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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동성애자 배제는 복음에 대한 대적이다.

원문: "Homosexuelle auszuschließen ist evangeliumsfeindlich"

동성애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닐스 크리스티안젠 목사와의 인터뷰

 

Frauenpaar auf einer Bank

(iStockphoto)

 

질문: 목사님은 “동성애 혐오 대항 성서적 훈련”을 제공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것이고, 그 이유는 뭔가?


ᅟ크리스티안젠: 우선적으로 성서주의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불안에 휩싸이게 된 사람들, 특히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그리고 양성애자 등 동성애 혐오 대상자들을 위해서 제공한다. 그들을 강건하게 하고 전문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결함이 없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질문: 기독교인들의 동성애 혐오 배후엔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크리스티안젠: 동성애 혐오의 자세는 – 최근 프랑스에서 분명해졌듯이  –  많은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Angst)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북유럽 현대사회는 지난 150-200년 극적인 변화로 각인되어 있다. 이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사실인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편안하게 자기 것으로 체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변화에 대한 내적 불안을 일으키고 그들이 습득한 평범한 삶의 기준들에 집착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삶조건 및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이 끊임없이 변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동성애 혐오 배후엔 또한 잡다한 무지가 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 좀 덧붙여 말하자면 신학을 수양한 신학자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 역시 – 역사비판적 성서해석 방법을 동성애와 관련해서 거론되는 몇몇 성경구절에 적용할 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학에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굳이 평하자면, 마르틴 루터가 정립한 근본적인 해석기준을 망각하고 있다.

 

질문: 어떤 기준이고 어떻게 적용되는가?

 

크리스티안젠: 마르틴 루터는 성경 전체의 모든 말 하나하나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반듯이 그게 “기독교를 촉진하는 것”("Christum treibet")인지 그 여부를 따져보는 검증에 입각하여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인 것의 핵심을 촉진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드는지 아니면 이것을 방해하는지 그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엄격한 해석기준이다. 상당수의 신학자, 성직자, 그리고 교회의 지도적 인사들이, 내가 보기에, 루터의 이 해석방법의 의미를 망각하고, 21세기 현재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석적 문건들의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가장 신앙적이고 경건한 해석방법이라고 처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심각한 오해다.

 

질문: [동성애 혐오 관련 인용되는] 핵심적인 성경구절은 레위기 18장 22절과 로마서 1장 26-27절이다.  그럼 귀하는 위 구절은 유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 구절들은 이제 더이상 “유효”(“gelten”)하지 않다는 말인가?

 [레위기 18장 22 절: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로마서 1장 26-27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크리스티안젠: 물론이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성경구절에서도 역시 그리 한다. 레위기 – 이른바 유대인 신앙의 성법 – 에는 오늘날 우리가 기도교적인 관점에서 전형 더 이상 준수하지 않는 규칙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거기에 예를 들어 부모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식들은 돌로 쳐 죽여야만 한다고 적혀있다. 신약성경에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린도전서 14장 34절]. 성서적 문건들은 많은 구절에서 내용적으로 서로 모순된다.

기독교적인 교회와 그 신학에 주어진 과제는 항상 기독교적인 것의 핵심요소를 밝히고 각 사회가 처해 있는 현황과 관계짖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부모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식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교회공동체 생활에서 주둥이를 닥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구절에서 모순되게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 나는 이것을 기독교적인 자세라면 취해야 할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질문: “기독교를 촉진하는” 구절인가?

 

크리스티안젠: 내 견해로는 그렇다. 바울이 제시한 다른 상을 보자.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다양한 지체를 갖춘 몸을 입안한 이 그림을 나는 기독교의 핵심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바울을 이렇게 말한다. 세간의 가치판단에 따르면 각 지체는 어쩜 그 중요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머리카락은 심장이나 신장에 비교해서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이 비유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심중은 이것이다. 즉, 인간공동체는 모든 지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세상에서 중요하게 아니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과 무관하게, 상호 대등한 존재로 존중되고, 서로 균등한 존엄과 중요성을 부여할 때 비로서 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독교적이라고 일컫는 것의 핵심이다.
여성은 교회공동체에서 주둥이를 닥쳐야 한다는 바울의 말은, 내 생각에, 자기모순적인 말이다. 우리는 루터의 [성경해석] 기준에 따라 이렇게 말해야 한다. 바울의 이 말은 참으로 기독교적이고 그리스도를 촉진하는 말이고, 저 말은 기독교적인 것을 방해하는 말이다라고. 이런 맥락에서 나는 –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남.여 신학자들이 – 당시 오늘날의 형태로는 분명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동성애적 생활을 폄하하는 구절들을 평가한다. 저런 구절들은 기독교적인 기본자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어디까지나 당시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동성애를 어떻게 다뤘는가를 보여주는 구절들일 뿐이다.

 

질문: 창세기의 한 구절이 자주 인용된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세기 1장 27절]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가 한 쌍이 되어 살아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귀하의 논증은?

 

크리스티안젠: 그 문장은 주지하다시피 창세기에 그렇게 적혀있지 않다.

 

질문: 일부로 틀리게 – 또는 루터 번역에 따라 – 인용했다.

 

크리스티안젠: 바로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 구절들이 – 내 비판은 바로 이것이다 – 이해관계의 주도아래 해석되거나 또는, 귀하가 방금 본보기적으로 했던 것처럼,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난 말만 계속 전달되는 상황이다. 창세기에 우선 이렇게 적혀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풀 스탑. 단수다. 하나님이 인간적인 존재 그 자체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구절에 “남자와 여자로”라고 적혀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남성적으로, 여성적으로”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 관하여 이러쿵 저러쿵 할 말은 없다. 온통 사실 서술이다. 그러나 동성애 혐오 성경해석자들이 여기서 추론하는 모든 것은 기독교적인, 최소한 루터적인 창세기 해석방법과는 일치하는 점이 추호도 없다.

동성애 혐오 혹은 성서주의적인 성경해석의 주안점은 주지하다시피 생물적인 삶이 이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간의 성교가 필요하다는 점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이건 이론(異論)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정이다. 마찬가지로 이론의(異論) 여지가 없는 것은 또한 저것이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자연적인 가정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의중을 찌르는 말을 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2장 50절] 하나님을 따르는 방식으로 서로 대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말이다.  

물론,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는 생물적인 방식으로 자녀가 태어나야 한다. 중요하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생물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을 말과 신앙과 행동으로 물려주고 공유하면서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것이며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것이다. 이런 삶은 물론 호모나 레즈비언이나 양성애자나 트래스젠더나 양성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 수 있다. 이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철저하게 복음에 대적하는 것이다.

 

질문: 피상적으로 자주 적용되는 다른 개념은 죄 개념이다. “동성애는 죄다”라고 말한다. 죄란 무엇인가?

 

크리스티안젠: 죄의 복수, “죄들”은 없다. 이 점도 루터가 분명하게 정립했다. 어디까지나 핵심적인 하나의 죄가 있을 뿐이다. 이 단수의 죄에 따르는 구체적인, 죄성이 있는 행위들은 루터는 "Tätelsünden"이라고 했다. 원죄와 상관이 있는 개별행위들이라는 말이다. 유일한 원죄는 인간이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는데 있다. 이게 에덴동산과 타락 이야기의 핵심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다가선 이유는 하나님과 같이 지혜롭고 무한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있었다.

오로지 이것만이 기독교가 말하는 죄다. 그리고 이 죄는 무엇보다도 내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평가할 때 나타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혹은 창조된 피조물의 한 부분을 놓고 “이것은 월등하게 가치가 많은 것이다 혹은 가치가 전혀 없다”고 말할 때, 내게 한 생명과 삶의 궁극적인 가치를 확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 이때 나는 나를 높여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다.  왜냐하면 유대와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명과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인간에 의해서 확정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저편의,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이름하는 권능에 의해서만 확정되어지는 것이다. 칼로리 많은 크림케이크를 먹는 게 죄가 아니듯 호모 혹은 레즈비언인게 죄가 아니다.

 

질문: “동성애 혐오 대항 성서적 훈련”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참가자들이 항상 기억하고 강건하게 해주는 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크리스티안젠: 가장 중요한 take home message는 이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너희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분명하게 해라. 이 가치는 기독교 세례에서 표현된다. 우리는 세례식에서 모든 사람을 예수가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울려 퍼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례한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네가 있어서 기쁘다”. 하나님이 두루 담보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무제한적인 긍정이, 우리의 모습 그대로가 “옳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행복과 불행을 의미있게 다룰 줄 아는 잠재력이 있다고,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믿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근원적인 신뢰가, 하나님의 이런 절대적인 존중이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것이다.  

호모든 레즈비언이든 양성애자이든 트랜스젠더든, 양성인이든 그 외의 어떤 사람이든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지혜와 은혜를 너희들 마음 속 중심에 깊이 담고 꼭 붙들어 그 누구도  앗아가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의 존엄이 바로 거기에 있으며, 그 존엄은 그 누구도 너희에게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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