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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이주민들과 지낸 사진들을 열어봅니다.

  • 등록일
    2010/03/04 12:30
  • 수정일
    2010/03/04 12:30

이주노동자, 이주민들과 지낸 사진들을 열어봅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고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주노동자 그/녀들과 보낸 시간들을 회상해 봅니다. 만남은 그리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와 인연을 맺게된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 입니다. 호소할 곳,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그/녀들은 친구의 소개로 아름아름 찾아왔습니다. 모든 센터가 그러할 것입니다.

 

임금체불, 산재, 폭행 등 한국에서 처한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에 도움을 청하고, 하소연하며, 억울함을 센터에 있는 저희들에게 이야기하고 해결에 실마리를 찾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과 올해도 어김없이 한해살이를 하였습니다.

 

많은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진출국하는 이의 환한 미소도 보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공장에서 강제단속으로 연행되어 강제출국한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 또한 많았습니다.

 

 

조촐한 환송회도 해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에게 미안함을 마음으로 나마 전해봅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떠나야 하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의 봅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보호소에서 죄수복을 입고 있어야 하는 그/녀들의 모습 그리고 한국에 체류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그/녀들의 떨리는 목소리로 환송을 하는 것이 저희 일상이었습니다.

 

 

이런 그/녀들.... 사진속에서는 한결같이 웃고 있습니다. 추억에 기대어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과 보낸 소중한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떠나야 하는 그/녀들.... 그러나 욕심이 과한 것인가요. 그/녀들과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만 시간은 무한하지 않았습니다.

 

유한한 시간속에서 그/녀들과 웃고 지낸 시간.....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 소통의 어려움으로 그/녀들과 잦은 다툼도 있었으나 그/녀들은 한결같이 맑고, 순수하였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해 하소연하였고, 부모님이 아프면 같이 아파했고, 기쁠때 마음껏 웃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도, 친구가 죽어도, 아이가 아파도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은 하루면 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그/녀들의 몸은 개인이 아닌 가족을 부양해 하는 기계이며, 가족의 미래를 짊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사망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이주노동자, 아이가 아파서 야후 인터넷 메신져로 하염없이 걱정하며 사랑한다는 목소리를 아이와 아이를 부양하는 친지에게 이야기하는 그/녀들이 한 없이 덧없게 느껴질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이 왜 이렇까지 하며 한국에 체류해야 하는지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주운동을 하면서 이주한 이주노동자, 이주여성의 삶의 단면을 접하면서 이주한 그/녀들의 삶을 보았답니다. 더 나은 세상, 미래를 꿈꾸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웠듯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또한 코리안 드림을 꿈꿔왔습니다.

 

코리안 드림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들이 브로커에 속아 막대한 빛을 지고 한국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고용허가제, 산업연수생이 아닌 관광비자 3개월, 6개월짜리를 받고 들어온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고용정책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브로커에 속아 한국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강제출국되는 이도 있습니다. 관광비자의 가격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중국과 태국의 경우 다른 나라에 비해 그 횡포가 심각합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들어온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이 자주는 아니지만 어려울때나 고민스러울때 고국에서 큰 일이 있을때 찾아와 마음을 가다듬고 갑니다.

 

 

그래서 저녁이면 기쁠때도 있었지만 마음을 쓸어내릴 때도 많았습니다. 이런 그/녀들과 웃고 지낸지도 언 5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함께한다기 보다 많이 배울 수 있고, 그/녀들의 삶에서 우리 아버님들의 고충을 잠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우리 또한 이주노동을 하였지만 급속한 경제성장은 우리사회는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센터에서 함께하면서 그/녀들에게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 센터는 한가족 같이 그.녀들이 언제나 방문하고 쉬고, 기대고, 외로움을 달래고, 어려움을 풀거나 함께 기뻐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녁 늦은 시간에 간혹 오는 그/녀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거나 살아가는 이야기.... 술한잔 기울이고, 웃고 떠드는 것이 참 행복하게 다가왔습니다. 함께 있기에 고된 노동을 잠시 잊고 고국의 소식을 접하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참 정겨웠습니다. 행복하였습니다.  

 

저녁이면 몇 안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인근에서 아름아름 와서 인터넷을 보며 자국의 소식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공간.... 그 속에 제가 함께 있었고, 많은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그/녀들이 함께하였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 사진속에 웃고만 있네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을 회상해 봅니다.

 

다들 잘지내고 있는지.... 전화해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저는 정작 함께 있어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함께하였기에 고마웠다고..... 당신들이 있어주었기에 내가 세상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었고, 마음이 풍요롭고 정작 행복하였다고,,,, 늘 걱정해주고 안부를 물어주는 그/녀들....

 

 

베트남 이주노동자 라이쾅 타오 화성 건설현장에서 반장의 횡포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3년을 해메이다 우리와 만나서 눈치료를 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간 그..... 억울함은 해소되었지만 눈에 상처는 치료하지 못한 그... 그러나 마지막 돈을 벌어서 비행기표를 사서 출국한 타오씨..... 새벽 베트남 쌀국수를 끓어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갔습니다.

 

카자흐스탄 자나라씨... 아이가 아파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아파서 근심이 많았습니다, 출국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으나 이전 사업장에 임금을 주지 않아서 출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빨리 임금체불 건이 근로감독관의 노력으로 일찍 끝나 출국하였습니다. 출국당일 인천공항에서 센터에 찾아오지 못하여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행복하게 살라는 당부.... 더 이상 한국에 가족과 떨어져 살지말라는 이야기를 하였던 기억....

 

케냐의 페리씨.... 2008년 다솜공동체 후원의 밤에서 잠보 춤을 추면서 이주노동자, 지역주민을 흥겁게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을 하였지만 그래도 안정을 취하고 고향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그러하지만 외로움, 두려움,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배운 술과 담배가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삶을 갉아 먹거나 몸을 망가트립니다. 그래서 안타까울때가 많습니다. 상처를 치유할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이주노동자 그/녀들을 상처를 만들고 확대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린 페리씨가 지금 케냐에서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늘 수줍어 했는데....

 

 

올해 6월 전화로 형 집에 가요....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여자친구와 결혼할 거에요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갔습니다.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늘 어려울때면 함께 있어주었는데.... 스리랑카 헤러드가 보고싶네요.  초기 스리랑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던 이주노동자입니다.

스리랑카 친구들은 대부분 헤러드가 있었기 때문에 왔고, 헤러드는 회사에 있는 할아버지에 의해 잔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먼 타향에서 온 헤러드가 돈을 벌고 건강히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어려운 일과 힘든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님들 처럼 중동의 열사 땅에서 힘들게 일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에 헤러드가 건강히 돈을 벌어 고국에 가기를 바램하며 잔업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헤러드는 잔업을 하여 고국에 돈을 많이 보내는 것을 원하였습니다.

이런 헤러드가 이제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자진출국을 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 봅니다.

 

몽골 오트후.... 잉크, 오트후, 바이라 3인은 임금체불과 바이라 상해건으로 상담을 맞게 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바이라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여 팔, 등, 어깨를 180바늘 꼬메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병원비가 없어서 난처했습니다.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경찰에 붙잡혀서 병원비를 낼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화성 보건소에서 화성이주노동자 의료지원을 받아 병원비 전액을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 바이라가 다쳐 병원에 갔을때.... 살아 있는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바이라 또한 한국의 고용체류 3아웃제도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어 강제출국 당했다는 소식을 잉흐에게 들었습니다.

 

오트후는 다른 남자와 가출을 하여 술에 쪄들었는데.... 잉흐에게 지금 들었더니 부인과 재회하여 울반바토르에서 조그마한 가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네요. 잉흐 빼놓고는 사업장의 상습적 임금체불, 폐업으로 3아웃되어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오트후, 바이라는 2년의 한국생활을 하고 강제출국당하였습니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참 냉혹합니다.

 

늘 저녁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센터에서 있습니다. 서류정리와 일도 있지만 이주노동자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고 삶을 나누는 것이 참 정겹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레인 만남은 다른 곳에서는 없었던 것이라 매우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별과 만남이 번갈아가는 센터생활이지만 그래도 인연은 이어지겠지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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