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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31
    인터넷에 글쓰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간장 오타맨...
  2. 2005/03/31
    [시/안도현] 연탄 한장
    간장 오타맨...
  3. 2005/03/31
    반가운 만남
    간장 오타맨...
  4. 2005/03/31
    파이란 같지 않은 현실
    간장 오타맨...
  5. 2005/03/30
    머리가 멈춘 것 같다.
    간장 오타맨...

개나리 노란 꽃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다.

  • 등록일
    2005/04/02 22:25
  • 수정일
    2005/04/02 22:25
간만에 밖으로 외출을 나갔다. 오산민주단체 연석회의 공청회로 준비를 위해.. 오산대학에 갔다. 그곳에서 개나리 노란 꽃과 올해 첫 대면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 서울 집 근처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목련을 이곳에서 구경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목련도 함께 피어났을 것이라는 짐작만 해본다. 봄날은 봄날이다. 오산역 주변 바자회를 하는데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게 느껴진다. 다솜공동체에서 판 옷도 아마 화사한 옷이지... 샬라라 옷도 있고, 음... 돈만 있으면 아니 몸이 조금 받쳐주면 허리가 조금 가늘면 살만한 옷이 넘치는데... 옷이 없다. 구경만하고 하나에 1000원짜리 옷을 마구 팔았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 옷만은 2000원 또는 3000원에 팔았다. 내일도 옷을 파는 하루가 되겠구나.. 4월 5일 휴일이다. 다솜공부방 아이들과 오산천 나들이나 가야 겠다. 아이들과 봄 맞이 행사를 가볍게 해야지... 내일 또 무료진료구나... 바자회 무료진료 수도권이주노조 건설준비위 회의... 주말엔 꼭 일로 발목이 잡히구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은 생활이지만...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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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넘어선 의제를 남기자.

  • 등록일
    2005/04/02 00:58
  • 수정일
    2005/04/02 00:58
* 이 글은 미류님의 ["그" 포스터에 열받은 "둘째" 이유에 대한 의견] 에 관련된 글입니다.

의미심장한 글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하나이다. 우리가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자본이라는 것이 IMF경제위기(정확히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구조조정... 아니 정리해고라는 용어를 들이밀며 노동자들이 회사 경영에 있어서 돈을 많이 잡아 먹는 도구이기에 회사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고 선전전을 하였다. 그 당시 김대중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호도한다. 민주화 투쟁을 하였던 나를 믿고 경제회생의 길을 함께 해쳐가자고 그러나 그 믿음은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의 불안정성을 낳았다. 비정규직 투쟁에 있어서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단사에 있어서 정리해고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이 단사에 도사리고 있는 사안이기에 쉽게 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힘든 용어로 전락하였다. 우리는 본디 하나인데 둘로 갈라 지게 한 요인....그러나 우리가 부정하고 투쟁하고자 하였지만 이 사안은 너무 광범위하게 너무 폭넓게 노동계에 침투하였다. 우리가 인식하는 이상으로 확대되고 그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라는 바이러스는 다양성을 갖지 못하고 한 계급에게 촛점을 맞추게 된다. 노동자라는 대상.... 회사 정상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는 논리... 정규직이 빠져나간 자리는 비정규직이 판을 치고 그 비정규직이 차지한 자리에서는 노-노 갈등이라는 불가피한 대립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비정규직을 논하기 전... 고용안정이라는 단어는 엿장수에게 팔려갔다. 싼값에 경총과 전경련에 넘어갔다. 정부는 그 고용안정이라는 고물을 경총과 전경련에게 무상임대해 주고 그 임대료를 갈고 닦아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노갈등이라는 것을 한편 부추기며.... 미안한 부분에 대해서는 근로감독관을 통하여 해소하기 위한 방편을 만든다. 이 문제에 있어서의 노-노갈등은 본질이 아니다. 정권이 자본이 어떻게 이를 이용하고 있는가 이다. 확대 비정규직을 증대하여야 한다는 말은 설득이 없다. 그들은 이 비정규직과 정규직이라는 하나된 노동자의 동일성을 노-노라는 갈등을 조장하여... 서로가 상처를 통해 망가트리고,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처사임을 이미 여러사건에서 볼 수 있지 않았던가... 문제는 난 무수한 담론보다는 문제를 명확히 지적하되... 비정규직/정규직이라는 이분 구도가 갖은 노동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이를 통해 비정규직/정규직 문제라는 사안이 서로 동떨어지지 않은... 사안이고, 잠재적 비정규직인 정규직의 투쟁을 독려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직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본다. 문제는 앞으로도 확산되고... 정규직은 이미 비정규직으로 가기위한 수순을 밝고 있다는것을 우리는 착목하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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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의 이야기

  • 등록일
    2005/04/01 10:43
  • 수정일
    2005/04/01 10:43
다시금 써내려 간다. 수정을 거듭한다. 여성의 문제에 대해서 난 모른. 그러나 난 여성이 당해야 할 고통 그리고 겪어야 할 어려움에 대해서는 내 가족 아니 우리 어머니를 통해서 들쳐 보았다. 늘 나 때문에 가슴 어려 있는 한... 내가 서울에 올 수 밖에 없는 사연 때문에 한이라는 응어리를 지니고 살았던 우리 어머니 아니 인간 박경옥이라는 여성을 통해 비춰 보았다. 지금은 영면이라는 편안한 안식에 들어갔지만... 내 조그마한 가슴에 박힌 한은 가져가지도 못하고... 내가 서울에 와야 했던 것... 지금은 호주제다 뭐 그렇지만 난 재혼녀의 아들... 그리고 여성이며, 어머니인 그녀가 당했어야 할 고통 나로서는 감당이 안된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사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난 안다 하나를 어머니는 불안했다. 혼자 살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기대고 싶었던 것이 그렇게 관계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 또한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기에.... 산동네 공터에 가서 힘들때마다 소리치거나 그냥 실컷 울었던 기억.... 나에게 만큼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이다. 동생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혼자 이겨내야 했고, 혼자 생각해야 했던 당시... 그러나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은 나에 대한 눈초리 나로 인해 당해야 했을 고통을 잘 알고 해결책으로 나를 서울로 보냈다. 조금 낳아질거라고... 같이 보낸 시간이 그래서 짧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버려져야 했던 나... 그러나 버려진 나 때문에 또 혼자 근심에 사로잡혀야 했던 어머니인 박경옥이라는 여성이 사회 아니 내가 살던 마을에서 겪어야 했을 고통을 지금 머리가 큰 지금 조금은 이해가 간다. 늘 왜 재혼했냐고 어머니에게 화를 내야 했던 나(잘 알면서도 난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아니 기대고 싶었다. 주저 앉고 싶었다. 나 힘들다고 지켜달라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 그게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응어리요 상처였다. 치유할 수 없던.... 집에 있을 수 없어 멀리 유배되듯 떠날 수 밖에 없었고 내가 떠나야 문제가 해결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난 그렇게 쫓겨나듯 중학교를 서울로 보내져야 했던 나... 받아들였지만 떠나기는 죽어도 싫었지만 그게 해결책이기에 난 떠났다 아니 ㅤㅉㅗㅈ겨나듯 어린 내가 나와야 했다. 배다른 형과 누나가 있던 공간으로... 친구들과 떨어지기 싫었고 어머니와 살고 싶었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그렇게 나를 내칠 수 밖에 없었다. 가슴속 깊이 각인된 상처... 난 이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만 듣고 살았다. 적과 증오 대상이 왜 나에게도 없겠는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왜 살면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게 뭐 사회적 현상을 해결시켜 주는던가? 그렇듯 난 스스로 달래야 했고, 좋은게 좋은 것이지 하면서 살았다. 사회적 관계에서 철저히 이 사안은 감추어야 할 대상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아니기에 적개심이라는 것을 쉽사리 들어낸다. 그러나 그건 당사자인 그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 빗겨 나있다. 성이 달라서 고통 받는 것은 별로 없다. 쪽팔림 이외에는 ....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이 난 그냥 따라가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버려지지 않기위해 졸인가슴 쓸어내면서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혼이라는 가정이 겪는 시선에 대해서는 조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어머니가 미치도록 미웠다. 달동네....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하늘 바라보면서 울었던 기억...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도 사회적 시선 나로 인해 당해야 할 그 모든 수모들.... 동네에서 사람들이 싸움하면 근본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뼈속 사무치도록 듣기 싫었다.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과 사소한 말타툼 또는 싸움을 하게 되면 들어야 했던 어린 나에게 아직도 기억되는 화낙녀라는 소리... 그 뜻 어릴땐 몰랐지만 지금 되새기면 소름이 끼친다. 위로 변명은 그곳에 없다. 적도 없다. 그곳에선 살아가기 위해 아니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본능만이 감돈다. 상처를 나눌 대상이 없다. 사회라는 통념과 장막이 그렇게 그물망 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기대라는 위안....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낳아지겠지 라는 희망만이 존재하였을 뿐이다. 쉽지 않은 문제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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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도종환] 깊이 들여다보기

  • 등록일
    2005/04/01 10:03
  • 수정일
    2005/04/01 10:03
아침에 방을 쓰는데 벌레 한 마리가 쪼르르 기어갑니다. 호박씨만한 크기의 벌레는 수많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연분홍빛 몸을 끌고 갑니다. 겨우내 어디 흙벽속이나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연못에도 작은 물벌레들이 물에 잠긴 팽나무 잎 사이를 오르내리는 게 보입니다. 겨울에 가뭄이 심해 바닥까지 물이 말라 있거나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디서 목숨을 유지하고 살았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가마솥 아궁이 옆에 풀 한 포기가 손바닥 만하게 초록 잎을 내밀고 있고 오랜만에 멧비둘기 울음소리도 들리고 쇠딱다구리가 작은 부리로 나무둥치를 쪼는 소리도 들립니다. 방안에서 겨울을 난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한데서 겨울을 난 것들은 서로 무슨 신호를 주고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풀들이 주도하는지 새들이 나팔수 노릇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자기들끼리는 밖으로 나와 돌아다닐 때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서로 서로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귀와 눈과 코와 피부로는 감지가 되지 않는 어떤 소리와 온도와 빛이 있어 그걸 알고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나 봅니다. 나는 오늘 아침 그것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천지에 봄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새나 벌레 한 마리의 목숨도 하찮은 것이 아님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봄입니다. 새롭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가상하고 신비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 작은 것들도 이렇게 온전한 생명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온통 죽음과 적막뿐이던 잿빛 대지 아래서 다시 살아나고 목숨을 이어가며 몸 전체로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내 생명과 꽃다지의 생명이 다르지 않고 내 존재와 고라니의 존재가 큰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합니다. 짐승도 벌레도 다 하루치의 자기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가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고 여럿 속에서 소외될까봐 두려워하며 더불어 사는 방법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배웁니다. 목마름과 허기와 사랑을 알고 기다리는 법을 압니다. 청화스님은 “천지는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명이나 자연 만물의 생명이 다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입니다. 모든 목숨 있는 것들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등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불성으로 묶여 있다는 동일성을 자각하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몸과 똑같이 생각하고 큰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천지만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내 뼈가 꺾일 때 아프면 나무도 그렇게 아픔을 느낄 것이고 산짐승이 덫에 걸려 죽어갈 때 내 목숨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처럼 아파하는 것, 그것이 동체대비의 마음입니다. 내 몸이 겪는 통증을 짐승도 똑같이 느끼고 내가 갖는 두려움과 환희를 풀과 나무와 산과 물도 똑같이 느낀다고 생각할 줄 알게 되면 하찮아 보이는 미물도 함부로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큰 스님들처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천지만물이 다 부처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생명을 가진 것들은 어떤 것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생각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비로소 소중하게 보이는 시기를 거쳐 인간의 인간다운 영역은 넓혀져 왔습니다. 어린이가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대접을 받아온 것이 언제부터였습니까. 채 백 년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이라고 부르는 말조차 없었습니다. 몇 해를 키워본 다음에야 호적에 이름을 올렸고 질병과 굶주림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아이는 키워서 남에게 주어버리는 존재처럼 취급당했고 자라서도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주어진 것이 얼마나 됩니까. 해월 최시형 선생이 사인여천(事人如天), 어린이든 여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사람 대하기를 하늘 같이 하라고 말하는 것이 반역의 사상을 퍼뜨리는 일로 매도당하던 것이 불과 백 몇 십 년 전입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를 한 단계씩 거치며 비로소 세상이 인간다운 모습으로 조금씩 변해왔습니다. 흑인들이 그렇게 노예에서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받았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자연에 대해서도 이제 똑같이 동체대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때 많은 저항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와 천민과 여성과 흑인과 장애인들도 똑같이 인간다운 권리와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해야 한다고 말할 때 당대 사회도 그 요구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였고 힘으로 억누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을 거쳤고 그것을 인정한 것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도 맞는 길이었음을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내 속에도 자리하고 계시고 내 이웃의 가슴 속에도 계십니다. 좋은 옷을 입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만이 내 이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만의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어부와 막노동꾼과 손가락질 받는 자와 병든 자와 소경과 앉은뱅이 같은 장애인들과 창녀의 예수님이기도 하셨습니다. 백인들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유색인의 예수님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사람답게 대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오른편에 앉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과 자연만물과 미물들까지도 평등하게 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아주 조금씩 잎을 내밀고 눈을 틔우고 대지를 푸른빛으로 바꾸어 가는 뭇 생명들의 움직임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자비의 마음을 갖게 하는 계절이 봄입니다. 조용히 움트는 버들개지를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겸허해지는 계절이 봄입니다. 영문학자 박혜영 교수는 2004년 ‘올해의 평화상’을 받은 인도의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왜 우리가 다른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존재이건 일단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우리와 연결된 그 고리를 쉽게 잘라내지 못할 것이다. 가령 맑은 강물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 물 속에 시멘트를 쏟을 수 없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두고두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내지 못할 것이다. 또 죽어가는 동물의 눈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결코 덫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를 처음 사랑했을 때의 그 착한 설렘을 기억하고 있다면 결코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은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일이며 사랑과 동체대비의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내 앞에 있는 것들을 타자로 대하지 않고 나와 똑같은 생명이라는 동일성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한 발짝만 걸어 나가면 우리는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하는 생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들로 봄의 대지는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오래오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는데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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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

  • 등록일
    2005/04/01 08:14
  • 수정일
    2005/04/01 08:14
오늘 무슨 거짓말을 할까... 궁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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