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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도종환] 아름다운 봄날

  • 등록일
    2005/04/19 22:00
  • 수정일
    2005/04/19 22:00
봄 산을 넘다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연두색 물감에다 흰색을 조금 섞어 붓끝으로 톡톡톡 찍어 놓은 것 같은 나무들. 그건 신갈나무 갈참나무 같은 참나무류의 새로 돋는 잎들일 겁니다. 바로 아래에 짙은 녹색의 소나무 잎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 더욱 싱싱하게 연록색으로 빛나는 새 잎의 신선한 채도. 그 사이에 분홍색에다 흰색을 많이 섞어 옅은 연분홍으로 가볍게 칠한 산벚나무들. 골짜기에는 직선의 줄기를 쭉쭉 뻗은 낙엽송 군락. 가까운 산발치에는 희디흰 조팝나무 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이토록 아름다운 산의 풍경은 누가 그린 것일까요.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요. 자연의 힘, 생명의 힘, 신의 손길에 감탄하며 저절로 머리 숙이게 됩니다. 뭉글뭉글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우듬지의 곡선들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고 싶어집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산가의 사계절 풍경 중에 봄의 신록을 으뜸으로 칩니다. 계절별로 두 가지 풍경씩을 선택해 팔경을 삼았는데 그 중 첫째가 봄 산의 신록입니다. 신록이 연록색 깃발을 드는 것을 신호로 산벚나무 꽃이 피고 이어서 자두나무, 앵두, 뜰보리수나무, 배나무가 흰색 분홍색의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골짜기 물이 더욱 맑고 힘차게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붓꽃잎이 쑥쑥 솟아나고 상사화가 단검처럼 빳빳한 줄기를 세우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단도직입. 그렇습니다. 그 옆에 앉아 있으면 상사화 잎은 단도직입으로 대답을 요구합니다. 겨우내 혼자 지켜온 고독의 성에 백기를 꽂을 걸 요구합니다. 상사화가 여기저기서 푸른 칼을 들이대고 앞산에선 나무의 대군이 신록의 창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에 갇혀 나는 그만 무장해제 당하기 직전의 외로운 병사 같습니다. 그런 날은 정말 사과꽃을 혼자 보기 아깝습니다. 상현달 새벽하늘 위에 서늘히 떠 있는 모습을 누군가와 같이 보았으면 싶습니다. 모란꽃 여린 순들이 손가락을 들어 수화로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숨겨진 뜻을 혼자서는 풀지 못하겠습니다. 봄은 이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꽃 피고 만개하여 이 땅에 아름다운 꽃 향기 가득한 날, 나는 한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는 잡보장경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망가지기 쉬운 것이 역경 속에서가 아니라 역경을 이기고 난 뒤 긴장이 풀린 시기입니다. 적과 싸우며 나라를 지켜낸 인물들 중에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동지에 의해 배신당하거나 적이 아닌 동지의 손에 죽는 이가 많았습니다. 함께 싸워내야 할 적이 사라지거나 공동의 목표가 없어진 뒤에는 내부의 분열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절 중에는 겨울을 이기고 난 봄철이 그렇습니다. 게을러지고 해이해지는 것도 이때입니다. 한 생애를 사는 동안 우리가 맞닥뜨린 경계 중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역경계 앞에서는 분노를 조심하고 순탄하게 풀려나가는 순경계 앞에서는 탐심을 경계하라고 스님들은 가르치십니다. 인간은 의외로 어리석은 데가 있어서, 일이 잘 풀리는 시기에는 욕심이 생기고 의욕이 넘치며 그것이 과욕을 불러오고 바로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꽃 중에도 화려하고 현란한 꽃을 피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꽃은 대체로 수명이 짧다고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아름다운 건 생존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 꽃이 성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수꽃은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암꽃은 예뻐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매혹적인 색과 향기를 만들어 내는 물질을 끝없이 생산해 내고, 그리하여 더욱 확실하게 씨앗을 잉태할 수 있게 되지만, 꽃을 피우고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 때문에 그렇지 못한 나무들에 비해 수명이 짧다는 것입니다. 피는 꽃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벌써 지는 꽃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는 꽃만 축복이 아니라 지는 꽃도 축복입니다. 꽃이 피는 날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꽃이 지는 날도 소중하다는 걸 꽃은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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