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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13
    [노래/유정고밴드] 이 길의 전부(2)
    간장 오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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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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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지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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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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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우리당에 드리는 수청 철대위 입장
    간장 오타맨...

[노래/유정고밴드] 이 길의 전부

  • 등록일
    2005/06/13 01:31
  • 수정일
    2005/06/13 01:31

유정고 밴드의 노래를 노동의 소리에서 퍼날라 옵니다.

출처 : 노동의소리(http://www.nodong.com)

주소 : mms://211.215.17.148/song/youjunggo band/youjunggoband_1_this road all.asf



♪ 이 길의 전부 ♪

 

 



꽃다지 사이트에서 합법음반 1집에 나온 노래를 퍼날라 옴.

 



♪ 네 가슴에 하고픈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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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멋지다.

  • 등록일
    2005/06/12 23:37
  • 수정일
    2005/06/12 23:37

그림이 눈에 들어와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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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 등록일
    2005/05/28 23:39
  • 수정일
    2005/05/28 23:39

***나우누리 맑스연 현실주의 지기였던 고픈시인님의 직접 쓴 시합평을 올려본다.

 

황지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1998)

??????????????????????????????????


정직한 다중분열의 노래


S의 문체는 이제 서서히 관료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다. 관료의 글엔 상처가 없다. 흉터가 완벽히 제거된 사진은 심심 ! 균열없이 배열된 영혼의 풍경 또한 심심 ! J씨와 L씨는 이제 의사가 다 되었다. 그들의 시는 이제 시라기 보다는 처방전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 말하면서 적재적소, 아프지 않게 주사를 놔준다. 외로우니까 사람이야,아파하지마. 최근 K가 발표하는 저, 제 스스로 난 곳 모르는 불투명한 상처의 기록들도 시가 있는 방의 문지방을 넘어서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호마이크 장롱 흠집 하나가 K에겐 가족사 전체에 육박하는 비밀스런 상징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이들에겐 허다한 세간살이의 하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K는 시인에겐 절대적인 어떤 재능을 결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겐 관료의 공문서와 의사의 처방전, 호마이크 장롱의 흠집, 그 어느 것과의 밀월도 불륜이다. 나는 그런 시인들에게 연애 걸면 언제나 실연당한다. 나의 편견에 의하면, 훌륭한 시인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다만 상처로 끌고 가는 사람이 며, 하물며 남을 치유하겠다고 덤벼드는 도인일 수는 더욱 없다. 훌륭한 시인의 독자가 그의 시에서 혹 그 무슨 위로를 받는다면, 그건 시인이 동시대의 독자들과 <지금 함께> 아프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인의 상처는 투명하다. 그 투명함은 시인의 상처가 독자의 상처로 곧장 이어지는 통로를, 역사적 사회적 실존의 통로를 환하게 비춘다. 한 실존의 상처와 분열을 설명할 때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역사규정성,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명제는 한동안 얼마나 부당하게 무시되어 왔던가. 이 시대의 빈곤 속으로, 80년대 <시의 시대>의 대표단수, 황지우가 8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태양제의」의 슬하의 자식들로 보인다. 이 시의 화자인 어린 "나"는 "해우장시한다고 집 나간 지 오래인" 아버지의행방이 늘 궁금하다. 그 그리움이 "나"로 하여금 "해"와 놀게 하고 그"해'는 "나"에게 "환한 구멍"이고 "빛 솜사탕"이다. 그러나 어느날 "나"는 안과에 가서 "포르말린 냄새나는 엄청나게 큰 해"가 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되고 "나"는 이제 "해"를 다른 곳에서 발견한다. "그날 밤 엄니 품에서 잘 때 제가 조물딱조물딱 만진 울엄니 젖, 제가 잡은 해." 그러니까 "해"는 부재중인 아버지다. 그러나 그 "해"가 먼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까뒤집고 들어오는 안과의 빛" 속에도 있다는 사실은 아버지-해의 유일무이성과 순결성을 해치고 이제 "나"는 어머니의 젖을 해라고 믿는다. 부재중인 아버지-해에서 어머니-젖으로의 이 방향전환은 일종의 뒷걸음질에 가깝다.아버지-해 찾기가 여의치 않을 때 언제라도 어머니-젖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나"의 내부엔, 어느 길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두 주체가 잠복해 있다는 사실.

 

황지우는 이미 오래전,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을 < 아버지 없는 세대 >라고 명명한 바 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한마당,1986, 197면 ). 아버지(군부독재세력)를 거부한 세대가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이 새로운 아버지를 세우는 것(변혁)이라면,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어머니에게 고착되어 버리는 것(허무주의 혹은 초월?)이지 않았을까. 짐작컨대 이 두가지 길은 긴장관계일 것이다. 하나가 승하면 하나가 패한다. 저 < 아버지 없는 세대 >는 어느길로 갔던가.

 

그들에겐 좋은 의미의 선택의 여지란 없었고 오로지 실존적 결단의 여지만이 존재했다. 길은 오직 하나였다. 대체-아버지를 세우고 그 아버지의 법대로,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서 사회적 실존을 구축해나가야 했다.그것은 기왕의 아버지를 죽이고 새로운 아버지를 세우는 변혁의 길이었다.


그러나 대체-아버지는 제대로 세워지기도 전에 몰락한다("폼으로 갖다 놓고 읽지도 않은 / 카를 마르크스『자본론』(모스크바,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서가"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그리고 그 자리에 자본-아버지가 꿰차고 들어온다( " 63빌딩 황금 유리집에 안치된 태양 ; 빌어라! 빌어라! / 무릎 꿇고 빌어라!" 「서해까
지 밀려 있는 강」). 이제 "내 호주머니에는 해바라기 씨앗이 없"(「해바라기 씨앗」)다. 그들은, "망막을 속이는 빛이 있음을 모르고 / 흰 빛 따라가다 / 철퍼덕 나가떨어"(「우울한 거울 3」)졌다. 「우울한 거울」연작의 화자는,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대체-아버지의 몰락과 더불어 함께 몰락한 자신의 모습을 아프게 확인하면서 "턱 밑 털을 밀기 위해 추어올린 내 얼굴 : / 비누 거품을 허옇게 쓴 나의 헛것, / 이것, 아무도 아닌데!"(「우울한 거울 1」)라고 탄식한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던 날 난" 말한다, " "개좆같은 세기야" ."이제 당연한 수순으로 우린,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제가 잡은해"라고 말하던 그 주체는 어디로 갔을까, 물어야 한다. 그 퇴행의 주체는 지금 살찐 소파위에 널브러져 있다. 어머니 대신 이제 아내이고( "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어머니 젖을 살찐 소파가 대신한다. ( "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그는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 生은 베렸"기 때문에 "無爲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格이"므로 이제 "격조 있게, 놀"겠다고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은 하나의 극단일 뿐, 전부는 아니다. 그 증거로 우린, 지금 거론하고 있는 이 시와 함께 「펄프劇」이나 「석고 두개골」같은 시에서, 화자인 "나"와 시 속의 "그"가 혼란 속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나"는 "나"에 의해 "그" 혹은 '왕"과 같은 3인칭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이는, 아직 저 퇴행의 주체와 화자인 "나"가 완벽한 하나는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 보여주는 의도적인 혼란이다. 반성과 퇴행의 주체가 명확히 구분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얘기는 반성적 주체가 엄연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태양제의」에서 드러났던 잠재적인 두 주체가 어느 일방의 한판승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중분열된 게 아닌가,질문할 수 있다. 그 분열된 주체들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변주된다.

 

"나"는 반성한다. "아버지"의 몰락이 왜 곧 나의 몰락인가, 그건 꼭 그럴수 밖에 없었던가, 혹 내 안에 이미 그 몰락을 예비한 징후가 존재했던 건 아닌가, 를 묻는다. 이 반성의 주체가 바로「뼈아픈 후회」같은 시편을 낳는다 :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이 시는 과연 어느 비평가의 지적대로( 김형수,「새로운 시적 자아들의 명멸에 대하여」『90년대를 찾아서 2』개마고원,1996,해설), 허다한 반성의 시를 낳은 90년대를 통틀어 "진정성의 무게를 가장 많이 싣고 있는" 절창이다.그 반성하는 "나"는 "어떤 회환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일 포스티노」)을 하고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 내 자신이 한계이다"(「等雨量線 1」)라고 돌이킨다. 그리고는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뼈아픈 후회」)라고 말하기까지에 이른다. (시인의 이 뼈아픈 후회 앞에서 더욱 뼈가 아픈 사람들, 많으리라)

 

이 "나"가 반성의 대상인 "나"를 거리를 두고 대상화하고자 할 때, 혹은 사회 역사적 배경과 긴밀하게 얽어 보고자 할 때, "나"는 배우-환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의 "나"는 "미친놈들만큼 절박한 삶이 어디있어?"(「우울한 거울 2」)라고 말하는 "나"이며, "모든 착란적인 것이 시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착란적인 것은 시적이다"(시집 뒷면 산문)라고 믿는 시인이 "시뮬레이트"하고 있는, "내가 위조한 연극, 내가 꾸미고 있는 생체 실험"(「석고 두개골」)의 주인공이다. 환자인 "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같은 시)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사상이 없어졌"(같은 시)다는 것이다. 또한 이 환자의 병은 세계사적이라 할 만 한데, 시인은「等雨量線」연작 4편을 통해, "이란 고원"에서 "렉싱톤 80번가"까지, "고르바쵸프"에서 "쿠르드족 소년"에까지, 함께 비 맞으며 아파하고 있는 生들을 하나의 등우량선으로 무심히 이어놓고 있다.

 

"나"는 또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여기에 없는 아버지-해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곤 하는, 즉 신성을 찾고자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때의 "나"는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신성이다"(「等雨量線 2」)라고 말한다.즉, 훌쩍 넘어가 버리는 <초월>(신)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나는, 어딘가 갈 곳이 있어야 하므로 인도에는 여태껏 안가고 있다고"「진짜 빛은 빛나지 않는다」),신의 이쪽에서,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신적인 것(신성)을 찾아 내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구원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나"는 벚꽃을 보면서,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수은등 아래 벚꽃」)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며, "신성이 찰나에 임하는"(「聖 오월」) 순간이라고,"어쩌다 한순간 /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
은 /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여기서 더 머물다 가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 "나"는 또한 "나는 나무敎를 창시하여 전파하고자 했다"(「서해까지 밀려 있는 강」)라고 말하는 열렬한 나무 숭배자와 동일인이다. 그 "나"가「나무 숭배」「소나무에 대한 예배」 「거룩한 저녁 나무」와 같은 시편들을 낳는다. "비가 내리고, 나무가 있고, 초록 빛
이 있는 / 無限無窮 가운데 단 하나뿐인 별이여 / 소생하소서"(「나무 숭배」)라고 말하는 "나"를 보라.


이렇듯, 아버지-해를 찾아 헤매는 주체와 어머니-젖으로 되돌아오는 주체는 실상 그리 단순하게 분할되지 않는다. 이미 위에서 본 바 대로,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형태로 변주된다. 즉, 대체-아버지의 몰락과 그것의 영향으로 "살찐 소파"에로 퇴행해버린 주체, 그 주체를 반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주체이자 혹은 철저하게 자기 반성을 수행하는 주체, 또는 "아주 가까운 피안"을 보곤 하는 주체, 등등의 사분오열.

 

이 주체들은 문득 죽음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들은 이-쪽에서 살기 싫어 죽고 싶어하기도 하고(" ‘나’만 없으면 돼. ‘나’가 나한테 안들어오면 돼. / 완전하게 포기하면 돼. / 벼랑에서 손을 탁, 놓아버리는 거지."「밑」 "도마 위의 그 스테인리스 식칼을 두 눈 찔끔 감고 지나왔지.

/ 때로 나는 내가 두려워! 나를 어떻게 믿어?"「우울한 거울 2」), 저-쪽에서 살고 싶어 죽으려고도 한다(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듯, /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 자살하고 싶은 한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세상의 고요」). 저-쪽으로 가고 싶다는 이 "초월"의 욕망은 순교에의 충동으로 변형되기도 하며("큰 나무 보면 발가벗고 그 속에 들어가 / 祭物되어 흡수되고 싶다"「나무 숭배」), 이 "초월"에의 충동이 여전히 등장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황지우의 시를 읽을 때 습관적으로 적용해왔던 "변혁과 초월의 긴장"이라는 관점이 여전히 유효할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다중분열된 주체들은 다시 <생/사>라는 층위에서 양분될 수 있다(이 생/사의 욕망쌍은 사실 저 아버지-해를 찾는 주체/어머니-젖으로 돌아가는 주체 사이의 욕망쌍과 여기서 만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어머니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욕망은 <거꾸로 되돌아가는> 욕망이고,실상 <욕망없는 상태>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므로 죽음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 시집의 시들이「태양제의」의 자식들이 아닐까, 라고 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즉 이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서 "막(膜)"의 이미지가 탄생하며(「膜」「비닐봉지 속의 금붕어」), 막 "바깥"에 대한 사유가 이어져 나오는 것이다(「아직은 바깥이 있다」「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늘 그래왔듯, 황지우는 어느 한 쪽으로 쉽게 마음 주지 않는다. 그의 다중분열된 주체들은 빽빽하다. 이 긴장 자체가 황지우를 황지우로 만드는 힘이다. 그건 그런데, 그렇다면 8년 동안 그의 시를 읽어오면서, 수많은 독자들이 썼을 저 부치지 않은 편지에 대한 8년 만의 답장으로서, 이번 시집은, 시집의 부피만큼이나 충분히 꽉 차 있는가. 그의 상처를 나눠 갖고 있는 동세대들에게 세기말을 통과하면서 던지는 그의 <회심>의 전언은 무엇인가.

 

나의 오독인지도 모르겠으나 「모래 지평선이 있는 유리 상자」같은 시에서 그는 근대적인 역사관(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한다)을 부정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고, 「靑銅 마로니에 숲」과 같은 시에선 예컨대, "대리석탑 속에 잠들어 있던 이성은 그날 후로 여태 / 내 삶을 험난한 물결 위에 떠다니게 했달까. / 미쳐버릴 수도 없고 달관할 수도 없었던 것이 / 다 그놈 때문이었지만, 인간이라는 것들에게 뭐를 / 더 기대할 수 없게 된 요즘 그래도 끝내 / 최소한도로 믿을 거라곤 그놈뿐 아닌가 하는데"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고 보는 사람들 중 하나인 듯도 하고, 「낮에 나온 별자리」에선 "유토피아는 우리가 뒤에 두고 지나쳐왔는지도 모른다"라는 의미심장한 에피그램을 던져놓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명제화 해내기엔 시집 속에 주어진 정보량이 너무 적거나 나의 능력이 모자란다. 그가 어딘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인은 온전히 투사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관의 경지를 서성거려서도 안되는 것이라면(이번 시집을 통해 우린, 시는 완전히 미쳐서도 안된다, 라고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 경계를 사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답장은 여전히 "쓰 여지고 있는 중"인 거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한다.

 

80년대에 많은 좌파 비평가들이 그를 비판한 것처럼,그의 이번 시집을 앞에 놓고서도 우린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그의 표현대로 이른바 "유사-광증"을 실험하기엔 지금 세상이 너무 아픈 건 아닐까. 실상, 차라리 미쳐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라고 한숨짓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 이번 시집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닐까, 그의 <정신적인 꾀병>은 너무 화사한 것은 아닐까. 시집을 덮었을 때, 명치께가 저릿한 아픔보다는 나른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면, 그건 극단적인 절망과 자조 속에 있을 때에도 그가 조금은 아름답기 때문에, 독자가 그 아름다운 자학과 연민에 동일시 하게 되는 까닭은 아닐까. 아니, 본질적으로 그는,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저물면서 빛나는 바다」)과 같은, 깊지만 관조적인 이미지 그대로, 예전보다 늙어버린 건, 혹시, 아닐까.

 

하지만 내게 이 모든 비판을 넘어서서 더 압도적으로 육박해 오는 진실은 그가 너무나 뛰어난 시인이라는 것이다. 호들갑스러운 표현이지만, 그가 기왕에 발표한 시집들을 다 읽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 한국어의 아름다운 정체를 다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몹쓸 동경」「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거룩한 저녁나무」와 같은 시를 쓰는 황지우가, 상처를 추체험할 밖엔 없는 나같은 20대 중반이 아닌, 그의 동세대들의 가슴에 가닿는 느낌은 나로선 짐작 밖의 일이기조차 하다. 황지우가 황지우일 수 있는 까닭은 그러므로 그의 시 바깥에서 쓰여지는 이런 글로는 감당되지 않는다. 만약에, 이번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72편의 시를, 하루에 두편씩 대략 한달 동안 천천히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라면, 그래서 초판 1쇄에 있는 오자 3개를 모두 발견해내는 독자라면, 그 독자에게 시집의 살을 발라낸 듯한 이런 글이 더 전해줄 그 무엇은 아무 것도 없다. 언제나 나는 나의 상처만큼 밖에는 읽어내질 못하기에, 시의 용량은 항상 내 상처의 용적을 흘러 넘치고 말며, 상처를 텍스트로 읽어내려는 욕망은 상처를 읽기 보단 그걸 살아내고자 하는 욕망보다 언제나 열등한 것이기에.

 

황지우의 이번 시집은 <문학과 지성사>로서는 94년, 신경숙의『풍금이 있던 자리』이후 단행본으로는 최고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한 달 만에 2만부가 팔려 나갔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교수인 황지우는 요즘 광주 20주기 기념 뮤지컬의 대본을 쓰고 있고, 나는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라, 했던 한 선배의 말에 마음이 걸려 넘어지곤 한다,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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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가능하다

  • 등록일
    2005/05/28 09:16
  • 수정일
    2005/05/28 09:16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가능하다 미디어 / DMB 시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DMB 사업자가 결정났다. ‘지상파이동멀티미디어방송’이라는 긴 이름을 지닌 이 DMB 사업은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 쏟아져 들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방송통신서비스 가운데 하나다. 목적은 한 마디로 이동중인 사람들이 손쉽게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란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아직도 이동을 할 수 없어서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이동하며 감상할 수 있는 매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이런 매체를 만들지 말자는 건 아니다. 만약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면 DMB도 의미있는 일보전진일 것이다. 바로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장애인들의 이야기가 논쟁되고 소통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이 DMB 사업의 얼개에 깊숙이 반영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 ? 아직까진 전혀 (혹은 거의) 그렇지 않다. 김명준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소장 mjkim@mediact.org 누구나 겪고 있지만 별로 고민해보지는 않는 상황을 한번 되새겨보자. 디지틀 미디어 시대에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이 결정해버린다. 그런데도 우리 주머니를 털어 그 사업을 진행하는 기묘한 현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세상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살아보면 그냥 알 수 있는 것인데, 이 쪽 사업의 진도는 항상 거침없이 나간다. 단 한사람도 정부청사앞에 가서 “지금 보는 TV가 워낙 화질이 안좋으니 디지털로 바꿔라!”고 외친 일도 없거만 이제 수년내로 모든 아날로그 TV는 고물이 될 판이다. 모두를 위한 디지털 미디어 자본주의? 아무런 싸움도 없이 왜 이렇게 진도가 빨리 나가는지에 대한 답변은 다음 두가지중 하나다. 그게 워낙 좋은 것이긴 하지만 대중들이 무식해서 요구를 안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워낙 이권이 크게 걸려있는 것이라 앞뒤 안 가리고 진행하는 것이다. 어느 답변이 맞든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것이긴 하지만, 이 분야의 사업들이 지난 10여년간 보여준 규칙들을 보면 하나같이 똑같은 궤적이 그려진다. 언제나 시작은 장밋빛 환상이다. 언론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어느날 아침 눈을 뜬 A과장은 이동용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로 어쩌구 저쩌구 … 어쨌든 그런 편리한 세상이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따위의 기사들이 분위기를 잡아주고, 새로운 미디어가 유발할 산업 연관 효과가 그럴듯한 통계로 포장되어 등장한다. 그런데, 이 통계들을 다 모아보면 우린 하루종일 온갖 미디어의 숲에서 바보처럼 버튼을 눌러대고, 수입의 대부분을 방송통신장비에 지출하고 있어야 한다. 어쨌든, 주로 영어약자로 암호처럼 이름 붙여진, 이상한 미디어에 대한 정책이 수립되고 거대한 이권을 노리는 사업자들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이런저런 시비가 붙고, 어쨌든 사업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경쟁이 장려된다. 독점되면 안된다고,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사업이 과잉투자임이 드러나면서 수사학은 바뀐다. 소비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지 않고 경쟁은 치열하니 다시 효율성의 논리가 등장하면서 독점이 경쟁을 대체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시장이 경쟁을 낳고, 그를 통해서 소비자의 권리가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이 사실은 경쟁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결국 경쟁은 오직 사업권을 따기 위한 핑계이자, 공적 책임을 떠맡지 않기 위한 변명임이 드러날 뿐이다. 상황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이제 이런 과정 전체가 마치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양 그럴듯한 개념으로 포장되기 시작하는데, 산학협력이라는 이름 하에 동원되는 학자들은 이런 자본의 운동에 대해 온갖 논리적 구조를 부여해준다. 그것은 패배주의이거나 혹은 적극적인 동참의 표현이다. 게다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기술 개발은 그 기술 자체가 수용자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하기도 한다. 하나의 DVD 규격을 확정하자마자 이번에는 거꾸로 전 세계를 멋대로 분할통치해버린 지역코드라는 황당한 발상이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긴 호흡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이건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자본은 언제나 세상을 자신의 이름으로 구상하고 만들어왔으니까. 그러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상황을 열심히 분석하면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바꿔내는 것이다. 현실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아가 그들의 이름과는 다른 이름으로 (그것이 민중이든 시민이든)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 가운데 일단 두 가지만 점검해보자. 괴제는 자본 중심의 미디어환경 극복 그 하나는 공공성이다. 시장근본주의의 문제점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은 공공성, 공적 영역, 공익성 등의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사적 이익의 파괴적인 욕망과 운동을 제어하려했다. 미디어 영역에서 이 공공성은 아날로그 시대를 관통하며 다양하게 굴절되어왔다. 그것은 민중의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면서 함께 확대되기도 했고, 때로는 아래로부터 일어난 정치적 변화와 맞물리지 못하면서 위축되기도 하는 등 ‘불균등발전’은 불가피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그 변화의 폭은 짧은 시간동안 무척 컸다. 방송 영역에서 공공성의 문제는 우선 공영방송이라는 일종의 대의제 성격을 지니는 방송의 역할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해서, ‘시청자 주권’이라는 무척 추상적이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개념으로 표현되면서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나 시청자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또 ‘퍼블릭 액세스’의 번역판인 시청자 제작 참여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 사업의 확대로 등장하기도 했다. 정보통신 영역에서는 이와 달리 주로 보편적 서비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공공성의 담론이 발전되었다. 사람들이 값싸고 손쉽게 누구나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조건과 정책에 대한 논쟁이 공공성을 둘러싼 갑론을박의 주요한 축이 되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런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이른바 정보통신융합의 시대, 미디어간의 경계가 파괴되고 융합된다는 이 ‘디지털 미디어’ 세상에서 기존의 공공성은 어떻게 재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또 새로운 공공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그리고 과연 이러한 공공성을 전 사회적으로 담보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국가기구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혹은 제안하고 있을까. 애석하게도, 답변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다. 워낙 미래가 혼미하고 상을 잡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답답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잡아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방송 혹은 통신중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아야할지에 대한 암중모색이나 갈등만이 아직까지 우리 앞에 드러난 현실이라는 것이다. 섣부른 답변을 하기에 앞서서, 하지만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는 환경에서 산업,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 중심의 논리를 극복하면서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그야말로 미래지향적인 공공성을 구상하기 위한 단서중 한 가지를 양쪽 미디어에서 초보적인 논의 수준에서나마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주류미디어, 참여미디어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 한국의 미디어 역사가 지닌 주요 특성은 인터넷이 발전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은 시민들이 공동체 라디오나 TV를 소유하고 운영해본 경험 없이 곧바로 광대역 인터넷(초고속 인터넷이라는 황당한 상업적 용어는 되도록 쓰지말자)을 접하면서 미디어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확대한 유일한 국가이다. 즉 허가받은 주체가 컨텐츠의 생산과 소통을 독점하는 기존의 대의제적 미디어 시스템과 다른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적 참여형 미디어 시스템’의 가능성이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폭발적으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역설적으로, 인터넷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을 그 접근에 대한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 자본이 시장을 통해 인터넷을 독점하게 되는 위험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접근권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를 넘어 커뮤니케이션 권리의 보장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정책의 필요성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른바 주류 미디어의 한계는 명확해지고 동시에 그 역할이 더욱 확장되어야 함이 분명해지고 있으며, 주로 정보통신 영역으로 분류되는 새로운 미디어 또한 그 새로움과 함께 이른바 올드 미디어가 지닌 한계를 어떤 수준으로든 내포하고 있음도 분명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존 주류 미디어의 혁신과 그러한 주류 미디어와 새로운 참여적 미디어를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의 프레임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아닐까. 말하자면 방송과 정보통신이 모두 공존하는 바로 지금, 이미 드러났지만 공공성의 담론에 아직 포괄되지 않는 방송과 통신 영역의 새로운 의제들을 포괄하면서 아직은 맹아로만 존재하지만 미래에는 틀림없이 드러날 의제를 역시 포괄하는 새로운 공공성의 재구성은 불가피하면서도 가능한 것 아닌가 말이다. 이제 공적 이해를 대변해야 할 사람과 조직들은 이 질문에 대해 책임있게 답변해야 한다. 누가 주도적으로 융합을 할지 따위의 논쟁을 벌이기 훨씬 전에 이것부터 해명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자본의 힘은 막강하고 국가 기구와 공적 체계도 자본의 힘과 그 힘에 근거한 시장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이 디지털 미디어의 영역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서야 할 운동주체, 그리고 수용자의 상황을 둘러싼 특수한 조건이 도사리고 있다. 그 이름부터가 부담스러운 이른바 뉴미디어는 마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처럼 언제나 저 높은 고지 위에 서있다. 공적 이익을 고려한 대책을 준비하면 대상 자체가 기술 개발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바뀌어버리기도 하고,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순간 게임의 규칙은 이미 결정난 상태이기 일쑤다. 무엇인가 제안을 하려해도 그 제안을 이해하면서 공공성을 함께 고민할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돈도 벌기 전에 무슨 요구가 그리 많냐는 핀잔도 융단폭격처럼 쏟아진다. 이건 정말 힘든 싸움이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건 해야할 뿐만 아니라 해볼 만한 싸움이다. 기존 매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싸움이 주로 그 자유를 당장 침해하는 세력에 대항한 수세적인 투쟁의 확대로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이 싸움은 미래를 그려가는 싸움인만큼 공세적인 싸움이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고, 누구도 미래를 단언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지금 한국은 디지틀 미디어의 초기단계가 아니라 이미 그 한계와 성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이른바 ‘IT 강국’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상황을 알고 있으며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첫단추들이 꿰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디지틀 TV의 전송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시대의 채널 정책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고, DMB는 어리둥절한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그러니 비록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빨리)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 정해놓은 게임의 규칙안에서 이리저리 휩쓸려다니지 말고, 게임의 규칙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운동을 시작하자는 말이다. 처음부터 규칙을 통째로 다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지부터 논의를 해나가면 된다. 새로운 시대의 공공성과 미디어 전략을 한꺼번에 논의에 붙여보든지, 수용자 주권, 커뮤니케이션 권리, 퍼블릭 액세스 권리 등의 각종 권리 개념을 중심으로 인권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논의를 하면서 전체적인 얼개를 잡는 단서를 찾아가든지, 앞으로 남아있는 다른 매체들의 도입 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 정책을 토론하든지, 도입된 혹은 정착된 매체에 대한 재평가를 새로운 개념에 대한 상상력을 기초로 시도하든지,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누가 모여야 할지, 머리를 맞대야 할 때가 왔다. 해방의 가능성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좁고, 짜임새있게 설명하기에는 내공이 모자란 상태에서 이 거친 글을 억지로라도 쓰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 아직은 작아 보이는 이런 시도들이 분명 현재의 갈증을 채워주는 강력한 힘으로 성장해갈 수 있기 때문이고,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시도가 정말 지금과 다른 세상을 현실적으로(!)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핵심이라는 ‘기술 결정론’ 혹은 ‘생산력 지상주의’를 믿어서가 아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이 지닌 해방의 가능성과 참여와 다양성의 확대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를 한껏 키워나가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장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요약하자. 다른 세상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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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에 드리는 수청 철대위 입장

  • 등록일
    2005/05/27 17:32
  • 수정일
    2005/05/27 17:32
서민을 위한 정책을 정당의 기조로 삼고 있는 열린우리당이 최악의 상황이 발생된 후 늦은 감은 있지만 수청 철대위를 방문해 주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곳 수청동의 문제는 비단 수청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재개발, 재건축 지역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문제로서 수청 철대위는 지역 단위에서가 아니라 모든 철거민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국정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 주시길 바라며 수청 철대위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곳 수청 철대위는 주택공사가 재개발 공고를 한 후 공식, 비공식적으로 주공 관계자와 많은 의견을 나누고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고 대책 방안을 논의해 왔습니다. 주민을 해당자, 비해당자로 나누고, 철대위 동지들을 용역들을 동원하여 회유, 협박하고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만 이야기 하였습니다. 주민들을 해당자, 비해당자로 나누고 법테두리 내에서만 이야기 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투기꾼이 아닙니다.” 다만, 주공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원거주민들이고 등기부 등본에 등재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언제 이곳을 개발해 달라고 요구했습니까? 현 상황에서 우리가 쫓겨날 경우 우리는 자녀교육, 직장문제 등 지금의 보상기준으로는 세입자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으며, 주거 생존권은 와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이고, 무엇을 위한 개발입니까? 둘째, 우리는 대화의 마지막 수단을 골리앗을 선택했습니다.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상대와 대화의 수단으로 골리앗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택공사가 선택한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골리앗을 세우기도 전에 대화의 방법이 아닌 용역 깡패를 동원한 폭력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폭력 집단이 아닙니다.” 4월 16일에는 우리는 살기 위해서 싸웠지 누굴 죽이려고 싸운 폭력 집단이 결코 아닙니다. 셋째, 골리앗이 세워진 후 우리는 공식적인 5자 회담 형식의 1차 협상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주공은 지금도 예전의 입장에서만 접근할 뿐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습니다. 또, 주공의 입장과 오산시청의 말은 전혀 달랐습니다. 주공은 법적인 테두리만을 이야기하고 시청은 등기분 등본에 등재된 사람이면 모두 해당자라고 언급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이 맞는지 우리 철대위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넷째, 4월 16일 용역직원이 한명 사망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 다립니다. 또, 그 문제에 대하여 성낙경 동지가 경찰에 자진 출두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살인으로만 단정할 뿐 부검 등 죽음의 원인에 대한 기초적 수사조차도 하지 않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1차 사망 원인이 옆동 4층에서 용역이 던진 소화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4월 16일 당일 우리도 합판 한 장을 머리에 얹고 철대위를 4차례에 걸쳐 침탈하려고 한 것에 대하여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법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눈뜨고 지켜보기만 했던 경찰 책임자와 침탈하라고 지시한 주공 관계자와 용역 간부에 대해서는 반드시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 경찰은 국가인권위가 다녀간 후 화성경찰서와 구두로나마 약속한 최소생필품 마저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차단하고 있으며, TV에서도 방영되었듯이 아사직전까지 가면 항복하겠지 하는 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또, 경찰이 철대위를 향해서 처음으로 골프공, 차돌맹이에서 이제는 쇠로 만든 너트까지도 발사하여 유리창을 박살내고 동지들에게 크고 작은 부상을 입혔으며 철대위가 골프장인지 골프채를 휘둘러 유리창을 박살내면 박수치고,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공권력에 대한 증오심만 키워 왔습니다. 여섯째, 수청동 미도빌라에 거주하다 골리앗에서 투쟁중인 종지의 따님 한 분은 5월 16일경 파출소에서 자술서를 썼다고 합니다. 내용은 집안에 조폭이 들어서 가제 도구를 훔쳐갔다고 하는 내용이었고, 당일 동지의 남편되시는 분이 지방 출장에서 돌아와서 집에 들어가는 것 조차도 막고 여관에 가서 주무시라고 했던 경찰이, 4개 중대 병력이 둘러싸고 있고, 동네 주민들 맞여도 출입을 통제하는 경찰이 대낮 트럭을 들이대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도둑을 집지 못했다는 것은 저희 입장에서는 이해 할 수가 없으며 경찰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찰의 방조내지는 협조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고 봅니다. 일곱째, 이곳에 참여한 주민들을 폭력을 통해서 자기권리를 되찾으려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인식하고 수청의 문제가 해결되면 나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과 같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용역 직원 한명이 사망한 것에 대하여 성낙경 동지가 경찰에 자진 출두하고 주공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수청 주민들은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법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권력에 대한 불신감을 해소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덟째, 단전․단수는 준살인 행위입니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도 밥주고 물주고 부상자에 대한 치료는 해줍니다. 40여 일째 단전․단수가 계속되면서 동지들이 닦고 씻지도 못하는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다보니 피부병, 배탈, 설사 등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선 시급한 문제로 단전․단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권 차원을 떠나서 이것은 준살인 행위입니다. 아홉째, 열린우리당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서민을 위한 정책을 기조로 삼고 있는 정당입니다. 그러나 상동2동의 철거민투쟁, 고양시 풍동의 철거민 투쟁 등을 지켜볼 때 아직도 재개발, 재건축 문제는 살고 있는 지역주민을 위한 것이 아닌 건설자본의 논리대로만 움직이고 있다고 봅니다. 열린우리당은 수청 철대위 문제를 수청동 문제로만 바라보지 마시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근본적인 대안을 세워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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