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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 감시의 실태와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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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감시의 실태와 대응

  • 등록일
    2005/04/26 23:43
  • 수정일
    2005/04/26 23:43
이메일 감시의 실태와 대응 - 이메일, 메신저 기타 통신이용에 대한 감시에 대한 대응 지침 - 이은우(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Ⅰ. 직장의 인터넷 이용 감시와 접근 차단에 대한 노동자의 기본 입장 1. 전자우편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1) 전자우편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전자우편은 서버라는 중앙컴퓨터를 거쳐 노동자의 개인컴퓨터로 배달되고, 외부로 보내지는 전자우편은 서버라는 중앙컴퓨터를 거쳐 밖으로 보내집니다. 물론 외부의 전자우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회사의 서버를 거치지 않고 전자우편의 수신이나 발신이 이루어지지만, 최근에는 회사의 서버를 이용하지 않는 전자우편의 수신과 발신상황도 감시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전자감시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전자우편은 언제나 감시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동자는 자기의 컴퓨터에서 전자우편을 지워도 사업자의 서버에는 보낸 전자우편이나 받은 전자우편이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으며, 노동자가 회사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보내고 받은 모든 전자우편을 사용자가 따로 저장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예전에는 사용자가 노동자를 감시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고, 은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용자의 감시활동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우편의 감시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노동자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감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노동자가 전자우편을 받은 시간, 보낸 시간, 전자우편의 상대방, 전자우편의 내용 등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무제한적으로 저장하고 분석하고 감시할 수 있으며, 손쉽게 원하는 정보만을 골라서 검색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용자는 특정인이 보낸 또는 특정인에게 보낸 전자우편만을 검색해 낼 수도 있고, '노동조합'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전자우편만을 골라낼 수도 있습니다. 2. 사용자는 전자우편 관리체계를 노동자에게 공개하고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전자우편의 관리체계는 노동자의 인격권, 프라이버시권, 통신의 자유, 노동3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며, 근로조건에 관한 중대한 결정이므로 노동자에게 공개하고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이때 사업자는 전자우편 관리체계의 모든 내용을 공개하여야 하며, 전문적인 내용은 노동자에게 상세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3. 노동자는 직장에서 헌법상 보장된 인격권과 프라이버시권과 통신의 자유를 누리며 전자우편을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1) 직장은 단순히 사업자가 영리추구를 하는 사업자만의 공간이 아닙니다. 직업이 개인의 자아실현의 수단이듯이 직장은 노동자의 자아실현의 공간입니다. 직장은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생활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노동자의 자아실현의 과정이며, 가장 중요한 사회생활의 공간인 직장에서 노동자의 헌법상 보장된 권리인 인격권과 프라이버시권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2)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방해받지 않고 통신을 할 권리,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 권리는 직장생활을 하는 노동자에게도 당연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방해받지 않고 통신을 할 권리,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3) 따라서 노동자는 직장에서 비밀을 보장받으며 전자우편을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일부 사용자는 직장 내에서는 사적인 전자우편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회사가 제공하는 기기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사적인 전자우편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는데, 이는 직장을 사업자의 전유물로 보고, 노동자를 사업자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사업자의 부속품으로만 보는 위헌적이고 위법한 처사입니다. 4. 직장에서 노동자의 사적인 전자우편의 비밀은 어떠한 경우라도 침해되어서는 안됩니다. (1) 특히 직장에서 노동자의 사적인 전자우편의 비밀은 어떠한 경우라도 침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사용자가 노동자로부터 비밀침해에 대해서 동의를 받더라도 그 동의는 헌법상 기본권인 통신의 자유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2) 직장에서 노동자의 사적인 전자우편의 비밀을 침해한다는 것은 사용자가 전자우편의 발신인, 수신인, 발송일자, 발송회수, 제목, 발송내용 등 전자우편을 주고 받는 것과 관련한 일체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전자우편 뿐만 아니라 인스탄트 메신저를 통한 글이나 파일의 송수신, 게시판에 올린 글이나 파일 등 통신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전자우편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비밀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3) 회사의 서버를 이용하여 노동자가 사적인 전자우편을 보내고 받거나, 그 밖에 회사의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하여 노동자가 사적인 통신을 할 때, 회사의 서버나 컴퓨터시스템에서 중개를 위하여 전자우편이나 기타 통신을 저장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노동자의 통신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하여 순간적인 저장만을 하여야 합니다. 중개행위가 끝난 경우에는 노동자의 사적인 전자우편이나 기타 통신을 저장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순간적으로 저장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떠한 경우라도 통신의 비밀을 침해하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서버나 컴퓨터시스템의 장애를 해결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는 순간적으로 저장된 노동자의 사적인 전자우편이나 기타 통신에 대해서 접근이 허용되겠지만, 이 경우에도 접근이 허용되는 자는 서버나 컴퓨터시스템의 장애를 해결하는 자로 국한되어야 하며, 접근은 장애의 해결에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로 한정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의 대표의 참관이 허용되어야 하며, 장애의 해결과정에서 알게 된 통신의 비밀이 있는 경우에는 비밀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4) 사용자는 노동자의 사적인 전자우편이나 통신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하여 회사의 서버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노동자에게 사적인 전자우편을 보낼 때 이용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자우편 계정이나 인스탄트 메신저 아이디나 기타 통신방법을 제공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적인 전자우편이나 기타의 통신에 대해서 암호처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5. 노동자가 직장에서 사적인 전자우편을 이용할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됩니다. (1) 노동자는 직장에서 헌법상 보장된 통신의 자유, 인격권, 프라이버시권에 의하여 사적인 전자우편이나 기타 통신을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를 막는 것은 헌법상의 기본권의 침해행위이며, 통신방해행위는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하여 형사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2) 해당 컴퓨터나 통신회선이 회사에서 제공한 설비라고 할지라도 노동자가 직장에서 이를 이용하여 헌법상 보장된 통신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3) 사용자가 노동자로부터 회사의 설비를 이용한 사적인 통신을 하지 않겠다는 동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동의는 노동자의 헌법상의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무효입니다. (4) 노동자가 직장에서 사적인 전자우편을 이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허용됩니다. (i) 통신설비의 정상적인 운영에 장애가 될 정도의 과중한 부담을 주는 사적인 통신의 이용 (ii) 설비의 고장 등으로 인하여 통신회선의 운영이 불가능한 경우 6. 업무와 관련된 전자우편도 통신의 비밀이 보호되어야 하며, 다음과 같은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전에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어 업무와 직접 관련된 목적으로만 보존되거나 이용될 수 있습니다. (1) 노동자의 업무와 관련된 전자우편도 헌법상 보장된 통신의 자유에 의하여 통신의 비밀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통신비밀보호법에서도 업무와 관련된 전자우편의 동의없는 통신의 비밀의 침해나 통신의 방해는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 회사의 업무수행을 내용으로 하는 전자우편이 상법 등의 규정에 의하여 회사에서 보존해야 하는 문서에 해당할 경우에는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보존되거나 이용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노동자에게 해당 전자우편이 보존됨을 공지해야 합니다. (3) 전자우편이 회사의 업무수행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어서 회사의 업무수행을 위하여 전자우편을 보존해야 하는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사전동의를 얻어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보존된 전자우편은 회사의 업무수행의 목적을 위하여만 이용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해당 전자우편이 보존됨을 지속적으로 공지해야 합니다. 이때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사전동의를 얻는 방법과 이용의 범위는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i)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동의는 반드시 사전동의여야 하고, 동의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습니다. (ii) 다음의 사항을 서면으로 알기 쉽게 노동자에게 고지해야 합니다. ① 회사는 전자우편의 보존의 목적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② 회사는 전자우편의 보존의 기간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③ 회사는 전자우편의 보존을 책임지는 부서와 사람을 명확히 해야합니다. ④ 회사는 전자우편의 보존의 방법, 처리과정 및 보존장소를 명확히 해야합니다. ⑤ 회사는 전자우편의 보존된 전자우편의 이용 목적과 범위를 명확히 해야합니다. (iii) 보존된 전자우편은 공정하게, 본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보존된 전자우편은 회사의 업무수행의 내용과 관련해서만 노동자의 직무평가에 이용될 수 있으며, 특정한 노동자에 대한 감시의 목적으로 보존되거나 이용되어서는 안됩니다. (iv) 보존된 전자우편은 어떠한 경우에도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목적 외에는 이용되어서는 안됩니다. Ⅱ. 이메일 감시에 대한 노동자의 대응 회사의 전산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이메일이 회사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든 자신의 이메일이 감시당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① 회사의 이메일감시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한다. 과거에 자신이 이메일감시에 동의했는지 생각해본다. 동의를 받지 않은 감시는 위법이므로 회사는 노동자에게 동의를 해줄 것을 요구할 수 없고 노동자가 동의해야할 의무도 없다. 아무 조건 없이 동의한 사실이 있다면 현행법상 회사의 감시행위가 정당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자신이 동의한 사실이 없다면 내용증명 등 서면을 통해 자신이 동의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한다. ② 이메일이 감시되고 있다는 증거를 최대한 확보한다. 회사 전산망 서버관리자 등 다른 사람을 통하여 감시 사실을 확인한 경우, 이에 대한 사실을 명시한 확인서를 자필로 받는다. 녹음을 할 수 있다면 녹음을 하는 것도 좋다. 다만 녹음을 하는 경우 녹음을 하는 자가 대화의 일방당사자여야 한다. 또한 화면캡쳐나 카메라 등을 이용하여 감시상황을 증거로 확보한다. 이메일 감시로 인해 해고당했다고 생각되는 경우, 회사측에 해고사유를 명시해줄 것을 서면으로 요구한다. ③ 회사측에 요구해야할 정보 ― 리시버가 설치된 곳(회사내 모든 메일이 감시되는지, 특정한 메일만 감시되는지 알 수 있음) ― 메일의 복사본이 저장되는 기간 ― 서버의 관리자가 누구인지 ― 감시내용이 인사고과에 반영되고 있는지 여부 ― 메일 복사본이 어떤 기준으로 분류되는지(메일 제목·내용, 첨부파일의 제목·내용, 발신자, 수신자 등) ― 메일 복사본을 검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 어떤 상황에서 검색이 이루어지는지 여부 ― 검색된 내용은 누구에게, 어떻게 제공되는지 여부 ― 개인·부서·직급별 차단 정책이 따로 있는지 여부 ― 어떤 내용이 저장되는지(메일, 메신저, 파일, telnet, ftp 등) ④ 노동자가 동의했을 경우 ― 회사는 감시의 목적을 명확히 해야한다. ― 회사는 목적이외의 정보는 저장·수집할 수 없다. ― 동의했다하더라도 과거에 저장된 이메일을 열람할 수 없다. ― 감시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고지해야 한다(감시의 대상, 기간, 이메일종류, 감시장비, 감시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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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혹은 잘리거나"

  • 등록일
    2005/04/26 08:35
  • 수정일
    2005/04/26 08:35
학습지교사들, 부당영업 사례 고발…고 이정연씨 1주기 추모제도 함께 열려 "회비가 체납되면 교사들에게 이를 대납하도록 강요하고 심지어는 '사채업자를 소개해주겠다'는 식으로까지 회비대납을 강요했다." 학습지노조가 지난 22일 개최한 '학습지업계 부당영업·부정업무 사례발표 기자회견'에서 증언한 최아무개씨(경기도 안성 거주)는 "대학을 졸업한 큰딸이 학습지 교사로 1년6개월 동안 일해서 얻은 것은 1400만원의 빚"이라며 "너무 억울해 조사해본 결과 회사 관리자들이 실적을 채우기 위해 교사들에게 가짜회원을 강요하고 마이너스통장과 사채를 통해 회사로 입금시키는 방법까지 강요했다"고 폭로했다. 최씨는 "딸이 학습지 교사로 일하는 동안 자기 생활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지만 돌아온 것은 빚과 정신적 압박 뿐"이었다며 "회사의 교묘한 수법으로 교사들이 빚쟁이 되고 인권을 침해당해도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더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최씨 뿐 아니라 또다른 학습지회사의 교사로 일한 한 교사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회비가 체납되더라도 회사쪽에서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며 "오히려 사채업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식으로 회비대납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학습지노조는 또 "회비대납을 거부하면 돌아오는 것은 계약해지에 의한 강제해고뿐"이라며 "지난해 부당 영업을 항의하다 해고된 경우만 30건이 넘는다"고 덧붙였다. 노조는 또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이들 교사들은 특수고용직으로 노동3권과 4대보험에서 제외된 채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조는 "학습지 업계의 부당영업·부정업무의 심각성이 세상에 많이 알려졌음에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교사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노동정책"때문 이라며 "학습지 업계의 부당영업 근절과 노동기본권 보장과 근로기준법 적용을 위한 투쟁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기자회견이 열린 이날은 구몬학습 교사로 일하다 사망한 고 이정연씨의 1주기로, 회견 후 추모제도 함께 열렸다. 고 이정연씨는 학습지 교사로 근무하던 지난해 4월16일 혼수상태에 빠졌고 나흘 뒤인 19일 새벽 사망했으며 휴회 회비대납 등에 의한 1500만원의 빚을 남겼다. 학습지노조는 구몬학습의 사과와 재발방지책 수립, 해당 관리자 파면, 유족보상 등을 촉구했다. 앞서 지난 2월 재능교육 교사로 일하던 서아무개씨(여·24)도 심한 스트레스로 투신자살한 바 있다. 서씨는 휴회 등의 회비대납 문제로 시달렸으며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자 회사측이 위약금 300만원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려왔다. 끝내 서씨는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 노조는 "회사의 부당영업 강요로 학습지 교사들은 해고 혹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특수고용직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김미영 기자 ming2@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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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일백일간의 기록'

  • 등록일
    2005/04/25 15:48
  • 수정일
    2005/04/25 15:48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일백일간의 기록' 89명 해고, 116명 고소, 멈추지 않는 백화점식 노동탄압 최백순 기자 redsqure@dreamwiz.com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대표)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6위 자동차 생산업체로 발돋움한 현대자동차. 머나먼 꿈처럼 여겨지던 GT-5(Global Top 5) 달성이 어느덧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현대자동차 안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절규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판정에 따른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금 투쟁중이다. 거대한 공장의 규모에 비해,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수는 아직 많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마치 군사정권의 온갖 탄압을 견뎌 내면서 마침내 87년 대투쟁의 물길을 터냈던 1970~80년대의 선도적인 노동자 투쟁들을 연상시키고 있다. 불법파견 판정받은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지난해 말 노동부는 울산·아산·전주 등 현대자동차의 국내 생산공장 세 곳에 있는 127개 사내하청 업체에 대해 ‘도급을 위장한 불법파견’으로 판정했다.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엔 파견 노동자를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음에도, 현대자동차가 이들 사내하청 업체들을 통해 대규모의 불법파견을 저질러 왔다는 것이다. 해당 업체에 소속된 노동자 수는 무려 1만 여명이었다. 사실상 원청업체인 현대차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으며, 정규직과 섞여 일하는 불법파견 노동자들. 이들은 마땅히 정규직으로 고용되었어야 하지만 현대자동차의 불법적 인력운영으로 인해 비정규직이 된 사람들이다. 현재까지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비정규직은 직접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전체 비정규직의 80% 정도에 해당한다. 사내하청 가운데 이른바 1차 하청이 전원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상태고, 사외 협력업체의 하도급이라는 계약형식을 가진 이른바 2·3차 하청 노동자 2천여 명도 불법파견 추가 진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럼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비율과 규모는 얼마나 될까?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종업원 5만여 명 가운데 직접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생산직’은 2만 4천~5천명 수준이다. 결국 현대자동차를 직접 생산하는 노동자 가운데 대략 30% 정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셈이다. 직접생산 공정 외 식당·경비 등 간접지원 업무에 종사하는 인원까지 포함하면, 현대자동차의 사내 비정규직 규모는 1만 5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평균임금 기준으로 동일근속 정규직의 60% 수준이다. 정규직의 생산직 평균과 비교하면 45% 정도밖에 안 된다. 기본 시급은 법정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이조차도 비정규직노조가 설립된 2003년 이후 2년간 다소나마 개선된 결과다. 그 이전에는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거나 심지어 그조차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 정규직이 쫓겨난 자리에 비정규직 투입 IMF 이전에도 현대자동차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고, 또한 정규직과 차별이 심하지도 않았다. 현대자동차에 지금처럼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가 대규모로 투입된 것은 2000년 6월 정규직 노사간에 ‘완전고용합의서’라는 이름 아래 사내하청 투입을 합의하면서부터다. IMF를 맞아 일시적인 내수판매 부진으로 적자를 내게 되자, 현대자동차는 1997~98년에 걸쳐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쫓는다. 당시 4천여 명으로 추산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먼저 쫓겨났고, 정리해고의 실제 적용을 둘러싼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리전이었던 1998년의 고용조정 사태를 겪으면서 8천여 명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로 쫓겨났다. 2000년에 접어들어 내수판매가 급격히 호전되자 현대자동차는 생산직 노동자들을 다시 충원하기로 했다. 단 값싸고 언제든 내쫓을 수 있는 비정규직(사내하청)을 원한 회사는 노조를 교묘하게 유혹한다.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할 테니, 부족한 인원을 사내하청으로 투입하는 데 합의해 달라. 사내하청이 들어오면 정규직 고용보장의 방패막이 될 것이다.” 1998년의 대접전에서 결국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패배의 상처를 깊게 안은 노조는 회사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저버린 ‘합의서’를 움켜쥔 회사는 무차별적으로 사내하청을 현장 곳곳에 투입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재 규모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 곳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임금, 작업복·안전화 같은 것들에마저 적용되는 온갖 차별, 산재는 엄두도 못 내고 월차 한번 마음 놓고 쓰지 못하는 억압, 심지어 수시로 욕설과 반말이 횡행하는 비인간적 대우. 게다가 정규직 노동자들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느라 겪어야 하는 노동강도에서의 차별···. 정규직이 쫓겨난 자리에 투입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의 처지는, 왜 총자본이 1990년대 후반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법제화하기 위해 그렇게 총공세를 펼치고 ‘난리 블루스’를 떨었는지 설명해 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교범이었다. 노조 설립에서 불법파견 판정까지 - 당당하게 살아남은 비정규직 노조 2003년 3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 송성훈씨가 소속 업체 관리자로부터 아킬레스건을 절단당하는 ‘식칼 테러’를 당한다. 업체 규정대로 5일 전 월차사용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하자 항의를 했다가 관리자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를 ‘비정규직 주제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반항’이라고 느낀 관리자가 깡패 두 사람을 데리고 병실을 찾아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세 번이나 그어버린 것이다. ‘식칼테러’의 충격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3년여의 세월 동안 그저 숨죽이고 살아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침내 떨쳐 일어서게 만들었다.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고, 당황한 현대자동차는 해당 업체 계약해지 및 소속 노동자 전원의 신규업체 고용승계를 약속했다. 일주일 후 아산공장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현자아산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아산공장의 사건들은 현대자동차의 주력 생산거점인 울산공장에도 바로 영향을 미쳤다. 한 달 후 울산공장에서도 ‘비정규직투쟁위원회’(비투위)가 공개적으로 설립되고, 다시 두 달 후인 7월초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노조가 설립되었다. 전주공장에서도 지난해 2004년 5월 ‘하청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를 설립한데 이어 지난 2월엔 ‘금속노조 현자전주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이로써 울산·아산·전주 등 현대자동차의 국내 생산공장 세 곳 모두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의 운명은 너무나 고달팠다. 기본적으로 현대자동차가 비정규직 노조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해고와 구속을 비롯한 무수한 탄압을 십자포화로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수동성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함에 따라 그 결집력이 아직 미약했다. 정규직 노조의 지원과·연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비정규직 노조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생존을 둘러싼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러나 비정규직 노조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온갖 탄압과 악조건들을 과감하고 끈질긴 투쟁들로 돌파하면서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1년을 넘어서면서 이젠 의미 있는 성과와 승리들을 하나씩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는 정규직 노조의 임금투쟁이 종결된 이후 비정규직 노조가 독자파업과 철탑농성 끝에 이른바 2·3차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사내하청 처우개선’ 동일 적용을 쟁취해 냈다. 정규직 노조가 “회사의 완강한 반대로 불가능하다”며 포기했던 목표를 독자 투쟁으로 달성해 낸 것이다. 곧 이어 5공장에서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노린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안기호 위원장의 “정말로 목숨을 걸었던” 38일 단식을 비롯한 두 달여의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년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응 끝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노동부의 판정을 끌어냄으로써 비정규직 대중의 움츠린 가슴에 자신감과 확신을 불어넣으며 바야흐로 비정규직 투쟁을 본격적인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유력한 발판을 마련해 냈다. 현대차 앞에서 무력한 노동부 지난해 9월부터 12월 1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127개 업체 1만여 명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월 중하순에 총력투쟁을 펼치기로 계획한다. 어렵사리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냈지만, 자칫하면 제대로 쟁점화도 되지 않은 채 묻혀버릴 조짐이 농후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불법파견 판정을 내린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에게 불법파견 시정 지시를 내리면서 정규직화 및 직접고용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도망갈 출구를 열어주었다. 노동부는 그동안 금호타이어 등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릴 때 ‘원청이 직접고용하도록’ 명시적인 시정지시를 해 왔다. 또한 ‘2년 이상 파견노동자로 일하면 원청에 직접 고용된 것으로 자동간주’하는 파견법상 조항이 불법파견에도 적용된다는 게 노동부의 공식적인 유권해석이다. 전후 사정을 놓고 볼 때,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만 정규직화 및 직접고용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고의적인 누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불법해소를 위한 개선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노동부의 두루뭉실한 지시를 받은 현대자동차는 공정재배치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 혼재’를 해소함으로써 불법을 해소하겠다는, 이른바 ‘진성도급 전환’을 핵심으로 하는 개선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무려 1만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 마땅히 정규직이 되어야 했으나 현대자동차의 불법행위로 비정규직이 되어버린, 그러나 노동부라는 국가기관의 불법파견 판정으로 사실상 정규직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획득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내지 직접고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현대자동차가 제출한 개선계획서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방안이었다. 이 계획서에 따르면 정규직 또한 대대적인 공정 재배치를 감수해야 하는데, 이는 정규직 노조와 조합원들의 동의 없이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거니와 결코 동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성도급 전환이 ‘실현가능성 제로’라는 사실을 현대자동차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야 받아들이겠다는 게 현대자동차의 공공연한 입장이다. 이른바 ‘개선계획서’는 노동부의 시정 지시에 대응하는 요식절차로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어떤 진정성도 없이 국가기관을 기망하는 문서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엉터리 개선계획서를 받아든 노동부는 현대자동차를 불법파견 혐의로 동부경찰서에 고발하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마무리 지어 버렸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그조차도 형식적인 고발장만 제출했다가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관련 자료를 경찰에 제출한 것이 ‘노동기본권실현 국회의원연구모임’ 소속 단병호·조승수·김영주 의원 등이 3월 14일 발표한 진상조사 결과에서 밝혀졌다.) 도대체 고발 이외에 노동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없다는 것인가? 간단한 방법으로, 불법 판정을 무시한 채 불법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을 구속 수사해 달라고 검찰에 품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간단하게 가능한 일도 일부러 안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들이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을 멈추다 이처럼 ‘알맹이 빠진 시정 지시 → 엉터리 개선계획서 제출 → 형식적 고발로 사태 종결’의 짜고 치는 듯한 수순이 전개되는 가운데, 1월 12일 현대자동차가 제출한 세 번째 마지막 개선계획서마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일관하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규직 노조가 준비부족을 이유로 당장은 공동투쟁에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정규직 노조의 준비완료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울산의 비정규직 노조는 1월 20일부터 잔업거부를 포함한 생산타격 투쟁에 돌입하기로 했다. 비정규직 스스로의 강력한 투쟁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최대한 쟁점화 시켜야만, 불법파견 판정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절박함이었다. 1월 20일로 예정된 비정규직 노조의 잔업거부 투쟁이 다가오자 현대자동차와 사내하청 업체들은 미리부터 대체인력 투입을 준비했다. 특히 5공장 도장부의 경우 비정규직 노조가 상당한 조직력을 확보하여 라인을 완전 정지시킬 게 분명해 보이자, 원하청 사측은 14일부터 예비 대체인력을 생산라인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5일 대체인력 철수를 요구하는 1시간 작업거부 투쟁으로 예비 대체인력을 철수시키고 나자, 사측은 이를 주도한 정영미 비정규직 노조 대의원을 17일자로 해고했다. 20일이 미처 오기도 전에 비정규직 노조와 현대자동차 사이의 긴장이 가파르게 치솟아 오른 것이다. 18일 오전 8시 주간조 출근과 동시에 비정규직 노조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불법대체인력 철수! 비정규직 노조 인정!” 등을 요구하며 5공장에서 전격적으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도장부 및 의장부 비정규직 120여명의 탈의실 점거농성으로 시작된 파업은 곧바로 5공장 전체를 정지시켰다. 투싼과 테라칸을 생산하는 5공장 라인이 주간조 내내 완전히 정지하자, 오후 3시 정규직 노동자들이 조기 퇴근했다. 5공장의 전격 파업 돌입에 발맞추어 비정규직 노조는 20일부터 시작하려던 잔업거부 투쟁을 18일 전격 단행했다. 1·2·3공장에서 6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잔업거부에 동참했다. 사측은 비정규직의 생산타격 투쟁을 봉쇄하려고 대체인력 투입을 준비하였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확실하게 라인이 서 버린 것이다. 대체인력 투입 방관한 정규직 노조 5공장의 탈의실 점거 옥쇄파업이 지속되는 가운데, 1·2·3공장의 잔업거부 투쟁은 1월 20일과 21일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사측의 총체적인 반격으로 잔업거부 참가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더 이상 잔업거부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내몰렸다. 정규직 노조 집행부는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라는 형식적인 지침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대체인력의 대다수인 1개월짜리 한시계약자를 대체인력 유형에서 제외함으로써 사실상 대체인력 투입을 방관한다. 집행부의 방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정규직 활동가들이 육탄돌격을 불사하며 대체인력 투입 저지 투쟁에 나섰지만, 집행부의 방관과 사측의 해고 위협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그 기세를 지속해 내지 못했다. 다른 사업부의 잔업거부 투쟁이 동력 소진으로 사실상 종결되면서, 1월 21일에 이르러 5공장 파업대오는 급격히 고립에 빠져들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사측은 21일 비정규직 노조의 본관 앞 집회 때 경비대를 동원하여 군홧발로 머리를 짓이기는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경비대의 폭력을 앞세운 현대자동차의 힘에 눌려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압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22일, 최남선 조합원이 현자노조 사무실 내에서 분신을 시도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과 “원하청 노조의 공동투쟁”을 호소하면서.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지만, 비정규직 조합원의 분신 시도는 사측을 움찔하게 만들었고 사측의 공세는 잠시 주춤한다. 그러나 분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투쟁전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자 1월말에 이르러 사측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2월 8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를 앞두고 노조 간부 및 5공장 농성자 전원에 대한 해고 절차 진행, 116명 고소고발,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 손해배상 소송 제기 등 전방위적인 공세에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고립 상황 속에서도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패기와 자신감을 높여갔다. 파업농성이 2주를 넘어가며 대오가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농성단의 기세는 결코 꺾일 줄을 몰랐다. 사측이 다가오는 설 연휴를 결정적 계기로 보고 총공세를 펼쳤지만, 농성단은 ‘설 연휴 기간 농성장 사수’라는 쉽지 않은 결의를 흔쾌히 끌어냄으로써 사측을 허탈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결국 설 연휴 기간에도 농성투쟁이 지속되는 상황이 되자, 현대자동차는 연휴가 시작되는 8일부터 ‘단전단수’라는 극악한 방법까지 동원한다. 텅 빈 공장, 영하의 날씨. 난방시설도 전기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기에, 전기와 물이 끊긴 한겨울의 농성장은 그야말로 정상적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한낮에도 촛불을 켜야 조명이 되는 농성장을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박쥐동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박쥐동굴’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기는커녕,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더욱 강인한 투사로 단련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얘기꽃 속에 서로의 살아온 삶들을 나누고, 비정규직으로서의 설움과 희망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더없이 끈끈한 ‘동지’로 거듭났다. ‘단전단수’라는 최악의 탄압이 오히려 최근 수 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에서 볼 수 없었던 최강의 투쟁대오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박쥐 동굴’ 속에서 태어난 최강의 투쟁대오 설 연휴가 끝나가던 2월 12일 저녁, 비정규직 노조 운영위는 ‘기필코 1만 명 비정규직 대중파업을 성사시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요지로 향후 투쟁방향을 정리한다. 그 정도 탄압을 몰아쳤으니 이제 곧 백기항복을 할 것이라 잔뜩 기대했던 사측은 비정규직 노조와 농성단의 기세를 확인하며 기겁을 한다. 바로 다음날인 13일 비정규직 노조 안기호 위원장은 낮 12시경 농성장에서 식사를 하러 싼타모 식당을 향해 계단을 내려서다가 100여명의 경비대들에게 붙잡혀 건물밖에 대기 중이던 스타렉스 차량에 납치, 5공장 정문에서 동부경찰서 형사들에게 인계된 후 바로 구속되었다. 안기호 위원장은 납치 과정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고, 동행하던 조합원 세 명도 상당한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의 구심인 안기호 위원장을 제거하면 대다수가 초심자인 농성단이 결정적으로 흔들릴 것이라던 사측의 계산마저 빗나가고 말았다. 사실 안기호 위원장은 노조 설립 이후 헌신적인 실천투쟁을 바탕으로 농성단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믿고 의지했던 위원장을 참혹하게 빼앗긴 농성단의 위기의식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버렸다. 안기호 위원장을 빼앗기고 며칠이 지나자 농성단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투쟁체가 되어 있었다. 2월 18일 물리력을 동원한 강제퇴거를 단행하겠다는 공문이 날라오고, 20일엔 실제로 물리적 침탈이 시도되자, 21일 마침내 30~40대 여성 농성자들이 단식투쟁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농성장 안에서도 보호만 받으며 살아왔는데, 아들 같은 20대 남성 농성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당황한 사측은 200여명의 관리자·경비대를 동원하여 여성 농성자들의 단식투쟁을 방해하러 나섰다. 속옷과 생리대가 들어있는 가방을 열어 던지고, 여성 농성자들을 지키려던 20대 남성 농성자들을 밀치고 때리며 온갖 폭력을 가했다. 한 남성 농성자의 머리를 벽 모서리에 쥐어박아 피투성이로 만들기도 했다. 웃옷을 벗어던진 여성 농성자의 절규와 실신. 결사적인 투쟁 끝에야 농성자들은 단식투쟁의 공간을 지켜낼 수 있었다.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의 ‘피 흘리는 결사투쟁’은 마침내 상황의 반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22일 정규직 노조의 윤성근 전 위원장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최소한 평화적인 농성이라도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함께 하겠다”며 농성장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현장조직과 각 사업부 대의원회·소위원회 등에서 농성장 지지방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 25일 마침내 단전단수가 해제되었다. 1 월 21일 다른 사업부들의 잔업거부 투쟁이 동력 소진으로 종결된 이후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던 최악의 고립 상태를,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마침내 돌파해 낸 것이다. 89명 해고, 116명 고소고발, 집회시위금지 가처분, 출입금지 가처분,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 손해배상 신청, 위원장 납치 폭행, 단전단수…. 거대한 현대자동차가 백화점식 노동탄압으로 십자포화를 쏟아 부었지만,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것을 뚫고 오히려 강철투사로 거듭난 것이다. 파견법 개악 저지와 불법파견 철폐 투쟁 올해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가 ‘사회적 양극화’라고들 한다. 그 핵심에 비정규직 문제가 있고, 특히 제조업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불법파견 문제가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은 한국의 산업구조 및 노동운동에서 현대자동차가 갖는 상징성으로 인해 이미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에 4월 처리가 확실시되는 파견법 개악안 저지 투쟁이 결합되면서, 비정규직 문제의 향방을 가르는 큰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 전체의 원하청 공동투쟁이 큰 그림으로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고립을 벗어난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여전히 활력 있게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서서히 동력을 회복한 타 사업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다시 새로운 분출을 준비하고 있다. 4월 불법파견 철폐 투쟁과 파견법 개악 저지 투쟁이 만나는 정점에서,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또 어떤 감동스러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그들은 아직 소수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끝내 소수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들은 소수의 벽을 넘지 못한 채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평범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저토록 강인한 투사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운동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도 결코 아니다. 저 작은 흐름 속에는 거대한 미래가 숨 쉬고 있다. 멀지 않아 지금 그들을 통해 예고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활짝 열리고야 말 것이다.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의 절반 이상이 20대 청년 노동자다. 개인주의적이기만 한 줄 알았던 지금의 20대, 노조와 파업은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금의 20대. 그러나 이번 투쟁을 통해 그들은 단결력과 투쟁력에서 과거 어느 세대보다 강력한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강한 자율성에 기초하기에 그들의 집단성은 훨씬 생동감이 있다. 인터넷과 멀티미디어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풍부한 문화적 감수성과 표현 능력을 갖고 있기에 그들의 투쟁력은 훨씬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20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가능성 20대 청년들의 잠재적인 가능성이 마그마처럼 꿈틀대는 비정규직의 분노와 결합하면서 한국 노동운동은 조만간 전혀 새로운 거대한 분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은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2005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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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법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

  • 등록일
    2005/04/25 15:46
  • 수정일
    2005/04/25 15:46
어머니 죽음에도 돈을 벌어야 했던 어느 이주노동자의 이야기 최백순 기자 redsqure@dreamwiz.com 1998년 나는 방글라데시의 다카 국제공항에서 가족들의 슬픈 배웅을 받으며 브로커와 함께 서울에 가기 위해 먼저 홍콩으로 출발했다. 비자가 없는 빈 여권을 들고 그렇게까지 멀리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열한 명의 형제로 이루어져 있다. 신장이 안 좋으신 어머니는 곧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어머니를 수술시켜 드리고 싶었지만, 막상 졸업을 하고 보니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자니, 그 돈으로는 수술은커녕 한 달에 30만 원이 들어가는 정기적인 치료조차 불가능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비용은 약 700만 원. 브로커는 처음에 나를 홍콩으로 보냈다. 우리는 홍콩에서 일주일을 체제한 후 한국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브로커가 사정이 여의치 않다며 나를 먼저 중국으로 보냈다. 그 후 약 3개월 동안 나는 탁구공처럼 홍콩과 중국을 10번 정도 오가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돈은 다 떨어지고 전화도 제대로 걸지 못하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3개월 후에 돌아온 브로커는 이제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며 마치 비즈니스맨처럼 나에게 양복을 사 입혔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서류가 가짜라는 것이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몇 명의 덩치 좋은 출입국 직원들이 나를 위협하며 출국 관련 서류에 서명하라고 다그쳤다. 결국 서명을 하게 된 나는 김포공항에 있는 보호소에서 며칠을 고생하다 방글라데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행은 어이없는 실패로 끝났지만 브로커에게 준 돈을 다시 돌려받지는 못했다. 한 달 후에 다시 다른 브로커를 통해 한국행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중국에서 했던 고생이 무색하리만큼 너무도 쉽게 출입국 절차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방글라데시 브로커와 몇몇 출입국 관리 직원들 사이에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통과되었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한국에 들어온 후 내 생활은 거의 노예의 생활과 다름없었다. 하루에 12시간 야간과 주간을 바꿔가면서 일한 월급이 식비 합쳐서 65만 원. 너무나 힘들었지만 아픈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6 개월 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셨다. 슬 픔을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장에라도 방글라데시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 오기 위해 빌렸던 돈을 갚기 위해, 또다른 가족들의 생계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술만 마시면 그때의 고통과 슬픔이 밀려들어 와 내 자신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생활한 지 5년. 그 동안 못사는 나라의 외국인으로 차별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차별”이라 이름붙일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더 이상 눈치 보지 말고 좀더 솔직히 그리고 좀더 과감히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이 글을 쓴다. “저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고 외국인이야” 한국은 못 사는 아시아의 나라에서 온 나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얼굴이 검고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며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힘들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번 회식을 갖게 되면 어김없이 삼겹살집을 가게 되는데, 한국인 사장과 동료들은 이슬람 문화에서 자란 나에게 돼지고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돼지고기가 피를 맑게 해준다며 마구 강권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돼지고기를 다른 고기라고 속여서 나에게 먹였다. 돼지고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눈물이 찔끔 나도록 한참 토한 적도 있었다. 한국말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당한 수모도 많았다. 대부분의 다른 이주노동자들도 그러하듯, 한국말을 배우는 것은 낯선 언어에 대한 동경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한국어를 몰라 영어로 이야기하면 한국인 사장이나 동료들로부터 엄청난 욕설들이 날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미군 혹은 영어교사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거나, 영어를 좀 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한국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 한국말 잘 하시네요”하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하는 말이 귀찮기 이를 데 없다. 택시를 타건, 지하철을 타건, 시장에서 물건을 사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가건,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이 이 말이다. 택시 기사들도 백이면 백 내가 한국인 동료나 친구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으면 백미러로 날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하고 묻기 일쑤다. 그러면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인이에요. 좀 탔죠?” 하고 대답한다. 그만큼 한국은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문화 속에 사로잡혀 있다. 또 한 번은 길을 걸어가는데, 엄마와 걸어가고 있던 한 아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마, 미국인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는 “저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야”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마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종류가 한국인, 미국인, 외국인 이렇게 딱 세 가지인 듯이 말이다. ‘우리 한국인’과 ‘불쌍한 그들’ 게다가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이주노동자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이주노동자들의 존재에 대해서 호의적이라는 신문과 방송 매체들도 이주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은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주노동자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전자로 대표적인 사례가 MBC의 「아시아, 아시아」나 「느낌표」같은 프로그램이다. 한번은 「아시아, 아시아」에서 가족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한 이주노동자에게 가족을 한국으로 초대해서 만나게 해주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 적이 있다.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쏙 뽑아내는 이 방송은 비록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울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청자들 스스로가 불쌍한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이 무언가를 해주고 있다는 자족감과 우월감을 갖게 하면서 차별의 현실과 시스템을 은폐하고 부인하게끔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은 다소 그 인기가 주춤한 ‘블랑카’ 역시, 한국이 한국 스스로를 코믹하게 비추어보는 거울의 역할로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끌어들였을 뿐, 이주노동자의 현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또, 정부와 방송 3사는 이주노동자를 ‘외국인 근로자’로 지칭하길 계속 고집한다. 특히 미등록일 경우, 미등록이 아닌 ‘불법’으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늘 주류 언론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근로자란 단어는 노동자의 노동자성(노동자의 권리)을 어떻게든 탈각시키고 단순히 일하는 책임만을 강조하는 용어로 박정희 시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인’이란 말도 ‘한국인이 아니’라는, 다분히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용어이다. 반면 ‘이주민’이란, 말 그대로 ‘이동’에 강조를 둔 말이다. ‘이주민’은 한국 밖에서 한국으로 이주 해왔다는 좁은 의미뿐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광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예전에 각 지방에서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대다수의 서울 시민들도 사실은 이 광의의 ‘이주민’에 속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불법’이라는 용어이다. 보통 합법이니 불법이니 하는 말은 특정 행위로 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말이다. 하지만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는 말에서 ‘불법’은 사람의 존재 자체를 ‘합법이냐 불법이냐’로 규정하기 때문에 ‘미등록’으로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법을 어긴 사람을 우리는 ‘불법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합법적 결혼에 의하지 않고 태어난 아기를 우리는 ‘불법 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불법’이라는 말의 문제는 단지 용어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불법’이란 용어는 출입국관리소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처럼 단속하고 수감하고 강제출국 시킬 때,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부정하는 구실로 작용한다. ‘불법 사람’과 인간의 존엄성 작년에 시행된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불법 사람’이 아닌 ‘합법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최고 3년이다. 그것도 고용주가 1년마다 꼬박꼬박 계약을 갱신해 줘야 하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또 작업장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임금이 체불되거나, 근로조건이 나빠서 공장을 옮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순전히 고용주의 입장만을 담고 있는 이런 고용허가제 아래에서 이주노동자가 3년을 ‘합법 사람’으로 남아 있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또 법적으로 5년 이상을 합법적으로 체류하게 되면 영주권이 주어지는 제도가 한국에도 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상 3년밖에 체류가 허용되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영주권이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이주노동자를 어쩔 수 없이 ‘불법 사람’으로 만드는 제도와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싼 값에 노동자를 쓰고 버리기 위한 전략이다. ‘불법’ 상태에서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싼 값에 부리는 것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새로운 이주노동자로 물갈이 하면서 임금을 계속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이주노동자들의 단결투쟁과 공동체 형성을 저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일 것이다. 종종 이런 소릴 듣는다. 3년만 벌어도 고국에 가면 큰돈이 될 텐데 무슨 욕심이 남아 그렇게 차별받으면서 한국에서 일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적게는 700만~800만 원, 많게는 1500만원 정도의 브로커 비용을 충당하는 데만도 2년 이상이 걸린다. 이런 현실 속에서 빚만 갚고 한국을 떠나기란 쉽지 않다. 정부에서는 불법 브로커들을 없애고 고용허가제 하에 모든 것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불법 브로커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공식적인 소개 기관조차도 거액의 돈을 받고 이주노동자들을 공급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정부의 발표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 추방에 대해 침묵하거나 지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없다면 이미 공장 문을 닫았을 영세 제조업에 그동안 우리들은 묵묵히 일해 왔다. 요즈음은 공장지역 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에서도 농사지을 인력이 없어 이주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실정이다. 밑바닥 이주 노동자의 노동 없이 과연 한국 경제가 돌아갈 수 있을지도 정말 의문이다. 결국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주류 미디어들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까도 말했듯, 어떻게든 이주노동자를 사람들의 차별 속에 몰아넣어 그들의 권리와 목소리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차별을 없애기 위한 첫걸음 이러 저러한 미디어의 내용과 표현방식은 둘째치고서라도,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미디어에 접근하고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제한되어 있다. 이주노동자의 현실과 권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미국인 등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에게는 AFKN, 케이블 TV, 위성방송, 영어잡지, 신문 등 다양한 미디어들이 열려 있는 반면,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의 70~80 퍼센트를 차지하는 45만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라디오 주파수 하나, TV채널 하나 주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자국어로 된 철 지난 잡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어야 할 만큼 매체와 정보에 목말라있다. 이런 전체 이주노동자들의 공통된 상황과 권리를 알리는 목적뿐만 아니라, 97개 나라의 다양한 문화에서 온 다양한 공동체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있어서도 소출력 공동체 라디오나 인터넷 미디어 공동체 만들기 같은 이주노동자들의 미디어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각국의 언어로 된 크고 작은 미디어 활동은 한국의 획일화된 문화에 다양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지 17년. 이제 우리들은 이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제 잠깐 왔다 가는 이방인의 존재가 아닌, 이 땅에 한국인들과 살아 숨쉬는 존재로서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길 간절히 기원한다. 2005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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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우리는 무엇이 돼 있을까?

  • 등록일
    2005/04/24 09:05
  • 수정일
    2005/04/24 09:05
[이완기의 여의도통신] 욕망의 정글속에 내던져진 미디어 ****이완기 / 본지 객원칼럼니스트·MBC기술본부장 91년 여름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선생은 통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뇌옥(牢獄)에서 20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1988년 가석방으로 자유를 찾았다. 28세에 시작한 인생의 황금기를 닫힌 세월로 보내버린 셈이다. 선생은 교도소 밖의 사람들이 교도소 안의 인간군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를 차분하게 풀어 놓았다. 범죄자나 패륜아 등이 모여 있는 교도소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살기 힘든 지옥처럼 인식되어 있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이 없는 감옥 안의 세계가 밖의 세상보다 오히려 덜 야만적이고 더 인간적임을 선생은 긴 세월의 감옥살이를 통해 터득했다고 했다. 12살 된 고아 소녀, 그녀는 어떻게? 14년 전에 필자가 들었던 선생의 이야기들 가운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예화는 가출한 누이동생을 세상에 버려둔 채 감옥에 갇혀버린, 같은 방의 한 재소자의 이야기다.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하며 어린 누이를 애타게 그리는 그 재소자는 출소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누이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면서 누이의 소식을 전해줄 것을 간절히 부탁한다. 바깥세상에서 막 들어온 신입 죄수나 재범으로 다시 들어온 죄수만 보면, “서울이 많이 변했죠?”라면서 집요하게 누이의 소식을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갇혀 있는 오빠가 어린 누이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선생이 그 재소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천애 고아가 된 12살 소녀가 서울 한 복판에 던져졌을 때, 10년 후 그녀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리들의 상상은 공통적으로 불길한 예측에 포박되어 버린다.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우리는 “십중팔구 ‘거리의 여자’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너무 쉽게 내려버린다. 그것은 대도시 서울의 본질을 오랜 기간 체득한 관습적 사고 현상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러한 우리의 상상이 거의 대부분 실제상황으로 되어 버린다는 현실이다. 선생의 문제 제기는 거기서 출발한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인구, 고층빌딩, 자동차 대수, GNP, 각종 경제지수 등으로만 재단할 때, 냉혹하리만치 비인간화된 서울의 중병은 치유되기 어렵다. 선생의 문제 제기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어 있는 자본 만능의 사회에 직격탄을 던진다. 서울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무신경 사회, 자유는 방임으로 흘러 만인이 투쟁하는 정글사회, 고삐 풀린 자본을 통제 불능에 이르도록 방치한 무기력한 후진사회다. 의지할 곳 없는 고아소녀의 절대 위기를 절대 보장해주지 않는 세상은 선진사회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노숙자의 문제에는 아랑곳없이 소득 2만달러 달성이 더 시급한 사회는 인간적인 세상이 아니다. 인간다운 미디어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할까 각설하고, 다시 미디어로 돌아가 보자. 자본이 만들어 놓은 사생결단의 경기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우리의 미디어는 10년 후에 무엇이 될까? 게임의 규율도 없고 무소불위의 자본을 통제할만한 견제기구도 없는 대한민국에 내 팽개쳐진 우리의 미디어는 10년 후 어떤 모습이 될까? 보통사람이 평생을 땀 흘려도 모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돈을 인기연예인은 한 차례 광고출연으로 벌어들인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오늘의 미디어다. 그 위대한 인기를 이슈화하고 확대재생산해서 더 큰 미디어의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날 미디어의 정체다. 그 미디어가 쏟아내는 의제와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끌고 간다. 문화마저도 ‘문화산업’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어떤 미디어도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공염불인 현실이다. 미디어의 모든 의제가 산업론에 기반해 있고, 공공성과 공익성에 대한 논의는 고용효과, 성장 동력에 묻혀 소수 공영론자들의 한물간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암울하기만한 미디어의 공공성 논의에 실낱같은 희망의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정책 입안자와 학자와 서비스 공급자들이 하나같이 돈벌이 미디어만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꺼져가는 공공 미디어의 불씨를 다시 짚이려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지난 달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방송통신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는 그 동안 미디어의 진화과정에서 흔히 제시되었던 산업론과 시장주의의 논점을 벗어나, 방송환경변화에 따른 방송의 공공성 퇴색에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행복하고 건강한 인간의 삶터로 만들기 위해 미디어가 해야 할 역할은 지대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시청률, 돈벌이, 채널수, 성장동력 등 경제지수로만 평가하는 작금의 담론은 빨리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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