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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러시아 선전전] 선전의 음흉한 권력

원문: The Insidious Power of Propaganda, by Karel van Wolferen

번역: 일몽

 

 

예전에 ‘자유세계’라고 하던 곳에서 정치선전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있는 음흉한 선전의 사례를 체험하고 있다. 그것은 공동의 필요에 부응한다. 대량살육과 인재人災의 시기에 도덕적 의식이 있는 사람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바람직한 것과 비열한 것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으로 분명한 것을 원한다. 심지어 우리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전쟁을 팔기 위한 장사수단으로 ‘도덕적 투명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지하디스트들이 수감된 기자들을 참수할 때 선악의 분류는 너무나 쉽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좋은 놈’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다. 시리아의 아사드는 오랫동안 나쁜 놈 명단의 맨 꼭대기에 있었지만, 그는 이제 사태를 수습하느라 전념하고 있는 자들에게 어느 정도 동맹이 된 것 같다. 게다가 미국과 미국의 아랍 동맹국들이 ISIS의 모체인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자금을 대고 지원한 사실은 철저한 비밀이 아니며, 2003년 이라크 국가의 참수가 가져다 준 마법사의 제자 효과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이런 아수라장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거의 모두 동의한다.

 

우크라이나는 그보다는 더 명확하다. 민주주의와 서구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키예프 전사들과 그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주변국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으며, 어떤 제재를 가하더라도 그의 비타협성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298명이 사망한 항공기 추락 사건은 이제 더 이상 뉴스에 나오지 않으며, 누가 항공기를 격추시켰는지에 관한 조사는 어떻게 된 건지? 기다려도 소용없다. 지난 주 네덜라드인들은 TV에서 뉴스를 보다가 인터넷 자가출판(samizdat)에서 떠돌고 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MH17 조사단에 참여한 나라들이 비공개 협정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키예프를 포함한) 참여국들은 모두 아무 이유 없이 결과의 공개를 거부할 권리를 갖고 있다. 298명의 운명을 결정한 그 원인에 관한 진실은 이미 정치선전에 의해 정해져버린 것 같다. 증거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으면서 ‘반군’이 항공기를 격추시켰고 러시아가 개입되었다는 공식보도가 나왔고 그것은 여전히 대러 제재를 정당화하고 있다.

 

몇 주째 유혈사태와 폭격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 속에서 위기는 힘겨운 발걸음을 계속 내딛어갔고 푸틴의 인도적 구호트럭이 제5열일지도 모른다는 나토의 불평이 나오자, 주류 언론은 러시아가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침략했다는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또 다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 모았다. 9월 1일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금 전쟁중”이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이것도 정치선전물일까? 확실히 그렇게 보인다. 프랑스를 포함하여 외국 지원자들이 ‘반군’에 합류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러시아인일 가능성이 있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전투원들이 국경 바로 너머에 이웃과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도네츠크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신임의장 알렉산드르 자하르첸코는 기자회견에서 외신기자의 질문에 만약 자신의 병력을 지원하는 러시아 군대가 있다면 아마 그들은 키예프로 벌써 이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하르첸코의 병력이 러시아인들 없이도 그들 스스로 꽤 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정보들이 간간이 있다. 그들은 또한 동부의 형제들을 살해하려는 열정이 식어버려서 탈영한 키예프 병력의 도움을 받고 있다.

 

냉정한 편집자들에게는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낼 직접적 수단이 거의 없는데, 그들은 경험 있는 기자들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 보낼 수가 없다. 그들의 예산으로는 천문학적인 보험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실적을 갖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 여기저기에서 정보를 조금씩 모으는 수밖에는 없다.


미 정보부 분석가들이 협조를 거부한 뒤 - 그들의 의견은 언론을 통해 누설되었다 - MH17 참사에 관한 국무부와 백악관의 선전노선은 덜 단호해졌지만, 러시아 침략이라는 주제를 다시 살려냈고, 미국의 잡다한 출판물은 여전히 선악의 대결구도를 유지하면서 육성하고 있다. 이 중에는 포린폴리시처럼 명성을 중요하게 여기거나, 뉴리퍼블릭처럼 한 때는 상대적으로 리버럴 성향의 본부로 여겨졌던 매체들이 있다. 정치에 관해 상대적으로 신뢰할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출처였던 이 매체들의 종말은 애도해야 마땅하다.

 

이례적인 지정학 이론가 존 미어샤이머가 이례적으로 포린어페어스에 의견을 표명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태 그 대부분의 책임자들인 워싱턴과 유럽 동맹국들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이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우크라이나를 서방의 근거지로 바꾸려는 시도는 실수였다. 그 실수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밝혀졌기 때문에, 잘못된 정책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더욱 더 큰 실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유럽의 일부 진지한 편집자들에게 확신을 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정신이 멀쩡한 필자를 한 명 더 꼽자면, 스티븐 코헨이 있다. 푸틴의 러시아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맨 처음 그의 글을 읽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언론은 ‘patriotic heretics’(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배신하는 자들)을 - 코헨은 자신이 애국적 배신자라고 주장한다 - 매우 거칠게 다루고 있는데, 코헨도 뉴리퍼블릭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중이다.

 

성공적인 선전의 특징은 의심하지 않는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에게 서서히 스며드는 방식이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한 책이나 영화의 리뷰, 또는 기사에서 상대적으로 순식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 속에서 넌지시 표현된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지만, 하나만 예를 들어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편집장 저스틴 폭스가 이렇게 묻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 거의 분명한 자신의 나라를 왜 서방과의 대립으로 몰고가려하는가?” 가끔 자신의 이름으로 꽤 적절한 경제 분석을 했던 그에게 내가 묻고 싶은 건 “푸틴이 몰고 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다. 대니얼 드레즈너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푸틴이 “서방이 우려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며, “명성과 민족주의적 영광을 위해 경제성장을 기꺼이 희생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장난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푸틴과의 싸움이 보복주의와의 싸움이라고 한다. 마초적인 환상을 가진, 공산주의 없는 소련을 재창조하려는 야심에 찬, 전체주의적 야망에 사로잡힌 정치인과의 싸움이라고.

 

선전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은 숨겨진 의미를 통해서 머리에 무언의 지식을 주입시키는 방식이다.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는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암묵적 이해가 수반하는 가정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토론하지 않는다. 암묵적 지식을 갖고 있을 때 새로운 증거나 논리적으로 더 훌륭한 분석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그 가정들에 의식을 집중하게 하려면 대체로 한숨을 내쉬며 “그냥 넘어가자”고 하기 때문에 굉장히 성가신 일이다. 암묵적 지식은 매우 개인적인 지식이다. 물론 그것은 그 사회가 채택한 확실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명백히 공유된 지식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지식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에, 그 지식은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필요하다면 필사적으로 지켜야 한다. 호기심이 별로 없으면 그것이 진실일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워싱턴이 시작하고 BBC를 비롯하여 유럽 주류언론의 대부분이 충실히 따르면서 계속하고 있는 선전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주민들이 자신들의 투표결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 사용금지 정책을 도입한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 정권과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그들에게 공공건물, 병원, 주거지에 대한 폭격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절실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 아무런 질문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선전노선은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지역에서 불안을 조장해왔다는, 단순한 러시아 침략과 관계된 것들 중 하나다. 나는 주류언론 어디에서도 키예프 병력이 저지른 파괴에 대한 보도와 사진을 볼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본 목격자들은 전 세계가 보았던 가자공격에 비유했다. CNN과 BBC 보도에 함축된 견해들, 미 국무부 대변인의 말을 인용한 ‘소셜미디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토록 성공적인 선전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정보는 이를테면 러시아 투데이를 모스크바의 선전기관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무력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지배적인 선전이 번성하는 것은 범대서양주의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이 세계의 주요 정치행위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세계는 잘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유럽은 미국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둬야 한다는 유럽인들의 믿음이다. 저속한 범대서양주의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은 러시아 적군을 눈앞에 두고 있다며 라디오에서 울부짖는 네덜란드이며, 세련된 범대서양주의는 나토를 방어하기 위해 그것이 왜 여전히 존재해야하는지 다양한 역사적 이유를 찾아내는 나라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자는 한심하기 짝이 없고 후자에 대해서는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호소력을 갖춘 지적으로 가장 유혹적인 방식의 범대서양주의에는 쉽게 대처하지 못한다.

 

이라크를 침략하기 전이었던 11년 전 정치선전이 유럽을 덮쳤을 때, 그 당시 미국 정부의 정치적 지혜에 대한 유럽의 신뢰 위기를 복구하기 위해 냉철한 학자들과 논객들이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합리성에 호소했다. “미국이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원칙이 가슴에 새겨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러한 범대서양주의 교리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맹 내부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상대적 안락함을 누리고 나서 갑자기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자국의 안보에 관한 고려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대서양 동맹(Atlantic Alliance, 나토를 말함)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이해를 촉구하는 탄원, 동맹의 재활성화를 위해 새롭게 이해하자는 호소는 자신들이 손해를 보고도 그 현실에 맞설 수 없는 마음씨 좋은 친구들의 가슴 아픈 눈물과 같은 것이었다.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연고가 필요했고, 큰 덩어리로 배달되었다. 권위 있는 유럽의 지식인들과 고위 공무원들은 조지 W. 부시에게 공동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관계회복과 그것의 달성을 위한 공식문구를 긴급 요청했다. 더 낮은 수준에서는 논설위원들이 합리성을 지지하는 행동에 돌입했다. 미국의 새 외교정책에 대한 환멸을 표시하면서 균열의 치유, 화해를 위한 소통, 상호이해 개선, 기타 등등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했다. 2003년 여름, 이라크에 대한 성급한 침략을 분명히 반대했던 사람들은 처음의 서슬 퍼렇던 입장이 무뎌지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례를 들자면 옥스퍼드대 역사학자이며 다작논객이며 일반적으로 합리적 인물로 여겨지는 티모시 가튼 애쉬는 transatlantic balm(유럽-미국 사이에 까칠해진 관계를 위한 립밤)이 넘쳐나는 기사와 책을 마구 찍어댔다. 새로운 가능성들이 발견되었고, 동맹은 개과천선했고,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열렸다. “양측 모두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탄원과 사설의 전반적 취지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토론은 나토의 기능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상호양보가 아니라 유럽이 책임을 져야 했다. 지난 몇 달간 보았듯이 미국의 양보는 없기 때문에, 이라크전을 위한 선전에 반대하며 유럽이 쏟아부은 에너지는 이제 거의 완전히 바닥이 난 것 같다.


가튼 애쉬는 2014년 8월 1일자 가디언 기고문을 통해 “대부분의 서유럽인들은 푸틴의 크림 병합(anschluss)을 모른 척 했다”고 주장하면서 업무에 복귀했다. 병합? 우리가 지금 푸틴을 히틀러에 비유할 정도로 천박해지고 있다니. 이번에는 애쉬가 제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신문 사설의 틀에 박힌 말을 초월하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는 이번에는 이번 사태에 대한 미국의 어떠한 역할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거대한 착각 덕분에 범대서양주의자들의 믿음은 더 견고하게 복구되었기 때문에, 올해의 선전은 무제한의 자유를 획득했다. 이것은 합리적인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방어할 필요가 없는 암묵적 지식이다.

 

범대서양주의는 유럽을 눈멀게 하는 고난이다. 그것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를 놓고 토론하는 곳은 어디에서나 현존하는 위협은 끊임없이 도외시된다. 내가 읽고 있는 주류언론의 뉴스와 논평은 우크라이나를 키예프와 ‘분리주의자들’과 특히 푸틴의 동기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렇게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이유가 명확하다. 범대서양주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미국의 개입이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면, 그것을 모른척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면, 회피하는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는 단순히 모르기 때문이다. 사려 깊고 교육받은 네덜란드인들 사이에서 미국 네오콘의 부상과 영향력을 추적해왔다거나, 또는 사만사 파워가 푸틴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미국 정부의 다양한 기관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미국에 대한 적절하면서 실현가능한 외교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정부의 효율적인 감독 없이, 그 기관들이 어느 만큼이나 바로 자신들의 삶을 주도하고 있는지 그들은 모른다.

 

선전은 모든 것을 만화책의 단순함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이를테면 키예프 정부 하에서 IMF가 도입되면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와 같은 정교함이 선전에는 존재할 틈이 없다. 그리스 꼴이 난다.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가 여전히 한 나라에 존재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자치정부를 가질 수 있도록 일종의 연방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키예프가 폭격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동부인들에게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교가 필요하다는, 푸틴이 자주 표현했던 열망은 그리 모호한 것도 아니었는데 선전에는 존재할 수 없다. 만화책 수준의 상상력은 나쁜 놈이 합리적이고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해서는 안된다는, 푸틴의 주된 소원이며 애시당초 그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했던 근본적 이유는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수 없다. 푸틴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우크라이나가 비동맹 중립국으로 있는 것이며, 정권을 유지하기 원하는 러시아 대통령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주장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선동자들은 워싱턴의 집무실에 있다. 그들은 러시아를 (그들 용어로) “왕따국가”(pariah state)로 만들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2월 쿠데타가 다가왔을 때 그들은 반러시아 우익 세력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저항운동을 장악할 수 있게 도왔다. 키예프가 통치하는 주민들에게 더 많은 민주주의가 주어졌다는 생각은 물론 터무니없다.

 

러시아 주제에 관해 진지한 필자들이 있다. 그들은 푸틴 치하에서 최근 몇 년간 러시아인들의 삶에 변화에 도덕적으로 분노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사태와는 다른 주제이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선전에 많은 도움이 된다. 위에서 언급한 뉴욕타임스 논평을 쓴 벤 유다가 좋은 예다. 나는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 그들에게 공감한다.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서 글을 쓰는 기자들을 통해 너무나 많이 봤기 때문에 이런 현상에는 친숙하다.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 그들의 분노를 촉발한 것은 그들의 눈에 완전히 잘못 되고 있는 사태들의 축적이며, 그 이유는 자유주의적 사상에 부합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들로부터 이탈하여 퇴보적으로 보이는 당국의 조치들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다. 분노 때문에 시야가 가린 그들은 실권자들이 끔찍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지 못한다.

 

러시아의 경우 푸틴이 전 정권으로부터 러시아를 물려받았을 때, 국가가 더 이상 하나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중앙에 권력을 재집중하는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대해 최근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옐친 밑에서 러시아는 서방의 무수한 약탈적 이익단체들과 하버드의 시장 근본주의에 현혹되어 경제적으로 파탄이 났다. 공산주의가 폐지된 후, 그들은 즉시 미국 스타일의 자본주의로 전환하라는 꼬임에 빠졌고, 그러한 전환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관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민간부문이 없는 거대한 국유산업들을 민영화했다. 일본 역사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듯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빨리 뭔가를 창조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얻은 것은 클렙토크라트 자본주의며, 국가재산은 강탈당했고, 그 결과 악명 높은 올리가르히들이 태어났다.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렸던 러시아 중산층은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러시아인들의 기대수명은 곤두박질쳤다.

 

물론 푸틴은 외국 NGO들을 제한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푸틴의 정부를 불안정하게 해서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다. 외국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정책연구소들은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책을 팔러 다니기 위해 존재하며, 최근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생각이 없는 그들은 그 생각이 언제든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라는 교조적인 가정에 빠져있다. 이 주제는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이야기들 중에서 기껏해야 슬쩍 스쳐지나갈 뿐이지만, 현재 널리 퍼져있는 선전을 위해서 지적 토양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푸틴의 팬이냐고? 나는 그를 모르며, 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최근의 문건들을 읽으면서 그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는데, 산더미 같은 비방을 일일이 다 훑어봐야겠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고, 주류언론에서는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려한다는 실없는 소리 외에는 도대체 푸틴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내려는 진지한 시도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제국주의적 야망이나 쿠데타 전부터, 그리고 정상에 오른 루소포비아들이 나토에 가입하려는 야심 때문에 러시아 해군기지가 위태롭게 되기 전부터 그가 크림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반미냐고? 그런 꼬리표가 붙는 것은 거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끝없는 비극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시름에 잠긴 미국인들에 대해 마음 속 깊이 동조한다. 특히 그들 중에서 이 비극과 온몸으로 싸워야 할 나의 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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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메모

며칠 마음과 생각이 흐름을 타고 있다. 일상생활과 거의 단절된 상태다. 이젠 다시 또 며칠 흐름을 단절해야 하고 일상생활로 나가야 한다. 잊지 않게 몇가지 정리한다.


1.


관심(關心)의 한문을 찾다가 관심(觀心)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전자는 Interesse로 쉽게(?) 번역되는데, 후자의 적당한 독어는 뭔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앞서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네이버 사전: [불교] 마음의 본바탕을 바르게 살펴봄. 새우리말 큰사전: 마음의 본성을 밝히어 살핌. 자종(自宗)의  진리를 살핌. 자종? 새우리말 큰사전에 없다. 종에 대한 설명만 있다. 인도 논리학 어찌고 저찌고 하는데, 뭔말? 그리스의 Noesis(독 Vernunft/이성)와 비교될 수 있겠다라고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무지의 답답함은 한이 없다. 답답함은 홀로이기 때문이다. 교제가 없기 때문이다. 관심 혹은 자종이란 낱말이 한낱 낱말에 머물러 아무런 연상(聯想)을 야기하기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Funktionaer(간부)하면, 기능에서 시작해서 수학의 함수, 기능적 분화(funktionale Differenzierung)등에 이르기까지, 또는 거드름 피우는 당간부 혹은 스마트한 자본주의란 기계의 기능공 등  연상이 풍부하다.

 

관심(關心)과 관심(觀心)의 변증법? 얼른 생각나는 건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Erkenntnis und Interesse). 뭐라고 했지?

 

2.

노동자는 ‘자종’(自宗)적인 것 혹은 ‘자가’(自家)적인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남김없이 [타자 소유 및 레짐하의] 생산에 투입될 때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이 완성된다.

 

이렇게 생산된 것이 자기 안에 모순되는 이중성격을 갖는 상품이다.

 

하늘과 땅 그 모든 것은 생산된 것이다. ‘자종’, ‘자가’적인 것이란 없다. 관념도 생산된 것이다. 착취관계에 기반한 생산에 의해서 생산된 관념이 자종/자가를 운운하는 순간 상품처럼 자기 안에 모순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리스의 Noesis (독 Vernunft/이성), Philia(독 Freundschaft/우정) 등이 이렇다.

 

관념도 역시 생산의 결과란 말의 긍정적인 의미는 해방의 세력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산해야 한다는데 있다. 예컨대, 연대를 생산해야 한다.

 

Noesis(nus)와 그 주변 연상들의 관조적인 면과 생산적인 면의 우위가 유럽 정신사에서 늘 문제가 되어 왔다. 변혁의 대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근대/현대 혁명세력은 관조적인 면을 다시 우위로 설정한 이상주의에  대항하여 대려 경험주의/실증주의에 가까운 ‘실천’을, 즉 생산(Produktion)을 중시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제와서는 이른바 좌파사이에 관념주의가 더 팽팽하다. 관념에 관념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이다. 생산의 범주로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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