4 참조

[6] 원어 . 헤겔은 Historie, historisch 등을 고대 그리스어 가 갖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이야기식으로 나열하는 지식’(Kenntnis, Kunde)이란 의미다.

[7] 원문 . 예수가 승천하면서 내뿜은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광채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 여기서는 <어떤 것을 관념적으로 정의하는 생각>. 이부분 번역이 꼬일 수 있다. 원문의 문장체가 비틀려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überzeugt> 종속절로 보지 않는 오류를 쉽게 범할 있다.

[13] 원문

[14] 원문 역자주 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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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읽기

정신현상학 서설도 서론과 같이 매일 1 문단씩 읽어 내려갈 생각이다. 동시에 서론에서 의문점으로 남았던 것들을 꾸준히 살펴볼 예정이다.

 

서론과 서설의 관계, 정신현상학 전체의 구조 등에 관한 예비적이지만 결론적인 생각들은 지양하고 정신현상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 즉 서론에 대한 이해에 기대어 서설을 읽어 내려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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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싸움인가?

* 민중언론 참세상[“실현가능성 희박한 기본소득론”] 에 관련된 글.

 

기본소득에 대한 정통 맑스주의에 입각한 논리 정연한 반론이다. 사이사이에 소명제를 삽입하여 논점을 명쾌하게 하고 그 필연성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듯 하다. 모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Statement. 그리고 동의한다.

하지만 난 박석삼님의 반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유는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박석삼님의 반론은 그가 비판하는 사람들과 기본적으로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왜 냐하면, 기본소득논쟁을 자본과 노동간에 있는 모순의 쟁점으로 보는 사람들을 비판하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논점도 결국 그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반론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논쟁에 접근하는데 내가 취하는 입장은 매우 원시적이다. 나는 우선 누 가 누구하고 싸우는 싸움인가”, 그 다음 내 가 개입해야 하는 싸움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가 개입해야 하는 싸움이면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물어본다.

난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이 자기반성적으로 발전한 자본내부에서 일어나는 싸움이지 자본과 노동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자 본과 노동간의 모순은 일면적인 모순이 아니다. 그 모순은 자본내부의 모순과 운동, 그리고 노동내부의 모순과 운동을 수반하는 입체적인 모순관계다. 이런 입체적인 모순관계와 운동을 정확하게 포착하면 그날그날의 행동강령이 명확해지고 투쟁에 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천 박한 단순논리에 붙잡혀 나의 적이 적으로 생각하는 편을 내 편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자본내부의 모순 때문에 자본 내부에 일어나는 싸움에서 자본내부의 양자는 원칙적으로 다 나의 적이다. 자본이 자기 내부의 한편에 적대적인 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 편이 내편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오류를 박석삼님이 비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인데, 박석삼님도 결국 그 오류에 붙잡혀 있다.

 그럼 기본소득이 자본내부의 싸움이라면 그건 누가 누구하고 하는 싸움인가. 독일의 경우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의 지평은 기본법 해석을 둘러싼 헌법현실(Verfassungswirklichkeit)에 대한 논쟁이다. 독일기본법은 독일연방공화국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gewährleisten) 법치주의원칙을 준수하는 국가(Rechtstaatlichkeit)임과 동시에 개인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베푸는(gewähren) 사회복지국가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양자간의 긴장과 대립관계가 50년대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와 볼프강 아벤트로트간의 첨예한 논쟁으로 불거진 이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매개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복지국가원칙이 헌법 조항이 된 것은 노동운동이 성취한 것이 아니고 자본의 자기반성으로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전후 사회주의권을 의식한 자본주의로 시작한 독일자본주의(관련 Christoph Butterwegge, Armut in einem reichen Land, 2009 참조)는 지금 자기 재생산의 토대를 걱정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자본주의로 발전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다양한 대책이 제시되고 그 대책간 갈등과 모순이 있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한속으로 본다. 차 이가 있다면 일할 의욕이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럼 이 싸움에 개입해야 하는가? 그리고 개입해야 한다면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 물론, 개입해야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전근대적인 귀족주의적인 사고, 자립과 자존정신으로 무장된 시민과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잘못과 절대(!) 연계시키지 않는다는데 있다. , 어떤 사람이 게으름뱅이어서 자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형편을 베푸는 것이다. 사 회주의 운동이 그 이하로 떨어질 수 없다.

그럼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 이기는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신자유주 의의 순정파 독일 자민당도 시민수당을 제안으로 내걸고 나오는 형편이다. 조건을 달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기반성적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대세는 기본소득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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