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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 등록일
    2005/05/28 23:39
  • 수정일
    2005/05/28 23:39

***나우누리 맑스연 현실주의 지기였던 고픈시인님의 직접 쓴 시합평을 올려본다.

 

황지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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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다중분열의 노래


S의 문체는 이제 서서히 관료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다. 관료의 글엔 상처가 없다. 흉터가 완벽히 제거된 사진은 심심 ! 균열없이 배열된 영혼의 풍경 또한 심심 ! J씨와 L씨는 이제 의사가 다 되었다. 그들의 시는 이제 시라기 보다는 처방전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 말하면서 적재적소, 아프지 않게 주사를 놔준다. 외로우니까 사람이야,아파하지마. 최근 K가 발표하는 저, 제 스스로 난 곳 모르는 불투명한 상처의 기록들도 시가 있는 방의 문지방을 넘어서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호마이크 장롱 흠집 하나가 K에겐 가족사 전체에 육박하는 비밀스런 상징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이들에겐 허다한 세간살이의 하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K는 시인에겐 절대적인 어떤 재능을 결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겐 관료의 공문서와 의사의 처방전, 호마이크 장롱의 흠집, 그 어느 것과의 밀월도 불륜이다. 나는 그런 시인들에게 연애 걸면 언제나 실연당한다. 나의 편견에 의하면, 훌륭한 시인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다만 상처로 끌고 가는 사람이 며, 하물며 남을 치유하겠다고 덤벼드는 도인일 수는 더욱 없다. 훌륭한 시인의 독자가 그의 시에서 혹 그 무슨 위로를 받는다면, 그건 시인이 동시대의 독자들과 <지금 함께> 아프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인의 상처는 투명하다. 그 투명함은 시인의 상처가 독자의 상처로 곧장 이어지는 통로를, 역사적 사회적 실존의 통로를 환하게 비춘다. 한 실존의 상처와 분열을 설명할 때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역사규정성,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명제는 한동안 얼마나 부당하게 무시되어 왔던가. 이 시대의 빈곤 속으로, 80년대 <시의 시대>의 대표단수, 황지우가 8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태양제의」의 슬하의 자식들로 보인다. 이 시의 화자인 어린 "나"는 "해우장시한다고 집 나간 지 오래인" 아버지의행방이 늘 궁금하다. 그 그리움이 "나"로 하여금 "해"와 놀게 하고 그"해'는 "나"에게 "환한 구멍"이고 "빛 솜사탕"이다. 그러나 어느날 "나"는 안과에 가서 "포르말린 냄새나는 엄청나게 큰 해"가 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되고 "나"는 이제 "해"를 다른 곳에서 발견한다. "그날 밤 엄니 품에서 잘 때 제가 조물딱조물딱 만진 울엄니 젖, 제가 잡은 해." 그러니까 "해"는 부재중인 아버지다. 그러나 그 "해"가 먼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까뒤집고 들어오는 안과의 빛" 속에도 있다는 사실은 아버지-해의 유일무이성과 순결성을 해치고 이제 "나"는 어머니의 젖을 해라고 믿는다. 부재중인 아버지-해에서 어머니-젖으로의 이 방향전환은 일종의 뒷걸음질에 가깝다.아버지-해 찾기가 여의치 않을 때 언제라도 어머니-젖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나"의 내부엔, 어느 길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두 주체가 잠복해 있다는 사실.

 

황지우는 이미 오래전,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을 < 아버지 없는 세대 >라고 명명한 바 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한마당,1986, 197면 ). 아버지(군부독재세력)를 거부한 세대가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이 새로운 아버지를 세우는 것(변혁)이라면,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어머니에게 고착되어 버리는 것(허무주의 혹은 초월?)이지 않았을까. 짐작컨대 이 두가지 길은 긴장관계일 것이다. 하나가 승하면 하나가 패한다. 저 < 아버지 없는 세대 >는 어느길로 갔던가.

 

그들에겐 좋은 의미의 선택의 여지란 없었고 오로지 실존적 결단의 여지만이 존재했다. 길은 오직 하나였다. 대체-아버지를 세우고 그 아버지의 법대로,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서 사회적 실존을 구축해나가야 했다.그것은 기왕의 아버지를 죽이고 새로운 아버지를 세우는 변혁의 길이었다.


그러나 대체-아버지는 제대로 세워지기도 전에 몰락한다("폼으로 갖다 놓고 읽지도 않은 / 카를 마르크스『자본론』(모스크바,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서가"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그리고 그 자리에 자본-아버지가 꿰차고 들어온다( " 63빌딩 황금 유리집에 안치된 태양 ; 빌어라! 빌어라! / 무릎 꿇고 빌어라!" 「서해까
지 밀려 있는 강」). 이제 "내 호주머니에는 해바라기 씨앗이 없"(「해바라기 씨앗」)다. 그들은, "망막을 속이는 빛이 있음을 모르고 / 흰 빛 따라가다 / 철퍼덕 나가떨어"(「우울한 거울 3」)졌다. 「우울한 거울」연작의 화자는,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대체-아버지의 몰락과 더불어 함께 몰락한 자신의 모습을 아프게 확인하면서 "턱 밑 털을 밀기 위해 추어올린 내 얼굴 : / 비누 거품을 허옇게 쓴 나의 헛것, / 이것, 아무도 아닌데!"(「우울한 거울 1」)라고 탄식한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던 날 난" 말한다, " "개좆같은 세기야" ."이제 당연한 수순으로 우린,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제가 잡은해"라고 말하던 그 주체는 어디로 갔을까, 물어야 한다. 그 퇴행의 주체는 지금 살찐 소파위에 널브러져 있다. 어머니 대신 이제 아내이고( "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어머니 젖을 살찐 소파가 대신한다. ( "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그는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 生은 베렸"기 때문에 "無爲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格이"므로 이제 "격조 있게, 놀"겠다고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은 하나의 극단일 뿐, 전부는 아니다. 그 증거로 우린, 지금 거론하고 있는 이 시와 함께 「펄프劇」이나 「석고 두개골」같은 시에서, 화자인 "나"와 시 속의 "그"가 혼란 속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나"는 "나"에 의해 "그" 혹은 '왕"과 같은 3인칭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이는, 아직 저 퇴행의 주체와 화자인 "나"가 완벽한 하나는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 보여주는 의도적인 혼란이다. 반성과 퇴행의 주체가 명확히 구분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얘기는 반성적 주체가 엄연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태양제의」에서 드러났던 잠재적인 두 주체가 어느 일방의 한판승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중분열된 게 아닌가,질문할 수 있다. 그 분열된 주체들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변주된다.

 

"나"는 반성한다. "아버지"의 몰락이 왜 곧 나의 몰락인가, 그건 꼭 그럴수 밖에 없었던가, 혹 내 안에 이미 그 몰락을 예비한 징후가 존재했던 건 아닌가, 를 묻는다. 이 반성의 주체가 바로「뼈아픈 후회」같은 시편을 낳는다 :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이 시는 과연 어느 비평가의 지적대로( 김형수,「새로운 시적 자아들의 명멸에 대하여」『90년대를 찾아서 2』개마고원,1996,해설), 허다한 반성의 시를 낳은 90년대를 통틀어 "진정성의 무게를 가장 많이 싣고 있는" 절창이다.그 반성하는 "나"는 "어떤 회환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일 포스티노」)을 하고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 내 자신이 한계이다"(「等雨量線 1」)라고 돌이킨다. 그리고는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뼈아픈 후회」)라고 말하기까지에 이른다. (시인의 이 뼈아픈 후회 앞에서 더욱 뼈가 아픈 사람들, 많으리라)

 

이 "나"가 반성의 대상인 "나"를 거리를 두고 대상화하고자 할 때, 혹은 사회 역사적 배경과 긴밀하게 얽어 보고자 할 때, "나"는 배우-환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의 "나"는 "미친놈들만큼 절박한 삶이 어디있어?"(「우울한 거울 2」)라고 말하는 "나"이며, "모든 착란적인 것이 시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착란적인 것은 시적이다"(시집 뒷면 산문)라고 믿는 시인이 "시뮬레이트"하고 있는, "내가 위조한 연극, 내가 꾸미고 있는 생체 실험"(「석고 두개골」)의 주인공이다. 환자인 "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같은 시)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사상이 없어졌"(같은 시)다는 것이다. 또한 이 환자의 병은 세계사적이라 할 만 한데, 시인은「等雨量線」연작 4편을 통해, "이란 고원"에서 "렉싱톤 80번가"까지, "고르바쵸프"에서 "쿠르드족 소년"에까지, 함께 비 맞으며 아파하고 있는 生들을 하나의 등우량선으로 무심히 이어놓고 있다.

 

"나"는 또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여기에 없는 아버지-해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곤 하는, 즉 신성을 찾고자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때의 "나"는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신성이다"(「等雨量線 2」)라고 말한다.즉, 훌쩍 넘어가 버리는 <초월>(신)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나는, 어딘가 갈 곳이 있어야 하므로 인도에는 여태껏 안가고 있다고"「진짜 빛은 빛나지 않는다」),신의 이쪽에서,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신적인 것(신성)을 찾아 내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구원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나"는 벚꽃을 보면서,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수은등 아래 벚꽃」)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며, "신성이 찰나에 임하는"(「聖 오월」) 순간이라고,"어쩌다 한순간 /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
은 /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여기서 더 머물다 가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 "나"는 또한 "나는 나무敎를 창시하여 전파하고자 했다"(「서해까지 밀려 있는 강」)라고 말하는 열렬한 나무 숭배자와 동일인이다. 그 "나"가「나무 숭배」「소나무에 대한 예배」 「거룩한 저녁 나무」와 같은 시편들을 낳는다. "비가 내리고, 나무가 있고, 초록 빛
이 있는 / 無限無窮 가운데 단 하나뿐인 별이여 / 소생하소서"(「나무 숭배」)라고 말하는 "나"를 보라.


이렇듯, 아버지-해를 찾아 헤매는 주체와 어머니-젖으로 되돌아오는 주체는 실상 그리 단순하게 분할되지 않는다. 이미 위에서 본 바 대로,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형태로 변주된다. 즉, 대체-아버지의 몰락과 그것의 영향으로 "살찐 소파"에로 퇴행해버린 주체, 그 주체를 반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주체이자 혹은 철저하게 자기 반성을 수행하는 주체, 또는 "아주 가까운 피안"을 보곤 하는 주체, 등등의 사분오열.

 

이 주체들은 문득 죽음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들은 이-쪽에서 살기 싫어 죽고 싶어하기도 하고(" ‘나’만 없으면 돼. ‘나’가 나한테 안들어오면 돼. / 완전하게 포기하면 돼. / 벼랑에서 손을 탁, 놓아버리는 거지."「밑」 "도마 위의 그 스테인리스 식칼을 두 눈 찔끔 감고 지나왔지.

/ 때로 나는 내가 두려워! 나를 어떻게 믿어?"「우울한 거울 2」), 저-쪽에서 살고 싶어 죽으려고도 한다(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듯, /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 자살하고 싶은 한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세상의 고요」). 저-쪽으로 가고 싶다는 이 "초월"의 욕망은 순교에의 충동으로 변형되기도 하며("큰 나무 보면 발가벗고 그 속에 들어가 / 祭物되어 흡수되고 싶다"「나무 숭배」), 이 "초월"에의 충동이 여전히 등장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황지우의 시를 읽을 때 습관적으로 적용해왔던 "변혁과 초월의 긴장"이라는 관점이 여전히 유효할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다중분열된 주체들은 다시 <생/사>라는 층위에서 양분될 수 있다(이 생/사의 욕망쌍은 사실 저 아버지-해를 찾는 주체/어머니-젖으로 돌아가는 주체 사이의 욕망쌍과 여기서 만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어머니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욕망은 <거꾸로 되돌아가는> 욕망이고,실상 <욕망없는 상태>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므로 죽음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 시집의 시들이「태양제의」의 자식들이 아닐까, 라고 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즉 이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서 "막(膜)"의 이미지가 탄생하며(「膜」「비닐봉지 속의 금붕어」), 막 "바깥"에 대한 사유가 이어져 나오는 것이다(「아직은 바깥이 있다」「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늘 그래왔듯, 황지우는 어느 한 쪽으로 쉽게 마음 주지 않는다. 그의 다중분열된 주체들은 빽빽하다. 이 긴장 자체가 황지우를 황지우로 만드는 힘이다. 그건 그런데, 그렇다면 8년 동안 그의 시를 읽어오면서, 수많은 독자들이 썼을 저 부치지 않은 편지에 대한 8년 만의 답장으로서, 이번 시집은, 시집의 부피만큼이나 충분히 꽉 차 있는가. 그의 상처를 나눠 갖고 있는 동세대들에게 세기말을 통과하면서 던지는 그의 <회심>의 전언은 무엇인가.

 

나의 오독인지도 모르겠으나 「모래 지평선이 있는 유리 상자」같은 시에서 그는 근대적인 역사관(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한다)을 부정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고, 「靑銅 마로니에 숲」과 같은 시에선 예컨대, "대리석탑 속에 잠들어 있던 이성은 그날 후로 여태 / 내 삶을 험난한 물결 위에 떠다니게 했달까. / 미쳐버릴 수도 없고 달관할 수도 없었던 것이 / 다 그놈 때문이었지만, 인간이라는 것들에게 뭐를 / 더 기대할 수 없게 된 요즘 그래도 끝내 / 최소한도로 믿을 거라곤 그놈뿐 아닌가 하는데"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고 보는 사람들 중 하나인 듯도 하고, 「낮에 나온 별자리」에선 "유토피아는 우리가 뒤에 두고 지나쳐왔는지도 모른다"라는 의미심장한 에피그램을 던져놓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명제화 해내기엔 시집 속에 주어진 정보량이 너무 적거나 나의 능력이 모자란다. 그가 어딘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인은 온전히 투사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관의 경지를 서성거려서도 안되는 것이라면(이번 시집을 통해 우린, 시는 완전히 미쳐서도 안된다, 라고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 경계를 사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답장은 여전히 "쓰 여지고 있는 중"인 거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한다.

 

80년대에 많은 좌파 비평가들이 그를 비판한 것처럼,그의 이번 시집을 앞에 놓고서도 우린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그의 표현대로 이른바 "유사-광증"을 실험하기엔 지금 세상이 너무 아픈 건 아닐까. 실상, 차라리 미쳐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라고 한숨짓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 이번 시집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닐까, 그의 <정신적인 꾀병>은 너무 화사한 것은 아닐까. 시집을 덮었을 때, 명치께가 저릿한 아픔보다는 나른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면, 그건 극단적인 절망과 자조 속에 있을 때에도 그가 조금은 아름답기 때문에, 독자가 그 아름다운 자학과 연민에 동일시 하게 되는 까닭은 아닐까. 아니, 본질적으로 그는,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저물면서 빛나는 바다」)과 같은, 깊지만 관조적인 이미지 그대로, 예전보다 늙어버린 건, 혹시, 아닐까.

 

하지만 내게 이 모든 비판을 넘어서서 더 압도적으로 육박해 오는 진실은 그가 너무나 뛰어난 시인이라는 것이다. 호들갑스러운 표현이지만, 그가 기왕에 발표한 시집들을 다 읽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 한국어의 아름다운 정체를 다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몹쓸 동경」「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거룩한 저녁나무」와 같은 시를 쓰는 황지우가, 상처를 추체험할 밖엔 없는 나같은 20대 중반이 아닌, 그의 동세대들의 가슴에 가닿는 느낌은 나로선 짐작 밖의 일이기조차 하다. 황지우가 황지우일 수 있는 까닭은 그러므로 그의 시 바깥에서 쓰여지는 이런 글로는 감당되지 않는다. 만약에, 이번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72편의 시를, 하루에 두편씩 대략 한달 동안 천천히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라면, 그래서 초판 1쇄에 있는 오자 3개를 모두 발견해내는 독자라면, 그 독자에게 시집의 살을 발라낸 듯한 이런 글이 더 전해줄 그 무엇은 아무 것도 없다. 언제나 나는 나의 상처만큼 밖에는 읽어내질 못하기에, 시의 용량은 항상 내 상처의 용적을 흘러 넘치고 말며, 상처를 텍스트로 읽어내려는 욕망은 상처를 읽기 보단 그걸 살아내고자 하는 욕망보다 언제나 열등한 것이기에.

 

황지우의 이번 시집은 <문학과 지성사>로서는 94년, 신경숙의『풍금이 있던 자리』이후 단행본으로는 최고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한 달 만에 2만부가 팔려 나갔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교수인 황지우는 요즘 광주 20주기 기념 뮤지컬의 대본을 쓰고 있고, 나는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라, 했던 한 선배의 말에 마음이 걸려 넘어지곤 한다,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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