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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박노자는 되고 우리는 안되는가?

  • 등록일
    2005/07/10 08:39
  • 수정일
    2005/07/10 08:39

왜 박노자는 되고 우리는 안되는가?

 

[비나리의 초록공명] 김지하, 이문열, 진중권, 21세기에 살아남을 사람은

 

 * 출 처 : 대자보(http://www.jabo.co.kr)

 

 * 글쓴이 : 비나리

 

박노자는 73년생이고, 오슬로에 있다. 나보다는 다섯 살 어리다. 물론 나이가 문제는 아니지만, 박노자 앞에서 부끄럽고, 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박노자가 우리 앞에 던진 질문에 대해서 사실 잘 모를만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박노자만큼 철저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21세기로 살아서 건너온 사람은, 박노자 밖에는 없어보인다.

 

장정일은 살아서 건너온 줄 알았다. 찡인 장정일은 90년대 혼자였지만, 혼자서 "섹스에 미친 시대"가 암 것도 아니라고 외치고 있던 건 장정일 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나도 살아서 건너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혼자였고, 지금 돌아보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것에 다름아니다. 강남의 재즈바와 이태원의 일탈들, 이런 것 다 그냥 “섹스에 미친 시대의 부자들과 그 언저리의 일탈에 다름아니다”로 외친 건 장정일 밖에는 없다. 89년도에 사망한 기형도가 만났던 시인만이 있던 도시의 "이상한 소년", 그 장정일은 90년대를 혼자 넘어왔는데, 그 장정일이 아직 살아있을까? 나는 장정일에게 지지를 보내고 싶지만, 지금의 장정일의 모습은 잘못된 이론가들 앞에선 "꽃돌이" 모습에 더 가깝다. TV에서 장정일의 망가진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 장정일도 21세기로 살아서 건너오지는 못한 것 같다.

 

조정래는 살아서 건너왔을까? 참여연대의 참여사회연구소에서 활동하던 시절 조정래 선생을 처음 보았다. 멋졌다. 그렇게 말 잘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러나 지금의 조정래는 영 아니다. 조정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너무 변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조정래는 지금 "완화된 민족주의"의 화신에 다름 아니다. 동북아중심국가를 염두에 두면서 일본에게 대해서 끝없는 적개심을 보이는, 그래서 아직도 서정주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서정주는 이미 사회적으로 폐기처분 된지 오래된다. 그렇지만 조정래는 21세기에도 서정주를 극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미 서정주의 친일성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된 상태에서 조정래에게 남은 것은 완화된 민족주의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대응체를 찾지 못하고 굳어가는 민족주의 밖에는 없어 보인다.

 

백기완 선생은 살아서 21세기를 넘어왔을까? 이제 남은 것은 강연하면서 받은 돈을 혼자 가졌다니, 한 번도 밥사준 적이 없고, 옛날부터 자기 영광 외에는 생각한 적이 없다는, 20년도 더 된 무용담이 전도되어 21세기에 동동 떠 있는 셈이다. 지금도 민주노동당이나 지역운동 했던 할아버지들이 술자리 안주 그 어떤 것도 아닌, 살아서 21세기로 넘어왔다고 평하기가 쉽지 않다.

 

김지하 선생, 소위 지하선생은 살아서 21세기를 넘어왔을까? 본인 스스로도 이제 다음 세대에게 넘긴다고 하였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문득 지하 선생의 큰 그늘 아래에서 나 역시 숨쉬고 살아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시인임에 틀림없고, 또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호쾌하고 호방한 시인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틀림이 없다. "오적의 김지하"는 분명 사회의 것이었고, 그 재능을 하늘이 사람들을 위해서 내려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제는 촌스러운 노인에 불과하다는 점에 대해서 더 눈이 많이 간다. 생명이라는 질문이 작으냐? 작지 않다. 동양이라는 질문이 작으냐? 작지 않다. 그러나 21세기에 김지하 선생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남아있지만, 정작 김지하는 70년대보다 더 옛날로 가버렸다. 흔히 얘기하는 "죽음의 굿판"이 잘못되었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게 내 어리석은 생각이다. 다만 너무 촌스러웠다는 아주 사소한 데에서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훌리건을 처음 본 이 순박하고 마음만은 청년, 김지하 할아버지는 감격했다. 그래봐야 그건 훌리건에 불과하고, 1만 불 시대의 훌리건들은 3만불 국가의 훌리건처럼 국경을 넘나들 경제적 힘이 없고. 경찰 통제와 미디어 지원 하에 국가 폭력과 교묘하게 결합된, 공공질서라는 또 다른 힘에 기대어 연명하는 그야말로 훌리건에 불과하다. 훌리건들에게 "우주의 질서"를 읽는 늙은 시인, 거기에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가? 나에게는 극우파의 기세등등만이 느껴진다.

 

박노해와 김남주, 두 시인의 차이는 생각보다 깊다. 나는 김남주의 시를 더 좋아했다. 내 주위에는 박노해를 더 좋아하는 사람과 김남주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김남주를 더 좋아했다. 민족해방전선의 맨 앞에 서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김남주의 서정성과 시어들을 좋아했고, 솔직히 시인 김남주를 오랫동안 흠모했다. 별 볼일 없는 시인이고, 나치에게 총살당했다는 것 외에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기억못할 시인이지만, 폴 엘뤼아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김남주의 시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엘뤼아르를 좋아해서 김남주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김남주를 좋아했기 때문에 엘리아르라도 좋아하게 된 셈이다. 94년도에 김남주는 옥중에서 퍼진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혼하자마자 죽었다. 그래서 살아서 21세기로 넘어오지 못했다. 살아서 넘어왔다면 험한 꼴을 보았을 것 같다. 박노해는 살아서 넘어왔다. 사노맹의 박노해, 그에게 21세기는 없는 것일까? 영 없어 보인다.

 

정작 살아서 넘어온 것은 신중현이다. 신중현이 매주 연주하던 우드스탁의 라이브를 접은 것은 2002년 겨울의 일이다. 우드스탁의 녹음실만을 남겨놓고 카페를 접은 다음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를 했다. 마음 속 깊은 얘기 한 마디를 남겨 놓았다. "한 명만 있었어도 계속 할려고 했었다..." 아마 우드스탁에 재수없게 한 명도 안 간 날이 있었을 거고, 그 날 신중현은 숨 남아있을 동안에는 끝까지 할려고 했던 우드스탁의 라이브 공연을 접었다. 그러나 아직도 신중현은 서슬 시퍼렇게 살아서, "그런 건 음악이 아니야"라고 여전히 열심히 작곡하고 있다. 그래도 조만간 신중현의 음악은 21세기를 헤치면서 진화하고 있다. 이상은, 이상은은 살아서 21세기 땅을 밟은 드문 경우이다.

 

김광석이 죽고, 꾼 에서 살아남은 이상은은 일본이라는 땅에서 21세기를 만났다. 확인되지 않은 이상은의 여러가지 전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독립된 개체로서 21세기라는 땅을 밟았다. 부럽고 또 부럽다. "쥐고 있던 초록빛 씨앗 보라색 흙에 담그리" (로만토피아 중, 6월 발매) 21세기의 서막이 걷히고, 대한민국 땅에서 진정으로 21세기가 시작된 건 2005년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누가 살아서 건너왔고, 누가 건너오지 못하고, 90년대라는 덫에 걸리거나 자빠져 있는지 조금은 명확해졌다. 나는 시체로 넘어왔다. 89년도에 전체 단식을 기획하던 우석훈은 그야말로 진기 한 줌 남지 않고, 시체로 21세기를 넘어왔다. 90년 10년 동안 한 줄의 글도 남기지 못하고,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하고, 시체만이 남아서 21세기에 흔적만이 넘어왔다.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그날, 난 페트병 3개의 소주를 다 마시고, 그야말로 시체만이 넘어왔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소설 '어리석은 사람"대로 술을 마시고 자살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체만이 21세기로 넘어왔다. 왜 박노자는 가능하고, 다른 사람은 불가능했을까? 그리고 왜 박노자는 진화하는데 다른 사람은 퇴화화거나 퇴행의 길로 빠져들게 될까? 누구나 다 아는 문제 같아 보였고, 다만 박노자는 "금기"로부터 자유로와서 그걸 얘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정도의 평가를 받던 박노자는 이제 한국 최고의 학자가 되었고, 한국 최고의 지성인이 되었고, 또 아직도 계속해서 아픈 질문들을 던지고, 그 아픈 질문들을 증명해나가고 있는데, 다들 21세기라는 공간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죽었을까? 주사파의 패싸움으로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박노해식의 단일 전선으로도 문제가 풀리지 않고, 기타등등의 각패 전선으로도 문제가 하나도 풀리지 않을 뿐더러 더 심각하게 꼬이는 현재의 상황... 도대체 무엇이 차이일까? 왜 박노자는 되고, 진중권은 안되지? 다들 고만고만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왜 훌리건이 박노자에게는 잘못된 근대화의 결과물로 보이고, 왜 김지하에게는 우주의 맥박처럼 보이는 거지? 더 어린 사람들이 등장하면 좋아질 것이라던 80년대의 대체적인 공감이 20년이 지났는데, 왜 더 문제가 복잡해져버리고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 거지? 조한혜정 교수의 해방구, 홍대는 왜 "걷고 싶은 거리"에서 "굽고 싶은 거리"로 바뀌어 버린 거고, 레이지본의 2집은 쫄딱 망한거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놓고 진화시키면, 나쁜 것들의 진화가 더 빠르다는 이유 때문일까? 박노자가 좌파야 좌파가 아니야? 왜 이런 쓸데없는 논쟁들이나 하게 되는 거지? 착하게 살아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덩치만 좀 되면 금방 파쇼 집단같이 되어버리는 거지? ‘노빠’들도 원래 모일 때에는 감동과 선 같은게 좀 있었쟎아? 노빠라이제이션 같은 이상한 법칙이 이 땅에는 흐르는 거야? 그러면 박노자는? 도대체 어떻게 출현과 진화가 가능한 거야? 진보이냐, 진보가 아니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있어서 세상에 도움이 되었느냐? 평가하기는 쉽지는 않지만, 도움이 된 것보다는 도움이 되지 않은게 더 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현재의 모습으로서는 그렇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삶을 빨아먹으면서도 갈 길을 잃고 비둥거리는 공룡 같다.

 

지금은 마치 종교처럼 동지와 동지 아닌 사람들을 구분한다. 그리고 자기처럼 희생하지 않으면 동지 아니라고 삐지기 일쑤다. 시민단체는? 너무 많아졌다. 그리고 기형적으로 커졌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서 유지하기 위해서 고생해야 하는데, 정작 "아웃풋"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결과물이 너무 조금이다. "에게, 이걸 할려고 그렇게 고생한 거야?" 더 문제인 것은 젊은 활동가들의 성과물을 몇 사람이 너무 쉽게 챙겨가 버린다는 거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조직들이 너무 많지만, 눈물만으로 서로 버티고 잇다는 건 실상을 너무 어렵게 만든다. CEO급과만 대화하겠다는 몇 단체는 눈쌀없이 보기는 어렵지만, CEO들이 신경도 안 쓰는 대부분의 단체를 눈물없이 보기는 어렵다. 이 단체들 역시 21세기에 살아서 도착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렵다. 21세기에도 아직 남아있는 90년대의 흔적 언저리에서 버둥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도대체 21세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질문이 세기의 질문이고, 세기는 떠나서라도 지금 우리나라에게 적합한 질문일까? 내가 보기에는 박노자가 옳고 김지하가 틀렸다. 노빠는 틀렸고, 노무현은 많이 틀렸는데, 그렇다고 민주노동당도 별로 맞아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던져진 질문을 쉽게 바꾸어보면 "독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다.

그래도 독도는 우리 땅. 개인들은 이렇게 가도 좋지만, 이렇게 대답한 학자들은 전부 죽는다. 이문열은 살아남는다. 그래도 이문열은 이 공간에서 별 얘기를 안했다. 나름대로 최선의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생각보다는 험악하게 살아남았다.

 

이순신은 명랑해전의 12척의 전선이라고 대답하면 시장에서는 잠깐 살아남겠지만, 학자로서는 꽝이다. 문인으로서도 꽝이고, 예술가로서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에 대해서 비판할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넘이 그넘이다. 질문은 몇 개 있다. 독도, 지율, 김선일, 훌리건... 또 몇 개의 질문이 더 있을 수 있다.

청계천, 뉴타운 그리고 기초의원 정당공천... 이 몇 개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다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될 것 같다. 박노자는 독도, 김선일, 훌리건에 대해서 사회적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김지하 선생이라면? 독도는 우리 땅, 지율은 우리 편, 김선일 불쌍해, 훌리건 좋은 것, 청계천 좋은 것, 뉴타운 몰라, 기초의원 몰라...

노무현이라면? 독도 우리 땅, 지율 나쁜 사람, 김선일 골 아파, 청계천 답답해, 뉴타운 화나, 기초의원 정당공천 당근 해야지... 민주노동당? 독도에 깃발 꼽고, 지율 우리편, 김선일 큰 일이다. 훌리건 좋은 거, 청계천, 노동운동, 뉴타운 나빠, 기초의원 정당공천, 글쎄... 나는? 독도, 시끄러, 지율, 어려운 질문, 김선일, 죽일 넘들, 훌리건, 극우파들, 청계천, 위험한 것, 뉴타운, 나쁜 넘들, 기초의원 정당공천, 어렵다... 여기에 애매하지만 질문 하나를 보태면 황우석이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던지면 통일은 어떻게? 박노자는 정치인이 아닌 학자지만, 어려운 질문들에 하나씩 답하는 진화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박노자와 답하지 않고 도망갈려고 한 사람들의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정답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답할려고 시도한 사람과 시도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결국 많은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박노자의 얘기가 전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전부 감추고 있던 이전 사람들과 박노자는 확실히 다르다. 나이 가지고 얘기하는 건 좋은 자세는 아니지만, 하여간 박노자보다 먼저 뭔가 한다고 방방거렸던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전부 접싯물에 코 박아야 한다.

 

* 사진출처 : 한겨레21

* 필자는 경제학박사로 초록정치연대(www.greens.or.kr) 정책실장입니다. 최근 <아픈 아이들의 세대 - 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뿌리와이파리, 2005)를 출간했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안내 http://blog.naver.com/wasan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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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오산 수청동 철거민들에 대한 진압시 소요된 철거경비에대하여......

  • 등록일
    2005/07/01 08:09
  • 수정일
    2005/07/01 08:09

[성명서] 오산 수청동 철거민들에 대한 진압시 소요된 철거경비에 대하여 주택공사가 경비를 지원한 작태를 강력 규탄한다.


지난 6월8일 경기도경과 화성경찰서는 오산수청동 철거민들의 기본적인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장에 2400여명의 전투경찰과 경찰특공대 대형크레인등 엄청난 공권력과 진압장비를 동원하여 폭력적 진압을 자행하여 30명 전원을 연행하고 그중 26명을 구속하였다.

이 사건은 철거용역을 동원하여 물리적 충돌을 매번 발생시키는 주택공사의 전 근대적인 개발(철거)정책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유엔이 정한 기본적인 주거권보장 문제와 경찰과 주택공사가 자행한 철거민들의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민적 여론을 형성시키며 개발(철거)정책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땅장사 투기꾼으로 변질된 주택공사와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의 현주소를 명확히 확인하기에 충분하였다.


4.16일 수청동 철거민들의 주거권 쟁취 요구를 경찰의 비호아래 주택공사의 철거용역을 동원한 무리한 진입으로 용역이 사망한 가운데 경찰과 주택공사는 문제의 원인과 본질을 회피하고 정확한 사망사고에 대한 조사도 없이 일방적으로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에 의한 사인으로 규정짓고 철거민들을 범죄집단으로 몰아갔으며 거기에 더불어 농성장에 대한 기본적인 생존을 위협하는 단전단수와 생필품반입통제등 반인권적인 작태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가운데 경찰은 사제새총까지 동원하여 철거민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등 사회적 비난과 지탄의 목소리가 끓이지 않았다.


6.28일자 수청동 철거민들에 대한 진압시 소요된 철거경비에 대하여 주공이 경비를 지원한 내용을 실은 오마이뉴스 기사는 또다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누구보다도 공정한 법집행을 통하여 시민의 권익과 인권을 보다 민주적으로 존중하고 보장하여야 할 경찰이 절차와 규정을 무시한 채 막대한 철거경비를 주택공사로부터 지원받아 철거민들에 대한 진압을 자행하였고 주택공사는 경비지원 근거도 없이 경비를 지출하는등 경찰과 주택공사의 밀착과 유착이 다시금 확인된 것이다.


그간 수청동 철거민들에 대한 주거권보장과 인권보장, 더불어 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공정한 수사를 촉구해온 수청동비대위와 인권 시민사회단체들은 주택공사의 경비를 지원받아 철거민들을 진압한 화성경찰서의 행태는 법집행의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예산편성 및 집행지침을 무시한 초법적 행태로써 민중의 지팡이 임을 스스로 포기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경찰의 철거경비를 지원한 정부투자기관인 주택공사 역시 사건의 본질적 책임당사자로써 경비지원근거와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금번 경찰에 대한 경비지원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며 공공의 복리증진이라는 허울 좋은 개발정책을 모토로 그들이 얼마나 반민중적인 돈벌이 투기 집단인가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이에 금번 사태를 접한 제 시민사회,인권,노동단체들은 다시한번 경악을 금치못하면서 아래와 같이 강력 규탄하는 바이다.


하나. 정부는 금번 주택공사가 행한 경찰에 대한 철거경비를 지원한 초법적이고 공정성을 상실한 화성경찰서와 주택공사의 유착속 이루어진 경비사용내역을 철저히 밝히고 법과 규정에 따라 조치하는 한편 관련 당사자를 엄중 조치하라! 


하나. 화성경찰서장은 관련 규정과 지침을 어기고 중립적 위치에서 누구보다도 형평성있게 사태를 해결해야할 공무원의 책임을 망각한 채 일방적으로 주택공사에 경비를 지원요청 하는 등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라!


하나. 철거용역을 동원한 폭력을 부추기며 철거민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돈벌이 투기집단으로 전락한 주택공사는 즉각 해체하라!

 

                                                              2005.6.30 


수청동철거민투쟁비상대책위원회 (민주노총경기본부. 전국철거민연합. 경기민중연대.경기노동자의힘. 경기민주언론운동연합. 기독교인권위원위. 경기남부민중행동연! 대. 경기도노동조합오산지회. 국민참여연대오산지부. 오산노동자문화센타. 다솜교회. 민주노동당오산지역위원회. 민주노총수원,오산,용인,화성지구협의회. 오산대교수협의회. 경기서부건설지역노조오산화성지부.오산이주노동자센타. 전국교직원노조오산화성지회. 캐리어엘지노동조합. 한원C.C노동조합. 전국학습지노동조합대교지부평택지회.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을위한수원지역목회자연대. 한신대 Power To The People(준)). 다산인권센타. 오산자치시민연대. 오산시민연대. 나눔교육오산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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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더불어 숲] 복지국가 스웨덴

  • 등록일
    2005/06/24 10:40
  • 수정일
    2005/06/24 10:40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눌리게 됩니다. "만약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의 세금은 0%입니다. 그리고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의 세금은 1백%입니다. 스웨덴의 세금은 75%수준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남은 사회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스웨덴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스웨덴 사람들이 자기나라를 소개하는 방식의 하나입니다. 세금이 너무 많다는 불평같기도 하고 그들이 누리는 사회복지의 수준에 대한 자랑같기도 합니다. 한 국가의 성 격을 담세율(擔稅率)로 설명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가 누리고 있는 복지수준이 공공지출의 비율로서 설명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참으로 복잡한 우여곡절을 겪어 왔으며 그만큼 복잡한 내용 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복지국가는 20세기가 지향해가야 할 가장 궁극적인 목 표로 제시되기도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해 가는 대안적(代案的) 개념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유화(宥和)함으로써 자본주의 그 자체를 유지하는 보정적(補整的) 개념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복지는 그만큼 다양한 시각을 허 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는 스웨덴에 있는 동안 이러한 시각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웨 덴에서는 그러한 시각이 없었습니다. 복지국가개념을 그러한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어 쩌면 냉전 이데올로기의 도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답변은 우회적인 것이면서도 이러한 틀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목표에 관 한 논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표와 방법에 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이 그 사회 에 대 한 사회구성원들의 신뢰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성한 개념규정과 복잡한 논의 는 실상 불신(不信)이 낳는 거대한 정신의 소모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스웨덴에서 가장 부러운 것과 가장 부럽지 않은 것을 엽서로 띄워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가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웨덴에서 몹시 부러운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신뢰(信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침 스웨덴 조간신문에는 스웨덴 남자와 결혼한 미국인 부인이 미국에 전 남편과 살고 있 는 자녀를 보러가는데 필요한 여비를 스톡홀름시에서 지급하라는 판결문을 싣고 있었습니 다. 이것은 스웨덴의 복지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작은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부의 공공지 출은 국내총생산(GDP)의 67%에 이르는 규모로서 OECD 24개 회원국중에서 가장 높습니다. 그러나 부러운 것은 이러한 복지의 량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입니다. 실업, 노후, 의 료, 주택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걱정이 생활의 대부분인 우리들로서는 무척 낯선 것 입니다. 빈(貧)과 부(富), 귀(貴)와 천(賤)의 의미가 극히 왜소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 니다. 스웨덴에서 가장 경멸되는 것이 축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최근에는 실업률의 증대, 정부지출의 급증 그리고 세수(稅收)의 감소 등 스웨덴이 당면한 경 제적 위기감이 거론되고 따라서 당연히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사람들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낸 세금은 언젠가는 다시 그들을 위하여 쓰여진다는 생각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이러한 사회복지는 스웨덴이 축적한 경제적 잉여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은 물론입 니다. 스웨덴은 1, 2차대전의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유럽국가였습니다. 전쟁특수(特需)와 전후복구과정에서 누릴 수 있었던 경제성장이 일찌감치 스웨덴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 내었 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바로 그 시기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빼앗기고 다시 모든 것을 전화에 불태우고 말았던 우리들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었습니다. 물론 경제적 잉여는 복지사회의 가장 기본적 물적 토대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적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빈부의 격차만 더 크게 벌여놓음으로써 빈익빈 부익 부의 첨예한 사회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스웨덴에도 물론 재벌이 있지만 스웨덴 제1의 재벌의 총재산이 우리돈으로 8백억원이라고 하였습니다. 8백억원이 물론 적은 액수가 아니 라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될 정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경제성장과 경제 적 잉여의 축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러한 물적 부의 사회적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은 이 물적 부의 사회적 관리에서, 특히 사회적 합의에서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합의과정은 노동연합(LO)을 중심으로 한 노동부문의 강력한 정치력에 뒷받침되어 있고 이 러한 정치력이 1930년대부터 근 반세기에 걸친 사회민주당 정권의 기반이 되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사회민주당의 복지정책이 오늘날의 복지국가 스웨덴의 골격을 만들 어내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일류정치가 일류경제, 일류사회의 기본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스웨덴에서 당신이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합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신뢰 (信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궁금해하는 '부럽지 않은 것'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것은 피곤함입니다. 스웨 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깨끗하고 반듯한 도시입니다. 도로, 건물, 자동차는 물론이고, 보도불 럭이나 크고 작은 간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고급품이면서 잘 관리되고 있음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도시입니다. 잘 사는 나라의 모습입니다. 넓고 푸른 공원에는 햇볕을 받고 있는 사 람들이 무척 한가롭습니다. 그들의 여유와 느긋함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한가로운 풍 경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60대의 노년(老年)입니다. 스웨덴에는 물론 노인이 많기도 하지만 곳곳에 고여 있는 피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 람들이 알콜과 마약중독자가 되기도 하고 취업보다는 차라리 실업연금 수혜자로 안주하기도 합니다. 작년 한 해동안 3만 3천쌍이 결혼하고 2만 1천쌍이 이혼하고 있기도 합니다. 스웨덴 에서 부럽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러한 노년같은 피곤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 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넓게 고여 있는 무관심과 피곤함 때문에 나는 이 도시가 갖고 있는 부러운 하드웨어에도 불구하고 결코 정다운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부럽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富)의 관리보다 더욱 중 요한 것이 사람의 관리이고 인간관계의 관리입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리 게 된다'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을 늘푸른 청년으로 세우는 문화가 이곳에서는 퍽 아쉽습니다. '베리야 노인센터'에서 받은 인상 역시 매우 착찹한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시설 과 간호를 받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가득히 풍겨오는 공허감은 비단 노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아득히 먼 곳으로 물러나 있는 그들의 외로움은 마치 '앞당겨진 죽음'같이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어린 남매가 입양해 있는 가정을 찾아가면서 느꼈던 심정도 내게는 아픔이었습니다. 자식을 키울 수 없어 먼 이역땅으로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그들이 입양된 집은 매우 훌륭한 가정이었습니다. 양아버지 는 의사이며 양어머니는 연극연출자로서 그들 내외는 예쁜 친딸을 하나 두고 있었습니다. 나의 상식으로 볼 때 입양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키우는 일의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생각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훌륭한 부모와 언니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것 은 한국에서 온 어린 남매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자라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한 몇시간동안이 나로서는 매우 어색하고 착잡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착잡함은 우리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한가를 잘 알면서도 머지 않아 이곳에 만연하고 있는 피곤함속에 던져질 그들의 삶 역시 흔쾌히 수긍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사회가 해내지 못하고 있는 일을 이역만리의 낯선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부끄러 움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햇빛 가득한 정원에서 다정한 커피를 나누면서도 나는 내 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부(富)를 만들어야 하는 세월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키우기에 앞 서 물건을 만들어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각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들 남매가 우리나라에서보다는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잘 자라리라고 믿습니다. 그 러나 '잘 자란다'는 것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 다. 우리는 아직도 '잘 자란다'는 의미에 마음을 쏟을 여력이 없는 지도 모릅니다. 경쟁과 효율 성등 사람을 헤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일의 엄청난 잘못을 미처 돌이켜볼 여유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는 일찍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언제나 후회 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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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카트만두에서

  • 등록일
    2005/06/23 10:33
  • 수정일
    2005/06/23 10:33

문화는 공산품이 아니라 대지에 심고 손으로 가꾸는 농작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것입니다.

 
네팔왕국의 수도 카트만두는 옛날에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천4백여미터의 산상호수였습니다. 만쥬슈리(文珠寶薩)가 큰 칼로 산허리를 잘라 물을 흘려보내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신(神)이 카트만두를 사람들의 마을로 만들어주었다고 구전되어오듯이 막상 카트만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신입니다. 사원이나 탑에 신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골목에도 있고 시장거리에도 있고 지붕에도 있고 처마 밑에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연못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신상들의 모습은 가난한 네팔 사람들의 차림새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공포의 시바신이 그의 처 팔비티와 함께 듀버광장 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창문열고 구경하는 여염집 부부같습니다. 네팔의 신은 근엄하거 나 숭고하지 않습니다. 쿠마리라는 살아 있는 여신이 있지만 이 여신은 어린 소녀입니다. 그리고 여신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보통사람들 속으로 돌아와서 대체로 보통사람들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신이 카트만두에 오면 가장 먼저 수많은 신을 만나게 됩니다. 신은 신이되 사람들과 가 까운 자리에 내려와 있는 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만나는 것은 사람들의 손길입니다. 오랜 세월과 풍상에 젖어 갈색빛을 띠고 있는 목조의 사원이나 궁궐건물에 배어 있는 사람들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허술한 건물에도 창틀과 기둥에는 어김없이 정교하게 조각된 갖가지 문양들이 사람들의 정성스런 손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점의 좌판위에서 햇볕에 따뜻이 익은 자잘한 기념품들에서도 구석 구석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신상이나 손길보다 먼저 사람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순박한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수줍고 어색해하는 사람들의 눈길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 순박한 눈길은 험악하게 변해버린 우리들의 얼굴을 반성하게 합니다. 이처럼 카트만두에서 만나는 것은 신상과 사람, 물건과 사람들의 손길이 혼연히 무르녹아 있는 다 정한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이 다정함이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으로 완성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 니다. 그래서 카트만두의 타멜거리에서는 유년시절(幼年時節)을 만난다고 합니다. 비단 타멜거리뿐만 아 닙니다. 카트만두의 곳곳에서 우리들의 지나간 유년시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산광장에서 어느 골목을 접어들더라도 그 좁은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유년시절을 만 나게 됩니다. 그것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추억이기도 하고 산업화되기 이전의 우리의 삶의 모습 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숫자로 계산하며 직선과 격식에 갇혀 있던 심신이 그 틀에서 해방되어 맨 발과 땅의 접촉에서 건져올리는 편안함.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과거이고 우리의 유년시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곳 카트만두의 분지(盆地)에 고여 있는 유적과 사람들은 이처럼 커다란 거울이 되어 잃어버린 우리의 유년시절을 보여줍니다. 카트만두가 호수였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비단 유년시절뿐만이 아닙니다. 카트만두에는 도처에 삶의 원형을 보여주는 거울이 있습니다. 파 슈파티나트의 화장터 풍경이 그렇습니다. 장작더미 위에서 타고 있는 시체나 그 시체를 뒤적여 고루 태우는 사람이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가족이나 그리고 임종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나 어느 한 사람 슬퍼하는 이가 없습니다. 바로 그 밑을 흐르는 강가에서는 빨래하고 물긷 고 식기를 닦고 머리를 감는 일상이 태연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만이 이 태연한 광경으 로부터 충격을 받고 있을뿐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삶의 찰나성과 삶의 영원성 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닥신카리사원에서 보는 암흑의 여신 칼리에게 바치는 번제(燔祭)도 그렇습니다. 짐승을 산채로 목 을 베고 솟아나는 피를 신상(神像)에 바르고 자기의 얼굴에도 바릅니다. 짐승의 체온과 비명소리 가 채 가시지 않은 피와 그 피로서 행하는 제의(祭儀)는 보는 사람을 당황하게 합니다. 은은한 파 이프 올겐의 성가속에서 보았던 성체미사의 포도주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그 적라라한 원 시성이 우리의 생각을 압도합니다.

 

나는 카트만두에서 만나는 이 모든 것이 한마디로 '문화의 원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치장하고 있는 복잡한 장식을 하나 하나 제거해갔을 때 최후로 남는 가장 원초적인 문화 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삶과 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화의 자연'(Nature of Cul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란 말이 있지만 문화란 그 본질에 있어서 공산품(工産品)이 아니라 농 작물(農作物)입니다. 우리가 이룩해내는 모든 문화의 본질은 대지(大地)에 심고 손으로 가꾸어 가 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에게서 결실(結實)되는 것입니다. 문화가 농작물이란 사실이 네 팔에서처럼 분명하게 확인되는 곳도 드물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잘 사는 나라에서 이곳을 찾아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카트만두의 골목을 거닐며 네팔의 나즈막한 삶을 싼 값으로 구경하며 부담없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혹시나 그들이 네팔에서 문화의 원형을 만나고, 그 문화의 원형에 비추어 그들의 문화를 반성하는 대신에 네팔의 나즈막한 삶을 업수이 여기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우리가 문화의 원형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이후의 산업화의 과 정은 한마디로 탈신화(脫神話)와 물신화(物神化)의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자연'(自然)을 파괴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과자로 된 산'을 쌓아 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예상되는 영상문화와 가상문화(cyber culture)에 이 르면 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의 삶과 사람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 게 됩니다. 진정한 문화란 사람들의 바깥에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속에 씨를 뿌리고 사 람들의 관계속에서 성숙해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나는 네팔에서 만나는 유년시절을 통하여 지나간 과거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어느때보 다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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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만에 터져나온 건설플랜트 노동자들 인간선언

  • 등록일
    2005/06/20 01:30
  • 수정일
    2005/06/20 01:30

위기의 노동운동 / 울산 건설플랜트 노조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양준석 / 울산노동자신문 대표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해 온 ‘산업수도’ 울산. 그 울산의 성장을 상징하는 것은 단연 자동차·조선·석유화학 공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국가산업단지다. 국내 최고는 물론이요 전세계적으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그 수많은 공장과 산업설비들을 건설하고 유지·보수해 온 노동자들이 있다.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다.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바로 그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지난 3월 18일부터 두 달이 넘도록 파업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파업에 나선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는 잠깐 우리의 눈과 귀를 당혹스럽게 한다.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
“휴식공간을 만들어 달라!”
“화장실을 제공하라!”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해 달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OECD가입국으로 성장하기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유지·보수하며 누구보다 피땀 흘려 일해 왔던 ‘건설역군’들이 21세기 한복판에 외치고 있는 ‘믿기지 않는’ 요구들이다. 그러나 너무나 기본적인 인간적 요구들을 내건 그들의 파업은 의외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장기화되고 있다. SK(주) 등 원청 발주회사를 비롯한 사용자들이 성실 교섭에 나서지 않고 있고, 울산광역시와 노동부가 관리·감독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으며, 검찰과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노조를 탄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70m 정유탑 고공농성 - 또다시 벌어진 울산의 파업전쟁

30여 년 만에 터져 나온 인간선언의 절규마저 철저히 무시당하자,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투쟁은 갈수록 극한적인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5월 1일 노동절 새벽에는 세 명의 조합원이 SK(주) 울산공장 내 70m 정유탑(베셀타워)을 점거하여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SK(주) 측은 1급 국가보안시설이라는 정유탑 기습 점거에 큰 충격을 받고 경찰에 강제진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지만, 경찰은 강제진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잠정적으로 포기한 상태다. 정유탑이 너무 높아 농성자와 진압요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데다가 자칫하면 대규모 폭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공농성만이 아니다. 구속 22명에 수배 7명, 심지어 825명의 무더기 연행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겪었지만,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여전히 매일같이 1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산업단지와 울산 시내를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여 명의 전경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파업대오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다. 지금 울산은 또다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파업노동자들과 전경들이 맞붙는 울산 특유의 파업전쟁이 또다시 벌어진 것이다. 다만 그 주역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현대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제조업 노동자들이 아니라 건설플랜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의 주체로 나섰다.

 

인간 이하 취급 받는 노동자들

한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한 울산의 중화학공업 발전은 많은 노동자들을 울산으로 불러 모았고, 한국 최대의 노동자 밀집지역으로 자리 잡은 울산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된 이래 자연스럽게 전국 노동자 투쟁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제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울산의 노동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이들 울산의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상당한 정도로 사회경제적 권리를 획득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일정한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울산의 모든 공장과 산업설비를 건설하고 유지·보수해 온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최근까지도 완전한 무권리 상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남아 있었다.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최소 1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사회전반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계속적인 실업위험과 저임금 중노동의 상황을 강요당해 왔다.

 

“일을 하다 작업장에서 도시락을 먹으려 하면, 밥은 싸늘하게 식어 딱딱하게 굳어있고, 반찬은 돼지고기가 있으면 다 식어서 기름기가 허옇게 떠 있는 걸 볼 수 있다. 가끔 도시락 업체가 바빠서 오전 10시쯤 미리 가져다 놓기도 하는데 한여름엔 콩나물이나 시금치는 더운 날씨 때문에 상해서 못 먹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다 시어빠진 김치쪼가리와 함께 국에 밥을 말아 먹고 치우고 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서 밥을 먹게 되는데 비바람이라도 치면 밥에 온통 빗물이 들어가게 된다. 또한 그라인더에서 튀는 돌가루와 쇳가루가 날아와 밥에 들어가 그나마 도시락도 먹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20년째 건설현장에서 기계 일을 해 온 플랜트 노동자 박모씨의 증언)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유지·보수 공사를 해야 하는 남구의 석유화학공단이 주된 일터가 되어 있는데, 하루 종일 유해한 화학물질을 뒤집어쓰고 땀에 흠뻑 절어도 샤워는커녕 손조차 씻지 못하고 퇴근해야 한다. 탈의실이 없으니 공장 담벼락 밑에서 혹은 출퇴근길 비좁은 차량 안에서 작업복을 갈아입어야 한다. 화학물질이 내려앉고 시멘트가루 쇳가루가 날리는 속에서, 비를 맞아가며 밥을 먹어야 한다. 화장실조차 제공되지 않아 풀숲에서 눈치껏 해결해야 한다.

     
걸핏하면 사망사고, 10년 동안 뒷걸음친 실질임금

건설플랜트노동자들의 서글픈 현실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들에게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등은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를 쓰거나 취업규칙이라도 구경했을 리가 없다. 나오지 말라면 그만두어야 한다. 위험한 작업환경에 노출되어도 작업보호구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 사고가 나서 다쳐도 산재처리는 기대할 수 없다.

지난해 4월 삼양제넥스 수소저장탱크 폭발사고로 세 명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10월에는 한국바스프 유화공장 폭발사고로 조합원 다섯 명이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화상을 입었다.

이렇듯 상시적인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작업환경이 개선되기는커녕 실질임금조차 지난 10년간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다. 이들은 대부분 10~30년 동안 이 분야에서 일해 온 숙련공들인데, 경력 20년차의 숙련된 조합원 일당이 11만원 정도다. 언뜻 보면 많은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른바 ‘포괄임금제’ 형식으로 이 일당에는 퇴직금·주휴수당·년월차수당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4대 보험에 심지어 안전화, 작업복, 점심식사 비용까지 개인이 부담하기도 한다. 게다가 하루 9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하며, 공휴일 구분도 없다. 그나마 이런저런 사유로 일할 수 있는 날이 한 달에 20여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경력 20년 이상인 조합원의 연간 임금이 2천만원을 겨우 넘기는 정도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부실공사의 뿌리, 다단계 하도급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건설업에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급이란 일정한 기일 안에 완성해야 할 일의 양이나 비용을 미리 정하고 그 일을 한꺼번에 맡기거나 맡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일을 통째로 하청을 주는 것인데, 최소 4~5단계에 걸쳐 재하도급을 주는 게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를테면 SK(주) 삼성정밀화학(주) 한화석유화학(주) 등은 건설공사 도급을 주는 발주회사들이다. SK건설(주)와 같은 일반건설업체가 1차 도급업체라면, 이들은 도급받은 건설공사를 다시 제이콘 등과 같은 전문건설업체에 2차로 하도급을 준다. 이 업체는 다시 더 작은 업체나 소장·공사과장·반장 등 하수급인에게 재하도급(3~4차)을 주고, 이들이 다시 여러 명의 모작반장에게 재하도급(4~5차)을 준다. 모작반장이 비로소 시공에 참여할 노동자들을 직접 모집하여 건설공사를 시공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4~5단계를 거치는 동안 이윤확보를 위해 무리한 공사기일 단축, 부실공사, 저임금 장시간 노동, 주·월차 수당 떼먹기, 심지어 밥값 떼먹기까지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산재 은폐 및 세금 포탈도 기본으로 동원된다.

다단계 하도급은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을 끝없이 쥐어짜는 흡혈구조일 뿐만 아니라 다단계로 이윤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부실공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4월 21일 시공 중이던 문수구장 수영장 천정이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앞서 울산건설플랜트노조는 파업에 나서면서 문수구장 수영장 천정이 작업을 수월하게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설계대로 시공하지 않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경고를 한 바 있었다.

건설플랜트노조는 또한 현재 진행 중인 SK의 shutdown 공사(석유화학 계열 업체가 일시 휴업을 하며 진행하는 정기보수공사)도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불법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미숙한 작업자들 때문에 결함이 많이 생기는데도 쉬쉬하며 감추고만 있다는 것이다. SK같은 정유공장에 이런 부실공사로 폭발사고라도 생긴다면 어찌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다단계 하도급은 명백히 불법이다. 그러나 발주회사 및 건설업체들에 대한 허가권을 갖고 있으며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울산광역시는 지금껏 어떤 제재도 행하지 않고 있다.

     
교섭회피에 취업방해· 노조 탈퇴강요까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의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대접받고 사는 거라고, 일당에 만족하고 살았는데 이제 아니다. 일용직 노동자도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으로 단결해서 싸운다.”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고립적인 작업환경과 지속적이지 못한 고용조건은 ‘조직화’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최소한의 조직화를 이루지 못한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권리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고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선도했다는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마땅한 자부심은 최소한의 설 자리가 없었다. ‘일당쟁이’ ‘노가다’ ···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최하층으로 취급받았고, 그렇게 30여년을 억눌려 살았다.

그러나 지난해 2004년 1월 6일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마침내 노조를 설립해 냈다. 1월 19일 시청 근처 종하체육관에서 열린 노조설립보고대회에는 1천여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모였다. 포항과 여수의 건설플랜트노조들이 먼저 성공적인 조직화를 이룬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건설플랜트노조는 지난해 6월 59개(나중에 70개로 확대) 건설업체에 근로조건 개선, 산업안전 보장, 근로기준법 준수 등을 내걸고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2005년 2월까지 9개월 동안 “조합원이 없다” “조합원 명부를 제시하라”며 한 번도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단체교섭을 위해 조합원 명단을 제시하면 오히려 공사중단 등을 내세워 해고시키거나 조합원들에게 노조탈퇴확인서를 제출하도록 강요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노조간부들은 SK(주)와 삼성정밀화학(주) 내 현장에 평소 1년에 2~3개월씩 취업해 왔으나, 노조 결성 이후엔 단 하루도 취업할 수 없었다. 블랙리스트를 통한 취업방해가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SK(주) 현장에서 일하던 조합원 60여명이 한꺼번에 노조탈퇴확인서를 받아가기도 했다. 또 삼성정밀화학(주)는 임시총회에 참여하는 조합원을 사찰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노조가 요구하는 교섭에는 전혀 응하지 않으면서, SK(주) 등 원청회사들의 지휘 아래 건설플랜트노조를 말살하기 위한 비열한 탄압이 전개될 뿐이었다.

 

쌓이고 쌓였던 분노의 폭발

마침내 쌓이고 쌓였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난 3월 17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쟁의행위를 결의하고 다음날 18일 곧바로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일당쟁이, 노가다로 불리며 사회 밑바닥 인생을 강요받아왔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그 자체로 해방의 희열이었다. 파업돌입 이후 매일같이 1천여 명을 넘나드는 파업대오가 강고하게 형성되었다. 너무나 어렵게 시작한 파업인 만큼,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들로 넘쳐흘렀다.

 

그러나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바로 노조간부 9명에게 출두요구서가 날아 왔고, 5일 만에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5천여 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해 조합원들의 현장접근조차 원천봉쇄했다. 노조사무실 압수수색, 차량수색,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진압 및 검거 과정은 계엄 상황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4월 8일에는 울산시장 면담을 요청하는 825명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을 집단 연행하여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가는 기가 막힌 사태가 발생했다. 이들을 범죄자로 몰아 반성문과 서약서를 강요하고 폭도로 취급하는 등 인권유린을 서슴지 않았다. 이날 9명의 노조간부들이 구속되고, 불구속 입건된 조합원만 110명이었다.

5월 15일 현재 구속 22명에 수배 7명. 이처럼 검·경찰은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을 폭도로 몰고 폭력을 휘둘러 노동조합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노동부와 울산광역시 역시 철저히 SK(주) 등 원청 발주회사와 건설업체 사업주 편에 서 있다. 불법 다단계 하도급 뿐 아니라 원청회사와 건설업체들이 온갖 불법을 자행해도 눈감아 온 이들은 오히려 일당쟁이 노동자들의 피 마르는 파업이 두 달이 넘도록 수수방관하고 있는 공범자들이라고 할 것이다.

 

노동부가 지난 11개월 동안 한 일이라고는 현재 70개 교섭대상 업체 중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더니 고작 12개 업체에 행정지도를 내린 것이 전부다. 노동부 또한 그동안 ‘조합원 명부를 제출하라’는 등 교섭을 회피해 온 사업주들과 똑같은 행보를 보여 왔을 뿐이니, 12개 업체와도 교섭이 잘 될 리가 없다. 대상 업체에 대한 추가확인조차 하지 않고 시간 끌기로 노동조합의 파업이 무력화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고공농성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처절한 절규인 ‘파업’마저 처참하게 짓밟고 있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길은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우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을 살인적으로 탄압하는 배후이자 실질적 책임자는 불법 다단계 하도급을 통한 실제 사용자들인 SK(주) 삼성정밀화학(주) S-OIL 등 원청회사들이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원청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말이다.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일하는 가장 큰 현장이자, 노조탄압과 단체교섭 거부를 주도하고 있는 SK(주). 상경투쟁단이 서울 SK(주) 본사 앞에서 무기한 노숙투쟁을 전개하는 데도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SK(주)를 상대로 목숨을 건 고공농성에 잇달아 돌입한다.

4월 30일 서울 SK건설 공사현장 45m 타워크레인에 세 명의 조합원들이 무기한 단식 고공농성에 돌입한 데 이어, 노동절인 5월 1일 아침 다시 세 명의 조합원들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SK(주) 울산공장 70m 정유탑 점거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노조탄압 중단하라!”
“단체협약 체결하라!”

인간다운 삶이냐 죽음이냐, 그 갈림길에서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절규와 분노의 함성이 갈수록 거세게 울려 퍼지고 있다.

 

울산의 파업전쟁, 그 선두에 선 건설플랜트 노조

울산의 파업전쟁은 점차 확산일로에 있다. 울산광역시가 야심차게 준비해 온 IWC(국제포경위원회) 제57차 연례회의가 개막될 예정인 오는 5월 27일, 민주노총은 울산지역 총파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울산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을 강력하게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에 조만간 본격적인 대중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과 건설플랜트 파업투쟁이 맞물릴 경우 2005년 울산의 파업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번질 수도 있어 보인다. 지난 1월 18일부터 시작된 현대차비정규노조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파업농성이 네 달을 넘어서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5월 16일 정규직·비정규직 노조가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공동 교섭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6월 중하순이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본격적인 대중투쟁으로 발전하리라 예상되고 있는데, 만일 그때까지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이 타결되지 않는다면 울산 전역이 파업전쟁의 거센 물결 속으로 휘말려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2005년 울산의 파업전쟁은 예상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민주노총까지를 겨냥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채용비리 수사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야흐로 울산에 새로운 파업전쟁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며, 그 주역들이 새롭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대공장 노동운동의 힘을 상징하는 울산에서마저도 ‘비정규직’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파업전쟁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얼마나 직접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처절한 절규는 표면적인 승리 이상으로 강력한 성과와 파장을 남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파업이 보여준 위협적인 파괴력은 어떠한 단체협약보다 강력한 힘으로 노동조건의 실질적 개선을 강제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강력하게 자극할 것이다. “저들 일당쟁이 노가다들도 저렇게 당당하게 일어서는데,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주어진 대로 체념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갚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점점 더 많은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 당당한 노동자로 일어서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바라본다면, 너무 앞서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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