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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해산 판결문 읽기 - 1

통진당 해산 헌재소의 판결문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경악한다. 하이데거류의 파시즘이 역력하다. 종북을 이야기하는 헌법재판관의 사조가 종파시즘이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된 피청구인 정당이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와 북한식 사회주의체제를 추구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그 전복을 꾀하는 행동은 우리의 존립과 생존의 기반을 파괴하는 소위 대역(大逆)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1.정당금지, 민주주의 보호 조항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관련 독일 헌번재판소는 독일공산당 KPD 해산 판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Die gesamtdeutschen Wahlen dienen aber der Vorbereitung eines Aktes des pouvoir constituant des ganzen deutschen Volkes, der die Beschlußfassung über eine gesamtdeutsche Verfassung zum Gegenstand hat, also gerade darüber entscheiden soll, ob die Ordnung des Grundgesetzes auch für Gesamtdeutschland fortbestehen oder durch eine andere Verfassungsordnung abgelöst werden soll. Die Legitimität der gesamtdeutschen Verfassung kann nicht daran gemessen werden, ob sie in einem Verfahren zustande gekommen ist, das seine Legalität aus der Ordnung des Grundgesetzes herleitet. Vielmehr ist nach der in die Zukunft gerichteten Überleitungsnorm des Art. 146 GG die künftige gesamtdeutsche Verfassung schon dann ordnungsgemäß zustande gekommen, wenn sie "von dem deutschen Volke in freier Entscheidung beschlossen worden ist". Dies bedeutet, daß die Entscheidung des deutschen Volkes über eine gesamtdeutsche Verfassung frei von äußerem und innerem Zwang gefällt werden muß, und das heißt allerdings, daß ein gewisser Mindeststandard freiheitlich-demokratischer Garantien auch beim Zustandekommen der neuen gesamtdeutschen Verfassung zu wahren ist. Das in Art. 21 Abs. 2 GG zum Ausdruck kommende Prinzip, daß verfassungswidrige Parteien aus dem politischen Leben ausgeschlossen werden können, sowie der Grundsatz der Bindung aller staatlichen Organe an Entscheidungen des Bundesverfassungsgerichts sind jedoch diesem Mindeststandard nicht zuzurechnen. Es sind freiheitlich- demokratische, für die Dauer geschaffene Verfassungen denkbar und Wirklichkeit, die eine Verfassungsgerichtsbarkeit und die rechtliche Möglichkeit eines Parteiverbots nicht kennen. Ist dies aber so, so wäre es nicht gerechtfertigt, in den von Art. 146 GG gemeinten Mindeststandard freiheitlicher Garantien beim Zustandekommen der neuen gesamtdeutschen Verfassung die zwar dem Grundgesetz eigentümlichen, aber nicht vom Wesen einer freiheitlichen Ordnung her schlechthin geforderten Grundsätze der Bindung an verfassungsgerichtliche Entscheidungen über den Ausschluß verfassungswidriger Parteien aus dem politischen Leben einzubeziehen. Dies bedeutet aber: für die gesetzgeberische Vorbereitung gesamtdeutscher Wahlen als Vorbereitungsakt zur Schaffung einer gesamtdeutschen Verfassung wäre eine Entscheidung des Bundesverfassungsgerichts, welche die KPD für verfassungswidrig erklärt und auflöst, nicht hinderlich.” (강조 ou)

 

이 인용문의 핵심은, 독일 기본법 제21조 2항에 명시된 정당금지와 모든 국가기구들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준수해야 한다는 규정이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독일 국민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vom dem deutschen Volke in freier Entscheidung”)의 최소기준(Mindeststandard)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보호라는 목적아래 행해지는 정당금지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2. 서구 민주주의 기본이념

 

서구 민주주의 이념은 “인민의 자치”로 요약될 수 있다. 링컨의 말을 빌리자면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 서구 민주주의 본질이다. 이 본질은 내용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형식이다. 이런 형식으로서의 인민의 자치에 선행하는 게 없다.

 

3.형식의 존재화

 

한국 헌법재판소 판결문 마지막 문장은 나치를 추종한 하이데거가 했을 법한 말이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취임연설, <존재와 시간> 74절 등에서 한 말과 비교된다.

 

하이데거 사유의 기본틀을 ‘형식의 존재화’로 규정하고 싶다. 지에 선행되는 존재를 이야기한다. (“Wissen wir um diesen geistigen Auftrag? Ob je oder nein, unabwendbar
bleibt die Frage: sind wir[.]”, 총장 취임 연설, 강조 ou) 형식을 존재화하면 형식에 선행되는 게 있다. 내용의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단 (존재와 시간), “권력을 향한 본질의 의지”(“Wesenswille zur Macht”, 총장 취임 연설) 등이 선행된다. 북한의 수령관과 유사한 영도원리(Führerprinzip)가 우선된다.

 

형식의 존재화는 우리가 주고 받는 말의 근간에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에 대한 주장 혹은 판단이 스며있다는 20세기 영미 철학에 대립되는 사조다. “열린 사회의 적"이 따르는 사조를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따르고 있다.

 

이건 파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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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리턴: 돈, 권력, 그리고 땅콩

땅콩리턴: 돈, 권력, 그리고 땅콩


이렇게 제목은 달았지만 글이 쓰여지지 않는다. 중첩되는 여러 이미지가 한 줄로 꿰매지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 들이다.

 

1.확인 사살

 

땅콩서비스가 잘못되었다고 회항하여 사무장을 내리게 한 것, 이걸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말이 있을까?  너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전쟁터에서도 금지되어 있는 확인사살.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사상에 근거해서 자행된 확인사살, 이 이미지가 ‘땅콩회항’ 사건에 겹친다.

군복차림의 한 독일인(중앙)이 우크라이나의 미조츠에서 유대인 집단학살후 한 유대인 여성을 확인 사살하고 있다. (인용: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ekdrn111&folder=103&list_id=8584089)

 

2.포용의 몸짓

 

학교에서 배운 그림읽기(Bildinterpretation)에서 접한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른다.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30년 전쟁 중 네덜란드의 브레다성의 항복을 묘사하여 그린 <브레다성의 항복>이다. 정복한 성은 반듯이 깔아뭉개버렸던 30년 전쟁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포용과 화해의 유토피아를  그린 그림.


3.도이체 방크(Deutsche Bank/독일은행) 회장의 “땅콩” 발언


힐마 코퍼(Hilmar Kopper)가 도이체방크 회장이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슈나이더라는 건설업주가 중소건설업자들을 등쳐먹는 일이었는데, 도이체방크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약 5천만 마르크를 등쳐 먹었는데, 힐마 코퍼가 이를 두고 “peanuts”라 하고 대신 갚아주겠다고 한 것이다. 빗발치는 언론의 비판에 여유있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비꼬는 사진으로 대하는 힐마 코퍼의 여유있는 자세.

http://www.s-f.com/public/files/media/s_f_group/images/Cases/FAZ/199901_FAZ_Hilmar_Kopper.jpg

(독일 중도우파 유력일간 FAZ 광고사진: "Dahinter steckt immer ein kluger Kopf."([FAZ 일간 뒤에는 항상 영리한 두뇌가 있다." 힐마 코퍼의 "피너츠" 발언 풍자한 광고 사진. 코퍼가 미국 땅콩 농장에서 땅콩을 가득 실은 컨테이너 위에 앉아서 FAZ를 읽고 있다.)

 

4.환대(hospitality)와 공손(Zivilität, civility)

 

지긋지긋한 세상을 그래도 훈훈하게 해주는 게 있다면 아마 환대일 거다. 환대의 법이 무너진 지금에 와서는 최소한의 도덕인 공손이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말이다.
한국 광산노동자들을 끝가지 챙겼던 독일인 기숙자사감(Kurt Koblitz란 분이었는데 나중에 사민당 직선 연방하원의원이 됨)의 장례식장을 찾은 한 한국 광산노동자. 그는 혼자 쓸쓸이 앉아 있었다. 근데 장래식 내내 그 곁에 앉아 동무해 주었던 헤르베르트 베너(60/70년대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와 함께 사민당 ‘3인방’으로 불림). 이 조그만 몸짓에서 우러나오는 훈훈함이 아직도 사민당에 애정을 갖게 한다.

 


5.한국사회의 일면을 “섬광처럼”(blitzhaft, 발터 벤야민) 보여주는 변증법적 이미지로서의 “땅콩회항”

 

“인간백정의 역사”(경향신문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에 사학자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사건. “땅콩회항”이 “인간백정의 역사”의 한 현실적인(actual) 형식이라는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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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8

„Das Gesez [=Gesetz] dieses Gesanges ist, daß die zwei ersten Parthien [=Partien] der Form <nach> durch Progreß u Regreß entgegengesetzt, aber dem Stoff nach gleich, die 2 folgenden der Form nach gleich dem Stoff nach entgegengesetzt sind die letzte aber mit durchgängiger Metapher alles ausgleicht.“

“이 노래의 법은 첫 2 부는 형식상으로는 진보와 퇴보로 대립하나, 소재상으로는 동일하고, 다음 두 개의 부들은 형식상으로는 동일하나 소재상으로는 대립한다. 이와 달리 마지막 부는 소재와 형식을 두루 관통하고 통일하는 은유로 모든 것의 화해를 이룬다.”

 

<라인강>이 어떻게 ‘흐르는가’ 알 수 있게 해주는 횔더린의 길잡이(Anweisung)는 헤겔 <정신현상학>의 <지각> 장의 이해를 돕는 길잡이로도 안성맞춤이다.

 


올 여름, 둘 다 바뻐 휴가를 못갔다. 남은 휴가를 낸 짝지, 내 일과를 엉망으로 만든다. 늦은 아침 밥상.

짝지: 우리 오늘 뭐해?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러 갈까?
짝지: 어디?
나: [전시장 이름이 얼른 생각이 안난다.] 알잖아. 거기.
짝지: 거기가 어딘데?
나: 거기이~~. 자기가 거기하면 난 다 알아먹잖아.
짝지: 거기가 여럿이잖아. 어디?
나: 그로피우스-바우.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이 자의반 타의반 수행한 변증법적 운동은 “거기”가 “그로비우스-바우”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einfaches Zusammen vieler Hier”. “거기”가 “가장 풍부한 인식”(“die reichste Erkenntnis”)이 아니라 아무런 규정이 없는 단순한 존재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 것이다. 아무런 질적 규정이 없는 단순한 양적(“viel”/많은) 일반성.

 

<지각>의 테마는 “거기”하면서 표상된 사물, ‘그로피우스-바우’에 대한 풍부한 인식이다. 다시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감각적 지의 풍부는 지각에 속하지 직접적 확신에 속하지 않는다”. (“Der Reichtum des sinnlichen Wissens gehört der Wahrnehmung, nicht der unmittelbaren Gewißheit an”). 그런데 이 사물이,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얽히고 설킨 사물”(“ein vertracktes Ding”, 자본론, 제1편,1장, 4절)이다. 지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보다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지각의 장에서 파악되는 사물의 존재양식은, 사물이 일반적인 존재(Allgemeinsein)임과 동시에 하나로서의 단순한 존재(Einssein)라는 이중성격을 갖는다. (헤겔: “das Ding von vielen Eigenschaften”)  그래서 착각하기 마련이다. 인식이 부족해서 착각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착각’할 수 밖에 없다.

 

<지각>에 속하는 “풍부한 인식” 혹은 “풍부한 지”에 달하는 길이 테마인 <지각>은 3 개의 단계를 거친다. 각 단계는 지각에 내재하는 이중성격의 모순을 전개하는 과정이다. 각 과정에서 참과 허를 가르는 검증이 진행된다. 검증의 척도는 지각이 스스로 채택한 것. 진리는 불변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sichselbstgleich”(변하지 않고 자기자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척도가 된다. 이 3 단계가 횔더린이 <라인강>의 길잡이에서 말한 3 단계와 구조적으로 똑 같다.

 

주지하다시피 <지각> 첫 단계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지각의 대상인 사물이고 (횔더린의 소재상의 동일성), “진보와 퇴보” 운동을 하면서 모순에 빠지는 것은(횔더린의 형식상의 대립) 지각이다. 둘째  단계에서는 정반대다. 셋째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관계’가 앞 두 단계를 아우르는 기본범주가 된다.

 

(짝지가 제촉한다. 바쁘다. 더 자세한 설명은 내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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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7

횔더린의 찬가/송가 <라인강>을 어쩌다 번역시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늘 그러듯 별 준비없이 덤볏는데, 가면 갈수록 태산이다. 횔더린에 대하여 아는 게 고작해야  페터 헤르트링의 역사소설 <횔더린>과 그의 시를 한때 부르노 간츠(Bruno Ganz)의 목소리를 통해서 밤새 듣고 또 들었던 것이 전부다. 하나 더 있다면, 쬐끄만 좌파 출판업체 “붉은 별”(Roter Stern)이 감히 출간한 횔더린 전집을 F.시의 시민도서관에 종종 들여다 본 것 + 횔더린에 심취하여 그가 머물렀던 곳을 하나하나 찾아본 것 (아직 다 못했다.)

 


<라인강>의 내용 파악을 멈추고 그 구조를 잠깐 살펴보려고 한다. <라인강>은 15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5연을 일반적으로 3연을 하나로 하여 5부로 구분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근거는 횔더린이 원래 자필원고에 <라인강> 모두(冒頭)에 쓴 글에 있다.

 

„Das Gesez [=Gesetz] dieses Gesanges ist, daß die zwei ersten Parthien [=Partien] der Form <nach> durch Progreß u Regreß entgegengesetzt, aber dem Stoff nach gleich, die 2 folgenden der Form nach gleich dem Stoff nach entgegengesetzt sind die letzte aber mit durchgängiger Metapher alles ausgleicht.“

“이 노래의 법은 첫 2 부는 형식상으로는 진보와 퇴보로 대립하나, 소재상으로는 동일하고, 다음 두 개의 부들은 형식상으로는 동일하나 소재상으로는 대립한다. 이와 달리 마지막 부는 소재와 형식을 두루 관통하고 통일하는 은유로 모든 것의 화해를 이룬다.”

 

여기서 두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1.“durchgängig”의 이해에 있어서 횔더린 전문가(?)들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소한 그들이 하는 말이 이해하기 힘들다. 헤겔 <정신현상학>의 <지각>편이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이 표현을  <지각>편에서 처럼 소재와 형식을 아우르는 “화해” 혹은 “통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2.“이 노래의 법”(das Gesez dieses Gesanges)이란 표현이 쉽지 않다. 법이란 건 보편적인 것인데, 이게 어찌 “이 노래”, 즉 개별적인 것의 소유물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하여 예술 작품은 “act of self-legislation”으로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스스로 만든다고 떠들기도 한다. (참조: ᅠJoshua Robert Gold, Minority Report: Approaching Peter Szondi’s Hölderlin Studies, in: Russell Berman and Joshua Gold, eds., Peter Szondi and Critical Hermeneutics, S.114,  https://books.google.de/books?id=3kZkF6tSjZsC&pg=PA114&lpg=PA114&dq=das+gesetz+dieses+gesanges+szondi&source=bl&ots=tE_QFZEp8t&sig=SB1BGTUcz5NkTjrx-sMrFOVILcE&hl=ko&sa=X&ei=Wx-IVJS1O8bVPZKrgYgG&ved=0CCAQ6AEwAA#v=onepage&q=das%20gesetz%20dieses%20gesanges%20szondi&f=false)

“이 노래의 법”이란 표현은 “이 나라의 법”이란 표현과 유사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횔더린이 말하고자 하는, <라인강>이란 노래를 통해서 구상함과 동시에 현실화한 “노래”(Gesang”)란 우선 어느 한 “나라”처럼 풍부한 내적 분화가 (innere Differenzierung) 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 내적 분화를 서술하는 방법, 혹은 법으로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아우르는 변증법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 변증법이 <정신현상학>의 변증법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다.


암튼, 횔더린이 <라인강> 모두에 삽입한 “길잡이”에 근거하여 <라인강>을 5부로 구분한다. 3연을 쭉 한 부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울리히 가이어(Ulrich Gaier)는 형식과 소재의 동일 및 대립이 <라인강>에서 어떻게 서술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다섯 부를 매우 다르게 구분한다 (참조: Ulrich Gaier, Aufmerksamkeits-Ebenen. Ein Hölderlin-Lehrgang,   http://www.hoelderlin-gesellschaft.de/fileadmin/user_upload/Dokumente/Hoelderlin_Lehrgang.pdf). 근데, 내가 보기에 설득력이 없다. 글 몸체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 몸체(Textkörper)에 충실한 구분은 <라인강>의 구분에서 “aber”(반면)와 “jetzt”(지금)을 간과할 수 없다. 다들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라인강>의 분화.분절의 마디에 등장하는 핵심어는 앞 두 낱말이다. 이에 따라 구분하면 <라인강>이 영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는게 보인다. (이에 대해선 다음에)

 
여기서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횔더린의 ‘모두발언’을 반영하면 <라인강> 첫 낱말이 “법”이고 마직말 낱말이 “혼돈”(Verwirrung)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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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6

[Heureka! 앞 연과 다음 연의 연관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다음 연 첫 행 세번째 낱말 ‘aber’의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새벽이 역시 발견의 시간인가 보다. 잠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생각하는 가운데 답이 보였다. 다음 연의 내용은 신은 신선놀음으로, 마치 바둑을 두듯이, 우리 인간을 가지고 장난한다는 것. 희랍 신관인데, 이런 신관이야말로 바로 앞 연에서 서술된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 관계가 파괴되어 파생된,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과 함께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게 보였다. ‘aber’가 ‘그러나’가 아니라 앞의 연과 뒤따르는 연을 한 ‘쌍’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이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번역한 연들이 ‘aber’에 의해서 한 쌍을 이룬다 (3, 4 연 제외). 이런 ‘aber’를 내멋대로 “변증법적 aber’라고 이름해 본다.]

 

신이 되려고 하는 완고한 자의 욕망에 상응하는, 그런 욕망과 한쌍을 이루는 신[관]은 이렇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희랍 신들은 자신들의 영원불멸에 충만하여 [진정]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영웅들과 인간들과 그밖에 살다가 죽어야만 하는 생명체들이다. 왜냐하면, 유유자적하는 복받은 신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도 신이 내리는 벌을 받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면 (si hoc fas est dictu), 저네들이 뭔가를 느끼고자 하면, 그들의 이름을 빌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몸부림에 참여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느껴주는 [대]타자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횔더린이 여기서 인용하는 로마의 표현 ‘si hoc fas est dictu’ 혹은 ‘si fas est’의 fas에서 유출할 수 있는 것은 이 연에서 이야기되는 신관은 다름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말이 비운이 되는 (fatum) 숙명론이란 것.) [희랍류의] 신들에겐 이런 놈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신들은 신을 대신하여 느끼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는 대가로, 신들처럼 되려하면서 신에 어울리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떠벌이(Schwärmer/낭만주의적 몽상가)에게 자기 집을 산산조각 내고, 자기 집의 사람과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둘 다에게 똑같은 폭군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서진 집의 잔해에 묻는 벌을 내린다.      

 

Es haben aber an eigner
Unsterblichkeit die Götter genug, und bedürfen
Die Himmlischen eines Dings,
So sinds Heroën und Menschen
Und Sterbliche sonst. Denn weil
Die Seligsten nichts fühlen von selbst,
Muß wohl, wenn solches zu sagen
Erlaubt ist, in der Götter Namen
Teilnehmend fühlen ein Andrer,
Den brauchen sie; jedoch ihr Gericht
Ist, daß sein eigenes Haus
Zerbreche der und das Liebste
Wie den Feind schelt' und sich Vater und Kind
Begrabe unter den Trümmern,
Wenn einer, wie sie, sein will und nicht
Ungleiches dulden, der Schwä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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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6

[Heureka! 앞 연과 다음 연의 연관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다음 연 첫 행 세번째 낱말 ‘aber’의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새벽이 역시 발견의 시간인가 보다. 잠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생각하는 가운데 답이 보였다. 다음 연의 내용은 신은 신선놀음으로, 마치 바둑을 두듯이, 우리 인간을 가지고 장난한다는 것. 희랍 신관인데, 이런 신관이야말로 바로 앞 연에서 서술된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 관계가 파괴되어 파생된,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과 함께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게 보였다. ‘aber’가 ‘그러나’가 아니라 앞의 연과 뒤따르는 연을 한 ‘쌍’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이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번역한 연들이 ‘aber’에 의해서 한 쌍을 이룬다 (2, 3 연 제외). 이런 ‘aber’를 내멋대로 “변증법적 aber’라고 이름해 본다.]

 

신이 되려고 하는 완고한 자의 욕망에 상응하는, 그런 욕망과 한쌍을 이루는 신[관]은 이렇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희랍 신들은 자신들의 영원불멸에 충만하여 [진정]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영웅들과 인간들과 그밖에 살다가 죽어야만 하는 생명체들이다. 왜냐하면, 유유자적하는 복받은 신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도 신이 내리는 벌을 받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면 (si hoc fas est dictu), 저네들이 뭔가를 느끼고자 하면, 그들의 이름을 빌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몸부림에 참여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느껴주는 [대]타자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횔더린이 여기서 인용하는 로마의 표현 ‘si hoc fas est dictu’ 혹은 ‘si fas est’의 fas에서 유출할 수 있는 것은 이 연에서 이야기되는 신관은 다름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말이 비운이 되는 (fatum) 숙명론이란 것.) [희랍류의] 신들에겐 이런 놈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신들은 신을 대신하여 느끼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는 대가로, 신들처럼 되려하면서 신에 어울리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떠벌이(Schwärmer/낭만주의적 몽상가)에게 자기 집을 산산조각 내고, 자기 집의 사람과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둘 다에게 똑같은 폭군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서진 집의 잔해에 묻는 벌을 내린다.      

 

Es haben aber an eigner
Unsterblichkeit die Götter genug, und bedürfen
Die Himmlischen eines Dings,
So sinds Heroën und Menschen
Und Sterbliche sonst. Denn weil
Die Seligsten nichts fühlen von selbst,
Muß wohl, wenn solches zu sagen
Erlaubt ist, in der Götter Namen
Teilnehmend fühlen ein Andrer,
Den brauchen sie; jedoch ihr Gericht
Ist, daß sein eigenes Haus
Zerbreche der und das Liebste
Wie den Feind schelt' und sich Vater und Kind
Begrabe unter den Trümmern,
Wenn einer, wie sie, sein will und nicht
Ungleiches dulden, der Schwä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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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5

[횔더린의 삶은 비록 혁명가의 삶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의 생각의 중심에는 항상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횔더린에서 프랑스 혁명을 사상한 하이데거류의 해석은 1945년 패망한 “독일정신”의 난장이들이 따르는 해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연 해석.번역이 어렵다. 여기에 횔더린의 삶과 “횔더린의 유일한 친구”(페터 헤르트링, 그의 역사소설 <횔더린>, 579쪽)인 혁명가 이작 폰 징클레어(Isaak von Sinclair)의 삶이 삼투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연은 ‘doch’로 시작한다. ‘그러나’ 정도로 해석.번역할 수 없다. 연인관계에서 한사람이 크게 잘못하여 상대가 결별을 선언할 때 흔히 등장하는 표현이 “Ich liebe dich doch”다. ‘나의 잘못이 다 맞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정도가 되겠다. 1989년 11월 13일 동독 인민회의에서 국가보안부 장관 에리히 밀케가 한 말이 생각난다. “Ich liebe – Ich liebe doch alle – alle Menschen ...” “나는 사랑한다. 나는 정말(doch) 모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누가 그걸 믿어? 평범한 사람들을 못살게 했던 현상이 정면으로 반박하는데.  현상과 들여다 볼 수 없는 내면이 사이비관계가 될 때 등장하는 표현이 ‘doch’다. 나이 30을 갓 넘은 1801년에 이 시를 쓴 횔더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암튼, 이런 사이비를 인식했는지 거듭 강조하는 표현으로 첫 행이 시작된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천년까지 누리리라

 

에 <단심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줄이 있으랴  
 

로 대답한 정몽주의 심정이었을까?]

 

 

 


그러나 그는 결코, 결코 그것[젊은 날의 혁명적 열기/프랑스 혁명]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자가 근원을, 젊은 시절의 순수한 목소리를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거처할 수 있는 모든 땅(Wohnung)이 다  꺼지고 [땅을 지배하는] 법이 또한 다 꺼져서 인간의 대낮이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Unbild, 당시의 아델룽 사전에 따라 번역)  될 것이다. 누구였는가? 누가 맨처음 사랑으로 맺어진 결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서로에게 올가미가 되게 하였는가?  [이런 썩어빠진 사랑의 올가미에 목이] 굳어진 완고한 자들이 비로소 천상의 불을 취할 수 있다는 자신의 권리에 확신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각자의 권리인 천상의 불을 조롱하지 않았던가? 이때 비로소 (사망으로 향하는) 인간의 길을 경멸하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대담 무쌍한 일을 선택하고 감히 신들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 않았던가?           

 

Doch nimmer, nimmer vergißt ers.
Denn eher muß die Wohnung vergehn,
Und die Satzung und zum Unbild werden
Der Tag der Menschen, ehe vergessen
Ein solcher dürfte den Ursprung
Und die reine Stimme der Jugend.
Wer war es, der zuerst
Die Liebesbande verderbt
Und Stricke von ihnen gemacht hat?
Dann haben des eigenen Rechts
Und gewiß des himmlischen Feuers
Gespottet die Trotzigen, dann erst
Die sterblichen Pfade verachtend
Verwegnes erwählt
Und den Göttern gleich zu werden getrach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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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링엔주 총리 보도 라멜로우(Bodo Ramelow)의 간단한 약력

보도 라멜로우 (Bodo Ramelow)

1956.2.16 생.
1971년 : Hauptschulabschluss.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수 없는 9년제 중학교 졸업)
1971-1974 : 소매상인(Kaufmann im Einzelhandel) 직업교육(백화점 체인 카르슈타트에서) [독일에서 상당히 무시받는 직업교육]
1975: 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한 10년제 중학교 졸업(“Mittlere Reife”), 야간고등학교 등 이른바 "제2의 교육의 길"(2. Bildungsweg)로
1977년: 전문대학 진학으로 제한된 12년제 고등학교 졸업(“Fachhochschulreife”)
1981-1990 : 마르부르크, 기쎈 등의 도시가 있는 프랑크푸르트 북부, 카쎌 남부에 위치한 미텔헷쎈지역 노조비서
1990-1999: 튀링엔주로 이주하여 동독지역 노조건설에 참여. 상업, 은행, 보험 노조(HBV) 튀링엔주 위원장
1999: 좌파당 전신인 PDS(민주사회주의당) 입당
2014.12.5 : 튀링엔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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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4

[다음 연 첫 행 “Ein Gott will aber sparen den Söhnen”의 첫 낱말인 부정관사 “ein”의 의미가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문학작품에서 정관사와 부정관사는 해당 명사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정관사의 경우 이미 도입된 내용에서, 반면 부정관사의 경우 뒤에 도입될 내용에서 해당 명사의 정체가 밝혀진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Ich fuhr auf einer Landstraße, da stand ein Auto – 나는 어떤 지방도로를 주행하고 있었다. 거기 차 한대가 서 있었다. 이 차에 대한 정보는 뒤에서 도입되는 내용에 있다. 그래서 부정관사는 보통 약간의 긴장, 기대, 혹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부정관사의 다른 용법은 일반화(Generalisierung)의 한 방법인 “대표 단수에 의한 일반화”(exemplarische Generalisierung)에서 사용된다. “Ein Mann weint nicht.” (남자는 울지 않는다. “너 남자 맞아? 왜 울어?” 란 의미다.)

 

“ein Gott”의 해석.번역에서 우선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횔더린이 이야기하는 ‘신’은 흔히 이야기되는 신이 아니다. 이 신의 정체는 뒤에서 밝혀진다. 이 외에 횔더린은 삶이 충만한 곳에, 즉 사랑 우정 더불어살기(Geselligkeit)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성취되는 [시.공간의] 곳에 다양한 신이(복수!) 거주한다고 생각했다는 (참조: R. Safranski, Romantik, Eine deutsche Affäre, S.166) 정도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첫 행의 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다른 표현은 “aber”다. 반대의 의미라기 보다는 “Christmas comes but once a year.”에서의 ‘but’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한다. ‘익히 알고 있듯이’ 정도라 할까.]

 

[자식들의 행동을, 자신이 스스로 체험해서, 익히 알고 있는, 자식의 삶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인] 신은 자식들이 정처없는 삶을 사는 걸 면하게 해주고 싶어하면서, 흐르는 물들이 깊은 곳에서 라인강 처럼, 단지 성스러운 알프스에 억제되어, 그에게 막말로 분노할 때 [조용히] 미소짖는다. 이런 연단의 장에서 모든  것이 또한 숙성된다. 이런 연단을 받고 산맥을 떠난 후 라인강이 자신에 만족하여 독일 땅에서 조용히 흐르고, [남을 등쳐 먹지 않지만 이득을 남기는] 좋은 [사]업에 푹 빠져 [예전의] 그리움을 달래는 모습, 아버지 라인강[으로 성숙하여] 땅을 일구고 도시를 세워 사랑하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          

 

Ein Gott will aber sparen den Söhnen
Das eilende Leben und lächelt,
Wenn unenthaltsam, aber gehemmt
Von heiligen Alpen, ihm
In der Tiefe, wie jener, zürnen die Ströme.
In solcher Esse wird dann
Auch alles Lautre geschmiedet,
Und schön ists, wie er drauf,
Nachdem er die Berge verlassen,
Stillwandelnd sich im deutschen Lande
Begnüget und das Sehnen stillt
Im guten Geschäfte, wenn er das Land baut,
Der Vater Rhein, und liebe Kinder nährt
In Städten, die er gegrün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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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3

그래서 즐겨 날뛰는 깔깔거림이(ein Jauchzen) 그의 말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기저귀] 포에 칭칭 감긴 채(in Wickelbanden)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럴진대, 먼저 강둑들이, 삐뚤어진 것들이 그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와 그를 덮쳐(durstig) 에워싸고, 지네들의 울타리 안에서[im eigenen Zahne; Zahn/이빨에서 Zaun/울타리가 들린다.] 그를 잘 보호하겠다는 미명아래 아무런 사심이 없는 그를 [묶어] 이러저리 끌고 다니려고 욕망할 때, 그는 그런 뱀들을 비웃으면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그런 것을 먹이삼아 앞으로 돌진해 나간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가 서둘러 그를 온순하게 하지 않으면, 즉 그가 클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그러면 그는, 번개처럼, 땅을 쪼갤 수 밖에 없다. [쏜살같이 흐르는] 그의 뒤로, 마술에 걸린 듯, 숲들이 늘어지고 산들이 멀어지면서 폭싹 주저앉는다.

 

Drum ist ein Jauchzen sein Wort.
Nicht liebt er, wie andere Kinder,
In Wickelbanden zu weinen;
Denn wo die Ufer zuerst
An die Seit ihm schleichen, die krummen,
Und durstig umwindend ihn,
Den Unbedachten, zu ziehn
Und wohl zu behüten begehren
Im eigenen Zahne, lachend
Zerreißt er die Schlangen und stürzt
Mit der Beut und wenn in der Eil'
Ein Größerer ihn nicht zähmt,
Ihn wachsen läßt, wie der Blitz, muß er
Die Erde spalten, und wie Bezauberte fliehn
Die Wälder ihm nach und zusammensinkend die Be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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