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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2)

[보이스 오버]

 

자 이제 의식이 이전에 [대상과 지각간 불일치가 발생할 때의 비진리를] 자기의 탓으로 돌렸던 것과 지금 자기의 탓으로 돌리는 것, 그리고 이전에 [진리인] 사물의 전유물(專有物)로 확정했던 것과 지금 확정하는 것을 돌이켜보자. 그러면 의식이 번갈아가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물을 똑 같이 두 갈래의 것, 즉 여럿이 없는 순수한 하나와 [이에 대립되는] 독자적인 물질들로 해상(解像)된 또한으로 만든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결국 의식은 이와 같은 비교를 통해서, 그가 진리를 취할 때, 받아들임(Auffassen)자기-안으로-뒷걸음질함(In-sich-zurückgehen)이란 차이(Verschiedenheit)가 자기에게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것 자체, 즉 사물이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함께 [사물에 대한] 경험으로 [의식에게] 남게 되는 것은 사물이 나타날 때, 받아들이는 의식(das auffassende Bewußtsein)에게는 단지 특정한 양식으로(auf eine bestimmte Weise) 나타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런 [의식에게 자신을 드러냈던] 양식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반성된 것, 달리 표현하면  사물이 [하나의 진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립되는 진리를 그 자체에서(an ihm selbst=사물에서 진리와 이에 대립하는 진리가 아직 분별되지 않은 상태/Ungeschiedenheit, 즉 아직 für sich가 아닌 상태) 갖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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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1)

[보이스 오버]

 

허참, 저놈 봐라! 제법인데. 우주의 신비를 깨닫네. 처음엔 달이 지구에 찰싹 붙어서 지구와 함께 원을 그리듯이 다람쥐 체 바퀴돌기만 하더니, 이젠  달이 지구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원을 그리듯이 지각함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도 원을 그리네! 그러나 “원들의 원”(“ein Kreis von Kreisen”, 논리학, 절대적 이념)은 소원하기 그지없다.

 

 

위와 같이 개진된 지각함에서는 이제 의식이 지각함과 동시에 [단지 진리(=대상)로부터 꺾여 나와 자기 안으로 뒷걸음질하는 가운데 지각함으로부터도 떨어져 나와 지각함과 대상(=진리)을 마주하는데 그치는 일직선의 반성운동만을 하지 않고] [직선의 처음과 끝을 굽혀 연결하여 원을 그리듯이] 자기를 자기 자신 안으로  다시 한 번 더 꺾어 들어가는 반성[운동]을 하고, 그러는 가운데 지각함에서 <또한>에 대립되는 모멘트(Moment)가 발견됨을 스스로 의식한다. 이 모멘트(Moment)를 명명하자면(aber) 사물의 자기(자신과의)통일성(Einheit des Dings mit sich selbst)으로서 모든 구별을 자기 밖으로 따돌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것을 의식이 짊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가 되는 사물 자체는 [자기(자신과의)통일성이 없고, 단지] 다수의 차별된 그리고 독립적인 성질들의 존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언명이 있다. 예컨대 사물은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그리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 있다는 등 갖가지로 언명된다. 그러나 사물이 흰색인 한에서 입체적이지 않고, 그리고 흰색이고 입체적인 한에서 톡 쏘는 짠맛이 아니다. 이런 성질들을 하나-안으로-정립함(In-eins-setzen)오직 의식이 떠맡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의식은 사물(안)에서는 성질들이 [안쪽으로 붕괴되듯이] 하나로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앞에서 개진된 사물에 따르면 진리인 사물에서 성질들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의식은 ‘한에 있어서’(das Insofern)란 표현을 차용하는데, 의식은 이 표현의 힘을 빌려 성질들을 겹치지 않게 펼쳐 사물을 [일반매체가 되는] <또한>으로 유지한다. 그러나 의식이, 성질이라고 명명된 것이 자유로운 물질(freie Materie)로 표상되게끔 통일(Einssein)을 [사물에서는 말끔히 말소하고 오로지 자기의 것으로만 하여] 짊어질 때 비로소 의식이 진정한 의미로 통일을 짊어지게 된다. 사물은 이렇게, 물질들의 집합이 되고, 그리고 하나가 되는 대신 그저 에워싸는 표면만이 되는 가운데 진정한 <또한>으로 우뚝 추켜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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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0)

(§ 10)

 

[보이스 오버]:

 

잠깐.

 

지각함을 되풀이 하의식의 결론은 사실 이렇다 (aber).

 

이와 같이 의식이 짊어지는 차별된(verschieden) 측면들은 각자 일반매체 안에서 따로따로 발견되는 것으로 있다는 간주아래 규정된 것이다. 여기서 흰 것은 오로지 검은 것과의 대립관계에서만 그럴 뿐이다. 다른 측면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사물이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다른 것들에게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이 하나인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하나인 사물이 자신의 힘으로(von sich aus) 다른 것들을 자기 밖으로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규정성의 힘을 빌려(durch die Bestimmtheit) 그리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로 있음(Eins zu sein)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자기-자신과의-관계함(Aufsichselbstbeziehen)이며 사물이 하나로 있음으로써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와 똑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also) [즉자적인 하나와 여러 대자적인 규정성(=성질)들이, 의식의 생각하는 것처럼 대상과 반성하는 의식으로 분리․분포되어 있지 않고, 이와 달리] 사물들 자체가 즉자대자적으로 규정되어 있다(=사물들 자체에서 즉자대자적인 규정성이 드러난다.) 사물들은 이렇게 [스스로] 성질들을 가짐으로써 각자 다른 것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그리고 [여기서] 성질이란 [한편으로는] [사물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사물 고유의 성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대자적인] 규정성들 중 그 하나이기 때문에, 사물은 다수의 성질들을 갖는다.

 

[역자의 몰이해]:

 

원문:

 

“Denn vors erste ist das Ding das Wahre, es ist an sich selbst; und was an ihm ist, ist an ihm als sein eigenes Wesen, nicht um anderer willen;”

 

1) “Es (=das Ding) ist an sich selbst.” 무슨 말이지?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첫 되풀이의 디딤돌로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 참다운 것으로 내 놓은 것과 상관이 있는가? 이건 대상이 자기동일성으로 일관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이런 자기동일성을 존재와 본질 간에 아무런 분리가 없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까?

 

2) “Was an ihm (=dem Ding) ist, ist an ihm(=dem Ding) als sein eigenes Wesen.” "was an ihm ist"를 대상의 성질로 읽고, 성질이 대상의 본질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번역했는데, 이건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이 문장의 주어(부)는 “was an ihm ist”다. 그리고 뒤 부분의 소유대명사 “sein”은 주어(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본질’은 대상의 것이 아니라 성질의 것이다. 이 문장의 소유대명사 “sein”이 그 앞의 “an ihm”의 "ihm"(=대상)을 받으려면 문법상 ‘dessen’이 와야 한다. 즉 'Was an ihm ist, ist an ihm als dessen eigenes Wesen.'이 되어야 한다. 소아시절부터 라틴어 문법을 신물 나게 훈련받은 헤겔이 이런 구별을 안 했을 리 없다.

 

3) 여기서 키포인트는 성질이 대상의 본질(Wesen)이 된다는 게 아니라, 성질이 어떤 양식으로 대상에 와 있는지(동사적인 의미로서의 wesen)에 있다. 이걸 흘렸다.

 

4) 성질을 대상의 본질로 읽으면, “um anderer willen”을 이해할 수 없다. 성질이 대상에 와 있는 상태는 연인들이 만날 때 자기 짝만 바라보는, 서로 푹 빠지는 모습과 같다. 다른 여성/남성에게 한 눈 팔지 않는다.  

 

[보이스 오버]

 

[상황이 왜  이렇게 되는지 다시 한 번 쭉 훑어보자.]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첫 되풀이의] 디딤돌로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 참다운 것으로 내 놓았는데, 이것은 우선 사물이 [존재와 본질이라는 분리가 없는, 자기동일성으로 일관하는] {자기직접태}(an sich selbst)가 되고 이런 사물에 안겨진 것은 거기에 온통 푹 빠지는 양식으로 실재하는 것으로서 다른 것들을 전혀 염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규정된 성질들도 [역시] 다른 사물들을 염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물들에게 눈짓하여 그들 앞으로 나아가는 {für(위하여)의 원래 의미인 vor(앞으로)에 기대에 이렇게 번역했다.} 법이 없이 오직 [한] 사물 자체에 안긴 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수, 그리고 각기 서로 구별하는 성질이 되어야만 비로소 [한] 사물에 안기는 규정된 성질들이 된다. 그리고 셋째로 규정된 성질들이 이렇게 물성 안에 존재함으로써 즉자대자적인 것이 되어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지각을 이해하려는 의식이 첫 되풀이에서 사물은 하나이고 성질들은 의식의 반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는 달리] 사실 사물 자체가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고, [이렇게 또한으로 이어지는 여러 성질들을 갖는다.] 달리 표현하면, [지각함을 되풀이 하는 의식의 추상으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사물이 또한, 즉 일반매체가 된다. 이런 일반매체 안에서는 다수의 성질들이 서로 겹치는 일이 없이 떨어져 존립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하거나 파기하는 법이 없다. 사물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참답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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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9)

(§ 9)

 

[보이스 오버]:

 

불쌍한 의식. 확신의 줄이 끊어져 ‘이것’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이젠 확실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각함’에서도 떨어져 나오는구나. ‘feeling’으로 거기에 찰싹 붙어(‘intimately’) 있더니. 근데 아직도 덜 떨어졌어. 필히, 탯줄이 완벽하게 잘려 뚝 떨어져(abtrennen) 나올 거야.

 

정신 차려. 네가 마주하는 것이 처음엔 ‘이것’뿐이었는데, 이젠 많아졌다.

 

 

[지각함을 되풀이하는 의식의 독백]:

 

나는 이제 지각함만이 아니다. 대상을 지각함과 동시에 거기서 한 발 떨어져 나와 지각함을 보는 의식이다.

 

[보이스 오버]:

 

되풀이에서 벗어나는 키를 찾아군. 자신이 뭔지 뭔가 알아본 것 같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걸. 되풀이를 서너 번 더 해야 할 텐데...

 

암튼, 첫 되풀이가 어떤지 보자 (zuerst).

 

[지각함을 되풀이하는 의식의 독백]:

 

이제 나는 사물을 하나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라는 이 참다운 규정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각함의 운동 속에서 이와 모순되는 것이 발견되는 경우 나는 그걸 내 반성의 [결과로]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지각하는데 뜬금없이 사물의 성질인 듯이 보이는 차별된(verschieden) 성질들도 튕겨 나온다. 근데 사물은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지 않았던가. [둘을 만드는] 차이(Verschiedenheit)가 사물에 있다면 사물은 더 이상 하나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앞의 차이가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일이라고 의식한다.

 

[역자 보이스]:

 

왜 ‘ich’(나)가 갑자기 ‘wir’(우리)가 됐지?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게 이렇게 쉬운가? 모두가 똑 같은 감성이라는 추상적인 우리인가? 투쟁의 결과인 상호인정으로서의 우리가 진정한 우리가 아닌가? 이런 추상적인 우리는 막다른 골목길이 아닌가?

 

[지각함을 되풀이하는 의식의 독백]:

 

사실 그렇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물이 하얀 것은 오로지 우리 눈에 갖다 대서 그렇고, 우리 혀에 갖다  대면 또한  톡 쏘는 짠맛이 나고, 우리 손의 촉각에 갖다 대면 또한 입체적이다. 이런 측면들의 전반적인 차이는(gänzliche Verschiedenheit) 우리가 사물로부터 [추상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로부터 취하는 것이다. 사물의 측면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허물어져] 이리저리 갈라지는 일은 혀와 눈이 완전히 구별되어(ganz unterschieden) 있듯이 서로 완전히 구별되어 있는 다양한 감각기관을 갖는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역자 보이스]:

 

차이(Verschiedenheit)와 구별(Unterschied) 간의 차이가 말소되었다. 왜? 감각기관들을 통일체로 엮는 힘이 우리에게 있어서? 감각기관의 애당초의 상태는 감각기관들이 해체되는 치매상태가 아닐까? 감각기관들 간의 차이가 구별이 되려면 감각기관들이 어떻게 통일체로 역어지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그 설명이 없다.

 

[쇼펜하우어]:

 

그래서 나는 헤겔철학을 개똥철학(Afterphilosophie)이라고 했지. 의지야 의지. 욕망!

 

[추상적인 우리가 된 의식의 독백]:

 

그래서 이제 [다양한 감각기관의 집합체로서의] 우리가 일반매체(allgemeines Medium)가 되고, 이런 매체 안에서 [통․공시적으로 분리되어 나타나는] 이런저런 감각들이 [집합체의] 한 면으로(Moment) 고립되어 나와 [다른 감각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와만 관계하는 대자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앞에서는 일반매체가 사물에서 드러나는 즉자적인 규정이었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일반매체로 존재한다는 규정을 우리의 반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사물의 자기동일성과 사물은 하나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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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8)

(§ 8) 결국 의식은 앞의 되풀이를 필연적으로 재개하여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통과하게 된다. 근데 첫 번째와 달라진 것이 있다. 의식은 이제 지각함이란 게 뭔지 경험한 의식이다. 즉 지각함의 결과와 진리가 지각함의 해체, 달리 표현하면 의식이 진리(=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반성이란 걸 경험한 의식이다. 이 경험에 의해서 지각함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짜여 진 것인지 [우리/헤겔뿐만 아니라] 의식에게[도] 분명해졌다. 지각함이란, 의식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단순하고 순수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대상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진리(=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반성이란 게 분명해 졌다. 의식의 자기 자신 안으로의 뒷걸음질은(Rückkehr=Umkehr?) 순수한 받아들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진리(=대상)에 변화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의식의 뒷걸음질이 지각함에게 본질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의식은 지각함의 이런 면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짊어짐으로써 참다운 대상을 순수하게 유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 일이 이렇게 되면, 지각함에서도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이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면이 [우리/헤겔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의식의 눈앞에[도] 놓이게 된다. 단지 지금 이 단계에서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좀 다른 의미로 그렇다. 감각적 확신에서는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감으로써 진리가 의식 안으로 이동했다. 이 점에 기대어 여기서도 위와 같은 상황을 마치 지각함의 진리가 의식의 몫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의식은 오히려 지각함에서 일어나는 비진리가 자기의 몫이라고 인식한다.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의식은 동시에 지각함에서의 비진리를 파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의식은 진리(=대상)를 받아들임에서 지각함에서의 비진리를 구별하여 그 비진리를 정정한다. 이렇게 비진리가 의식의 몫이 되지만, 의식이 이런 수정을 스스로 수행하는 한에서, 지각함의 참모습이란 의미로서의 진리는 의식의 몫이 된다. 그래서 우리/헤겔이 이제 살펴볼 의식의 태도는 더 이상 [밖으로 향하는 눈길만 되는 몰아지경의] 그저 지각함만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의 반성을 의식하고 이런 반성과 단순한 받아들임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단순한 받아들임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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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7)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과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먼저] 전개해 봄으로써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 체험할 경험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은 단지 [우리/헤겔이 알고 있는 필연적인] 전개 안에 널려있는 모순의 [의식에게 나타나는 현실적인] 전개가 될 것이다.

 

[지각하는 의식의 독백]:

 

나는 나다. 나는 ‘Je suis l'autre’가 아니다. 대상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는 아무런 분열이 없다. [첫 문장 관계절에서 ‘ich’를 ‘Ich’로 표기했는데, 이런 내용을 함유하는 것 같다.] 내가 그저 받아들이기만(aufnehmen) 하는 대상은 순전히 일개의 개물(흄: “a single object”=“a unity”=“ein Einfaches”)로 등장한다. 나는 또한 일개의 대상에서 {성질}(=이 {나무})도 알아본다(gewahr werden). 근데 이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별성을 초탈(超脫)한다. 어, 뭔가 이상하다. 이제 보니까 일개의 모습으로 내 곁에 와 있었던 [명사 Wesen을 동사 wesen의 의미로 번역함] 대상의 첫 존재가 그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 뭐가 잘못됐지? 어떻게 개별성과 보편성이 함께 있을 수 있지?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대상은 분명 참다운 것이다. 그럼 참답지 않는 것은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인데? 혹 내가 대상을 잘못 받아들이지 않았나? 맞아, 잘못 받아들인 게 틀림없어. 고쳐야 돼. 개별성을 버려야 해.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일개의 개물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모든 개물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해. 안 그럴 수 없어. 근데 뭔가 좀 다른 {성질}도 보인다. 다른 개물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고 울타리를 쳐주는(=horizein=bestimmen=제한하다/정의하다/규정하다) {성질}(=body?)이네. 근데 뭔가 또 어긋난다.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모든 개물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일반 공동체로, 달리 표현하면 개물과 개물의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대상을 잘못 받아들인 게 아니었나? 그런 것 같다. [울타리를 치는] 성질의 특수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뭔가 달리 해야 해. 개물과 개물을 연속성으로 잇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연속성을 절단하여 다른 개물을 [울타리 밖으로 쫒아내고]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 자리매김해야해. 어, 근데 뭐야? 이렇게 단절되어 있는 <하나>에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수의 {성질}(=쓴맛, 단맛 등)들이 있잖아. 뭘 또 잘못했지? 대상을 배타적인 <하나>로 받아들인 게 잘못이야. 대상은 그런 게 아니라 이젠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일반(=개물과 개물을 차별하지 않고 이어주는]연속성과 비교할 수 있는 일반적인(=갖가지 성질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매체(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가 아닐까? 맞아. 이런 일반적인 공동매체 안에서 [쓴맛, 크고 작음, 부드러움 등] 다수의 성질들이 존재하는 게 분명해. 근데 이 성질들은 감각적 보편성으로서 각기 홀로(jede für sich) 존재하고, [각 감각기관에 따라] 규정된 것으로서 다른 성질들을 배척하지 않는가? 그럼 결국 내가 지각하는 게 뭐지? [쓴맛이면 오로지 쓴맛일 뿐인] 단순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das Wahre=참다운 것)이 아닌가? 일반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성질 하나하나(einzelne)를 따로따로(für sich) 지각하는 게 아닌가? 그럼 [감각적인] 성질은, <하나>에 달려있지도 않고 다른 {성질}과 관계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야기된] {성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규정된 존재(bestimmtes Sein)도 아니지 않는가?

 

[보이스 오버]:

 

{성질}이 {성질}로 규정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에 달려서 (=이 {나무}=bestimmtes Sein/규정된 존재) 다른 {성질}과 관계하는 상황에서만 그렇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감각적] 성질은 더 이상 스스로 부정[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순수하게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것(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으로 머무르는, 온통 감각적 존재(sinnliches Sein)일 뿐이다. [지각하는 의식이 이 단계에 오면] 그는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게 되어 다시 단지 하나의 사념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각의 태동상태인]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는다.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사념이 스스로 지각행위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지각하는 의식]:

 

내가 시시포스야?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놓은 돌이 다시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수용해야만 하는 시시포스야?

 

환장할 일이다. 내가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아 또 반복과 반복의 되풀이란 말인가? 처음부터 다시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Kreislauf)에 휘말려 들어가야만 하는가?

 

시시포스야, 넌 어땠어?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는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었어?

 

너도 나와 같이 매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걸 맛보았니

 

[보이스 오버]:

 

ㅋㅋ. 처음과 끝을 연결하여 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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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6) 나머지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ß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denn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selbst unmittelbar für es, aber als das Nichtige, Aufgehobene.“


„지각하는 것은 Taeuschung(착각):<=>Tausch(교환)의 가능성을 [느낌으로=“intimately"]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자기동일성이란] 보편성(안)에서는 [자기비동일성(Anderssein)이 있을 수 없는데, 있다면] 다만 의식에 대해서만 의식도 모르게 (unmittelbar) 뜬금없이(selbst=아무런 관계없이) 등장하는 것일 뿐이지 보편성(안)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이] 거둬치워져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5)

„Sein Kriterium der Wahrheit ist daher die Sichselbstgleichheit, und sein Verhalten als sich selbst gleiches aufzufassen.“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이 갖는 진리의 기준은 [한편으론 대상의] 자기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론] 의식의 태도가 되는데, 이때 의식은 [대상의 자기동일성에 눈을 맞추고] 뭔가를 담아내는데 있어서 [모순을 빗는 일이 없도록] 자기 자신 [역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도록 처신한다.“


 

이 문장의 쉼표가 이상하다. 그저 잘못 찍은 쉼표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두 개의 문장인지 한 문장인지 아리송하다. ‘und'로 연결된 한 문장으로 보면 문법상 쉼표가 올 수 없다. 두 개의 문장으로 보면 두 번째 문장이 엉터리다. 그래서 'und' 로 연결된 한 문장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럼 쉼표가 올 수 없다. 만약 헤겔이 문법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쉼표를 찍었다면, 왜 그랬을까? 지각에서 의식이 자신과 대상이 확고하게 분리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암튼 이런 분리를 ‚한편, 다른 한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의식이 여기서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뭔가를 뭔가로’(etwas als etwas) 파악하는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변함없는 그릇으로(als sich selbst gleiches) 뭔가를 그저 담아내는 것이다.

 

 

6)

 

„Indem zugleich das Verschiedene für es ist, ist es ein Beziehen der verschiedenen Momente seines Auffassens aufeinander; wenn sich aber in dieser Vergleichung eine Ungleichheit hervortut, so ist dies nicht eine Unwahrheit des Gegenstandes, denn er ist das sich selbst Gleiche, sondern des Wahrnehmens.“


 

„[그러나]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차별되는 것이 함께/동시에 지각하는 의식에 대하여 있으므로 지각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는 결국 자기가 매순간 뭘 담아냈는지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교에서 모순이 발생하면, 그건 -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바 - 대상의 비진리가 될 수 없고 지각행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각하는 의식은 받아들인다].“ 


 

"zugleich"와 "verschiedene Momente"을 일관성있게 번역하는 게 어렵다. 여기서 Momente는 통일체(Einheit) 안에서 구별되는(unterschieden) Momente가 아니다. 우선 원문에 “unterschiedene Momente"라 하지 않고 ”verschiedene Momente"라고 하고 있다. 우리/헤겔에게만 통일체 안에서, 통일을 이루게 하는 unterschiedene Momente이지 지각하는 의식에게 그렇지 않다. 지각하는 의식은 통일을 이루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verschiedene Momente"는 단지 아무런 관계없이 갈라지는, 그저 흐르는 시간적인 의미밖에 없다 (물론 지각하는 의식에게). 그래서 ‘verschiedene Momente’를 ‘매순간’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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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3))

4)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지각하는 것은... 의식을 갖는다.” 앞에서 이야기된 것과 뭔가 어긋난다. Täuschung:<=>Tausch(교환)하는 의식은 어쩜 필요에 따라서 의식적으로 교환하겠지만 등가교환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일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병존하는 의식을 ‘허위의식’(‘falsches Bewusstsein’)이라고 한다.


 

첫 번역에서 뭔가를 잘못했다. 가변적인 '의식', 그리고 이 문장의 ‘지각하는 것’(‘das Wahrnehmende’)과 ‘의식’을 다 같은 것으로 보고, 즉 ‘지각하는 것’에다 어떤 것(etwas)과 함께(=동시에) ‘자기 자신’(‘sich selbst’)을 대상으로(내용으로) 삼는 의식의 구조를 편입시켜 번역했다. 오류다.


 

그럼, ‘지각하는 것’이 ‘Täuschung(착각):<=>Tausch(교환) 가능성의 의식’을 갖는다는 말은 과연 무슨 말이고, ‘갖다’(‘haben')라는 말은 무슨 관계를 표현하는 말인가?


 

'das Wahrnehmende'를 'das Aufnehmende'(수동적으로 뭔가를 그저'담아내는 것')로 읽으면 이건 흄의  ‘impression’과 같다. [흄은 'perception'을 추상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는가하면 또 의식의 내용이 되는 인상(impression)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의식(Bewusstsein)과 그 내용(Bewusstseinsinhalt) 간의 구별이 유동적이다.


 

흄의 key point는 인상들이(impressions) 단지 의식내용일 뿐이라는 점인 것 같다. 그래서 인상들의 속성("nature")에 관하여, 그리고 인상들과 ‘우리’(=[추상적인] 의식) 간의 관계에서illusion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다.


 

흄은 인상들은 어떻게 생겨먹었던지 간에 다 ‘똑 같은 터전’('on the same footing')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 간에 구별이 있을지라도 오직 인상일 뿐이라고 한다. 인상의 이런 속성("nature")에 illusion이 있을 수 없다. 그럼 illusion이 가능한 영역은 인상들과 ‘우리’(=[추상적으로 통일된] 의식) 사이의 관계(‘우리’와 독립적인, 아니면 ‘우리’ 외부 혹은 내부(예컨대 ‘아픔’)와의 관계)인데, 흄은 여기서도 illusion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의식의 모든 행위와 감각”(“all actions and sensations of the mind”)이 인상들의 터전이 되는 의식(consciousness)에 의해서, 정확하게 말해서 오직 의식에 의해서, 우리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impression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사이비가 발생할 수 없다.("esse est percipi"를 여기서는 거꾸로 "percipi est esse"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흄은 인상과 ‘우리’(의식) 간의 이런 혼합된 의식상태(Bewusstseinszustand)를 “feeling"으로 규정하고, 이런 ”feeling"을 인상과 의식 간의 친밀한 의식(”intimately conscious") 상태(Bewusstseinszustand)라고 설명한다. 이런 '느낌'에는 인상들이 달리 나타날 수 없다고 한다(’tis impossible any thing shou’d to feeling appear different.”)


 

이런 논증은 ‘나 아파“(”Ich habe Schmerzen")에서와 같이 의식내용과 의식을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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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2)

3) “Möglichkeit der Täuschung”


 

“Möglichkeit der Täuschung”을 “착각의 가능성”으로 읽으면, 지각하는 의식은 착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근데 그걸 “바꿔치기의 가능성”으로 읽으면, 의식의 태도가 달라질 것 같다. 바꿔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잘 바꿔치기하려고 할 것 같다. 필요한 것으로 바꾸면서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등가교환’을 하려고 할 것 같다. [여기서 ‘무의식’이 함유하는 걸 전개하려면 <자본론>의 상품 및 가치이론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무의식'='사회적 관계'라고 하고 넘어가자.]


 

여기서 '이것'이 '이것이 아닌 것'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이것' 내재적인 '힘'으로서의 가능성('kata dynamin',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5권12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 간에 [논리적인] 모순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이것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내재적인] 힘에 따르지 않는'('ou kata dynamin', 같은 곳) 단지 논리적인 규정상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 간 모순이 발생하면, 둘 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버림받는다. 이런 무모순성(Widerspruchsfreiheit) 혹은 일관성(=consistency)이 자기동일성(!)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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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2) Schein


 

케네스 웨스트팔은 헤겔의 <지각> 장이 위에서 언급한 흄의 <인성론> 부분을 배경으로 하고 ‚Täuschung’은 ‚Illusion’의 번역일 것이라고 한다. (Kenneth R. Westphal, Hegel, Hume und die Identitaet wahrnehmbarer Dinge, Ffm. 1998, S. 10ff.)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착각=Illusion}은 {착각=Täuschung:<=>Tausch(교환)}이 아닌 것 같다. {착각}이 교환의 의미를 가짐과 함께 {Schein}도 가상(假象)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물자체로] ‚있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넘어가면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와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두고 가상 혹은 사이비라고 했다. 교환에서는 뭔가 넘어가는 것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독어로 Passierschein이라고 한다. 비자도 이것과 어원을 같이 하고 있다. 'Visum'(비자)는 통과할 때 보여주는 것(‘Sichtbares'=보이는 것)으로서 Schein(=증명서)이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건너감’의 상처에 주목하고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지적하고 또 지적했듯이 - '건너감‘은 ’십볼렛‘하는 몸체를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뭘 가지고 건너왔던가? 뭐가 건너가게 해주었던가?


 

이주 노동자는 ‘노동력’만이 ‘건넘’을 허락받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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