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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3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이 과연 쇼아를 살아남은 사람일까?

 

첫 연에서 느껴지는 건 대화대상의 부재와 현재의 동시성이다. 아무리 말을 건네도 돌아오는 말이 없는 상황에서 시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것 같다.

 

“[비켜갈 수 없고] 꺼지지 않는 고통은 온 몸에 가해지는 고문으로 갈기갈기 찢긴 사람이 울부짓지 않을 수 없듯이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는 지어질 수 없다는 말은 어쩜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허나 그보다 덜 하지 않는, 문화 [전반]을 문제시하는 질문, 즉 우연히 [쇼아를] 비켜간 사람이,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사람이 아우슈비츠 이후에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계속 살 수 있는지, 그렇게 살 권리가 있는지 묻는 질문은 잘못된 게 아니다. 그의 연명은 부르주아 주체성의 근본터전인 냉정을, 아우슈비츠를 가능하게 했던 냉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Das perennierende Leiden hat soviel Recht auf Ausdruck wie der Gemarterte zu brüllen, darum mag falsch gewesen sein, nach Auschwitz ließe sich kein Gedicht mehr schreiben. Nicht falsch aber ist die minder kulturelle Frage, ob nach Auschwitz noch sich leben lasse, ob vollends es dürfe, wer zufällig entrann und rechtens hätte umgebracht werden müssen. Sein Weiterleben bedarf schon der Kälte, des Grundprinzips der bürgerlichen Subjektivität, ohne das Auschwitz nicht möglich gewesen wäre[.]”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III. 형이상학에 대한 성찰, I (아우슈비츠 이후))

 

파울 첼란은 자유죽음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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