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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감싸던 신문사 불타 통쾌했다”

  • 등록일
    2005/04/19 10:54
  • 수정일
    2005/04/19 10:54
오늘이 419이구나... 김영삼 정권이 모역을 공원화하여 외관을 치장하였지만... 이전 마라톤이나 도보행사 등의 풍경은 이전만 못한 것 같다. 몇년전만 해도 4.19 행사는 대단하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떠할까.... 특히 고대생들 그리고 서울공대는 그날 대단했지... 당시 419 청량리를 매운 대오가 서울공대와 고대생들이 제일 많았으니까... 대학때 대단한 날이었다... 선배들 묘역을 방문하는 것이.... ---------------- 4·19 혁명 참여학생들의 지필기록 공개 1960년 4월19일 오전 11시 성균관대생 홍아무개(당시 20)씨는 동료들과 함께 ‘독재정치 물리치자’라고 쓰인 펼침막을 들고 교문을 나섰다.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살인경찰 규탄한다”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홍씨는 “8열 종대로 짠 스크럼으로 구보 돌파” 하며 10만여명의 학생들과 시민들로 가득 찬 거리로 나아갔다. 오후 2시20분께 홍씨는 의사당 앞에서 처음으로 사상자를 목격했다. “사람들은 분노로 몰입했다. 독재를 감싸던 신문사가 불타 올랐다. 실로 통쾌했다.” 4·19 혁명 45돌을 맞아 당시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의 외침과 땀과 피를 날것 그대로 담은 기록이 공개됐다. <한겨레>가 18일 입수한 이 기록들은 4·19 혁명 직후 만들어진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학생들이 민주주의의 대열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발로 뛰어 찾아 받아낸 ‘자필 진술’로 이뤄졌다. “한국 현대사에 엄청난 사건으로 기록될 거대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경험과 기억들이 사라지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반 학생이었던 김달중(67) 연세대 명예교수는 4월19일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뒤 같은 과 동기였던 안병준(69) 전 연세대 교수와 혁명연구반을 꾸렸다. 단 2명이었다. “정부에서 나온 공식 자료부터 데모 계획서, 선언문, 학생 수기까지 가능한 모든 자료를 모았습니다. 각 대학 학생 네트워크를 이용했지만 두 명이서 하기에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서울에서 시작해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일어난 마산, 2·28 학생민주의거를 일으킨 대구로 뛰어다녔다. 데모 계획, 주동자 명단, 경찰의 문초 내용, 당시 느꼈던 감정까지 수십가지 항목에 걸친 조사가 이뤄졌다. 수백명의 자료가 쌓여 갔다. “젊은 지성들에 대한 벅찬 감격으로 대열에 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4월19일 낮 서울 아현동에서 전차를 기다리다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연세대생 4천여명을 본 당시 24살 시민 임아무개씨) “공포와 함께 총 쏜 이에 대한 저주가 머리를 관통했다.”(이날 오전 경무대 앞에서 발포 장면을 목격한 당시 22살 장아무개씨) “의정부로 가던 중 앞차 운전자가 이마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순간 나 역시 총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동지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국기에 내 몸을 쌌다.”(이날 밤 11시께 총을 맞은 당시 서울 경신고 2년 권아무개씨) “나는 정의라면 어떠한 강력한 제지라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22살의 고려대생 김아무개씨) 당시 혁명연구반의 조사에 응했던 우행원(66) 전 이화여대 교수(당시 이화여대 의예과 2)는 부상자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여 당시 돈으로 15만환을 모으기도 했다. 김 명예교수는 “4·19 혁명 뒤 정치상황에 따라 4·19를 자기 입맛에 맞춰 이용하는 일이 만연했다”며 “이 기록들은 4·19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있는 그대로의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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