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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 인터뷰 3 - 시험에 드는 날들, 희망을 찾는다

  • 등록일
    2011/05/10 15:19
  • 수정일
    2011/05/10 15:19

시험에 드는 날들, 희망을 찾는다

□ 프롤로그

방 글라데시인 로만과 리삐는 어린 나이에 만났다. 리삐가 18살이던 1999년, 남편은 비즈니스 비자로 한국 땅을 밟았고, 이듬해 리삐는 학생비자로 들어왔다. 결혼 13년 만에 그리도 갖고 싶어 했던 아이를 임신했지만 한국에서 받은 상처와 절망으로 리삐는 임신중독증과 우울증에 시달려야했다. 결국 칠삭둥이 쌍둥이를 낳았고,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했다. 셰도는 얼마 전 퇴원했지만, 심례는 아직도 인큐베이터에 있다. 병원비만 1억원이 나왔다.

로만은 2004년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리와 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힘든 몸을 부려 다시 일을 했지만 지금까지 체불된 임금만 3000만원이다. 공장이 문을 닫고 사장이 도망가 1800만원은 아예 받을 수조차 없다. 교통사고, 임금체불, 힘든 출산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 시험에 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13년 만에 만난 아이들, 어렵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다시 희망을 찾는다.

 □ 그들의 꿈, 절망, 그리고 희망

어린 신부 리삐, 남편과 꿈을 꾸다

리 삐의 현재 나이 29살, 13년 전 로만을 만나 결혼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옷가게를 하며 근근이 삶을 버텨봤지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이대로는 살 수 없었다. 남편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1,000만원 정도 든다고 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지 한참이 흘러 어렵게 돈을 모으고 빌려 드디어 1,000만원이 생겼다. 1999년, 남편은 희망의 나라, 한국으로 떠났다. 이듬해 리삐도 남편이 있는 한국에 들어왔다. 방글라데시 정부정책상 여자는 산업연수생 자격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브로커를 통해 학생 비자를 얻어야 했다. 그때 들어간 브로커 비용은 800만원이었다.

기계처럼 일어나 노예처럼 일하다

리 삐는 한국에 들어온 직후부터 일을 시작했다. 부부는 잔업도 마다않고 열심히 일했다. 일이 끝나면 그대로 쓰러져 자고, 다음날 또 기계처럼 일어나 노예처럼 일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한국인들은 ‘빨리빨리, 부지런히’라는 말을 좋아했다. 방글라데시와 너무 달랐다. 하지만 이 정도 고생쯤은 장밋빛 미래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4년이 흘러 브로커 비용을 다 갚고, 방글라데시에 조그마한 땅도 사놓았다. 로만의 부모님께 제법 적지 않은 돈도 송금할 수 있었다. 리삐는 방글라데시에 돌아가 그럴싸한 옷가게를 할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불행의 시작

2004년 로만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식당배달 오토바이였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다쳐 절단에 이어 복원 수술을 받아야 했다. 1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리삐도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1년 동안 돈을 못 벌고 병원에서 지냈다. 그때는 보상이고 뭐고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몰랐다. 병원비를 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로만의 다리에는 철심이 박혀있다.

체불임금 3000만원, 사장은 도망갔다

2004 년 말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그대로 나앉기에 부부는 너무 젊었다. 그동안의 고생도 아까웠다. 또 다시 밤낮 없는 고된 노동이 시작되었다. 한국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월급이 조금씩 연체됐다. 사장은 걱정 말라 했다. 공장이 어려워져 다른 공장으로 옮길 때까지만 해도 사장을 믿었다. 그런데 공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사장은 폐업 처리하고 어디론가 도망갔다.

여 기서 끝나지 않았다. 옮긴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경기가 어렵다며 한푼 두푼 미루더니 체불된 임금만 1,000만원이 넘는다. 한번 당한 경험이 있어 사장이 도망가지나 않을까 몇 번이고 찾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버젓이 똑같은 공장이 돌아가는데 공장 명의가 사장 동생으로 바뀌었다며 체불임금을 주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체불된 임금이 모두 3,000만원, 이런 식으로 아예 받을 수조차 없는 돈만 1,800만원이나 된다. 미등록 상태라 노동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리삐의 굽은 손가락

리 삐는 2008년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산재를 당했다. 게다가 수술이 잘못돼 지금도 검지 손가락은 직각으로 굽어있다. 사고 후 공장이 폐쇄되고 사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불편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만 아프지 않다면 더한 것도 참을 수 있다고 했다.

로만의 치료는 형식적

로만은 허리가 아파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4년 전부터는 치질이라 대변에서 피가 나오고 있다. 한번 병원에 갈 때마다 4~5만원이 든다. 보험이 안 되다 보니 제대로 된 검사나 치료를 못 받고 있다.

딸들, 인큐베이터에서 숨을 쉬다

쉼 터 문을 열자마자 아직도 배냇짓을 하고 있는 손바닥 보다 조금 큰 아기가 있었다. 그들의 딸 셰도이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호흡기를 뗀지 딱 하루를 넘긴 상태다. 절망스러운 출산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숨이 붙어있는 것이 눈물겹게 고맙다고 했다.

1997 년에 결혼하고 곧바로 아기를 갖고 싶었지만 생기지 않았다. 13년 만에 임신했다. 혹독한 일로 임신중독증과 우울증을 앓게 되어 7개월 만에 출산했다. 여자 쌍둥이를 낳았는데 두 아이 모두 저체중에 병을 갖고 태어났다. 셰도는 640g 극저체중으로 태어나 45일 동안 인큐베이터에 머물렀고, 아직도 인큐베이터에 있는 심례는 심장과 폐, 신장 기능 이상으로 3차례 수술을 받았다. 리삐와 로만은 두 아이가 건강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 출생 비용만 1억원

아 이들 병원비로 1억원이 나왔다. 너무 큰 돈이라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심례가 지금도 인큐베이터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병원비가 쌓여가고 있다. 다행히 병원에서 운영하는 의료지원 프로그램으로 3,000만원 가량 감면되었고, 안타까운 사연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어느 정도 성금이 모였다. 리삐의 가족들도 방글라데시에서 1,000만원을 보내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보험과 아름다운 재단에서 일부 지원을 받는다 해도 1,000만원 이상은 부부가 해결해야 했다. 체불된 임금을 받았더라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로만 혼자 버는 것으로는 생계비도 빡빡하다. 앞으로 두 아이의 기저귀와 분유 값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 상봉

잘 나갈 때는 리삐가 80만원, 로만이 120만원을 벌기도 했다. 그때는 로만의 부모에게 제법 적지 않은 돈을 송금했다. 그러나 2004년 사고로 일을 못하게 되면서 송금은커녕 그나마 모아두었던 돈마저 야금야금 까먹고 살았다. 지금 로만은 약품회사에서 일한다. 약품은 몸에 떨어질 경우 상처가 날 만큼 독하다. 냄새도 너무 심해 방독면을 쓰고 일한다. 이마저도 언제 쫓겨날지 몰라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 공장들을 돌며 일자리를 구한다. 월급은 70만원, 밥값 20만원, 잔업하면 120만원 정도 받고 있다.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어 일요일에만 리삐와 셰도, 그리고 병원에 있는 심례를 만날 수 있다. 리삐는 현재 오산 이주여성 쉼터에서 셰도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금남의 집이기 때문에 다른 이주 여성이 들어오면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가족 상봉도 어려워질 것 같다.

불안, 몸에 배다

로만은 그동안 2번 단속을 당했다. 간신히 도망쳐 추방은 피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길을 걷다가 조금만 큰 소리가 나면 깜짝깜짝 놀란다. 단속 때문인지 교통사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안이 몸에 배었다. 도둑질 한번 않고, 성실히 일한 만큼 돈 받고, 게다가 사장한테 돈도 떼일 정도로 바보처럼 살았다. 그런데 단지 비자가 없다는 이유로 범죄자처럼 불안해하며 사는 것이 가끔씩 억울하다.

 □ 에필로그

그들의 희망, 그들의 긍정

리 삐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가면 옷가게를 하고 싶다. 처음 한국에 올 때는 50살까지라도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아이들이 건강할 때까지 한국에서 살 수 있었으면 한다. 최소 3-4년은 더 살아야 할 것 같다. 미등록 신분이 바뀌지 않는 한 불안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아이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의 한국 생활에 대해 어떠냐?”고 묻자,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다지 많이 놀림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다르게 생겨서 귀여움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고도 했다. 하여튼 방글라데시의 긍정적 사고방식은 따라갈 재간이 없다. 아이들이 원한다면 한국에서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일자리도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미등록이 뭐길래

미등록 신분은 산재보상을 받을 수 없다. 일반 사고를 당해도 미등록 신분이 노출될까봐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아파도 생명에 치명적이지 않은 이상 버텨야 한다. 보험으로 처리되면 3000원이면 될 감기 치료비지만 미등록 노동자들은 1만원 이상 내야 한다.

이 주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 특히 가임 여성들의 건강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결혼 초기 한국에 입국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공장 기숙사에서 소음과 분진에 시달리는 생활, 불안한 일상으로 우울증이나 임신중독증에 노출된 위험이 높다. 건강하지 못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미등록이다 보니 병원비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난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꿈은 소박하다. 아플 때 병원가고, 한국 아이들처럼 교육받고, 무국적자라는 낙인 없이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건 어려운 법의 문제도, 거창한 인식 전환의 문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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