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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09
    짐을 치우다(3)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7/01/27
    서울역 대합실(3)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7/01/26
    보리건빵(6)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7/01/26
    실감난다(4)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7/01/23
    노무현의 연설(2)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7/01/21
    (4)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7/01/19
    1월 19일(3)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7/01/01
    하루가 가고 또 온다(3)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6/12/28
    회의하다가...(6)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6/12/21
    헌법 제33조를 아시나요?
    손을 내밀어 우리

고 이혜숙!

내가 사랑하는 풍물패 대물림,

대물림 식구들 모두가 사랑하는 서범경,

범경이와 대물림 모두가 사랑하는 이혜숙.

 

그 이혜숙이

그 이혜숙씨가

일곱살 다섯살바기 아이들 재우고 나서

남편 서범경이 귀가하기 직전에

청천벽력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70년 개띠라,

겨우 37살이다.

 

부산에서 오로지 남편 하나 믿고 대전에 왔는데

친구라고는 오로지 풍물패 식구들과 가족들 밖에 없는데

그래서 의지할 곳은 그냥 우리 넘치는 동무들 뿐이었는데

 

아무런 징조도 없이

아무런 신의 예고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상과 인연을 달리 했다.

 

무슨 얘기를 하랴,

무슨 사연에 귀 기울이랴,

어제 아침에

아이들 소풍간다고 해서

손 크게 넘치게 김밥을 싸고서는

그것을 연구실로 배달한 그 넉넉함이 문제였더냐.

 

초롱한 혜숙씨의 영정을 앞에 두고

나는 속절없이 비어가는 향을 탓하고 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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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8월은

반짝했던 휴가기간 빼고는

방명록에 흔적이 남겨지는 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뒤늦게

여러 동지들의 이름을 방명록에서 보고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몇 줄 남깁니다.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는 블로그에

관심갖고 오시거나 습관적으로 들리시는 불로거 동지들,

또한 고맙고 고맙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쓰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나누고 싶은 얘기들도 참 많은데

 

늘 제가 지니고 살던 틈새의 여유조차 없이

어느새 9월을 맞았습니다.

 

제 주변으로 보자면

의료연대노조의 출범과

발전노조의 직권중재 회부,

그리고 한국노총과 사용자들 사이에

전임자임금 지급금지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을

또다시 유예했다는 기막힌 소식으로

9월 초를 맞았지만-.-

 

어젠 오랜 만에 몇 권의 시집을 사들었습니다.

쉬지 않고 힘껏 나무를 베던 젊은 목수보다

틈틈이 쉬면서 연장을 벼리던 늙은 목수가

더 실하게 많은 일을 했더라는 얘기를 상기하면서

마음 조급히 달려가지 않아야지 하고 맘 먹어 봅니다.

 

어디

두고 봅시다.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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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정미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민주노총 제20차 중집위원회는

18일 낮 3시에 시작해서 19일 새벽 3시쯤 끝났다.

 

문제의 마지막 안건(소위 산별노조운동의 원칙과 기준)에서

나는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그 자신조차 안건의 맥락과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한데도

중앙위원회에 직권상정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 민주노총 위원장과

오류투성이의 회의자료를 작성한 실무책임자에게 목소리를 높였고,

몇몇 동지들의 차분한 문제제기가 이어졌지만

우리는 소수에 불과했고 회의는 별 소득없이 끝났다.

(그것에 대해서는 따로 기록하기로 한다)

 

회의가 끝나고 숙소로 들어간 직후

이정미 동지의 부음을 들었다.

하지만,

여러 날의 강행군과 잇따른 사건들로 인하여

오후가 되어서야 장례식장에 갈 수 있었다.

 

작년 8월, 동지를 처음 만났을 때

아픈데도 웃음이 그윽하게 넘치던 그 얼굴이

내가 늘 기억하는 동지의 모습이다.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우리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편히 잠드소서.

 

*************

 

이정미(향년 40세)
- 청구성심병원 지부장
-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
- 병노협 및 미조직센타 활동
- 2006. 8. 19 03:20 위암으로 운명.

*장지 : 추후 공지(예정지-마석모란공원)
*발인 : 8월 22일 아침(정확한 시간은 추후공지)
*영안실 : 서울 대학로 서울대병원 영안실 2층 3호실
*연락처 : 영안실-02-207-2014, 현정희-011-9837-0289, 최경숙-017-737-1607



 

이정미 동지의 삶(1993년 청구성심병원 입사 - 현재) 

 

1993년 3월 청구성심병원 분만실 간호사로 입사

       교수의 추천으로 을지병원에 입사하려 했으나 결혼을 하면서 남편 직장과 가까운 동네에 신혼집을 마련하게 되어 집에서 가까운 청구성심병원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4년 노동조합 교육 선전부장


1995년 첫째 아들 출산


1996년 초 응급실 부서이동  

       말 노동조합 위원장 당선


      위원장 당선 당시 임신 중이었으며 이때 한창 노개투 투쟁이었는데 만삭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노개투 투쟁을 열심히 전개.


1997년 3월 둘째 아들 출산


1999년 지부장 연임.


2000년 10월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 당선


2001년 4월 위암 발병, 위절제술


2002년 중소병원 담당 부위원장 활동 - 방지거 병원 투쟁 등


2003년 보건의료노조 회계감사            

    - 보건의료 노조 부위원장의 역할을 하면서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활동을 해야 했는데, 건강에 무리가 되어 보건의료노조 활동을 접을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과 같이 일하는 동지를 생각하며 다시 활동할 것을 결심.

    -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집단산재(정신질환)투쟁에 주도적으로 결합


2004년 1월 위암 재발

     한방과 기치료로 투병하기로 결정. 체력여건상 수술하기도 힘들다고 판단. 이후 CT상 위암이 작아진 것으로 결과 나옴.        


2005년 병노협 및 미조직센타 활동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 빚 청산을 위해서 재정 담당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준비활동을 시작.

 

2005년 9월

     청구성심병원 당시 지부장의 분만휴가 기간 동안 노동조합 지부장 직무대행을 맡으면서 직무대행 임금을 조합의 빚 청산에 사용하자고 제의함.


2005년 10월 6일 암의 전이

     심한 복통과 설사로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급하게 입원했을 때 암이 복벽에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며 장루수술만 함.


2005년 11월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서 항암치료를 시작

     한방치료 및 기치료를 병행하며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음.


2006년 3월 10일  항암치료 마지막 6차까지 다 마친 상태임.

 

2006년 5월 장천공으로 서울대병원 입원

 

2006. 8. 19  03:20 운명. 서울대병원 영안실 2층 3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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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은 계속된다(2)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논란은 계속된다] 에 관련된 글.

지금 나는

민주노총 제20차 중집위에

위원장을 대신하여 참가하고 있다.

 

회의가 3시 30분부터 시작되었는데

5시 현재 보고사항이 진행되고 있다.

 

미리 배포되지 않은 안건을 여기 와서 보았는데

기가 막히다.

 

참고로 오늘 안건은

1. 2006년 하반기 사업계획(수정안) 건

2. 진보진영  총단결체 건설방침 건

3. 산별노조운동 원칙과 기준에 대한 건

4. 조직혁신 건

이고, 회순을 정리하면서 4번 안건을 3번과 바꾸었다.

 

회의가 오래오래  진행될 것 같다.

 

3번 안건 요지를 덧붙인다.

 



주문사항: 민주노총의 산별노조운동 원칙과 기준을 심의해 주십시오.

 

1. 경과(생략)

2. 상황(생략)

3. 산별노조운동의 원칙과 기준(안)

 

(1) 강령을 수정한다.

 

-민주노총 강령(3항)과 규약(제4조)에 1국 1노총, 1산업 1노조를 명시할 수 있는 내용으로 수정되어 명시하여야 한다.

[참고] 현행 민주노총 강령 3항. "우리는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 등 조직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산업별 공동교섭, 공동투쟁 체제를 확립하여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을 통일한다.

 

(2) 세부적인 산별노조의 구획방침을 산별특위에서 신속히 마련하고, 복수노조시대가 되는 2006년 12월 이전에 공식 의결한다.

 

-2005년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설치된 "산별특위" 차원의 사업계획으로 올해 하반기 중에는 산별구획 정리와 그 원칙을 결정하기로 결정된 바 있다. 이에 후속된 산별구획 정리안 마련, 그에 따른 원칙적 방향과 방침(안)은 산별특위 차원에서 충분히 연구 토론하여 마련하도록 하며, 향후 의결기구를 통해 상응한 규약 규정 개정사업을 전개한다.

 

(3) 조직내에서 원칙과 기준을 위반할 경우에는 규약과 의결사항에 의거하여 총연맹이 조정 지도하며 이에 불응할 시에는 징계하여야  하며, 산별노조 집단탈퇴의 경우에는 그 즉시 민주노총 탈퇴로 간주한다.

 

(4) 각종 현안들은 위와 같은 내용에 일정에 따라 원칙과 기준을 확립한 이후, 그에 상응하게 규약과 규정에 의거하여 조치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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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도

휴가라고 경주에 와 있다.

 

식구들과 함께 오늘 오전에는

천마총과 첨성대, 계림 일대를 다녔는데

오전 날씨치고는 뜨겁기가 말복날의 양철지붕같다.

 

그래도 나는 걷고

아내와 아이들은 마차를 타기도 했는데,

급기야 아이들이 비명을 지른다.

더워서 다니기 싫다고.

 

오후 한나절은 숙소에서

집에서처럼 그냥 놀았다.

 

그래도 저녁무렵엔 석굴암에 갔고,

(너무 늦어서 불국사는 내일로 미루었다)

보문단지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도 하다가

숙소로 다시 들어와서 뉴스를 보는데,

 

경주 기온이 오늘 섭씨 36.8도

전국 최고였단다.

 

집에 가서 엎드려 책이나 보는게 낫겠다 싶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과기노조며 사무실에서 오는 전화들도

맘 편치 않은데

꼭 가 보아야 할 부고까지 문자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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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7월은 투쟁입네, 회의네, 수련회니 하면서

쏜살같이 가 버리고

내일이면 벌써 8월이다.

 

아내가 올해 휴가는 친정에 아예 가지 않고

(아내의 친정은 강릉, 그래서 여름의 한 주말은

 강릉 바닷가에서 보냈다)

그냥 어디 조용한 곳에 처박혀 쉬고 싶다면서

무조건 예약을 해 둔 곳이 경주 보문단지의 모처,

어제 짐 싸들고 경주로 왔다.

 

아마 수요일까지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 경주 남산의 한 자락을 더듬고 있든지

해 뜨거나 지는 토함산 허리춤에서

아이들과 산책을 하든지

천마총 그늘에 기대어 낮잠을 청하든지 할 것이다.

 

노트북을 갖고 와서 쬐금 눈총을 받고 있기는 한데,

암튼

휴가는 휴가답게 보내도록 해야지.

 

휴가 안가거나 못가신 동지들,

어여어여 방콕이라도 다녀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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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1인 시위

지난 주에

서울시청 앞에 집회하러 갔다가~

 

1인 시위 19일째란다.

오! 상에 풍 부는 시장님~-.-

(글씨 잘 안보이면 그림을 클릭하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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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핵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기술적 판단으로는 발전소 가동을 즉각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올림픽을 앞두고 대외적인 신인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정부는 현장의 과학기술자들의 소견을 무시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고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봐라, 과학기술자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더란 말이다! 그 후에도 기술적 판단보다 정치적 판단이 핵발전소의 안전관리를 대신하기가 일쑤였다. 핵발전소에는 대개 과학기술부의 관료와 핵 규제기관의 연구원들이 조를 이루어 체류하고 있고, 주요한 사항에 대한 판단과 보고는 관료의 몫이다.


기억이 어렴풋한데, 아마 97년 여름쯤이었던 듯, 경기도 일대에 폭우가 쏟아졌다. 비로 인한 피해가 상당했는데, 그해엔 특히 전방부대의 막사들이 산사태 등으로 인해 대거 매몰되고 젊은 장병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한 연구기관에서 정부의 의뢰를 받아 그 원인을 조사했고 곧 보고서까지 작성되었다. 그러나 보고서는 끝내 공개되지 못했다. 추측하건대, 막사의 자리를 잡고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재해에 대비한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판단들이 일방적으로 무시된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국방관료들의 농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엇비슷한 사례들이 많은데, 이런 사건들은 대체로 노동조합을 통해서 뒤늦게라도 밝혀지고 문제가 제기된다. 내부의 양심선언이나 고발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구조화된 사건에서 한 개인의 양심과 소신에 찬 행동이란 참 무력하기 짝이 없다. 직장에서 내쫓기거나 왕따를 당해서 외톨이가 되거나! 간혹 이런 얘기를 하면 과학기술자 사회도 그러냐고 반문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과학기술자 집단 또한 사회, 정치적인 맥락에서 구성되고 유지된다는 점에서 이 사회의 한 축소판일 뿐이다. 금강산 댐 건설 목적이 서울을 수몰시키는 것이니 성금을 모아 평화의 댐을 쌓아야 한다고 국민을 우롱했던 인간들 중에는 교수며 과학기술자들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구조적인 모순과 비리에 저항하고, 과학기술은 자본의 이익창출의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삶의 질을 골고루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믿으며, 과학기술자들이 스스로 노동자임을 선언하고 노동조합으로 뭉친 지 벌써 19년이 다 되었다.


그 때 그 노동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본의 이해에 놀아나는 갖가지 프로젝트 더미에 짓눌려 신음하는 자신의 삶을 이따금 돌아보는지, 연구현장을 채우고 있는 비정규직 과학기술자들을 정규직 관리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은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 기억이 까마득하게 옛일은 아닌지, 과거 한 때 자신을 분노하게 했던 관료적 통제와 억압이 지금 자신에게 가해진다면 정면으로 맞장뜰 자신이 있는지! 다시 6월 항쟁의 기억과 마주하며, 나 자신에게 또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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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1.

어젠

한달 전에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건강을 워낙 헤쳐 병원에 입원한 아느와르 이주노조 위원장도 만나고

(얼굴이 아주 반쪽이다)

이미 금속노조의 국제사업 담당자로 자리를 옮긴 정모 동지 환송모임도 겸하고

오랜만에 와서 자리를 함께 한 노모 동지도 있었고

잠시 자리를 비껴나 휴직 중인 한 동지와의 만남도 있었고

그 한편에서 밤새워 일할 수밖에 없었던 몇몇 동지들 있었고

나는

여러 종류의 술과

그보다 더 복잡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가까스로 밤을 지나보냈다.

 

2.

오늘은

회의도 있었고 만남도 있었고

멀리 가 있던 후배가 십수년만에 만나자는 전화도 있었고

대전에서 술마시고 있으니 오라는 전갈도 있었다.

술,

마셨다.

 

술 마실 시간도 없다고 하면 엄살이라고 하겠지만

진짜 술마실 시간이 없고 덩달아 술마실 마음도 저버리고 살고 있는 이 즈음,

차라리 술이나 마시자는 충동이 일 때

나는 나를 경계한다.

 

3.

어떤 경우에도 나는

드러내 놓고 얘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한 동지가 말했지만,

팔뚝에 작은 생채기 하나 생겼는데

그걸 감추려고 부벼대고 약바르고 긴팔 옷으로 감추어대고

그러다가 상처만 덧나게 하고 상처를 크게 키우는 어리석은 행동이

철든 어른이든 철들었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에게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일에 절망하여

도시를 저버리거나 세상과 등지고 사는 사람들, 의외로 많다.

 

어떨 때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그냥 나 하고 싶은 얘기나 퍼붓고 쓰러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했었다? 그래서?

이 밤새 고민하고 판단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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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생

그의 이름은 허그루라고 했다.

 

한 학년에  20명씩,

모두 60명이 다니는 대안학교의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 다니고 있다.

 

학생이 관심있는 분야나 흥미있는 분야의 직업을 (2주 정도)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통해 구체적인 자신의 진로와 인생의 목표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인턴쉽프로그램이 그 학교가 독특하게 내세우고 있는 교육과정의 하나이다.

 

허그루는

나중에 노동조합과 사회단체, 진보정당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인턴쉽을 민주노총에서 하고 싶었는데,

그의 아빠가 지금 민주노총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연맹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의 얘기는 시종 진지했고 어른스러웠다.

 

부럽다.

내가 저 나이였을 때는

노동조합에서 일한다는 거, 사회단체에서 일한다는 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때 내 꿈이 뭐였더라,

아, 고등학교 수학선생이었다-



안녕하세요. ****학교 교장 ***입니다. 먼저 ****학교 학생의 인턴쉽 탐방을 허락해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학교는 인격교육과 체험교육을 중시하는 학교입니다. 특히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자기발견"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 중에서도 인턴쉽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에서 이미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의 직업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배우는 기회를 갖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학생들에게 인턴쉽은 잊지 못할 배움이 될 것입니다.

 

****학교의 목표는 행복한 사람을 기르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진로를 발견하고 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개인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고 나아가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고자 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짧은 시간이나마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한편으로는 인생의 있는 그대로의 거친 부분을 보게  해주시고,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현실을 넘어 이상과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교 학생들은 보통의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힘든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치관 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아이들을 통해 세상이 좀 더 밝아지고 행복한 곳이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많이 바쁘시고 힘드신 일정 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받아 주신데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하시는 일에 기쁨과 보람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06년 눈부신 5월에

****학교 교장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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