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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정당 강령 건설을 본격화하다

사노준 4차 총회, <강령초안> 제출 심의

강령건설에 대한 문제의식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사노준)은 그동안 강령에 대해 궁극적인 목표로서 “실현 가능”하고, 노동자의 권력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또 노동자 스스로 그런 정치의 “주체”, 실천의 “주체”로 서게 하는 강령 건설을 목표로 토론하고 있다.
한국의 좌파, 진보 정치조직들은 지난 10년간 강령적 수준의 입장은 물론 강령도 제출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강령이 ‘호주머니 속 강령’, ‘증명사진’, ‘카핑 트로츠키’ 혹은 ‘카핑 사민주의’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이는 한편에서는 각 조직이 내놓고 있는 입장의 차이와 강령논쟁을 본격화할 만한 이론적 완성도의 부족 때문이고, 더욱이 어느 정치조직이든 ‘강령적 실천’을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노준은 이에 대해 강령과 정치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변증법적 긴장과 동력을 확보하면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강령건설과정을 밟아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강령의 체계와 구성에 있어서는 ‘기본강령-정책강령’으로 할 것인가?, ‘최대강령-최소강령’으로 할 것인가? 등의 쟁점에 대해 기계적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 강령건설을 말해왔다. 즉, 하나의 강령으로서 현실 계급투쟁의 진전, 우리의 인식과 실천과 논의의 진전 정도에 따라 바꿔 나갈 수 있는 체계와 구성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세 가지 안이 제출되다
사노준은 출범(2008년 10월 11일)이후 ‘강령작성을 위한 특별위원회’(강령특위)를 구성하고 조직 안팎으로 강령토론을 진행해 왔다. 2차 총회(2009년 2월 21일)에서는 <강령(초안) 토론용 자료>가 채택되었다.
이후 강령(초안) 작성을 위한 의제별 회원토론을 통해 내용정리들을 해나갔다. 국제주의, 민주주의, 문화, 노동운동, 페미니즘 등 강령에 담겨질 주요한 의제들에 대한 회원토론회를 진행했다. 이와 함께 지역별 강령토론도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3차 총회(2009년 6월 27~28일)에 <강령 초초안>이 제출되었다.
하지만 제출된 <강령 초초안>에 대해 강령특위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특히 분량, 서술체계, 문체 등에 대한 입장 차이가 컸다. 이견을 제출한 특위위원들은 “강령은 준비모임 내 사상적 지향에서 최소한의 합의수준을 반영하면 된다” “사노준의 지향과 요구, 현재 좌파의 정체성을 간결하게 드러내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단지 양이 길기 때문이 아니라 끝없는 나열식 묘사 때문에 틀린 말은 거의 없겠지만 심의가 어렵다” 등의 의견을 냈다.
그 결과 두 가지의 새로운 안이 제출되면서, <강령 초안>수립을 위한 토론은 세 가지의 개별안을 갖고 토론이 진행되는 상황을 낳았다.

진통 끝에 단일안으로
사노준의 각 지역모임에서는 10월 초부터 3개의 안을 놓고 회원토론을 진행했다. 강령특위에서 분량, 서술체계, 문체 등에 대한 이견이 있었던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긍정적인 의견과 비판적인 의견 모두가 있었다.
그러나 지역 별 토론의 과정에서 강령안이 단일안이 아니라 3개의 안으로 제출된 것에 대한 회원들의 문제제기가 많았다. 내용에 대한 쟁점이나 서술체계 형식의 이견이 있더라도 단일안으로 제출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동안의 강령특위가 논의를 모아 강령을 공동으로 작성하는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진통 끝에 현재 강령특위는 회원들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받아 단일안으로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4차 총회(11월 28~29일)에는 단일화된 <강령 초안>이 제출되어 토론될 예정이다.

지역토론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내용에 대해서도 지역토론에서 많은 질문과 의견들이 쏟아졌다. ‘21세기 자본주의 표현’, ‘21세기 사회주의 표현’,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문제’, ‘국제주의’, ‘계급동맹의 문제’, ‘생산수단의 사회화’,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한반도 통일과 평화’, ‘북한사회에 대한 규정’, ‘시장경제의 점진적 해소’, ‘총고용보장, 생존에 대한 국가책임 요구’, ‘국가와 당의 관계’,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동맹전략’, ‘대체권력 형성과 과정’, ‘민주주의 실현과정과 전략’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각각의 내용들에 대한 질문과 토론 속에서 수정과 보완해야 할 것과 쟁점으로 토론해야할 과제 등이 정리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쟁점과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적계획경제의 상’,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계급동맹’에 대한 쟁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인 주제들이다. ‘당원의 책임과 의무’, ‘국가에 대한 입장’에 대해 보완해나갔으면 하는 의견도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강령
이번 사노준 4차총회에서 심의될 예정인 <강령초안>은 ‘기본강령’의 성격을 갖고 있다. ‘부문정책강령’은 이후 계속 주체들과 함께 별도로 정리하는 과정을 밟아갈 예정이다.
<강령초안>은 말 그대로 초안이다. 사회주의정당 건설을 자기 과제로 삼는 하나의 주체로서 사노준은 앞으로 내부만이 아니라, 여타의 사회주의정치조직들과 개별주체들과 함께 사회주의정당 건설을 위한 강령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강령초안>은 사노준의 기본적 입장이 되지만, 논의와 토론을 통해 상호 수정, 보완되고, 얼마든지 새롭게 재작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애초 강령건설에 대해 이제 본격적인 첫 걸음을 시작한 사노준은 앞으로 회원 내부 뿐 아니라 사회주의정치진영, 나아가 전체 노동자민중진영 안에서 활발하게 강령논의가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또 이것이 현실의 계급투쟁과 변혁운동의 실천들과 긴밀히 결합해가면서 변증법적으로 상호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어져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직은 사회주의정치진영이 ‘강령적 실천’을 담보하기에는 미약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정당 건설의 열정과 희망으로 살아있는 강령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희망해 본다.

안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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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긍지를 가질만한 강령을 건설하자

[강령건설, 이렇게 하자]
 


강령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체성이고, 우리의 인식과 의지의 표명이며, 계급투쟁의 지침이어야 한다. 이것이 강령의 일차적 기능이고 가장 중요한 점이다. 자본주의가 왜 나쁜지, 왜 사회주의 변혁을 해야만 하는지를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다른 교재에서도 가능하다. 강령의 일차적 기능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무방하지만, 일차적 기능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강령의 독자는 대중이라는 점. 대중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언어로 써야 한다는 점에 대해 동의한다. 또한 강령은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학습과 실천의 성과를 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풍부하게 서술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강령의 분량은 그 내용이 명료하다면 즉 긴 글이라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독특한 문체와 어법은 토론의 대상으로 삼기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든 토론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면 강령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강령은 사회주의자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해결방법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결국 강령은 지금까지의 성과를 담아 풍부하게, 대중의 언어로, 그리고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되, 우리의 정체성과 인식과 의지를 밝히면서 계급투쟁의 지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단계론적인 입장의 반영인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이 아닌, 혹은 주요모순을 상정하는 이행기 강령이 아닌, 현 시기 자본주의의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대안으로서 하나의 강령을 상정했을 때, 그 서술은 필연적으로 가치와 과제를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강령의 체계와 구성, 내용과 쟁점, 문체 등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집단적인 작업의 성과로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점에서 개인의 작업물은 특수성이 강해 한계가 명백하다. 강령토론의 목적은 전 성원이 긍지를 가질만한 강령을 건설하는데 있는 것이지, 장단점을 비교하여 조금 더 나은 것을 채택하는 데에 있지 않다. 장점도 많지만 그렇다고 단점도 많거나 명백한 문제가 존재하는 시안들을 무작정 토론해달라고 하는 것은 회원들에 대한 강요다. 총회를 앞두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말 멋진 시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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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민중의 심장에 새길 당 강령은 무엇으로 벼릴 것인가?

[강령건설, 이렇게 하자]

 

백화점 쇼윈도에 걸린 ‘소비혁명!’이란 광고가 전혀 낯설지 않은 자본의 세기를 살고있는 대중과 만성적 실업에 길들여져 몸값을 높여 노동력을 팔기 위해 생체실험에 가까운 자본의 교양을 쌓고있는 청년들, 그리고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노동자민중에게 강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또 강령은 진정 돈보다 강한 힘으로, 돈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적 실체로서 노동자계급의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1917년 10월혁명의 주역들이 인민의 가슴에 불어넣은 강령적 실천이 ‘빵과 토지’ ‘평화’로 집약되는 인민의 삶 그 자체에서 시작됐듯이 이미 강령은 당대 민중들의 계급적 요구와 해방을 향한 보편의지 속에 씨앗을 간직한 채 정치의 햇빛을 만나기 위해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사노준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강령논의의 핵심은 주로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비판’ ‘21세기 사회주의혁명의 과제와 전망’ ‘새로운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이행의 문제’ 등을 둘러싼 입장과 쟁점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념의 결핍과 계급적 실천의 공백을 강령이 대체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당연하게도 현실 계급투쟁의 한가운데 서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는 일련의 실천 속에 강령을 유기적으로 배치하는 일관된 과정으로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기본 호흡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강령은 변혁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강령은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 체제를 궁극적으로 넘어서기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들과 잠재적 당원대중에게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강령은 노동해방을 열망하는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투쟁의 지침이 되고 살아있는 방향등으로서 현실 계급투쟁의 생생한 준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강령에 대한 대중적 동의지평을 넓히려면 육하원칙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명료한 표현과 구성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강령이 당의 지향과 가치, 좌표와 주소를 말해주는 사상적 토대로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예컨대, 맑스, 엥겔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이 담고 있는 빛나는 통찰과 함축적 표현처럼, 시적 은유와 날카로운 풍자와 간명한 현실인식을 담는 문장구성이 계급대중에게 큰 반향과 울림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의 폭을 제한하지 않도록 분명한 계급적 관점과 변혁의 계기를 살려내되, 계급투쟁의 당면과제를 우회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지나치게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강령의 풍부한 서술을 제한하는 벽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의미를 해치지 않는 한 사전적 지시적 문체에 갇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쉽고 어려움은 용어나 개념 그 자체보다는 현실개입력, 전선규정력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가 그 판단준거다.
셋째, 강령의 진폭과 형성과정은 현재 운동의 발전과정을 반영하여 운동일반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최대치로 담아내고 당면과제와 요구를 명료하게 집약해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즉,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토론과정을 통해 아래로부터 힘있게 만들어가야, 강령이 먼지 앉은 활자가 아닌 창당주체들의 살아 숨쉬는 무기로서 당당히 설 것이다.
넷째, 강령은 당의 지향과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담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령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유토피아)을 주술처럼 약속하는 선언과 당위에 머물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떻게 계급투쟁을 강화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지 스스로 드러내는 설득체계를 갖추고 구체성과 만나야 할 것이다. 강령의 한구절 한구절은 그 자체로서 현실의 계급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변혁(혁명)의 길로 안내하는 나침반으로서 피착취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갖는 다른 좌파 강령들과 분명한 차이는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강령은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발본적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조건과 상태를 가로질러 계급으로의 형성을 강화함으로써 변혁주체를 재구성하고 20세기 사회주의가 포괄하지 못했던 여성/생태/인권 등을 사회주의적 가치로 확장하는 과제, 자치와 민주주의가 살아숨쉬는 대체권력 형성의 과제 등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자본운동의 지배양식의 변화와 국가권력의 성격을 치밀하게 추적하지 못한 한계 등은 향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이론적 분석과제이자 당운동의 실천과제로 남아있다.
 
신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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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강령토론]

 

이제까지 인류사에서 ‘노동’없이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시기는 없었으며 앞으로도 상상할 수 있는 기간 내에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시대도 노동, 일자리가 핵심 쟁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대량 실업,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 일하는 빈곤 등은 나라와 국경을 불문하고 주요 쟁점이다.
완전 자동화를 통해 모두가 일을 안하고도 살 수 있고, 노동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생산력 향상과 함께 일자리의 상실이 지구적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없다. 앞으로 서비스 노동이 증대하여 제조업 노동이 사라지는 추세이므로 ‘노동의 종말’을 이야기해야한다는 주장역시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성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일자리가 나란히 3층밥 구조 속에 온존하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다.
분배의 영역에서 기본적인 소득 보장을 통해 사회의 악을 근절할 수 있다던 복지국가 패러다임은 신자유주의 등장 이래 노동, 복지가 공격당한 지금 설득력을 상실했다.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탈주’하라든가, 노동 자체를 거부하라는 주장을 들을 때 우리는 질문한다. ‘노동은 누가 하지? 생산은 어떻게 하나?’ 인류사는 아직 노동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안녕을 이야기할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노동 자체’라기보다는 일단은 노동 ‘착취’의 문제다. 즉 타인 노동을 사적으로 전유해 가는 문제다. 물론 노동이 착취되는 방식은 사회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노예주가 채찍을 들고 일하는 노예들을 노동현장에서 감시 감독하는 노예제 사회, 신분적 구속 아래 놓여져 있는 농민이 장원의 영주에게 일주일에 며칠 하는 식으로 의무적으로 일을 하는 중세 사회, 신분적 구속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배제되어 생존을 위해서는 임금을 받고 자본가와의 계약관계 아래 일을 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사회의 특수한 형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노동이 착취당해 왔던 것이다.
생산과정에서의 이러한 모순은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어 교육, 의료 등 사회적 재생산의 전 과정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심지어는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 내에서도 피보는 자와 빛보는 자, 투쟁하는 자와 성과를 챙겨가는 자 사이의 모순으로 나타났다. 동구 사회주의에서의 역사에서도 ‘직접 생산자’들이 소위 노멘클라투라로 불리우는 특권 계급의 아래 위치해 사회의 실질적 주체로 올곧게 서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다.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가 영웅 칭호를 받으면서 노동이 신성시 되었으나, 이는 동원전략의 수준에서 선포된 것일 뿐 타인 노동의 결과로 특권을 누리는 이전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강령안 초안에 제출된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는 노동의 착취 문제를 자본주의적 착취의 문제에서 기존 사회주의에서의 강제노동, 의무노동으로 확산하려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사회적인 수준의 문제를 다분히 심리학적인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본래의 의도가 불명료해지고, 역사 사회적인 형태의 차이가 간과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한편 직접 생산자의 노동에 대한 착취가 폐지된 이후에도 전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은 존재한다. 이 때 이러한 노동을 어떻게 전 사회적으로 조직해 나갈 것인가하는 문제는 남게 될 것이다.
사회적 필요 노동의 개념은 이러한 문제를 담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과 함께 노동의 질적 차이에 따른 차별이 사라지고, 생산력 발전을 통해 노동시간이 단축되면서 노동, 스포츠, 예술 활동, 취미 활동 등의 구분이 사라질 때, 요컨대 노동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는 것으로서의 자기 활동으로 바뀔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다운 자유의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 해방’의 문제는 노동의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가라는 관점까지 내적으로 장착한 수준에서 논의 전개가 필요하다.   
 
남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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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적 계획경제의 상은 더 ‘명료’해 져야 한다

[강령토론]

 

강령초안(이하 초안)이 제출하는 경제강령의 핵심내용은 ‘노동자민중의 자치권력에 근거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민주적 계획경제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이에 동의한다. 우리가 지향할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경제를 통해 자본주의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해야 하며, 동시에 20세기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인 관료적 계획경제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돈되지 않은 표현이나 서술이 있어 문제제기를 해본다.
우선, 생산수단 사회화에 대한 설명이다. 초안은 “생산수단의 사회화. 이는 생산과 소비 전체에 대한 중앙집중적이고 계획적인 사회화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집단이든 개인의 활동이든 자치적인 활동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해 사회적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중앙집중적이고 계획적인 사회화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20세기 국가사회주의국가에서 나타난 농업집산화 등 폭력적인 사회화 과정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옳다. 그런데 계획적인 사회화를 하지 말자는 것은 뭘 말하고자 하는지 파악이 안된다. 이것이 “사회적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한다는 표현과 연결될 경우, 더욱 그러하다. 도대체 생산에서 사회적 필요의 영역과 사회적 불필요 영역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게다가 이것이 자치적 활동을 확장하기 위해 사회적 필요영역만 사회화하는 것이라면, 사회화와 자치는 충돌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둘째, 계획경제의 상이다. 초안이 제출하는 계획경제의 구체상은 분명치 않다. “노동자민중권력은 전사회적 필요의 영역에 대한 거시적 조정을 담당하는데 한정하고 각 생산단위의 자율성, 창조성, 자주성을 보장한다” 각 생산단위의 자율성은 어떤 자율성이고 노동자민중권력의 거시적 조정은 어떤 내용의 무엇을 매개로 한 조정인지가 분명치 않다. 이것이 유고식의 자주관리사회주의를 의미하는지, 또다른 무엇인지? “민주적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상당기간 경쟁할 수도 있다. 민주적 계획경제 중심의 경제체제 구축을 통해 시장경제 부문을 점진적으로 해소해 나간다”도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주의로의 이행 초기 다양한 소유형태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민중권력의 힘으로 계획을 중심으로 시장을 하위배치하면서 시장을 배제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초안은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적 계획경제간의 관계’, ‘계획과 민주·자치와의 관계’, ‘계획과 시장과의 관계 설정’ 등에서 애매하거나 충돌하는 서술이 몇 군데 있다. 그 결과 ‘생산수단 사회화와 민주적 계획경제’라는 핵심테제의 구체적 ‘상’을 분명하게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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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강령 건설을 위해

- 강령특위, 전국순회 토론 돌입

사노준 강령특위가 ‘강령초안’ 전국 순회토론회 돌입했다. 강령특위는 지난 4개월간의 토론 끝에 3개의 강령 초안을 내놨다. 복수의 강령초안에 제출된 배경에 대해 박성인 강령특위 위원장은 “강령의 서술체계, 문체, 분량 등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결과”라며 “이는 단지 형식적인 수준에서의 쟁점이 아니라, ‘강령이란 무엇인가’, ‘건설할 당이 채택해야 할 강령은 어떤 수준의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당 건설에서 강령 논의는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등에 대한 판단의 차이다”라고 밝혔다. 3개의 강령초안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판단, 건설할 사회주의 사회의 상과 가치, 노동해방과 생태 및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재구성의 문제, 노동자계급 중심성에 대한 이해, 건설할 당의 과제와 임무, 20세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 등을 담고 있다. 강령특위는 지난 10월 7일 부산토론을 시작으로 서울, 충북, 강원, 안양, 수원 토론을 마쳤으며 11월 초까지 전국순회토론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전국순회토론을 마치고 회원들의 다양한 문제제기와 토론내용을 수렴해 11월 28일 예정된 4차 총회에서 강령초안에 대한 심의를 할 예정이다.
사노준은 4차 총회 이후 강령초안을 바탕으로 제사회주의 정치세력들은 물론 당건설에 동의하는 개인들과 함께 사상이론적 측면에서 실천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개적인 정치토론을 통해 당 건설 문제를 더욱 공론화해나갈 것이다.
이와 함께 사노준은 2010년 지자체 선거에 대한 정치방침 마련을 위한 토론을 시작했다. 10월 예정된 전국집행위원회에서는 지자체를 둘러싼 제정치세력의 현황을 점검하고 지자체 제도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주요 의제 발굴, 지역별 특성을 고려한 개입 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특히 반MB-민주대연합 논리가 더욱 확대되고 있는 점에 대한 우려가 큰 가운데 노동자민중운동진영의 독자성과 정치역량 강화를 위한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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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특위, 3개의 ‘강령(초안) 토론용 자료’ 제출

-10월부터 지역 토론 시작

강령특위가 마침내 ‘강령(초안)-토론용 자료’를 제출했다. 그것도 하나의 ‘안’이 아니라 세 개의 ‘안’을 제출했다. <강령시안>,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자계급 투쟁과 21세기 사회주의>, 그리고 <‘21c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가 그것이다.

3가지 안이 제출된 것은 강령특위 내에서 강령의 서술체계, 문체, 분량 등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결과이다. 이는 단지 형식적인 수준에서의 쟁점이 아니라, ‘강령이란 무엇인가’, ‘건설할 당이 채택해야 할 강령은 어떤 수준의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당 건설에서 강령 논의는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등에 대한 판단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강령의 각 ‘안’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판단, 건설할 사회주의 사회의 상과 가치, 특히 사회주의적 가치에서 노동해방과 생태문제, 여성해방과의 관련, 노동자계급 중심성에 대한 이해, 건설할 당의 과제와 임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토론 과정에서 그 쟁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지난 9차 집행위원회에서는 3가지 ‘안’이 제출된 것에 대해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분량이 많아 논의하기에 부담이 되고, 강령토론이 혼란스럽거나 제출된 안에 대한 선택의 문제로만 접근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강령특위는 왜 3가지 안으로 제출됐는지에 대한 ‘안’작성자의 견해까지 포함해서 제출하여 강령 토론을 활성화해 나가기로 했다.

지역 준비모임은 10월부터 11월에 열릴 예정인 4차 총회까지 강령 토론을 진행할 예정이다. 지역 준비모임에서의 토론 결과에 바탕하여 강령특위와 집행위원회는 4차 총회에 <강령(초안)>을 단일안으로 제출할 지, 복수안으로 제출할 지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4차 총회에서 심의할 강령은 <강령(안)>이 아니라 <강령(초안)>이다. <강령(초안)>은 준비모임이 당 건설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강령적 준거’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고, <강령(안)>은 당이 건설될 때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 강령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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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투쟁이 살아있는 강령 만들기(2)

“강령 하나하나의 구절에는 수십만 선동가의 연설이나 논문이 요약되어 있다”는 말처럼, 강령은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계급투쟁과 그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적 분석·전망 속에서 나와야 하며, 그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이끌 수 있는 실질적인 무기이자 나침판이 되어야 한다. 
강령 토론과 논쟁이 학술적이거나 현학적인 논의에 빠지지 않고, 개인적인 경쟁으로 타락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은 물론 노동자 민중들의 삶과 투쟁의 방향에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강령 토론과 논쟁의 과정은 당 건설 과정에 새로운 활력과 추동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카핑 스탈린주의’ vs ‘카핑 트로츠키주의’ 
우리의 강령 건설은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 붕괴의 충격, 최근 공황의 수렁에 빠진 현대자본주의의 위기, 그리고 수십 년간에 걸친 계급투쟁의 성과와 한계·오류를 사회주의적 관점과 전망에서 ‘일차적으로’ 수렴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주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이론적이고 총체적인 분석은 여전히 취약하거나 논쟁이 진행 중이다. 또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이 혼란스럽고, 사회주의자 공동의 용어나 개념으로 재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령 건설을 둘러 싼 토론과 논쟁이 구체적인 현실분석을 이론적으로도 추동해 나가는 계기와 동력이 될 수 있길 기대하고 그런 노력을 기울이려고 한다.
우리는 강령 건설 과정에서 20c 사회주의를 둘러싼 ‘스탈린주의 vs 트로츠키주의’라는 논쟁 구도 자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카핑 스탈린주의’ vs ‘카핑 트로츠키주의’라는 구도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선택만을 강요받는 구도를 깨고, ‘21c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능성과 지평을 모색할 것이다.

강령적 내용을 현실에서 실천적으로 담보해야 
강령이 작성되고 나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호주머니 강령’이나 우리 입장은 이렇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끝나는 ‘증명사진’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강령이 되려면 “강령은 현실의 투쟁과제와 맞물려 끊임없이 등장해야” 한다. ‘증명사진’은 그가 누구인지는 증명해 줄 수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에 나서게 하거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령은 목적을 단순히 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게 강령은 건설되어야 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사회주의자들이 강령의 실천적 주체로 서고, 또 일상의 조직 운영에서 계급투쟁의 실천상에서 제기되는 정치적 쟁점을 끊임없이 강령적 수준에서 토론하고 분석하고 재해석해 나갈 수 있는 조직구조와 조직운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럴 때 강령 하나하나의 구절에는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노동자 민중들의 요구와 열망을 집약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강령은 ‘21c 사회주의’를 위한, 살아있는 강령이 될 것이다.
박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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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투쟁이 살아있는 강령 만들기(1)

소중합니다 우리 노동자와 민중들의 삶의 근거와 희망이 뿌리째 흔들리거나 뽑혀나가고, 그래서 고통과 불안과 절망과 탄식만이 온통 우리 삶을 지배한다고 해도, 또 그래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일 수밖에 없더라도, 이 끝 모를 경제공황의 시대에 모질게라도 ‘살아남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내일이 오늘보다는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그래서 두 눈 감고 버티고, 잔업특근 더하고, 시간을 쪼개 자격증을 따고, 영어를 공부하고, 처세술을 익혀 몸 가치를 높힌다면, 그래서 남과의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앞서 나갈 수 있다면, 나와 내 가족이 지금보다는 낫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가냘픈 희망이라도 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앗아 갔습니다 자본주의 경제공황이 가져간 것은 우리 노동자민중들의 일자리와 임금만 가져간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와 희망조차도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우리 노동자민중들은 삶의 ‘근거’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삶의 ‘희망’조차도 빼앗겼습니다. 각자 열심히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기대도 더 이상 부질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막막하고, 숨 막히고, 캄캄합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물어야 합니다. ‘왜?’라고. 왜 이런 지경이 됐냐고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도 묻고, 또 세상을 향해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찾아야 합니다. “살아남을 방법”을. “함께 살아남을 방법”을. 내가 살기 위해 남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무한경쟁’,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세상을 끝장내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세상을 바꿔서라도 함께 살아남아야 합니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뒤집어 바꿔야 합니다. 삶과 투쟁의 살아있는 지표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위기 시대에 세상을 향한 실천적인 ‘물음’입니다. “왜 이 야만스런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어야 하느냐”고. 이 땅의 노동자민중들에 대한 절박한 ‘제안’입니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바꾸자”고. 만약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투쟁할 것인지”, “무엇을 목표로 투쟁하고 살아갈 것인지”, “세상을 뒤바꿀 필요만이 아니라, 뒤바꿀 수도 있구나”에 대해 이 시대, 이 땅의 노동자민중들의 분노와 열망과 지혜를 모아낼 수 있다면, 우리의 강령은 ‘호주머니속 강령’, 혹은 ‘증명사진’이 아니라, 삶과 투쟁의 살아있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 “아! 그래, 바로 그거다”라는. -박성인 *이 글은 두 번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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