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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과잉 이데올로기

  • 등록일
    2014/01/19 11:18
  • 수정일
    2014/01/19 11:19

희망이라는 과잉 이데올로기

제작 년 12월 대선 이후 우리는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의 죽음에서 그리고 이은 현대중공업 이운남 열사의 죽음에서 희망의 과잉으로 인한 그리고 희망과 상반되게 투쟁이 전진과 승리를 향한 치닫음이 없음에 스스로 이승의 삶을 던지는 희망의 뒷면인 절망을 보았다.

여전히 구체적 상 없이 투쟁은 희망으로 치닫고 희망을 노래한다. 그 희망 속에서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 인민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박차고 일어서기 위한 처절한 자본과의 투쟁의 연속 아니 매일매일 투쟁의 날들이다.
희망투쟁 승리의 외침은 널뛰기하는 시기... 이곳저곳이 자본과의 전쟁터이고, 이 전쟁터가 이미 10년이 넘긴 투쟁사업장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투쟁에 지쳐 스스로 투쟁을 접어야 했을 투쟁사업장이 또한 한둘이 아니다.

대중성에 기인한 투쟁의 자생성의 한계에 스스로 놀란다.

작금도 그렇다. 민주주의 외치며, 박근혜 정부 퇴진까지 기치가 올랐지만 정작 우리내 노동자 인민의 삶이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세상이 변화할 것인가? 선거의 문제인가 민주주의의 문제인가?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들의 향연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투쟁은 타전된다.
민주주의 수호와 국민 총파업이라는 구호까지 상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속에서 투쟁하는 주체들 특히 10년 풍찬노숙 투쟁의 당사자, 그리고 이 땅의 소외되고 자본과 국가폭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인민들의 삶은 녹아나 있지 않다.

총파업 투쟁이라는 설정으로 투쟁만 하면 된다는 그 발상이 소스라치게 한다.
투쟁의 목적과 그 투쟁이 갖는 사회적 함의가 실종된 투쟁은 우리 지난 과정 촛불과 여러 투쟁에서 이미 봐왔다. 막연한 대중성에 기인하지 않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교훈까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투쟁을 이끌어 나갈 단위가 부재하고 고민이 부재하다. 막연한 대중적 자생성에 기인한 투쟁만을 외치고, 모든 문제를 하나로 치환시킨다. 박근혜로 민주주의로 자본만의 문제로 그 경향성들이 우리의 패배를 부채질 하고 작금의 철도노조 파업이 갖는 사회적 함의를 정치권에 기대는 현상을 갖게 하였다. 판단된다.

파업의 기치를 든 자들 사회적 파업은 아니지만 그 현장투쟁이 자본과의 전쟁에서 어찌해야하는 것은 현장노동자는 잘 알고 있다. 승리 아니면 패배는 곧 생존권 벼랑으로 치닫는 현실이기에... 인민들 또한 알고 있다. 그 패배가 자신의 삶의 터전 그리고 삶이 이룩한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싹 쓰러 버린다는 것을.... 그러나 정작 이 투쟁의 지도단위만은 모르는 것일까?

아직도 희망이 타전된다. 그러나 그 희망에 난 이전 희망이 그랬듯이 널뛰기하는 희망에 마음한켠 아리고 불편하다. 한곳의 희망도 불 제대로 지피지 못하면서 투쟁을 위해 대중운집을 위해 그 희망을 모아내고 모아내는 모습이 참으로 불편하다.
투쟁만이 희망이라고 투쟁을 위해 나서는 의로운자들 투사들이 많지만 그 투쟁에 우리 투쟁하는 주체들과 함께 자신의 생 걸고 투쟁하는 자 몇이나 될 것인가? 현장을 일으켜 조직하고 학습하고 실천하고 그 투쟁지지 엄호하기 위한 우리의 노래 얼마나 부르짖을 수 있을 것인가?

2003년 노무현 민중탄핵 때 운동을 떠난 사람들이 마치 과거를 벗삼아 투사가 되어 움직이는 선배들의 모습이 불편하였다. 운동을 한 시간보다 운동을 이야기로 풀어 술안주로 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불편을 넘어 불쾌하기도 하였다. 우리내 투쟁이 술한주 뒷풀이 이야기 담화가 아니거늘 우리 내는 내 삶의 목적성과 부합하지 않는 삶에 주변인이면서 주체가 되지 못하면서 그 삶을 조망하고 그 투쟁에서 자신의 위치를 과거의 향수를 달래는 이도 적지 않음이 불편하였다.

이 세상을 이끌고 나가는 이들은 그 희망의 대상도 있지만 정작 우리가 외면했던 그 투쟁하는 자들이 이 땅의 노동을 희망을 밝히고 밝혀 나갔다. 그 치 떨리는 역대 정권에 의해 길거리로 내쫓기고 자본으로부터 쟁취한 것을 지키지 못한 우리 내 노동의 무심이 지키지 못한 비겁이 그 자리에 있다.

현실 자본의 분석 또한 투쟁과 이 시기 노동이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이지... 자신의 노동의 터를 지키기 위한 보신을 위한 무기가 아니거늘.... 우린 투쟁의 무기 내려놓고 관망과 연구 그리고 이에 따른 고심만 한다.

나의 단사의 문제로 닥치기 이전에는 말이다.

작금의 투쟁이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내 깊은 숙고 그리고 승리를 위한 길 어찌해야 하는지 우리 내 깊은 고민이 들어야 한다.

작금 한국사회가 어디로 치닫고 있는지 정권과 자본에 대한 우리의 노동이 인민이 어찌해야하는지 선명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반짝인 225국민총파업 총파업이 우리내 기나긴 노동자 투쟁과 현장과 만나지 않으면 어찌 되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투쟁의 선행에 대한 고민 조직, 실천, 학습이라는 그 조직노동자의 움직임이 어찌하여야 하는지 잘 알면서 그것을 묵인한 채 여전히 대중적에 대한 자생성의 폭발을 바라는 것 자체....

현시대의 문제로 과거 민주주의 정권의 문제로만 치환하는 우리내 그릇된 낮은 인식이 참으로 부끄럽다.

어찌해하는지 우리 작금의 투쟁사업장 모습과 그 투쟁과 함께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의 널뛰기가 아니라 그 투쟁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투쟁에 대하 진정성으로 역사를 밀고 나갔으면 한다.

여전히 이 땅의 노동자 인민은 이 사시사철 길거리에서 풍찬노숙으로 투쟁하고 있다. 투쟁을 타전하고 있다. 이들과 만나고 함께하고 함께 전진하는 투쟁으로 225총파업을 맞이하고 더욱더 큰 투쟁의 함성 키워나갔으면 한다.

당위로서의 투쟁.... 그 투쟁이 갖는 사회적 함의.... 정권이라는 문제로 자본이라는 문제로 쉽게 치환하지 않는 무오류를 넘어선 투쟁을 이끌어 내기를 고대하며.... 횡수를 마칠까 한다.

요즘 타전되는 총파업투쟁의 소식 그리고 막연한 박근혜반대, 민주주의, 희망이라는 것들이 우리내 투쟁하는 노동자 인민의 고통의 삶과 대조되어 불편했다.

p.s 일상 함께하는 우리(노동자, 인민)를 보고 싶다. 투쟁하는 우리를 보고 싶다. 투쟁하는 자 승리에 치닫게 하는 우리의 투쟁이 보고 싶다. 타전되고 투쟁의 날 수 년도수 잃어버리고 하는 투쟁들에 함께하는 우리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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