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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 22번째 해고노동자 소식을 접하고...

  • 등록일
    2012/04/03 11:54
  • 수정일
    2012/04/03 12:02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로 많은 수의 노동열사들이 나오고 있고, 쌍용자동차는 22번째 노동열사가 해고는 살인임을 보여주며, 자신의 집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쌍용자동차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현장투쟁이 단사의 벽에 갇혀 전국적노동자투쟁으로 불붙지 않은 현실 단사노동자 모습이다.  장기투쟁사업장, 정리해고투쟁사업장 등등 무수한 노동자투쟁사업장에서 민주노조 깃발을 부여잡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현장상황에서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현주소가 어떠한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금속산별 96년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을 기치로 출범한 금속연맹 그리고 금속노조 그리고 이후 만들어진 각종 산별연맹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확대는 공장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는 하나라는 기치로 출범하였으나 지금 현재 변현적 산별노조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산별 소산별 논쟁으로 산별노조의 문제가 붉어졌으나 현실조건에 맞춰 대산별로 건설된 각 산별노조는 과연 민주노조 조합원 조직화를 위한 조직으로 거듭났는지.... 그리고 산별이 커지면서 불기시작한 노사협조주의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투쟁으로 이룩하였던 노동악법 철폐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IMF 금융위기로 불기시작한 노사정협의회로 인한 정리해고제 도입에 따른 불안정노동자 즉 비정규직 양산이 본격적이었다.

 

이러한 과정 김영삼정권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저지 투쟁을 막았던 우리가 경제위기라는 자본이 만들어낸 위기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후로 진행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울분, 분노가 한이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민주노조 깃발을 내려야 했던 민주노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단위사업장에서 무수한 현장열사들이 얼마나 배출되었던가?

 

96,97년 조합원 투쟁은 아래로부터의 현장노동자 투쟁이었고, 노동자가 세쌍을 바꾸는 역사의 주체임을 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우리는 일깨울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경제위기에 따른 자본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98년 IMF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총자본에 맞선 투쟁의 전선을 희석화 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판단해 본다.

 

이후 벌어진 비정규직노동자 투쟁과 한라조선소(현 현대삼호조선소), 대우자동차, 한통계약직투쟁, 철도, 가스, 발전, 쌍용, 전교조 네이스투쟁 등등 무수한 투쟁은 민주노총의 총파업의 위력을 실감하기 보다는 조직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이 만들어낸 투쟁이었다.

 

그러한 언제부터인가 산별에서는 조직적 역량을 강하하기 위한 확대간부투쟁으로 총파업 지침이 변경되었다. 대공장이 아닌 중소영세사업장노동자, 장기투쟁사업, 정레해고사업장 투쟁 대오만이 총파업에 참가할 수 있었다. 실직적 아래로부터의 조합원 대중투쟁인 총파업이 간부파업으로 바꾸는 현상을 우린 지난 총파업 일명 뻥파업에서 여실히 봤다. 그리고 이 파업이 자본과의 임단협이랴는 경제적 측면을 벗어나 사회적 의제와 악법철폐를 위한 정치총파업으로 전화되지 못한 채 유실되는 파업이 현시점까지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전체노동자투쟁의 지위를 유실시키고 단사라는 벽에 한정된 투쟁으로 만들고 있다. 여전히 우린 대공장 조직노동자 투쟁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대공장 노동자의 투쟁과 조직노동자의 투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와 대공장 노동자들의 현장투쟁과 노동자 정치적 부대로 재편되지 않는 이상 과거의 노동운동의 선진부위로서의 대공장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현장강화는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운동으로변화시키기 위한 현장노동자 조직화와 노동자정치에 대한 각성이지 않을까 개인적 판단을 가져본다.

 

확대간부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평조합원들과 소통하고 조직하는 민주노조의 기치가 되살아나야 한다.

 

열사정국 그러나 참 무기력한 노동조합운동의 모습을 21세기 우린 목도하였다. 대우, 발전, 한통계약직, KTX비정규직 투쟁 등 사회적 의제를 제시한 투쟁이 많았으나 이 투쟁이 전체 노동자 투쟁으로 일구어내지는 못한 것이 현시점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는지...... 

 

쌍차노동자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한진중공업, 유성, 재능, 콜트콜텍악기, 보워터, 풍산, KEC, 코오롱, 현차 비지회, 전북고속 등등 보면 자본의 총단결하여 노동자의 삶과 생명줄을 옥죄여 오지만 우린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있다.

 

노동자 단결투쟁과 총파업 투쟁은 구호에 그치고 있다.

쟉년 한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필두로 조직노동자에게 희망이라는 단어가 전국적으로 노동의제를 알리고,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라는 사회적 의제를 사회화 시켰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왜 조직노동자들 특히 평조합원들 속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싹튀우질 못하는 것일까? 이는 현장조직화가 무너졌다는 소식이다. 확대간부이상 투쟁을 벌어낼 수 없는 \현 조직노동자들의 현실이기에 그토록 목성높여 외쳤던 변혖적 산별노조가 아래로부터 붕괴되어지고 있고 바닥을 쳤다는 소리이다.

 

이제 무엇부터 자본에 맞서 총노동진영의 총자본진영과 대적할 것인가?

극명하다 첫대 현장노동자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이다, 확대간부가 현장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을 조직하고, 현장에서 노동운동의 의제들이 생산되고 토론되고 학습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자본의 문화가 만연된 현장에서 다시금 노동자의 문화와 삶이 조망되고 이를 통해 신명나는 대동굿판이 벌어지는 현장을 복원하여야 한다.

 

생산의 주체 공장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자본가에게 여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자동차를 만들고 노동을 통해 역사를 일구는 자가 누구임을 각인시켜야 한다.

쌍용자동차 투쟁을 필두로 무수히 산개한 노동자 전국현장에 대한 순회와 전국 노동자 조직화를 통한 투쟁을 준비하고 자본가정권과 일대 격돌을 위한 총력투쟁 조직화를 통한 총노동진영의 총파업투쟁을 벌어야 한다.

 

96,97의 노동자 투쟁의 자신감을 갖고 노동악법 철폐 투쟁의 자신감을 갖고 역사적 주체인 조직된 노동자가 이제는 나서야 한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나서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폐, 노동악법 철폐, 제조업 노동자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한 기치를 내걸고 투쟁에 나서야 한다.

 

권력재편기에 맞서 4월 투쟁을 위한 조직정비와 5월 1일 총파업투쟁을 위한 전국노동자순회투쟁단을  통해 새롭게 국회를 장악한 이들을 압박하고 총자본과 총노동의 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

 

노동열사정국이다. 무기력함과 나약함을 벗어나 이제 투쟁을 조직하고 총자본과 일대 격돌을 준비하여야 한다.

쌍차의 해고는 살인이다! 구호를 박차고 일어나 노동열사정국에 우리는 투쟁을 조직하고, 총파업투쟁으로 자본의 악법에 숨죽여야 하는 노동자의 울분과 분노를 한데모아 퐁자본에 노동자의 의지와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반드시  

 

과거 노동열사 죽음을 회상하며.... 

 

연이은 자살보도가 언론을 통해 타전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노동현장에서 굴욕의 노동을 강요받던 노동자들의 분신, 자살정국 또한 올들어 간간히 들려온다.
 
태 풍 매미때에도 골리앗에서 한진 사측과의 성실교섭을 요구하며 투쟁의지를 굽힘없이 전개해온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위원장은 태풍의 강인함보다는 자본의 악랄함에 투쟁의 의지를 굽히고 노동열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오늘자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1970년 전태일열사의 외침이 아직도 이  땅 천만노동자들의 가슴속에 있는데.... 무엇때문에 노동열사가 되어야 하는가? 투쟁이 힘겹다 못해서 그런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선택 그 안엔 노동자 하나하나에 대한 진심어린 신심이 있었기에 그러한게 아닌가 추론해 본다.


올 초 배달호 열사의 분신.... 현장에와도 재미가 없다라는 짧은 말과 유서 글  현재 노동현장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 노동상황을 우린 무엇으로 돌파하고자 노력하지만 견고히 버틴 자본과 정권은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를 내세워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IMF 경제위기 후 찾아온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노동현장에서 근무한 노동자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죽음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불어닥친 구조조정을 앞세운 정리해고 정국은 많은 노동자들을 정든 일터에서는 물론 이승의 삶을 접게 하였다. 많은 노동자들의 분신, 자살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우린 노동열사정국에 무엇을 하였는가?
노동열 사의 죽음은 열사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1천만 노동자들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엔 우린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91년 한진중공업 위원장이었던 고 박창수열사 정국과 지금과는 다르다. 1천만 노동자들의 아니었지만, 선진노동자들의 분노어린 절규 그리고 안양시내를 관통하는 박창수 열사 사수투쟁이 굴과 12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배달호 열사 그리고 오늘 소식을 접한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힘을 결집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도 그럴 것이  지금시대를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정리해고라는  무기를 든 자본은 언제든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고  있고, 정권은 법제도라는 명분을 앞세워 노동자들의 죽음을 종용하고 있다.

열사들의 절박함이란 다름아니다. 노동자가 자본과 정권에 대항하지 않으면  지난 날 선배들이 쌓아온 노동운동의 힘이 퇴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산화해가면서 노동운동의 횃불로 승화한다. 노동자들을 사랑하기에 아픔을 머금고 황천 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이다. 더이상 있어서는 안되는 그 길을..... 시간이 지나면 아픔이 사라지는 현실이지만 지금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극단의  방법을 선택한다. 열사정국이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열사정국을 우린 노동자들의 총자본과 정권의 대항투쟁으로 만들어 내고 있지 못하다. 과연 무엇때문인가? 과거에 비해 노동운동이 개별화 파편화 그리고 조합주의 시각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노동운동의 총단결 총투쟁이라는 단결투쟁의 원칙이 개별노조의 조합주의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 이다. 이를 극복하고 현 노동열사정국을 전체노동운동 투쟁으로 만들어야 한다.

열사여 고이 잠드소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다고 나는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노동열사... 그리고 무수한 열사들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살아갈 날이라는먼 미래에 대한 삶의 희망이 있을까? 반문해 본다.


짧지만 세상에 대한 인식을 하고 살아오면서 많은 열사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또한 허락치 않는 세상이다. 노동해방 세상이 금새 올줄 알았지만, 노동해방은 우리에게 먼 미래 그리고 언젠가 올 희망의 세상인지 의구심 또한 든다. 열사들이 무수히 배출되고 있는 지금의 정국에 우린 너무 쉽게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가? 투쟁보다는 타협을  선호하고 있는 지금 노동운동의 조건에서 과연 열사가 고이 잠들수 있을까?

우리는 투쟁으로 화답을 해주어야 한다. 명백한 투쟁에 우린 그동안 무기력함  나약함을 단번에 날려 노동해방 깃발을 나뿌끼며 수세적 투쟁에 공세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집회는 짧게 투쟁은 길게라는 선명한 투쟁과제를 선정하여,  타협으로 잃어버린 용기와 노동해방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우린 투쟁으로 열사의 마지막을 노동해방 횃불로 승화시켜야 한다.
 
타협과 회유에서 벗어나 투쟁의 현장으로....
그 동안의 노동운동의 타협 그리고 무수한 투쟁 철회를 위한 회유로 점철되어져 왔다. 투쟁해서 패배를 한번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는게 나의 속내이다. 그러나  기존 노동운동의 패배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용기 있는 투쟁은 커녕 파업투쟁 고양시기 투쟁을 정리하여 선진노동자들로부터 빈축을 샀으며,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심각히 훼손하였다. 혹자들은 노동자 투쟁에 있어 과격투쟁이 대안이 아니며 구시대적 산물이라는 비판하지만 노동자들의 절박함을 방패와 곤봉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과 정권임을 알아야 한다. 평화를 보장하지 않기에 시위가 과격화된 것이지.... 시위가 과격하기에 공권력이 과격한 행동은 한다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지켜내지 않으면 누구도 노동자들을 지켜줄 수 없기에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나서는 것이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기존 국민대중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노동자 투쟁의 대중적 확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의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린 되살펴 봐야 한다. 이는 노동운동의 대중성에 얼마나 심각한 훼손을 하였는지를.... 노동운동 이건 노동자가 대다수인 이 땅에서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노동자라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타협과 기회를 넘어선 현장강화로 열사 정국투쟁의 횃불을 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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