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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지

짝지와 난, 만나기는 일찍 만났는데 늦게 합해져서 아이가 없다. 그래서 아이 둘을 데려다가 키우고, 한 녀석은 커서 날아갔고, 다른 녀석도 곧 날아갈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잔소리가 많아졌다. 인생은 이러니저러니, 학문은 이러니저러니. 야단도 많이 친다. 옛날에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4과목만 보았는데, 학제간 연구에 눈이 뜨이게 한다는 취지로 그러는지 수학-자연과학분야, 예술-언어분야, 그리고 역사-사회분야로 구분된 분야에서 서로 다른 분야에 속한 두 과목을 골라 한 테마를 만들어 다루고 프레젠테이션을 작성하여 한 20분 발표해야 하는 것이 추가되었다.

 

근데, 요놈이 6개월 시간을 주었는데 미루다가 발표할 날이 닥치자 허둥지둥이다. “그 사이 담당선생님과 몇 번 만났어?” 침묵. 공부는 선생을 찾아가야 한다. 선생 찾아가지 않으면 공부 못한다. 공부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선생을 자주 찾아가야 내가 모르는 것이 뭔지 안다. 등등의 잔소리. 발표도 마찬가지라고. 아는 것보다 ‘내가 모르는 것이 이것입니다’라고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안달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기도 한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 문득, ‘주지 않아도 가지고 갈 것은 다 가지고 가겠지’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광산 촌 신문에서 오려내 책상에 세워놓은 사진이 생각나서다. 80년대 초반 이스라엘 군에 쫓기던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해방군을 이끌고 베이루트에서 튀니지로 철수하기 위해서 배를 타기 전 한 갓난아이를 번쩍 쳐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에 대하여 아버지와 주고 받은 말은 없었지만 종종 머리에 떠오르는 사진이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고, 자식이 부모님들로부터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살다 보면 짜증나는 일이 많다. 특히, 하루를 시작하는데, 코 앞에서 [시간 맞춰 다니는] 버스가 떠나버리면 정말 짜증 난다. 뛰어오는 것을 뻔히 보고서, 버스 문 앞에 헐레덕 거리며 서면 문을 닫고 출발해 버리는 버스. 그 운전수 아저씨 정말 때려 죽이고 싶다.

 

근데, 이상하다. 짝지는 다르다. 막 뛰어가면 기다려 준다. 안 기다려 준 것을 못 보았다. 아니, 운전수 아저씨가 뛰지 말라고 손짓하면서 대려 천천히 앞으로 와서 선다. 참.

 

왜 그러지? 내 얼굴이 뭐가 잘못되었나? 짝지가 멋있게 뛰어서 그러나? 그건 아닌데. 대려 멋이 하나도 없는데. 사지를 허우적거리면서 뛰는 모습이 마치 갓난아이가 뛰는 모습이다. 아, 그렇구나. 측은한 마음! 아이가 아장거리는 것을 보면 발동하는 측은한 마음!

 

보토 슈트라우스(Botho Strauss)의 <짝짓는 사람, 스쳐가는 사람/Paare Passanten>에서 그랬던가, 애인이 길 건너편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에 흡족한 남성이 실망에 빠지는 이야기가 있다. 애인이 발을 잘못 디뎌 그 우아한 모습이 흥크러지는 것을 보고서 남자가 실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이힐을 신고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이 삐그덕하면 너무 초라하게 보이는 느낌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폼이 무너지면 참 초라해 보인다. 그래서 다들 폼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그 폼을 유지하기 위한 코르셋을 입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코르셋은 부모의 “안돼”하는 눈길로 엮어져 있지 않나 한다.

 

근데, 짝지는 “안돼”하는 눈길로 엮어진 폼을 배우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짝지는 아직도 사지를 흔들면서 뛰나 보다. 버스 잡는 것 외에도 장점이 참 많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담임선생 짝지에게)

담임선생: 구구법 못하면 시집 못 가.

(짝지 엄마한테 가서)

짝지: 엄마, 구구법 못하면 시집 못 간데.

엄마: 괜찮아. 내가 다 보내 주마.

(짝지, 담임선생한테 가서)

짝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구구법 못해도 저 시집갈 수 있데요.

선생: 구구법 못하면 시집가서도 물건값 계산을 못하기 때문에 속고 살아.

(짝지 다시 엄마한테 가서)

짝지: 엄마, 구구법 못하면 물건값 계산을 못해서 속고 산데.

엄마: 걱정하지 마라. 구구법 잘하는 사람 딸려 시집 보내 주마

 

아무튼 짝지는 5학년이 거의 다 끝나갈 때까지 구구법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할 일 다하고, 할 공부 다하고, 남에게 줄 것 다 주고 살았다.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늘 생각하다가 오늘 몇 자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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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를 받아들일 수 없다.

ou_topia님의 [아랍혁명을 사유하는 바디우 - 인민주의론, 공산주의론, 그리고 국제주의론] 에 관련된 글.

 

“For two centuries the only political problem has been how to set up in the long run the inventions of the communism of movement?”

 

이 문장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해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대중]운동의 최종목적은 국가가 해왔던 일을 국가없이 하는데 있다.

- 공산주의는 [대중]운동 밖에 없다.

- [대중]운동 안에서 가시화되는공산주의가 발견한 것을 지속적으로(!) set-up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문제되어왔다.

 

공산주의적 발견을 지속적으로 set-up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말이 없다.

믿음 외에 내놓은 것이 없다.

 

바디우가 말하는 모든 가능성을 창조하는 “joy”는 연애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대항해서 집단적으로 싸워 본 사람들도 다 알 것이고. 5.18 민중항쟁을 바디우와 같이 “ästetisch”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든다.

 

대중운동안에서 가시화된다는공산주의를 “지속적으로 set-up”하면 필경 뭔가가 조직화되지 않는가? 제도(Institution) 같은 것이? 그리고 이런 제도화된 것은 필경 운동 밖에 존재하게 되지 않는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속혁명”을 해야 하는가? 옛 것을 다 부수는 “문화혁명”?

 

모든 것을 운동 안에 있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이 반향하는 „한울림(resonance)“이 된다는 것이 나치파쇼운동의, 하이데거식의„움직여짐의 운동“(Bewegung der Bewegtheit)과 뭐가 다른가?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흡수한 운동개념이 배출한 것이 [운동 안에 다시 hierachy를 만드는] 이북의 수령관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제도“(Institution)에 관하여 필사적으로 사유한 헤겔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Vernunft와 Wirklichkeit간의 변증법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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