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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3/31
    인터넷에 글쓰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간장 오타맨...
  2. 2005/03/31
    반가운 만남
    간장 오타맨...
  3. 2005/03/30
    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간장 오타맨...
  4. 2005/03/29
    아름다운 봄날(2)
    간장 오타맨...
  5. 2005/03/27
    “안심해. 해가 뜨듯, 좋은 세상이 와”
    간장 오타맨...

인터넷에 글쓰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 등록일
    2005/03/31 20:40
  • 수정일
    2005/03/31 20:40
저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기에는 제 자신의 글에 대한 자신감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또 이러한 제 글이 오해의 소지를 낳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1년이 넘도록 제 기본적인 경제생활이 불가능해왔고, 더이상 경제활동이 전무한 상황에서 글쓰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기에 조심스럽지만 여러분의 지지와 연대의 후원을 요청하는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저 는 대자보라는 인터넷매체에 기사를 송고하는 기자입니다. 1년동안 60여개의 기사를 써왔으며, 그 기사의 대부분은 우리사회에서 소회받고 차별당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이야기, 사회일반의 부조리를 넘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의 이야기들로 채워졌습니다. 이것은 제 삶을 풍요롭게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문제이고 당장의 경제활동보다 저에겐 더욱 소중한 문제였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연말 여러가지 개인적인 문제로 글쓰기에 소홀해졌던 때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기본적인 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의 경제적 자립의 부재였습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제가 쓰는 글에 지지와 공감을 갖고 계시는, 그리하여 同知로서 저의 글에 연대의 뜻을 표해주실 분들은 적은 금액이라도 저를 후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러한 요청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경제적 이유로 글쓰기를 중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며, 이러한 제 생각에 공감하시는 동지들께서는 단돈 천원이라도 저의 사회를 바꿔나가기 위한 글쓰기에 후원을 요청합니다. 아직 날씨가 많이 춥네요...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후원계좌 - 기업은행 048-059332-01-011 (예금주 - 김오달) 우리은행 549-022249-02-101 (예금주 - 김오달) 2005/03/31 [10:08] ⓒ대자보 ** 대자보 기사들을 볼때 나와 코드가 맞지않는 글들이 있어 때론 글을 건너뛰고 읽지만 대자보를 운영하는 대표님 창은이형의 걸어다니며 찍은 기사 냄새가 향긋하게 다가온다. 간만에 들어온 대자보... 브레이크뉴스(시대소리+대자보)의 아픔을 딛고 아무쪼록 힘차게 전진하시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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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만남

  • 등록일
    2005/03/31 13:57
  • 수정일
    2005/03/31 13:57
도종환 시인의 편지에서 퍼날라옴. 참 여유없이 산다는 것을 도종환 시인의 글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그러나 난 도종환 시인과 같은 자리는 되도록 피하고 싶다. 나의 무르익지 않은 존심인지... 고집인지 모르나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양보하기 싫은 일 그리고 궂이 만나 서로 불쾌하고 어색한 자리는 피하고 싶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저자가 만할 것처럼... 과거 그를 기억하기 위해... 나약함이기도 하다. ---------------------- 오랜만에 반가운 전화를 받는다. 만나자는 약속도 흔쾌하게 정해진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과 약간의 들뜬 기분으로 약속장소를 찾아간다. 그런데 가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오늘 이 반가운 만남이 즐겁고 유쾌한 자리가 되고 끝날 때도 유익한 만남이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이었다. 학교동기를 만났다. 반가웠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옛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렵고 까다로운 선생님 밑에서 고생한 이야기가 제일 즐거웠다.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러다가 요즘 하는 일,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 갔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이야기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랐다. 흉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도 서로 달랐다.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비슷했지만 그런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의견은 같지 않았다. 자연히 가정교육, 학교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고 경쟁을 중심으로 한 사회 시스템과 거기서 낙오하면서 소외감과 적개심과 콤플렉스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만드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와 경쟁 없는 세상은 없는 게 아니냐는 현실론을 중심으로 각각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경쟁이 심하고 환경이 어렵다고 꼭 나쁜 사람으로 자라는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고 친구는 이야기하였다. 그 말도 맞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훌륭하게 성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잘못된 구조 속에서 더 나쁘게 자라고 있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쪽은 파병을 반대하고 한쪽은 국가의 미래와 이익을 위해서 찬성한다는 이야기로 발전하여 서로 주장이 강하게 엇갈리더니 마침내는 정치와 정치지도자에 대한 평가에 이르면서는 서로 세계관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씁쓸해지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다시 웃으면서 술을 권하기도 하고 몇 번이나 화제를 다시 돌려보려고 하였지만 조금 이야기를 하다보면 다시 첨예하게 대립될 수밖에 없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주장으로 옮겨가 있곤 하였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처해 있는 환경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서 생각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술을 많이 마실 형편이 못되었지만 친구는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우리는 자리를 끝내고 일어섰다. 악수를 하고 또 만나자고 말은 하였지만 헤어져 돌아오는 밤길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오면서도 아까 친구가 한 말에 대해 이러이러한 사례를 더 들어가며 반박을 했어야 하는데 그 말을 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친구가 한 말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 자꾸 떠올라 불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되자 후회의 마음이 밀려왔다. 작은 것을 가지고 밀리지 않고 지지 않으려고 하다 큰 걸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을 조금 덜 하고 더 많이 들을 수는 없었을까. 친구의 말이 틀리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나와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내 말에 대해 공격을 한다고 생각하여 경색되지 말고 좀 더 유연한 자세로 대할 수는 없었을까. 상기된 얼굴, 따질 듯한 표정으로 말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친구도 얼굴이 굳어졌던 건 아닐까. 친구가 계속해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많은 말을 하게 된 것은 혹시 내가 한 말 중에 나도 모르게 친구의 자존심을 강하게 건드린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톨스토이의 책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종종 분노에 사로잡혀 그것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분노 속에 일종의 남자다움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단단히 혼내주겠다, 등등.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분노는 나약함의 증거이지 힘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를 많이 낸다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감이 있으면 분노하지 않는다. 강한 자일수록 여유가 있다. 분노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행동이라는 것이다. 몰론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야 하고 분노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크게 언성을 높이고 분노할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도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노약자나 여자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중에는 강한 자의 폭력에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살아온 소심하고 나약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어지는 톨스토이의 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만 정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거나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 화가 나 있을 때는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린 것 같다. 나의 분노는 정당하고 다른 사람의 분노는 어이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 분노만 정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게 분노한 상태에서의 생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마음의 평정을 잃은 상태에서 하는 생각과 판단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정신적 여유를 잃어버릴수록 이성적인 판단이 설 자리는 줄어든다. 격앙된 상태에서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 하는 생각이 앞서기도 한다. 그리고 화가 났다고 해서 상대방이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새겨두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옛 친구와의 만남, 가족들끼리의 나들이, 애인과의 데이트, 동료들과의 회식 모임, 내일도 우리에겐 그런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남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남이 끝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즐겁고 다시 만나고 싶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남의 자리도 그리고 그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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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 등록일
    2005/03/30 19:11
  • 수정일
    2005/03/30 19:11
** 이 글을 진보넷 블로거 중 한분이 올렸던 글인데... 디지털 말에 올라와 있어 그냥 또 올려본다. 내가 읽기 위하여.... 데스크 칼럼 이종태 기자 jtlee@digitalmal.com “저 공장도, 토지도, 건물도, 문화도, 무기도 우리의 것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나왔던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뒷 표지에 새겨져 있었던 문구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 이 잡지는 ‘노동해방’(사회주의)이란 ‘노예의 언어’를 사용하긴 했으되, ‘노동운동의 목표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뚜렷이 못박는 선명성을 과시하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랬다. ‘80년대’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의 꿈은 사회주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지식인들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농촌으로 들어갔다면, ‘80년대’ 남한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운동가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은 레닌 등이 교시한 대로 너무나 선명했다. 임금인상 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은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 노동자들은 이 경제투쟁을 통해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운동가들은 생각했다. “파업(경제투쟁)은 혁명(정치투쟁)의 학교”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80년대 내내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경제투쟁은 단지(!)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참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예비적 투쟁’으로 설정되었다. 그래서 투쟁의 성과가 설사 해당 기업 노동자만의 처우개선에 그친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 노동자를 위한 싸움’이라는 ‘윤리적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자부심 덕분에 당시의 노동운동은 ‘자본의 앞잡이’들이 식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감옥에 가두고, 때로 조직 내부에 프락치를 투입해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리적 확신과 자부심이 강한 만큼 투쟁은 치열했다. 이렇게 ‘80년대’는 해방 이후 줄곧 수세였던 남한의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연대가 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이 거둔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노동운동의 치열성은 당시 3저호황과 맞물리면서 1987년을 전후한 3년여 동안 전체 노동자계급의 실질 임금을 100% 정도 올려 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80년대’의 노동운동이 오히려 한국자본주의를 더욱 튼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경제를 주도한 것은 자동차, 아파트 등 내구소비재 산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들이 쏟아내는 고가의 내구재 상품들이 팔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이 급속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생산능력 확대와 임금상승이 맞물려 경제 전체적으로는 선순환을 이루었던 셈이었다. 심지어 1980년대 말 한국경제의 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내수의 급증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공로’와 별도로 남한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이후 사회주의쪽으로는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인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만큼은 놓쳐서는 안 되었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남한 노동운동이 잃은 것은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이었고, 간직한 것은 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과격성이었다. 이는 자기 기업 내부에서는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윤리적 확신'에 근거한 '치열한 계급투쟁’을 벌이지만 기업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심하다는 비난은 이제 모함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최근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기아노조의 채용비리나 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등은 이런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2005년의 대한민국에서, 밑천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모두 잠재적 피해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정규직은 내일의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유럽 복지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금 뿔뿔히 분열된 남한 노동자들이 우선 ‘계급’으로 단결할 때 국가-자본과의 사회적 협약과 국민경제의 발전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비교적 여유 있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에게 먼저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진보운동의 주요 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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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봄날

  • 등록일
    2005/03/29 11:04
  • 수정일
    2005/03/29 11:04
봄 산을 넘다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연두색 물감에다 흰색을 조금 섞어 붓끝으로 톡톡톡 찍어 놓은 것 같은 나무들. 그건 신갈나무 갈참나무 같은 참나무류의 새로 돋는 잎들일 겁니다. 바로 아래에 짙은 녹색의 소나무 잎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 더욱 싱싱하게 연록색으로 빛나는 새 잎의 신선한 채도. 그 사이에 분홍색에다 흰색을 많이 섞어 옅은 연분홍으로 가볍게 칠한 산벚나무들. 골짜기에는 직선의 줄기를 쭉쭉 뻗은 낙엽송 군락. 가까운 산발치에는 희디흰 조팝나무 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이토록 아름다운 산의 풍경은 누가 그린 것일까요.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요. 자연의 힘, 생명의 힘, 신의 손길에 감탄하며 저절로 머리 숙이게 됩니다. 뭉글뭉글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우듬지의 곡선들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고 싶어집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산가의 사계절 풍경 중에 봄의 신록을 으뜸으로 칩니다. 계절별로 두 가지 풍경씩을 선택해 팔경을 삼았는데 그 중 첫째가 봄 산의 신록입니다. 신록이 연록색 깃발을 드는 것을 신호로 산벚나무 꽃이 피고 이어서 자두나무, 앵두, 뜰보리수나무, 배나무가 흰색 분홍색의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골짜기 물이 더욱 맑고 힘차게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붓꽃잎이 쑥쑥 솟아나고 상사화가 단검처럼 빳빳한 줄기를 세우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단도직입. 그렇습니다. 그 옆에 앉아 있으면 상사화 잎은 단도직입으로 대답을 요구합니다. 겨우내 혼자 지켜온 고독의 성에 백기를 꽂을 걸 요구합니다. 상사화가 여기저기서 푸른 칼을 들이대고 앞산에선 나무의 대군이 신록의 창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에 갇혀 나는 그만 무장해제 당하기 직전의 외로운 병사 같습니다. 그런 날은 정말 사과꽃을 혼자 보기 아깝습니다. 상현달 새벽하늘 위에 서늘히 떠 있는 모습을 누군가와 같이 보았으면 싶습니다. 모란꽃 여린 순들이 손가락을 들어 수화로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숨겨진 뜻을 혼자서는 풀지 못하겠습니다. 봄은 이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꽃 피고 만개하여 이 땅에 아름다운 꽃 향기 가득한 날, 나는 한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는 잡보장경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망가지기 쉬운 것이 역경 속에서가 아니라 역경을 이기고 난 뒤 긴장이 풀린 시기입니다. 적과 싸우며 나라를 지켜낸 인물들 중에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동지에 의해 배신당하거나 적이 아닌 동지의 손에 죽는 이가 많았습니다. 함께 싸워내야 할 적이 사라지거나 공동의 목표가 없어진 뒤에는 내부의 분열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절 중에는 겨울을 이기고 난 봄철이 그렇습니다. 게을러지고 해이해지는 것도 이때입니다. 한 생애를 사는 동안 우리가 맞닥뜨린 경계 중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역경계 앞에서는 분노를 조심하고 순탄하게 풀려나가는 순경계 앞에서는 탐심을 경계하라고 스님들은 가르치십니다. 인간은 의외로 어리석은 데가 있어서, 일이 잘 풀리는 시기에는 욕심이 생기고 의욕이 넘치며 그것이 과욕을 불러오고 바로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꽃 중에도 화려하고 현란한 꽃을 피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꽃은 대체로 수명이 짧다고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아름다운 건 생존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 꽃이 성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수꽃은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암꽃은 예뻐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매혹적인 색과 향기를 만들어 내는 물질을 끝없이 생산해 내고, 그리하여 더욱 확실하게 씨앗을 잉태할 수 있게 되지만, 꽃을 피우고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 때문에 그렇지 못한 나무들에 비해 수명이 짧다는 것입니다. 피는 꽃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벌써 지는 꽃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는 꽃만 축복이 아니라 지는 꽃도 축복입니다. 꽃이 피는 날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꽃이 지는 날도 소중하다는 걸 꽃은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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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해. 해가 뜨듯, 좋은 세상이 와”

  • 등록일
    2005/03/27 12:23
  • 수정일
    2005/03/27 12:23
미공개 다큐멘터리로 본 인물 -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김재중 기자 jjkim@digitalmal.com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2001년, 그가 여든 다섯 생을 마감하며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말』이 다시 꺼내든 이유는 조바심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가 ‘오고야 말 것’이라고 장담하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가 그에게서 찾는 것은 ‘위안’일지 모른다. 현실 사회주의로부터 배척받았던 이상주의자의 꿈. 우리는 아직도 그 ‘길’위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면서 언제든 그의 목소리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를 꺼내 볼 것이다. 『길』. 한 비디오저널리스트가 담은 그의 마지막 1년을 축약해 지면에 옮긴다.


다큐멘터리 제작 조천현 전문기자 vjcho@hotmail.com 글 김재중 기자 jjkim@digitalmal.com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을 등진 우리 민족들이 삶의 터전을 일궈온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도시,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숨어 살고 있는 도시다.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이곳을 드나들며 탈북자들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그런 활동 때문에 내적 갈등에 빠진 적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이유는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후 싹튼 남북화해 분위기 때문이었다. 탈북자 문제가 자칫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헤매던 그런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학철 선생이었다. 지난 2001년 초, 나는 조선족 문학인 출판기념회장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그 기회에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연변문학인으로부터 그를 소개받고자 했다. 그러나 연변문학인들조차 그를 만나기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얼마 후 다시 연길을 찾은 나는 혼자서 연길시 총류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 문에는 ‘볼 일 없는 사람은 이 문을 두드리지 말라(한인막고문)’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설명하고 그에게 인터뷰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숨기고 그가 하는 말을 몰래 담았다. “남북의 통일은, 이북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붕괴되지 않으면 통일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성 부자를 차우세스크 부부에게로 보내버리는 것만이 유일 정확한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충격과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심 북한 정권의 붕괴가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 1938년 일본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일본 군벌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122명의 전사들이다. 그가 속한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진지 앞에 까지 침투하여 일본군정을 탐지하고 일본군 문서를 변조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대원들은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김학철, 그는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었다. 1941년 12월 중국 화북성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 중 한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용군 대원 4명이 전사했다. 동료들은 그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믿고 추도식까지 했으나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를 포로가 아닌 정치범으로 대우를 했다. 일제 식민지 백성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기 내내 그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그러나 일제는 수감기간 내내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 해주지 않았다.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썩어가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국독립에 한 다리를 바친 것이다. 그 후 50년 간 그는 오른쪽 다리 하나로 힘겹게 살아야만 했다. “‘항일투사’라는 말, 역겹다” 2개월 후, 그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망설임 끝에 그를 만나기 위해 김해공항을 찾았다. 공항에는 윤세주 열사의 가족들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용군으로 함께 싸웠던 윤세주 열사 탄생 기념강연회에 후손들이 그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강연은 솔직하고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강연 중 그는 남북의 왜곡된 독립운동사를 비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우리는 무장투쟁을 하느라고 했습니다.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우리 조선의용대가 일본을 반대해서 싸운 것은 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역사가 이렇게 잘못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국에 나온 지는 벌써 10여년쯤 됐는데 일부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보니까, 어떤 분들은 전선에 나가보지 않아서 무장한 일본군의 얼굴도 보지 못한 분들 이예요. 중국군이 잡아 온 일본군 포로의 얼굴은 보았겠지만, 무장한 일본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분들이 계속 독립운동가로서 행세를 하고 있더라고. 그것을 몇 십 년 동안 우려먹고 있더라고. 그걸 보고 대단히 실망 했습니다. 그 때 우리가 항일 투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항일투쟁을) 안하고 어떻게 (그냥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두고두고 우려먹고, 대단히 굉장하시더라고. 그래서 저는 항일투사라는 말만 들으면 막 역겹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밀양서 이거 하신다고 하실 때도, ‘항일투사’라는 말은 빼주십시오 그랬습니다.” 다음 날, 그는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밀양을 떠났다. 일주일간의 짧은 여정 동안 짜여진 계획은 팔순 노인에게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부축이나 도움을 받지 않았다. 혼자서 걷고 혼자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철저했다. 나는 그와 그의 아들을 마포에 있는 나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포나루는 그의 기억 저 편에 살아 있었다. 1946년 10월, 30세가 되던 해 이 마포나루에서 공산당원 신분으로 조직의 부름을 받아 북으로 갔던 곳이었다. “여기서 배를 탔어. 여기서 배를 타고 어딜 갔냐면, 지금 오두산 전망대 있잖아. 그 앞으로 해서 임진강이 합류되는 데로 해서 쭉 내려가 가지고는 옹진반도로 건너가는데. 해병대들이 검문을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두부장수를 해서 돈을 벌었는데 폭격에 다리를 잃었다.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불편하니까 누이동생하고 조카가 마중 나왔다.’ 이렇게 거짓말을 했지. 그게 통하더라고.” “여기 나루터를 통해서 떠나시고 나서 한국에는 한번도 못 오신 거죠?” “못 왔지. 내가 떠날 때 우리 외삼촌한테 말했거든. 내가 3년 후에 돌아온다. 돌아오면 싹 사회주의 나라로 만든다. 이렇게 큰소리 치고 갔거든. 그런데 43년 후에 돌아왔다고 내가, 일흔이 넘어서 아이구. 그래 돌아왔어.” “나는 내 백골을 봤어” 한국에 혼지 10일째 되던 날 그가 몹시 피곤해하자 주위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볼 것을 권유했다. 검사결과, 평생 목발을 짚고 다닌 데에다 무리한 일정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겨드랑이에 나 있는 종기를 고약으로 치료하려 했지만, 의사는 종합검진을 받자며 입원을 권유했다. 그는 병원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관계되는 기사를 꼼꼼히 챙겨 읽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하루는 이 놈이(일본간수) 쫓아오더니, ‘야, 네 다리 보겠냐’ 그러는 거야. 자른 다리를 무연고자 묘지에 묻어버렸거든. 그래서 ‘내 다리 어떻게 됐냐’ 그랬지. 그랬더니 ‘야, 말마라, 얕게 묻었던 모양이야’ 하는 거야. 개구멍으로 개들이 들어와서 썩은 다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더라는 거야. 그래서 이 놈이 마당 쓰는 참대 비로 막 때려 쫓았대. 그리고는 이걸 다시 깊게 묻기 전에 나에게 와서 ‘한번 보겠냐’ 그런 거야. 그래서 내가 ‘가져와라’ 그랬지. 이 놈이 (내 다리를) 새끼줄에 매어 들고 와서 보여주는데. 완전히 백골이 됐어. 그런데 발가락하고 무릎 관절까지 다 붙어있더라고. 그런데 백골은 백골인데 빗물이 들어가 썩어 거뭇거뭇해. 그걸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야. 그걸 도로 묻었는데, 나는 내 다리, 내 백골 봤어”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도 행복한 때가 있었다. 북한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김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외금강휴양소로 좌천되었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소설 『최후의 분대장』은 조선의용대 시절의 항일운동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이 책 후기에서 남북통일은 김일성 부자를 붕괴시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고 썼다. 이 내용을 보고 한국 내 진보세력들은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보수 세력들은 그를 이용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 아랑곳 않으면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끝까지 지켜왔다. “이북이 자꾸 무슨 수해를 만났다 한재를 만났다 하지만, 체제 자체가 일을 안 하게 돼 있어 그런 거예요. 일을 해도 자기가 갖지 못하거든. 수재나, 천재, 가뭄은 조그만 영향을 끼친 거지. 중요한 것은 체제 문제였어요. 안된다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얼마나 굶어죽었냐면 3천만 명이 굶어죽었어요. 3백만이 아니야. 똑똑히 동그라미 하나 더 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는데도 아침부터 밤까지 ‘지상낙원이다’ 이러거든. 공산당에 제일 중앙, 높은 사람들까지 말이야. 이것들이 어디 사람이야. 백성이 굶어죽는데, 아침부터 위대하다고 만세 부르면 뭐하냐 이거야. 그래서 반발을 했지. 그래서 『이십세기 신화』란 소설을 쓴 거야.” 『이십세기 신화』는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했다는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그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중국 당국으로부터 이러한 글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 당했다.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 때 『이십세기 신화』의 원고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10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14년간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십세기 신화』는 탈고한지 31년 9개월 만인 1996년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아직도 이 책은 중국의 금서목록에 올라있다. “사회주의 세상은 반드시 온다” 그의 건강상태는 예상 밖으로 나빠져 있었다. 그는 예기치 않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일주일 후 나는 다시 그의 병실을 찾았다. 아들 김해양씨는 아버지의 기사가 실린 주간지를 읽고 있었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기사였다. 독방과 인연이 많은 김학철 선생. 그는 병실이 마치 형무소의 감방과 같다며 답답해했다. 그는 퇴원하여 중국 연길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퇴원을 앞두고 그는 아무이상이 없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그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운동까지 했다. 그의 의지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가 이 세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자유를 찾아가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적 삶이 아니었을까. 병실을 나온 그는 오랜만에 나에게 인터뷰를 자청했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살아가면서도 결코 사회주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김학철 선생. 그는 사회주의자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진정한 사회주의는 꼭 실현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한국이 처한 빈부의 격차를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옆 병실에 모녀가 와서 돈이 없다며 퇴원을 했어. 비참하잖아요. 한쪽에서는 호화판으로 살고. 결국 앞으로 먼 장래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안 될 수가 없지. (지금까지는) 시행착오야. 시행착오를 해서 개인숭배를 하고 그러니 그게(사회주의가) 되겠어. 20세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뼈아픈 경험을 했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대가를 치렀어. 이제 다음 세대에는 그런 형태가 나오지 않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없어져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당 독재고, 1당 독재는 1인 독재야. 이건 20세기의 뼈아픈 경험이야. 다수당제 가운데서 공산당이 잘해서 정권을 쥐면 쥐는 거고 놓치면 놓치는 거고, 이러면서 의회투쟁을 해나가야지 뭐.” “진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온다고 믿습니까?” “꼭 그렇게 되는걸 뭐. 아침에 해가 뜨면 한낮이었다가 저녁이 되는 것처럼, 사회발전 법칙에 따라 꼭 된다고. 누가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안하겠다고 해서 안되는 것도 아니야. 자연의 이치야.” 다음 날, 김학철 선생은 평상시와 같이 중산복으로 갈아입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모든 것들을 챙기게 했다. 그가 남긴 행적들에 대한 책임 같은 것 때문일까. 그의 꼼꼼한 성격이 단적으로 느껴졌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바다를 가로질러 달리면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눈은 언제나 무엇을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마지막 여행이라도 되는 듯 그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말없이 중국 연길의 집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지 10여일 후, 나는 동해안을 여행하던 중 중국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학철 선생이 위독하다는 아들 김해양씨의 전화였다. 멀쩡하던 그가 위독하다니 나는 불안했다. 그 다음날 나는 연길에 도착했다.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소리가 발길을 더욱 재촉했다. 나는 초조하고 마음이 바빴다. 그의 이층집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 순간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안도했다. 그는 자신이 위독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를 걱정해줄 정도로 여유를 보였다. 그는 나를 맞이하기 위하여 목욕을 하고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곡기를 끊은 지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자기 한명을 알면 그대로 깨끗이 승복하고 가는 게 제일 원칙이라고. 가족에게 조금도 피해를 끼치지 말고. 나는 내 장례식에 딱 열두 명, 가장 친한 사람만 모았어. 부고도 안내. 지난 5월까지 집필하고 서울 가서 석달 입원하고 (이제 곧) 죽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외로운 싸움을 했다고.” 외다리 하나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은 과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을까.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쓰던 책이며 물건들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평소 가장 존경한다는 노신의 문학 전집, 남북을 통틀어 이만한 작가를 찾기 어렵다는 홍명희의 『임꺽정』, 열 번씩이나 통독했다는 우리말 사전. 그는 유언처럼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본래 모습으로 깨끗이 되돌아가야 한다면서 먼저 관장을 하고, 옛 의용군 시절에 입었던 중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던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삭발도 했다. 그는 그렇게 원하던 대로 누구보다 고결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작가 조정래 선생은 “김학철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작갚라고 회고한다. “작가는 진실만을 말하는 존재다. 작가가 외롭거나 괴롭다고 해서 정권과 야합한다면 그건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인류 문화사가들은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온 작가가 바로 김학철 선생이다. 그 역시 북한이나 중국 정권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 대목을 모르면 ‘김학철’을 영원히 모르는 것이다.” 임종 후, 그가 마지막으로 살던 집에는 종이 박스에 담겨진 그의 유골이 도착했다. 그런데 유골이 담긴 박스 위에는 ‘홍성걸’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홍성걸. 그의 본명이었다. ‘김학철’이라는 이름은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활동하기위한 가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행여 고향의 옛 친구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걱정해, 유골 함에 본명을 써 넣었다. 그의 유골은 고향을 찾아 두만강을 따라 원산 앞바다로 떠내려갔다. 한 송이 꽃잎 같은 인생. 그가 좋아하던 꽃잎들도 해 저무는 두만강의 노을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 한낮이었다가 저녁이 되는 것처럼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온다고 그는 말했다. 그 사회주의는 과연 그의 희망처럼 실현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인간의 참다운 삶의 길이란 무엇일까. 김학철, 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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