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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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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들고 있는 악기가 기타의 조상인 우드입니다. 우드는 아랍어로 나무라고 하는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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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이어서 미국사 저널 99호(2012년 6월호)에 수록된 글 "Oil and the American Century"를 번역해보겠습니다.http://jah.oxfordjournals.org/content/99/1/24.full#fn-1
석유가 어떻게 “미국의 세기”에 힘을 실어주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미국의 세계 지배의 원천, 역학, 결과를 이해하는데 근본적이다. 군사력과 현대사회의 작동 모두에 필수적인 석유는 20세기 동안 미국의 힘과 번영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국은 20세기의 3분기까지는(옮긴이: 1970년대까지를 말함) 세계의 주요 산유국이었고,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제 석유산업을 지배했던 석유 대기업 7개 중 5개가 미국 기업들이었다. 석유에 대한 통제는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강화했고 미국과 그 동맹들이 1,2차 세계 대전과 냉전 모두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다.1
1) 그들 사이의 친밀한 유대와 다양한 조인트벤처 때문에 “일곱 자매”라고 알려져 있는 석유 대기업 7개는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엑손), 소코니(모빌),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오일(쉐브론), 텍사스 컴퍼니(텍사코), 걸프오일, 영국 소유의 앵글로-이란 석유회사(1954년 후 브리티시 페트롤륨), 네덜란드가 60% 영국이 40%의 지분을 소유한 로열 더치 쉘이다. (옮긴이: 소코니는 뉴욕 스탠더드오일을 말함)
미국정부가 해외의 석유매장량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고 또 유지하기 위해 석유산업과 긴밀히 협력한 것은 국가안보의 이해관계와 석유기업의 이해관계의 공생을 반영한다. 석유에 대한 접근권 유지가 미국 외교정책의 최우선순위가 되면서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 중동을 비롯한 석유생산지에서 지역과 국내 분쟁에 관여했고, 그러한 관여는 많은 나라들의 발전을 왜곡시키는 방식이었다. 트루만, 아이젠하워, 닉슨, 카터 독트린 같은 전후 미국 외교정책의 주요 독트린 대부분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중동과 중동의 석유와 관련되었다.
저가 석유를 입수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미국은 높은 수준의 석유사용을 전제로 한 사회경제적 조직 유형들을 채택할 수 있었다. 석유가 저렴하고 접근권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극히 정상적이긴 하지만, 이러한 생활방식은 경제, 전략, 환경적 조건이 변하면서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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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힘의 균형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전투함대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배가 더 빠른 속도와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할 수 있고 급유과정이 더 쉬어지는 등, 석유는 석탄에 비해 수많은 이점이 있었다. 석유는 태평양에서 해군이 실력을 행사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미국 서부에서 나오는 석탄은 해양 증기엔진 사용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웨일스나 아팔레치아의 석탄 공급지에서 선적되어야 했다. 대조적으로 석유는 캘리포니아에서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 해군은 더 쉽게 태평양을 가로질러 뻗어나갈 수 있었다.
1차 대전에서 열강의 해상함대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잠수함, 비행기, 탱크, 동력이용 교통수단(motorized transport)과 같은 중요한 군사혁신은 석유로 작동했다. 또한 과학자들이 석유에서 TNT의 필수 구성요소인 톨루올(톨루엔)의 추출과정을 개발하면서, 석유는 군수품 제조에서 진로를 개척했다. 전쟁기간 내내 미국은 연합국의 석유 필요량의 80% 이상을 공급했고, 참전 후에는 유럽으로 석유를 운송하는 탱커를 제공하고 보호하는데 기여했다. 미국의 석유자원 덕분에 동맹국과는 달리 연합국은 에너지 공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19세기 말에 석유를 연료로 하는 내연기관이 개발되어 20세기 동안 교통수단에 거의 보편적으로 채택된 것이 미국 경제를 변형시켰다. 석유로 작동하는 지동차, 트럭, 배, 비행기는 교통수단의 혁명이었고 물리, 경제, 사회적 풍경을 변경했다. 석유로 작동하는 기계류와 석유화학을 바탕으로 한 살충제, 제초제, 비료는 농업생산에서 유례없는 증가의 기폭제가 되었다.
미국은 1920년에 세계 석유생산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저가 석유를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석유에 대한 높은 그리고 점점 더 높아지는 수요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경제가 재구성되었다. 미국에 등록된 차량의 수는 1916년의 340만 대에서 1920년대 말에는 2,310만 대로 늘어났다. 1930년대에 미국은 도시를 “자동차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중교통에서 탈피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석유사용에 기반한 사회구조는 훨씬 더 확고해졌다. 1925년 무렵에 석유는 이미 미국의 에너지 소비의 거의 5분의 1을 차지했고, 2차 대전 무렵에는 3분의 1로 뛰어올랐다. 대조적으로 미국 밖에서 석유는 주로 운송용과 군용으로 비축된 부차적인 연료였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서유럽과 일본의 에너지 소비의 10% 미만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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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유공급의 불균등한 분배는 양 대전 사이의 힘의 균형에 중대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소련은 자국 영토 내에 거대한 석유매장량을 가진 유일한 열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기업들이 중동에서 채굴권을 갖고 있었지만, 접근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석유생산지의 안보와 안정, (특히 지중해를 통과하는) 해로의 통제가 필요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다른 주요 석유공급원은 서반구였고 전시에 이 석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선의와 어쩌면 지원에 의지해야 했다. 석유를 안전하게 대서양을 횡단하여 운송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독일과 일본의 석유기업들은 석유생산지로부터 거의 완전히 접근이 통제되었기 때문에, 양국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해외기업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경제, 정치 압력에 취약했다. 더욱이 영미 해상병력은 독일과 일본이 서반구와 중동의 석유에 접근하지 못하게 위협했다.미국은 전간기에 세계에서 주요 산유국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했고 1940년경에는 세계 생산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1차 대전 후 석유부족으로 잠시 소동이 벌어지긴 했지만, 캘리포니아와 오클라호마에서 새 유전지대가 발견되면서 증가된 미국의 매장량은 수요를 능가했다. 대공황 와중이었던 1930년대에 거대한 이스트 텍사스 유전이 발견되면서 미국의 석유산업이 직면한 주된 문제는 품귀가 아니라 오히려 과잉생산이 되었다.
미국은 해군력, 그 뒤에는 공군력을 통해 해외 석유생산지, 특히 석유가 풍부한 멕시코만-카리브해 지역에 대한 접근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기회균등을 위한 문호개방(Open Door) 정책의 요구와 주요기업들끼리 민간협력협정 체결의 지원을 통해 미국 석유기업들의 해외활동의 확장을 도왔다. 1928년부터 1934년 사이에 미국 기업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베네수엘라, 이라크,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에서 석유 채굴권을 따냈다.
멕시코 정부가 멕시코의 해외기업 대부분을 국유화하고 석유산업 운영을 위해 국영석유기업 페멕스(Petróleos Mexicanos)을 세운 1938년에 미국과 영국 기업들은 멕시코 석유에 대한 접근권을 잃었다. 멕시코의 조치는 국제 석유기업들의 지위뿐만 아니라 제3세계라고 알려지게 된 곳의 경제개발에서 다국적 기업들의 역할에 도전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로 멕시코의 생산은 하락했고, 미국과 영국 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면서 멕시코의 손실을 보상했다. 1930년대 말 무렵 베네수엘라는 주요 수출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 3위의 산유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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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는 2차 대전의 성립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석유가 자신의 야심의 실현에 필수적이라고 확신한 아돌프 히틀러는 합성연료 산업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석탄에서 석유를 추출하는 과정은 막대한 양의 철강, 석탄, 노동을 필요로 했지만 1940년 무렵에는 석탄에서 나온 합성액체연료가 평시 독일의 석유공급의 약 46%와 항공용 휘발유의 약 95%를 점했다. 1940년 11월에 독일은 루마니아 석유에 특권적 접근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수출은 독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프카스의 석유 장악은 히틀러가 1941년 소련을 침략하기로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었다.석유에 대한 접근권 확보 역시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로 한 결정의 배후에 있는 핵심 목표였다. 일본은 1930년대에 만주의 셰일오일을 개발했지만 생산이 적은데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자국의 석유수요의 약 80%를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나머지의 대부분은 동아시아 최대 매장량을 소유하고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나왔다. 그 지역의 석유를 통제하게 되면 1930년대에 급속히 증가한 일본의 석유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1941년 여름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차단하자, 일본 지도자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유전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하든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비롯한 미군기지를 공격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2차 대전의 핵심무기체계 - (항공모함을 포함한) 수상전투함, 잠수함, (장거리 폭격기를 포함한) 항공기, 탱크, 대부분의 해륙운송 - 가 석유로 움직였다. 석유는 계속해서 군수품 제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석유를 원료로 한 합성고무는 1941년 후 그 대부분이 일본의 수중에 있는 동남아시아 천연고무 공급에 대한 연합국의 의존을 덜어주었다.
하루 약 백만 배럴이 넘는 잉여생산능력을 가진 미국이 참전했다. 이 양은 1941년 미국 생산의 약 30%에 해당했다. 이런 여유분 덕분에 미국의 석유산업은 거의 혼자 힘으로 미국만이 아니라 그 동맹들의 전쟁활동까지 연료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정유기술에서도 앞섰기 때문에 미군은 옥탄가 100의 항공휘발유와 고성능 항공기 엔진에 필요한 특수 윤활유와 같은 이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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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이 안심하고 석유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패배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독일의 합성연료 생산과 독일이 통제하는 석유는 전시 공급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카프카스 석유장악 실패와 북아프리카에서의 후퇴로 인해 독일군은 전쟁기간 내내 석유부족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소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1944년 여름까지 두 번째 전선(옮긴이: 동부전선을 말함)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4년 5월 동맹국은 합성연료공장을 체계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했고,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독일의 전쟁기계는 힘이 다해가고 있었다.일본은 1942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장악했지만, 많은 석유시설들이 사보타주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가동을 위해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미국 잠수함이 일본의 선적을 성공적으로 방해하면서 1943년 이후 동인도에서 일본으로 석유를 수송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1944년 말경 일본은 심각한 석유부족에 직면하면서 군사적으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국내 석유공급의 적정규모에 대한 우려가 점점 더 커짐에 따라 증대되는 석유의 중요성은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와 중동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해외 석유와 관련된 미국의 국익을 관철하는 수단으로서의 주요 석유기업들의 역할이 향상되었다. 1943년 미국 정부는 베네수엘라 정부와 주요 석유기업들 사이의 합의를 끌어내는데 기여했고, 이 합의를 통해 50대 50 수익분배 협정, 기존의 채굴권의 확인, 이 채굴권의 40년 연장, 새로운 지역에 대한 접근권이 보장되었다. 베네수엘라 석유생산은 현저히 증가해서 연합국의 전쟁활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전후 미국 정부와 주요 석유기업들은 베네수엘라 석유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민주적인 정부와 권위적인 정부 모두와 협력했다.
1943년 말 미국 정부의 후원으로 중동에 파견된 석유 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세계 석유생산의 중심은 멕시코만-카리브해 지역에서 중동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 지역이 확고한 지위를 확립할 때까지 계속 이동할 것 같다.” 중동 석유에 걸린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루스벨트 행정부는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오일(소칼)과 텍사스 컴퍼니가 사우디 아라비아에 갖고 있는 채굴권을 사려고 했다. 그 뒤 루스벨트는 미국 정부가 걸프지역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송유관을 건설해서 소유할 것을 제안했다. 게다가 1944년과 다시 1945년에 미국 정부는 대영제국과 기존의 채굴권 보장, 새로운 채굴권을 따내기 위한 경쟁의 기회균등 보장, 다양한 산유국들의 생산량을 할당하기 위한 양국 공동의 석유위원회 구성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논의했다.
소칼과 텍사스 컴퍼니는 귀중한 재산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석유산업은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정부가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로 인해 혜택을 보게 될 소칼, 텍사스 컴퍼니, 걸프오일은 반대하지 않았다.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석유기업들은 대영제국과 석유협정을 체결하게 되면 저렴한 수입석유가 미국시장에 쇄도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반대했다. 미국 석유산업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수 있는 유일한 해외석유정책은 정부가 참여하는 문호개방외교의 복귀였다. 이 정책은 민간 기업들이 안전하게 수익을 낼 수 있는 국제환경을 유지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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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냉전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석유를 동력으로 하는 병력은 여전히 전후 세계의 군사력에서 필수적이었다. 핵을 동력으로 하는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제외하면, 전 세계의 전함 대부분이 여전히 석유로 작동했고 항공기, 전차와 장갑차, 수송차량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새로운 세대의 무기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세대의 무기들보다 석유를 더 많이 소비했다.
미국의 전후 세계전략과 석유 사이에 공생관계가 성립되었다. 미국은 석유에 대한 지배를 통해 소련 억제,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파괴적인 정치, 경제, 군사경쟁의 종식, 경제성장 촉진을 통한 자본주의 중심부 내부의 계급투쟁의 완화, 탈식민주의와 민족해방의 시대에 주변부 국가들의 원료, 시장, 노동에 대한 접근 유지가 가능했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미군이 수립한 광대한 해외기지 군도群島는 미국이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전략에 필요한 병력(주로 해상력과 공군력)은 해외 석유매장량에 대한 접근을 유지할 수 있었고 유지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병력 역시 석유에 의존했다.
석유는 미국의 목적에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은 중동의 안보와 안정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 지도자들은 이란을 걸프지역의 석유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소련과 미국 사이의 전략적 완충지대로 보았다. 2차 대전 당시 소련, 영국, 미국 군대는 이란을 점령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철수하기로 동의했다. 미국과 대영제국은 1946년에 병력을 철수했지만, 소련은 거부했다. 미국이 후원한 이란인들은 소련을 철수시키고 이란의 석유개발에서 소련을 배제하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위기 당시 미국과 협력한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이란의 공적 생활에서 군주의 역할을 둘러싼 국가 평의회(Majlis)와의 투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그리스, 터키, 이란의 상황은 서로 너무나 달랐지만, 미국 관리들은 이 모든 사태를 지중해 동부와 중동을 지배하려는 소련의 계획의 일부라고 해석했다. 전 세계 모든 곳에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저항을 서약한 1947년 3월 12일 해리 S. 트루먼의 의회연설에는 석유에 대한 언급이 고의적으로 삭제되었지만, 석유에 대한 접근보장은 트루먼 독트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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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미국의 주요 석유기업들은 중동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고 영국 기업과 뭉쳤다. 이러한 이른바 석유 대타협에서 주목할 부분은 뉴저지 스탠더드오일과 소코니를 포함시키는 사우디 아라비아 채굴권 소유의 확장이었다. 그 결과 중동 석유개발과 중동석유의 세계시장 통합을 수월하게 하는 세계적 민간 생산관리체계가 확립되었다.전후 새롭게 떠오르는 석유질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두고 첫 번째 실험대에 올랐다. 1947년 11월에 국제연합(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지지하고 1948년 5월에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트루먼의 결정은 국무부, 군부, 새로 형성된 중앙정보국(CIA)의 권고와 어긋났다. 이 세 기구 모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생성을 미국이 지지할 경우 아랍세계와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소련이 힘과 영향력을 확산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하고 서방이 유럽과 일본의 재건을 위해 중동 석유가 필요한 때에 그것에 대한 접근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 이익에 대한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은 유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한 병력과 무기 파견을 삼갔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지 때문에 아랍국들과의 공식관계는 악화되었지만, 석유기업들은 정부 정책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가면서 아랍을 불쾌하게 한 책임에서 벗어났다.
중동 석유는 마셜플랜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다. 전후 서유럽은 전시 과잉생산과 파괴 때문에 석탄부족이 놀라운 규모였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이 동유럽으로 팽창하면서 폴란드의 중요한 석탄자원뿐만 아니라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유럽의 대부분을 소련이 장악하게 되었다. 미국은 경제회복에 불을 붙이고 서유럽이 소련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중동석유에 기대를 걸었다. 마셜플랜을 위한 총지원금 중 약 10%가 미국 석유기업들이 제공한 석유로 지불되었다. 미국 매장량의 고갈을 제한하기 위해 대부분의 석유는 미국 석유기업들의 해외, 특히 중동 소유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기업들에게 늘어나는 생산을 위한 시장이 제공되었다. 유럽이 중동 석유에 의존하게 되면서 공급중단에 대한 취약성은 증가했지만, 미국은 필수적인 석유공급에 대한 접근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의 경제복구와 서구동맹에 통합시키는 목표와 독일의 공격성이 재발하지 못하게 하려는 욕망은 조화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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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석유기업들의 지위를 더 굳히기 위해, 미국 정부는 미국 석유기업들과 유치국 정부들 사이에 50대50 이윤분배 협정체결을 지원했다. 미국 세법은 미국기업들이 해외에서 낸 세금에 대해 공제를 해주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유치국에 지불한 비용을 미국 재무부에 전가할 수 있었다.이란이 1951년 봄에 영국이 소유한 앵글로 이란 석유회사(AIOC)를 국유화하자 중동안보에 대한 우려, 경제적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 주요 석유기업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의미하는 전후 석유질서의 핵심적 측면들이 강조되고 강화되었다. AIOC의 이란 활동은 영국의 가장 소중한 해외자산이었고, 영국은 이란이 기업을 인수하는데 성공하면 영국의 모든 해외투자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영국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이란 민족주의가 성공하게 되면 중동과 다른 곳에서 미국의 석유채굴권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족주의는 이란에서 대중적이었고,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민족주의를 뒤집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게 되면 이란이 불안정해지면서 친소 투데당의 전망이 밝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위기(옮긴이: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이란이 AIOC를 국유화하고 아바단시의 정유시설에서 서방기업들을 추방한 이 사건을 아바단 위기라고 함)가 한국전쟁 기간에 발발했기 때문에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대결을 주저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영국에게 협상을 통해 영국의 지위를 가능한 보존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협상을 중재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실패했고, 이란 왕에게 국유화의 주요 찬성자이며 민족주의자인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를 쫓아내라고 설득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AIOC가 주도하고 다른 주요 석유기업들, 영국과 미국정부가 지지한 이란석유 보이콧으로 이란의 수출소득은 급격히 감소했고 정부수입은 대폭 줄었다(옮긴이: AIOC의 보이콧으로 1950년에 4억 달러가 넘었던 석유수출은 1951년 7월부터 1953년 8월까지 2년간 2백만 달러 미만으로 떨어졌다). 영국과 미국이 이란 국내문제에 관여하면서 이란은 더욱더 불안정해졌다. 1953년에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으로 시동이 걸린 미국의 군비증강이 완료되면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이란에 대해 더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모사데크가 왕을 축출하고,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고, 석유 보이콧이 힘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미국과 영국은 1953년 쿠데타를 조직, 재정지원, 지시해서 모사데크를 몰아내고 자진해서 서방의 조건대로 석유협상을 하려는 정부를 설치했다. 쿠데타 후 이란 왕이 대의제 정부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이란의 실험을 끝내고 독재 군주국을 수립하자, 미국은 이란에게 대규모 지원을 제공했다. 이란 석유를 차질 없이 세계 시장에 재도입하기 위해 미국은 미국의 주요 석유기업들, 셸, 프랑스기업 토탈, AIOC를 모아서 이란 석유산업을 운영하기 위한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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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석유에 대한 불안은 1956년 7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회사의 국유화에 대한 미국의 대응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수에즈 운하는 중동에서 서방의 존재를 말해주는 중요한 상징이었고 국제무역에서 주요 동맥이었다. 걸프지역에서 서유럽으로 가는 석유의 3분의 2가 이 운하를 통과했다. 게다가 이집트가 운하뿐만 아니라 선박이 아카바 만을 통해 이스라엘에 도착하는 통로인 티란 해협을 장악함으로써 걸프 석유에 대한 이스라엘의 접근이 위협당했다. 미국은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반대했지만, 그의 국유화 시도를 뒤집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게 되면 중동에서 서방의 지위가 위태롭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는 이집트를 공격하고야 말았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집트는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들을 침몰시켜서 운하를 봉쇄했고, 사우디 아라비아는 영국과 프랑스 석유 선적에 엠바고를 실시했고, 시리아는 이라크에서 지중해로 연결되는 송유관을 폐쇄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동맹들의 행동에 격분했고 시기선택에 당황했다. 공격이 발생한 것은 미국 대선 직전이었고 소련이 헝가리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석유공급을 거절했고, 영국이 파운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지원을 얻으려는 시도를 막았고, 세 나라가 이집트에서 철군할 때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영국과 프랑스 병력이 철수하고 난 뒤, 미국 정부와 주요 석유기업들은 운하가 재개하고 걸프지역에서 유럽으로 가는 석유선적이 복구될 때까지 유럽에 석유를 공급하기로 협력했다. 티탄 해협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과 해협에 배치될 것이라는 미국의 장담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은 병력을 철수했다.수에즈 위기는 아랍 민족주의가 중동석유에 대한 서방의 접근에 제기하는 위험을 강조했다. 1957년 초에 아이젠하워는 중동의 석유가 없다면 “마치 마셜플랜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서유럽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세르에게 대항하기 위해 아이젠하워는 보수적인 아랍정권들을 강화하고 경제, 군사적 지원을 통해 그들의 친서방 노선을 보강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으로 분류되는 이러한 정책들은 중동에서 서방의 이익의 수호자로서의 대영제국의 역할에 대한 미국의 가정에서 중요한 이정표였다.
1958년 7월 이라크 군대의 민족주의 분파들이 이라크의 친서방 왕정을 전복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의 위협은 커지지 않았다. 아랍 세계의 지도력에 대한 이집트-이라크 경쟁은 약해지지 않았고 이라크 혁명은 어쩌면 아랍 민족주의 운동 내부의 분열을 악화시켜서 지역에서 서방의 이익에 대한 위험을 완화시켰는지도 모른다. 1960년 9월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인) 아랍연합공화국의 해체는 별로 돈을 들이지 않고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서 수에즈 운하를 우회할 수 있는 초대형유조선(supertanker)의 개발과 더불어 중동석유에 대한 서방의 접근을 차단하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위험을 더욱 더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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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석유기업들이 두 번 만장일치로 (산유국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할 때 사용되는) 가격을 낮춘 후인 1960년 9월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석유장관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했다. OPEC은 결국 1970년대에 가격책정에 대한 힘을 얻었지만, 결성 초기에는 모든 아랍국들을 위한 “아랍 석유”의 사용이라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더 폭넓은 의제보다는 전후 석유질서 내에서 가능한 최상의 조건의 확보를 통한 주요 산유국들의 수입 보호라는 더 협소한 경제적 목표에 치중했다.석유에 대한 우려는 1967년 6월 “6일 전쟁”을 불러온 위기 동안 미국 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에즈 위기가 해결된 후, 아카바만 맨 위쪽에 있는 이스라엘의 엘리앗항은 석유가 이란에서 이스라엘로 통과하는 주요 도관으로 떠올랐다. 1960년대 초 무렵 이스라엘 석유수요의 85%가 이란 석유에 의해 충족되었다. 아카바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티란 해협에 주둔한 병력을 포함하여, 1967년 5월 유엔군이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석유에 대한 이스라엘의 접근이 위태로워졌다. 아카바만을 재개하기 위해 개입하면 이스라엘군이 승리할 것이 뻔하고 아랍의 보복으로 자국의 석유이익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뒤로 물러나 이스라엘 혼자 처리하게 했다. 6월 6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선제공격을 실시하자, 주요 아랍 산유국들은 미국, 대영제국, 서독으로 가는 석유선적을 차단했다. 교전으로 수에즈 운하는 다시 폐쇄되었고, 시리아는 석유선적이 걸프 유전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송유관을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미국, 베네수엘라, 이란의 석유생산 증가(이제 초대형유조선 덕분에 운하를 우회할 수 있다)와 석유비축의 사용은 부족분을 벌충했다. 한 달이 지나자 아랍 엠바고는 와해되기 시작했고, 아랍국의 수출은 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1970년대의 석유위기
1970년대에 정치적 혼란과 세계 석유경제의 변화가 결합되어 미국의 세계 석유 지배는 위태로워졌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높은 수준의 석유사용을 전제로 한 사회경제 조직의 유형들의 수용을 심화했다. 1945년 후 대중교통수단의 방치와 교외화(suburbanization)로 인한 주택배치의 분산으로 자동차 사용의 증가를 촉진하면서, 미국 수송체계의 변형이 계속되었다. 1945년부터 1973년 사이 미국의 자동차 등록은 2천5백만 대에서 1억대 이상으로 늘어났고, 1인당 석유소비는 두 배 이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트럭수송은 눈부시게 확대되었고, 도시 간 화물운송에서 철도의 희생으로 트럭이 담당하는 몫은 늘어났다. 1972년까지 석유는 미국 에너지 소비의 45.6%를 차지했다.
서유럽과 일본은 에너지 수요를 위한 석유 의존도가 훨씬 더 높았다. 양쪽 모두 자동차 사용이 급등했고 1972년경 석유는 서유럽 에너지 소비의 59.6%, 일본 에너지 소비의 73%를 차지했다. 서유럽과 일본의 석유수입의 약 80%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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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내 석유생산은 1970년에 세계생산의 18.7%를 차지해 최고치를 기록했고, 십년간 소비 급상승으로 자국 수요충족을 위해 석유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중동석유의 생산에 드는 비용이 낮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투자와 생산이 집중되어, 세계 석유생산에서 중동의 몫은 1950년 7%에서 1973년 40%로 상승했다.동시에 중동의 전쟁과 혁명, 냉전의 역학 변화로 인해 미국이 중동석유 접근을 유지하는 능력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1968년 초 영국정부는 1971년 말까지 수에즈 동부에 배치된 병력을 철수할 계획이라고 미국에 통보했다. 평판이 나쁜 베트남전에 휘말린 미국은 닉슨 독트린 발표 후 이란이 지역의 수호자를 인수하길 기대했다. 고대 페르시아의 힘과 명성을 되찾으려는 이란 왕은 기꺼이 응했다. 미국은 이 정책의 다른 하나의 기둥인 사우디 아라비아가 여분의 생산능력을 유지하는 미국의 역할을 떠맡길 기대했다. 이 여분의 생산능력은 비상시에 석유공급에 사용되어 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
중동 이외에는 비축능력이 별로 없기 때문에, 미국은 가격을 천천히 오르게 하고 석유 채굴권과 시설 소유권을 서서히 양도하면서 석유공급의 혼란을 피하려고 했다. 유가인상은 (특히 알래스카와 북해 같은 고비용 지역에서) 투자와 생산 증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서방은 중동석유에 덜 의존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특히 석유사용에 대한) 관리를 촉진해서 대안에너지원, 특히 석탄과 원자력 활용을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가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1978-1979 이란 혁명이었다. 전쟁 기간에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대응으로, OPEC의 아랍회원국들인 바레인, 이집트, 시리아로 구성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미국으로 가는 석유선적에 대한 엠바고와 석유생산 감축을 조직했다. 이란,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OPEC의 비아랍 회원국들은 엠바고나 생산, 수출 감축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교란으로 인해 유가는 네 배 상승했고 대부분의 석유수입국들에서 경제적 문제가 발생했다.
석유수입 증가 덕분에 산유국들은 기업소유의 채굴권을 도로 사들이고 국영석유기업들을 설립했다. 산유국들은 1970년에 자국 석유산업의 10% 미만을 소유했다. 1979년경에는 거의 70%를 소유했다. 자국 석유산업의 모든 측면을 소유한 산유국들은 매장량 개발의 속도, 생산율, 수출의 목적지와 같은 요인들을 더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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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역시 유가상승은 석유수입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졌다. 그 결과 과도한 군사지출, 인플레이션, 대규모 이촌향도離村向都, 이미 뚜렷한 부와 소득 불평등이 더욱 증가. 이란 왕이 도입한 무기체계는 수천명의 서구 기술자와 군사고문단을 이란으로 불러들였다. 그 결과 (이란 문명을) 서서히 좀 먹는 서구 영향력에 대한 보수적인 두려움을 부채질하고 이란 왕의 반대세력이 불어났다. 1978년에 석유수입 감소와 석유 실질가격 하락, 정부지출 축소로 인해 국내에서 경제적 문제들이 발생했고 왕에 대항하는 시위가 확산되었다. 미국 정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쯤에는 이미 너무 늦었고, 1979년 1월에 왕은 이란을 떠났다. 이란혁명을 둘러싼 소란으로 석유공급과 시장에 차질이 빚어져 유가는 두 배가 되었다.1970년대의 석유 위기는 약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위기가 미국의 베트남 철수, 워터게이트 위기, 제3세계에서 혁명의 물결, 미국과 동등해진 소련의 핵능력과 겹쳤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고유가는 1970년대에 미국과 다른 서구 산업국가들이 직면한 경제적 문제들을 심화했고, 특히 경기 후퇴를 동반한 인플레이션으로 실업이 증가했다. 게다가 석유위기는 서유럽과 일본과의 경쟁 증가로 인한 미국 제조업 침체와 병행했다. 미국 대중문화는 개인 자동차와 개인 이동수단을 개인의 자유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고유가는 미국인의 생뢀방식을 뒤흔들어놓는 것 같았다.
대조적으로 소련은 고유가에서 이득을 봤다. 서시베리아의 새 유전이 생산에 들어가면서, 소련은 1974년에 세계의 주요 산유국으로서 미국을 추월했다. 소련의 석유수출 대부분이 동유럽, 쿠바, 베트남이었지만, 서유럽과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로 거두어들인 경화는 급격히 늘어나서 1976년경에는 소련의 경화소득의 절반을 차지했다. 고유가로 인한 뜻밖의 횡재 덕분에 소련은 서방의 곡물과 기계류를 대량 수입할 수 있었고, 이미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음에도 체제의 생존이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힘든 십년이 지나자 미국은 고유가를 이용하여 석유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특히 발전소에서) 석유를 다른 에너지원으로 대체하고, 다른 곳의 생산 증가를 통해 OPEC 수입을 줄이는 등의 전략에 의해 다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석유기업들은 채굴권을 상실했지만, 세계 석유경제에서 그럭저럭 중요한 역할을 유지했고,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수익성 높은 기업들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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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중동석유에 대한 서방의 접근을 보장하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80년 1월 23일 양원 합동연설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소련의 힘과 해외개입의 증가, 제3세계의 불안정, 중동석유에 대한 서방의 의존이 미국 안보를 위협한다고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르시아만 지역을 장악하려는 어떠한 외세의 시도도 미국의 사활적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며, 군사력을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공격을 물리쳐야합니다.” 연설 직후, 미국은 신속배치 합동 특수부대(Rapid Deployment Joint Task Force)을 창설하여 이 임무를 전담하게 했다. 카터의 선언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뒤이어 나왔지만, 카터 행정부는 이 계획에 대해 수년간 고심했다. 1983년에 신속배치군은 미국 중부사령부(U.S. Central Command)로 바뀌면서,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수호할 책임을 진 지역통합사령부가 되었다.1979년부터 1985년 사이 비공산주의 세계의 석유소비 감소와 비OPEC 석유생산 증가로 인해 OPEC 석유에 대한 수요가 하루 1,020만 배럴로 떨어졌다. 국내 석유생산 증가와 소비 감소로 인해 미국의 석유수입은 1977년 총공급의 47%에서 1985년에는 32.3%로 하락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으로 인한 교란에도 불구하고, 수요공급의 이러한 변화는 유가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산량을 줄여서 가격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사우디 지도자들은 1985년 가을에 생산을 늘려서 세계 시장에서 지위를 되찾겠다고 결심했다. 고정된 가격에 석유를 판매하는 대신, 가격은 시장에서 석유정제품이 정유회사의 고정이윤을 제하고 얼마에 팔리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새로운 체계는 가격보다는 용량을 중시했기 때문에 1986년에 세계 유가는 붕괴했다. 1985년에 일일 평균 3,175,000 배럴(bpd)로 떨어졌던 사우디 석유생산은 1986년 4,784,200 bpd에서 1990년 6,412,500 bpd로 늘어났다. 1985년 259억 3700만 달러에서 1986년 180억 6100만 달러로 떨어졌던 석유수입은 1987년에 늘어나기 시작해서 1990년에는 401억 3000만 달러에 도달했다.
가격붕괴는 소비에트의 경화소득을 말살했고, 1985년 3월에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신정부의 개혁구상을 약화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석유소득을 소비에트 산업 현대화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해서 생활수준을 높이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와 더 민주적인 사회로의 전환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유가하락은 소비에트 경제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부 보수적 필자들은 레이건 행정부가 공산주의의 패배와 냉전에서 승리를 초래하기 위해 유가붕괴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할지라도 - 그리고 이것은 유효한 기록에 근거하면 전혀 명확하지 않다 - 이러한 주장에는 핵심이 빠져 있다. 고르바초프와 1980년대에 부상한 소비에트 지도자 세대는 서방과의 충돌이 지속되면 스탈린주의의 참담한 유산 극복, 경제 개혁, 정치의 민주화, 사회의 활성화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고 이미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유가붕괴는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진 공산주의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소련에서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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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후 석유와 권력20세기 말 무렵 석유는 수송에너지 사용의 약 90%를 포함하여 세계 에너지소비의 약 40%를 차지했다. 선진국들(특히 미국)의 기존 소비구조와 개발도상국들(특히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 때문에 세계 석유소비는 계속 증가했다.
미국은 높은 수준의 석유소비를 전제로 한 사회경제적 조직 유형들을 계속 수용했다. 1986년 후 유가 하락으로 자동차 사용이 확대되고 주거유형이 훨씬 더 분산되면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환경보전의 많은 성과들이 허물어졌다. 1977년 후 내려갔던 일인당 소비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2003년에 세계 원유생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몫이 8.1%로 하락했고, 수입은 1990년 미국 석유공급의 47.1%에서 2003년 61.1%로 증가했다.
냉전이 끝나고 나서 미군은 다소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육상차량, 항공기, 군함으로 구성된 거대한 함대를 유지하고 있고 단일조직으로는 여전히 석유제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 병력은 재래식 군사작전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극도로 석유집약적 활동이 될 것임을 보장한다.
해외 석유, 특히 걸프지역의 광대한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 유지는 여전히 미국 외교정책의 최우선순위다. 미국의 석유수요 중에서 걸프지역이 차지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되지만, 이 지역의 석유는 세계 석유경제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세계 석유시장의 포괄적 성격(global nature)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라도 결핍이 발생하면 세계의 다른 곳들에서, 부족하지는 않더라도, 유가인상에 반영될 것이다. 게다가 걸프 석유의 접근에 대한 통제는 여전히 미국이 잠재적 적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동맹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천이다.
걸프지역에 대한 접근 유지는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정복에 대한 미국의 대응의 핵심목표였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장악은 사담 후세인이 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20%를 통제할 수 있게 했다. 이라크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유전도 접수했다면, 세계 매장량의 거의 절반을 통제했을 것이다.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멈추었더라도, 여전히 거대한 자원을 통제했기 때문에 나머지 걸프국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leverage)을 얻었을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내기 위해 국제적 군사연합을 형성했고 전쟁이 끝난 뒤 후세인을 억제하기 위해 제재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걸프 생산자들의 지렛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지역을 벗어난 곳의 석유개발을 촉진했다. 이 전략은 국내석유 생산증가, 서반구와 캐나다, 멕시코, 베네수엘라의 석유 협력관계 발전, 서아프리카의 생산증가,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석유의 급속한 개발촉진을 포함한다. 이러한 시도는 따로따로 보면 상대적으로 성공했더라도, 집합적으로 보면 걸프석유를 세계 석유경제의 지배적 위치에서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게다가 유가를 낮추려는 이러한 정책들은 석유를 보존하고 대안을 개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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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딕 체니 부통령이 이끈 위원회가 발행한 국가에너지정책(NEP) 보고서는 미국과 세계 석유필요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탐사, 개발, 정제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요청했다. 이 보고서는 세계 석유매장량의 3분의 2를 소유하고 있는 걸프지역에 집중하고 있지만, 걸프 산유국들과 전반적인 국영석유기업들은 생산을 증가할 동기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생산을 낮춰서 가격을 올려도 같거나 훨씬 더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서 석유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는 것이 아직은 가능하지 않지만, 석유에 대한 우려가 한 요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공격은 서방 에너지안보 보장을 위해 걸프지역에 미군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강조했고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향해 달려들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정권교체를 하면 지역안보에 대한 이라크의 위협이 사라지고 이라크를 민간투자에 개방하면 여러 혜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라크에는 개발이 안 된 엄청난 석유매장량이 있기 때문에 이라크 생산을 증가하면 가격을 조정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의존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이라크 개방은 다른 국영 석유기업들에게도 전시효과를 줄 수 있고 이란이 러시아, 중국, 프랑스와 쌍무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 최소한 정권교체에 따른 이러한 잠재적 혜택들 때문에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그들의 다른 동기들을 재검토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948년 1월 초 제임스 포레스탈 국방장관은 중동석유에 접근하지 못하면 “미국 자동차업체는 앞으로 5년 내에 4기통 자동차를 설계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48년 미국의 일인당 연간 석유소비량은 14.4배럴이었다. 2010년에는 22.6배럴이었고, 미국은 하루 약 1,900만 배럴을 소비했다. 대중교통 보전, (에너지) 효율성 증진, (4기통 자동차를 포함하여) 그 외 다른 조치들을 통해 미국 공공정책이 1948년 수준의 석유사용을 유지했더라면, 2010년의 미국 석유소비는 약 40% 더 낮았을 것이고 경제, 안보, 환경에 직접적인 혜택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세계석유 지배의 전략적, 경제적 혜택은 미국 외교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국가안보와 국익의 정의는 바로 그것이 지켜야 할 사회로부터 분리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이 글은 보여준다. 높은 수준의 석유사용을 조성한 사회적, 경제적 유형들은 해외석유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결심을 강화했으며, 국내생산이 석유에 대한 국민의 왕성한 식욕을 따라가지 못한 후로 특히 그랬다. 소비증가를 줄이거나 최소한 완화시키는 대안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뿌리 깊은 이데올로기적 신념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별로 없다.
석유산업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강력한 부문에 속하며, 사적 이익을 선호하면서 공공정책의 영역에는 중대한 제한을 가하는 정치적 문화 속에서 활동한다. 석유산업은 산더미 같은 중소기업들과 한 줌의 다국적 대기업들로 양분되지만, 국내외적으로 민간 기업들이 안전하게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으로 정부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을 선호하는 점에서는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한다. 대조적으로 석유수요를 제한하는 정책들은 경제를 규제할 수 있는 공적권위를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기 때문에 석유를 비롯한 업계는 강력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반대해왔다.
21세기 초 무렵 석유의존은 경제적, 전략적 골칫거리와 환경문제가 되었다. 막대한 양의 석유를 수입하는데 드는 비용은 미국의 국제수지를 심각하게 압박하고 있고, 걸프지역과 다른 석유생산지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인적 손실은 증가하고 있다. 마침내 대부분의 기후 과학자들은 석유사용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석유와 관련하여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석유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아니라, 명백히 지속불가능한 길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일지도 모른다. 석유와 미국의 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향해 필요한 첫걸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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