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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정은임 아나운서 영전에 부치는 글

  • 등록일
    2004/08/06 10:34
  • 수정일
    2004/08/06 10:34

故정은임 아나운서 영전에 부치는 글
“당신이 들려주던 말과 노래가 있었기에 우리들의 지친 가슴이 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오성 기자 

  
011-9199-****

‘바보처럼’ 그의 번호를 누르다,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는 이제 없다···.




지난달 22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입원한 지 13일만인 8월 4일 오후 6시 반, MBC 아나운서 정은임씨는 끝내 유명을 달리 했다. 사인은 중증뇌부종연수마비. 서른일곱 해도 다 채우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일개 방송인에 불과했으나 그의 삶은 ‘방송국’의 스튜디오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여성부장으로서, 그리고 그와 함께 ‘진보적 영화읽기’의 대열에 동참했던 애청자들의 누이로서 그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 당원의 글처럼 때로 볼셰비키의 ‘인터내셔널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심야의 전파를 타고 울려퍼지기도 하고, ‘철의 노동자’가 ‘영화음악’이라는 사실을 청취자들에게 일깨우기도 했다. ‘좌절의 90년대’에 그의 방송은 몇 안되는 안식처였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씨의 죽음을 오프닝 멘트로 전하며 ‘이것이 대한민국 노동귀족의 모습’이라며 애도하던 ‘유일무이한’ 방송이었다. 신입사원 시절엔 사측의 노조탈퇴서를 거부하고, 방송파업의 대열에 동참하기도 했던 강성노조원이기도 했다. 뭇남성들을 설레게 한 나지막한 목소리는 그의 표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에 ‘정은임의 영화음악 애청자 모임’ 카페는 물론,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등에도 추모의 글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환한세상’이라는 아이디의 민주노동당원은 “파병소식이 전해지던 순간, 문득 2주 동안 사경을 헤매고 있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생각났다”며 “온세상이 외면하던 김주익 열사를 나지막히 찾아주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지금도) 먹먹한 새벽을 여전히 채우고 있었다면 오늘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생각했다”며 추모의 글을 올렸다. 애청자들 사이에선 그의 방송을 영구보존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8년만에 다시 영화음악으로 돌아왔던 정은임씨의 프로그램이 불과 6개월만에 사라졌을 때 많은 청취자들이 분노하며 MBC측에 항의의 뜻을 전달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그의 프로그램이 ‘알량한 청취율’ 따위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깊이와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거대 방송사는 몰랐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고 청취자들을 위로했지만, 마지막 방송을 하며 그는 소리없이 울었다. 결국 그 방송의 끝부분에선 코까지 훌쩍이며 우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지만.

그날 정은임은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고 못하고, 그저 연기만 피운 것 아닌가···.”

그것이 그의 진심이라면 이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들려주던 말과 노래가 있었기에 우리들의 지친 가슴이 위로받을 수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척박했던 우리들의 지난 시간이 영화로웠노라고. 당신은 연기가 아니라 뜨거운 불길이었노라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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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  
[온라인 기자칼럼] 정은임 아나운서의 명복을 빕니다  
 
 
                                                                                                                 이김준수 기자 jslyd012@mediatoday.co.kr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먼저 꺾어 식탁을 장식하듯,
 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데려가 천국을 장식하신다…"


젊은 날의 요절에는 이같은 경구들이 나붙곤 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는 것을 더 이상 공유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한 아쉬움일까. 아니면 마음은 그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과의 괴리를 표현한 것일까.

 

어쨌든, 사람살이는 늘 그렇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진실. 불의의 사고이건, 스스로의 선택이건 천국을 장식하기 위한 떠남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보내고 갑작스레 보낼지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면서도 이에 충분한 대비를 할 수는 없다. 아직 천국 장식용으로 누군가를 보내기엔 마음속에 너무 깊이 박힌 사람들이 있다. 

 

정은임 MBC 아나운서가 천국을 장식하기 위해 떠났다. 인과관계는 전혀 없고 우연이겠지만, 정은임을 품고 살던 사람들에게 그녀가 떠난 4일 오후 그렇게 많은 비가 쏟아진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난달 22일 차량 전복으로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토록 쾌유를 바라마지 않던 사람들의 희망은 결국 부질없음으로 귀결됐다. 희망이란 것이 애당초 부질없음을 전제로 하지만 그 부질없음에라도 기대고 싶은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희망의 연가는 이제 명복의 비가로 바뀌었다. 

 

그렇게 좋아한다던 리버피닉스가 지난 93년 10월 세상을 등졌을 때, 그는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이젠 그가 세상을 등졌고 그의 팬들은 울먹이고 있다. 그는 이제 천국에서 리버 피닉스를 만나게 됐다.

 

그의 교통사고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전, 그가 실려 간 병원의 한 간호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정은임 아나운서가 교통사고로 위중하다는 글을 적어 이른바 ‘네티즌 특종’을 내놓기도 했다. 그 블로그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발 무사하시길... 제발 아무 일도 없길...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고 적혀 있었다.

 

‘정은임’을 마음에 담다.

 

누군가는 정은임의 떠남으로 자신의 20대도 떠났다고 토로했다. “당신이 있어 물 찬 장화를 신은 것처럼 불편하고 고달팠던 20대를 버틸 수 있었다”고 “이제는 저도 당신처럼 그 누군가의 20대를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겠다”는 다짐. 그 끝에는 “사랑합니다”라는 뒤늦은 고백을 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과거로 돌아갔다. 이제 ‘정은임’은 마음에서만, 기억의 회로를 돌릴 때에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됐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치지 못한다. 희망의 불꽃을 지피던 그 나지막한 음성은 없다. 디지털로 박제된 ‘과거’만이 남아 있게 됐다. 마음에서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누군가를, 무언가를 담아둔다. 사랑, 우정, 존경, 선망 등과 같은 이름부터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여러 모습으로. 상황에 따라 경계를 오가며 그 모습을 바꾸기도 하지만 쌍방향이건 일방통행이건, 신호등을 무시하건 그렇지 않건, 한가지건 여러 가지건, 일단 마음에 담기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채우기 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Before’와 ‘after'의 간극을 메우는 건 애당초 불가능이다.

 

그래서 마음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다. 컵에 물을 채운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 씻으면 그만이라고? 천만의 말씀. 씻는다고 그 컵에 담겼던 물의 기억이 깡그리 없어지지도 않고 씻을 때 사용한 물이며 퐁퐁의 향내는 미세하게 컵을 ‘예전과는 다름’으로 인도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기억. 그건 숨이 멎는 그날까지 미풍에도 흔들거릴 수 있는 잎새다. 그래서 마음에 담겼던 대상을 잊었다고, 지웠다고 애써 자위하는 건 무의미하다. 

     
나 역시 그의 팬이었다. 그는 내 마음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충직한 팬은 아니었다. 사실, 대학시절에 새벽 2~3시를 관통할 때는 술 먹을 때였지,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하 정영음)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어쩌다 듣던 라디오. 그냥 그 존재만 각인하고 ‘정영음’ 매니아들의 무용담만 얼핏 들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은임은 뉴미디어시대의 도래와 함께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스타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PC통신에서 만들어진 ‘정영음’은 아나운서를 위한 최초의 팬클럽이었고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TV프로그램도 아니고 라디오 중에서도 누구나 잠들어있을 법한 시간대, 그것도 영화음악이라는 한정된 장르를 다루고 있었지만 정은임을 향한 팬들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건 바로 정은임의 ‘힘’이었다. 정은임은 어쩌면 한 시대의 ‘초상’이었다. 그 90년대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정은임은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그의 분신이던 정영음은 영화강좌 역할을 했으며 당시의 영화 붐을 주도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불을 끄고 잠자리 맡에서 듣는 정은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결기가 묻어있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감수성의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정은임이 들려주는 영화음악들은 영화보다 더욱 감미롭고 마음을 헤집기도 했다. ‘정영음’은 그렇게 브랜드화 되어갔다.

 

정은임은 또한 그렇게 다가왔다. 작은 목소리에도 나는 귀를 기울였고 내 마음에 정은임이, 정영음이 담겼다. 마음의 끌림은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연스런 흐름이다.

마이너를 위하여

 

여러 보도를 통해 나타났듯 당시 정영음과 관련한 무용담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정은임은 20세기 반공 파시즘의 흔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볼셰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와 80년대 대학생들의 애창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중파 라디오를 통해 전파(!)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의 죽음’을 방송을 통해 추모했다.

 

정은임은 그랬다. 멜랑꼬리한 말로 한밤중 어스름이 안겨주는 낭만을 마냥 읊조리지 않았다. 영화와의 연결고리를 찾아 사회와 인간, 소외, 노동, 빈민 등에 대한 자신의 색깔을 입혀 청취자들에게 작지만 호소력 있게 속삭였다. 그것이 정은임이었고 많은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새벽녘의 라디오방송이 마냥 ‘잠자기’만을 위한 ‘수단’이 아님을 정은임은 증명했다. 과연 정은임이 아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건 정은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정은임을 향한 소리없는 열광도 거기서 비롯됐다. 한 사람이 세상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

 

정은임은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새벽녘의 공기를 뚫고 정은임의 목소리는 그렇게 청취자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내게도 그래서 ‘정은임’은 달콤함만을 선사하던 당의정이 아니었다. 때론 사회의 아픔을, 치부를 폐부 깊이 밀어 넣던 쓰디쓴 극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꿀꺽 삼키고 소화해야 할.

 

나는 소망한다, 그 군불이 횃불이 되길...

 

그런 정은임의 떠남과 복귀, 그리고 다시 떠남은 그래서 극적이었다. 1995년 4월 1일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께요”라는 마지막 멘트가 흘러나오고 정은임은 울먹이고 있었다. 팬들도 함께 울먹였고 마지막 그 멘트는 MP3로 저장돼 인터넷을 배회했다. 정영음의 팬들은 그렇게 정은임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10월 정은임이 다시 ‘정영음’으로 돌아왔다. 유학의 길에서 돌아와 다시 ‘정영음’을 꾸렸다. ‘두렵다’는 고백에도 불구, 정은임은 여전했다. 정영음의 부활했고 그 젊은 혹은 어린 날의 기억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그건 누군가의 말마따나 오아시스였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는 금방 말랐다.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기엔 지독하게 부족했다. 지난 3월 MBC라디오의 봄 개편은 정영음을 다시 ‘한때의 기억’으로 몰아넣었다. 팬들과 청취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정은임의 목소리는 다시 그렇게 공중에 흩날려야 했다. 다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란 기대만이 가슴 속에서 자맥질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도 이제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됐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잃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슴 속에 담아둔 무언가를 영영 떠나보내고 그 공간을 영원히 과거의 것으로만 박제해 놓아야만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기억 혹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란 기대조차 상실하게 되는 건 마음 한 칸을 비워내야 한다는 얘기다. ‘Before’와 ‘After’의 간극을 메울만한 대체재는 없다.

 

나는 그의 죽음 앞에 울고 싶었다. 정말 이제 다시 어디에서도 정은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지난 봄 개편 때 없어진다는 소리에도 다시 돌아올 것이란 ‘희망’으로 채웠던 가슴이 덜커덩 발밑까지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이미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랑을, 내 마음의 불꽃을 꺼뜨릴 수는 없는 법이다. 내 가슴을 따뜻하게 지펴주던 정은임의 목소리를 'Delete' 키를 누른다고 없앨 수는 없다.

 

정은임의 죽음을 추모하는 팬들도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되새김질하겠지만 아마도 일상은 곧 이를 덮을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코미디 프로나 드라마를 웃고 즐기며 친구들과 술 한잔을 나누며 일상과 줄다리기를 계속 할 것이다. 그러다 어쩌다 한달에 한번이 됐건, 1년에 한번이 됐건, 어느 순간 정은임을 떠올릴 것이다. 그게 대개의 사람살이지만 'before'와 'after'는 분명 다르다. 문득 그가 보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가슴이 저릴 것이다.

 

정은임을 사랑하는 팬으로서 나는 소망한다, 정은임이 피웠던 그 군불이 횃불이 되기를. 어떤 횃불에도 꿈쩍도 않을 것처럼 냉랭한 이 세상에서 금지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다는 말.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정은임은 그렇게 누군

가의 가슴을 영원히 따뜻하게 지펴줄 것도. 정은임이 지난 4월 마지막 ‘정영음’ 방송에서의 마지막 오프닝 멘트로 했던 그 ‘서시’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안녕하세요?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FM영화음악 문을 열었는데요

서시.
우리말로 여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시를 쓸 사람이
영원한 시작의 의미로 쓴 글이죠.

항상 아이러니해요.
이 끝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하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골랐어요.

꼭 그 마음 입니다.

단 한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자, FM 영화음악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오늘 첫 곡 들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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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지 못할 「정은임의 영화음악」 
월간 『말』 1월호, "올드 걸 올드보이를 만나다"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던 정은임 MBC 아나운서가 4일 저녁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고인이 진행했던「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습니다. 고인은 MBC 노동조합 여성부장과 업무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방송 현실 개선에도 앞장서 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월간 『말』 1월호 문화인물탐험에 실렸던 아래 기사는 고인이 살아 생전에 했던 마지막 인터뷰입니다.

올드 걸, 올드 보이를 만나다

지난 12월 5일 저녁,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2003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의 사회를 보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한 여성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정은임 누나다!"

삼십대 중반은 돼보이는 영화인의 입에서 터진 '누나' 소리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이 정은임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정은임(35). 1992년 11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매일 새벽 1시면 대중들 앞에 목소리를 드러낸 이래 그와 그의 방송은 하나의 '물결'이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 위주의 영화 소개로 일관하던 당시의 영화음악 방송 풍토에서 FM 영화음악은 날카로운 사회비판, 새로운 영화읽기로 1990년대 문화빅뱅의 시대를 진보적으로 지킨 상징이었다.

영화 「파업전야」가 특집으로 편성되는가 하면, 「인터내셔널」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나와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고정 패널로 출연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정은임씨의 대화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보적 영화읽기'의 텍스트가 되어 회자되곤 했다. '정영음'이란 고유명사로 불리우기도 했던 이 방송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고 정은임은 그 안식처를 지키는 누이요, 연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방송을 진행하던 날 어느 중학생은 수학여행길에까지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가 여관방에서 들으며 눈물지었다. 그날 방송에서 정은임은 "꽃 지는 날 만났다가 꽃 피는 날 헤어진다"며 이별의 회한을 달랬다. 1995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달갑지만은 않았던 방송복귀

그리고 8년 6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20일. 다시 「정은임의 영화음악」(MBC FM)이 돌아왔다. 매일 새벽 3시부터 4시, 그의 말처럼 '청취율의 사각지대'인 탓에 신경 쓸 것 없어 더욱 편한 심야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겨울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난 그에게 던진 첫 마디는 "꽃 피는 날 떠났다가 꽃 지는 날 돌아온 소감을 말해달라"는 말이었다. 감개무량의 감회를 기다렸던 기자의 기대와 달리 그는 "영화음악을 별로 맡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의외였다.

"걱정되는 일이 많아서 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면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MBC에서 없애려고 했거든요. 지금 영화음악이라는 게 독자적인 무엇이 있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음악을 삽입하는 수준이잖아요. 전세계적으로도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남아 있는 곳이 몇 곳 안 돼요. 그걸 몇몇 피디가 몸으로 막아내서 그나마 버텨왔죠."

걱정되는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8년 전 그가 영화음악 진행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애청자들이 '정은임 복귀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나선 것이다. 최초의 대중매체 소비자운동인 셈이었다. 이들은 정영음의 사회비판적 내용과 진행자의 적극적인 노조활동 때문에 방송사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와 중도하차하게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해 왔지만, 당시 입사 4년차의 방송 노동자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쏟아졌던 유형무형의 '파장'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쉽게 가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와 영화음악을 연관지으며 회사 밖의 사람들과 달리 회사 안에서는 뭐랄까, 당시 그 사건을 해사행위 비슷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어요. 마치 제가 바깥의 사람들을 움직여서 어떻게 한 것처럼 사시를 뜨고 쳐다보는. 제가 결벽증 같은 게 있는 데 그런 오해가 부담스럽고 싫어서 '나는 정당하다, 차라리 방송진행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한번은 영화 관련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하는데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어떤 사소한 일조차도 소영웅주의로 바라보는 식이었죠.

사실 2년 전에도 영화음악을 하기로 했다가 회사 내에서 잡음이 일어나 그만둔 적이 있어요. 손석희 부장님이 와서 '네가 영화 일을 안 하는 건 인력낭비다'라며 진행을 제안해서 하기로 했는데 또 주위에서 무슨 끈을 잡았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그때 제가 발끈해서 '나 그렇게 사는 사람 아니다 안 하겠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손석희 부장님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졌어요. 이미 보도자료까지 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시 관 밖으로 나오다

예기치 않은 파장과 그로 인한 부담 속에 영화음악으로의 복귀를 주저할 무렵,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또한 정영음을 사랑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관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니까 더 이상 관 뚜껑을 열지 말아달라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스스로 시체가 됨으로써 정영음을 사랑하던 많은 이들을 결국 '네크로필리아'로 만드는 일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가운데 지난해 정영음과 관련한 다큐를 찍게 됐어요. 거기에 함께 참여하면서 옛날 그 청취자들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달라졌지요. 게다가 이제 일 핑계대고 영화는 실컷 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미끼를 덥썩 물었죠."

그렇게 영화음악실로 복귀한 지 2개월여. 11년 전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터. 그에겐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니 어쩌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디오가 굉장히 어려졌어요. 가끔씩 무슨 이야기만 하면 '너무 이념적이지 않아요? 요즘 애들은 듣기 싫어해요' 이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무조건 청취자들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라디오는 솔직하잖아요. 요즘 다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얼마나 사적인 이야기나 농담 따먹기 같은 멘트를 많이 하나요? 그런데 왜 제 생각을 드러내는 건 안돼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제 일상 중의 하나거든요. 세상이 얼마나 모순적인데, 방송에선 여전히 예쁜 말만 골라서 해요. 그리고 우리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굉장히 즐기지요."

정은임은 가령 창사특집방송이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코너에 아나운서들이 차출되어 나눔의 정을 호소하고 돈을 모으는 일을 동료들끼리는 '앵벌이 뛴다'라고 표현한다며 종국에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방송의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과거의 정영음이 그랬듯 방송과 사회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그의 목소리도 함께 떨리곤 한다. 복귀한 뒤 두 번째 방송을 하던 날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기자는 가슴이 떨렸다.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는 스스로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겨우 매달린 기분으로' 청취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최신유행의 피곤한 수다로 점철되는 FM 방송에서는 물론, 여느 개혁적이라는 매체에서도 이처럼 애틋한 멘트는 듣기 힘들다. 단순히 싸구려 감수성으로 포장할 수 있는 깊이가 아닌 탓이다. 적지 않은 양의 방송 멘트를 써내려가는 일도 때때로 그의 몫이다. 그런 만큼 그에 따른 부담도 함께 돌아온다.

노동자, 그리고 8학군 기자들

"오늘은 이 이야기 안 하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힐 것 같다는 날은 꼭 직접 써요. 영화도 시선이 다르면 달리 보이듯이 어차피 방송을 진행하는 제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굉장히 비난 많이 받았어요. 나더러 노동자에 대해 뭘 아느냐. 육체노동자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뭘 아느냐고 이야기하더군요. 거기에 방송이나 언론의 허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마이크나 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SF 영화 같은 세상 아닌가요. 모든 것이 나의 물적 좌표에 따라 바둑판처럼 이미 짜여진 세상. 너는 중산층이고, 한 달에 얼마 버니까 얼마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라는 거죠.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손배가압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보면 괴롭고, 고민되고 그런 걸 이야기하고 다른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난 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할 수 없나요? 왜 '8학군 기자들'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방송국에도 정말 8학군 출신 기자들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점점 뉴스에서도 시선이 한쪽으로만 흐르게 돼요. 노동자, 농민 이야기는 그들의 생리나 환경과 맞지 않아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눈도 돌리지 않고. 말은 심각하지만, 그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전혀 심각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옆에서 투명인간화되어 버리는 청소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인데."
 
MBC 입사와 관련해 정은임씨에게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그가 입사했던 1992년은 MBC가 방송민주화를 내걸고 한창 파업 중이던 시기였다. 수습사원들에게 예의 노조불가입 각서가 강요됐고, 그는 입사동기 중 유일하게 방송사 간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파업에 참여한 '강성'노동자였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네 살배기 아이의 엄마이자 노조의 간부(여성부장)로 재임 중인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직장 탁아소를 설립하는 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그가 관련 법률까지 직접 챙기며 일을 벌이자 주변에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MBC 쯤 되는 거대 방송사조차 그와 같은 악바리가 나서지 않는 한 여느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MBC에서 그를 만난 날도 저녁에 노조회의가 잡혀 있다며 굵은 서류뭉치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행복한 영화 읽기

1998년에 그는 방송활동을 잠시 접고, 미국으로 영화공부를 떠났다. 그가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제목은 '한국의 영화마니아'. 1990년대 초반 정영음을 통해 일군의 영화마니아를 배출했던 당사자이기도 한 그에게 한국 영화와 영화마니아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일단 영화판이 엄청나게 커졌죠. 영화라는 것의 속성이 어차피 상업적이에요. 어떻게 보면 상업성 일변도로 가고 있긴 하지만. 대중들은 예전과 크게 차이 나는 건 없다고 봐요. 예전에도 영화를 진지하게 보는 계층이 20%밖에 되지 않았죠. 문제는 커다란 강이 있으면 거기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지류가 있어야 문화적 자생력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일 테죠. 그런 지류들의 움직임이 아직은 제 기를 못 펴지만 점점 나아지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독립영화 같은 데서 그런 움직임을 발견해요.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수일지라도 이런 게 있다는 걸 알려야죠. 그게 미디어의 기능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엄청난 사명감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자연스레 말하고 전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행복하게 느껴져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게 중요해요. 가령 박찬욱 감독 같은 경우 평론가 시절에 만났을 땐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긴 했지만, 참 빌빌거렸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 보면 저렇게 훌륭한 감독님이 돼 있잖아요. 그런 성장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정은임씨는 최근 본 영화 중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수작으로 꼽는다.

"「올드보이」를 보면서 송두율 교수를 떠올렸어요. 괴물이란 존재는 어떤 사회나 집단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걸 뜻해요.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생각이나 사상 모든 것들이. 영화 마지막을 보면 결국 최민식에게 근친상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나오거든요. 말하자면 괴물로서의 그 삶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최면을 거는 사람이 어쩌면 감독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감독은 최민식이 괴물인지, 혹은 그를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우리 사회가 괴물 같은 것인지 말이죠.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해석의 시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한 영화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는 건 당연하고요, 심지어 어떤 관객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마저도 좋게 느껴지더군요."

올드 보이와 올드 걸의 연대

이 쯤에서 '올드 보이와 관련해'(?) 정영음과 『말』독자들에게 한 가지 '뉴스'를 알려야겠다. 그건 올 1월부터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도 정영음에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정영음의 방송재개 이후에도 꾸준히 "정성일씨를 출연시켜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정영음의 극성팬들에겐 더없는 희소식일 터. 그런데 정성일씨가 복귀하게 된 과정엔 정은임씨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이를테면, '소녀, 소년을 꼬시다' 정도가 될까.

"복귀하면서 정성일씨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돌아온 답장이 '나는 이제 올드 보이다'라며 고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무슨 소리냐, 나는 관 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다. 나야말로 '올드 걸' 아니냐고요(웃음). 그렇게 곡절 끝에 일단 한 달 동안만 함께 하기로 했어요."

누군가 한때 "한국에서 영화광의 여러 단계 중 그 첫 번째 단계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때 영화광의 1단계에 진입했던 '올드 보이'들은 영화광의 나머지 단계의 진입에 성공했을까. 그리고 한국영화판을 바꾸기 위한 '올드들의 연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겨 '올드 걸'의 반열에 오른 정은임씨의 경우 '열린 영화광'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또 신성한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전엔 바보였어요. 절대적인 진리를 믿었죠.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이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남들을 용납하지 않았아요. 누군가는 그걸 매력이라고 했지만요. 그게 아이를 기르면서 달라졌어요. 과거에 나는 너무 나만의 언어로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의 언어를 하나둘씩 이해해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세계가 있고, 그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 하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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