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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한 시간

  • 등록일
    2005/03/17 10:27
  • 수정일
    2005/03/17 10:27
* 이 글은 갈막님의 [새벽에 걸려온 전화..]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도종환 선생 사이트(도선생도 훔쳐온 글임.)에서 글중에 훔쳐와 트랙백 걸어봅니다. 글 읽다 갈님의 게시판 글과 매치가 되어 트랙백 걸어봅니다.(자중해야 하는데 목련이 필때까지는...) 바위 위에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있습니다. 고요 속에서 나도 없고 생각도 없이 있습니다. 내가 멈추자 시간도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냥 바위의 일부가 되어 앉아 있습니다. 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남쪽 언덕을 넘어 갑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나도 머리칼을 바람에 맡기고 앉아 있습니다. 바람이 아무런 막힘이나 걸림 없이 나를 지나갑니다. 내가 있다는 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나를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나는 빈 밭처럼 있습니다. 갈지도 않고 일구지도 않고 씨를 뿌리거나 농사를 짓지도 않습니다. 몇 해에 한 번씩은 그냥 밭을 밭으로 놓아두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나도 나를 그냥 빈 밭처럼 놓아두고 있습니다. 이 흙의 몸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수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도 밭을 풀어주고, 잠시도 멈추지 말고 거두어들이고, 거둔 것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도 나를 놓아줍니다. 화엄의 숲에서 나와 해인의 초막으로 갑니다. 나무가 되어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고 그 숲 안에 대동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지난 몇 십 년 가슴 벅차고 힘들고 기뻤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 갑니다. 해인. 바닷물에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까지 다 비쳐 해인이려며 풍랑이 가라앉아야 합니다. 번뇌의 물결, 지나친 욕심의 파도, 끝없는 밀려오는 소유에 대한 집착, 헛된 명예와 허영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의 밀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요하고 고요해진 바다에 맑은 내 얼굴이 초승달처럼 비칠 때 그 해인의 삼매에서 다시 화엄의 세상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합니다. 본래 화엄의 큰 눈을 뜨기 직전 가장 깊은 순간이 해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화엄의 문을 열고 나와 해인을 향해 길을 나섰으나 해인에는 이르지 못하고 이렇게 산중턱에 앉아 있습니다.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가 물결소리 같습니다. 바람소리가 철썩이며 숲 위를 지나갑니다. 나무들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 걸까요. 그래서 저렇게 철썩이고 있는 걸까요. 나무들도 탐욕스러운 데가 있을까요. 나무들도 살기 위해 분노하고 다른 나무들을 해치고 그럴까요. 저만 살려하다 제가 먼저 쓰러지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요. 그렇다면 나무들도 업의 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칡넝쿨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던 나무, 다래넝쿨에 감겨서 자유롭지 못하던 나무, 으름덩굴을 제 열매처럼 달고 잠시 허영의 계절을 살아가던 나무들은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바로 그 넝쿨을 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넝쿨그물 위에 눈덩이를 짊어지고 있다가 그 무게에 눌려 가지가 부러지거나 꺾이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 걸 보면 나무도 다 저마다 두터운 제 업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나무가 욕심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사람처럼 탐욕스럽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나무들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사람들처럼 어리석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잘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함도 술수도 모략도 폭력도 다 동원하는 사람들처럼 모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도 고요히 돌아와 앉아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씩만 갖는다면 부끄러움도 알고 뉘우칠 줄도 알 겁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게 하기 위해 하루에 한 시간씩만 투자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넉넉해진 사람이 되어 하루를 살 수 있을 겁니다. 지금보다 내적으로 충만하고 값진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자 합니다. 몸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하루 한 시간 내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나는 이렇게 나를 고요 속에 맡겨 둡니다. 그러면 바람이 나를 맑게 씻어주고 부드럽게 매만져 줍니다. 햇빛이 내려와 내 안을 가득 채우고 따듯하게 합니다. 바람 속에 햇빛 속에 나는 지금 고요히 멈추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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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밑바닥 노동자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

  • 등록일
    2005/03/16 11:27
  • 수정일
    2005/03/16 11:27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민주노총은 물리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노동운동이 귀족화되었다. 자본은 늘 떠들었다. 그러나 그 면면을 살펴보면 2조 2교대(일명 주야맞교대)의 잔업과 특근을 빼고 고임금 노동자로 선동하였다.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의 차이는 상여금과 일급에 차이일뿐이다. 다 같은 노동자들이다. 그래 상여금과 일급이 차이가 나다 보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노사정 합의의 덫이 아니던가? 어제 대대를 보면서 왜 이리도 부끄러운지... 투쟁하는 동지들의 모습이 한편 힘차게 느껴졌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하고 과거 동맹파업의 시기를 되뇌이며 왜 이렇게 노동운동이 맥아리 없어졌는지 한탄만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현장을 돌면서 투쟁을 조직하자 외치는 수많은 동지들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하였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그래 왜 정규직이 나서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덫에 스스로가 나서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고용안정이라는 말에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 정규직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다 같은 노동자들이다. 엄밀히 말해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자본에 의해 조장된 말이다. 그 자본에게 타격이 가할 것이 언론의 왜곡과 날조로 노-노 갈등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사회적 교섭안은 밑바닥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관심거리가 되고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어떻게든 현장에서 살아 남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투쟁을 해보았자 신명이 나지 않는 판에... 술한잔의 취기에 돌아 개같은 세상이라고만 연거푸 말한다. 조합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세상의 주인이라 믿었던 과거 선배들은 그렇게 뒤로 돌아셨다. 그 뒤 돌아선 분들 그래 현 활동가들이 볼때는 낙오자라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난 다르다. 그분들은 운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부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때 투쟁을 희망으로 읽구며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채 빼앗긴 사람이기도 하다. 현장에 들어갈 수 조차 없어 노점상을 하거나 상업을 해서 목에 풀칠을 겨우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러나 지금 사태를 보면 그 분들이 되려 부럽다. 욕심이 없었기에 순수했기에... 밑바닥 노동자들의 정서를 읽고 함께하였다. 최소한 인생을 걸고 투쟁한 분들이다. 책임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결단이라는 것을 함부로 지껄이지 않았다. 함께하였을 뿐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건설용역, 노점상, 상인 등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노동자로서 삶을 이어나갈 기회를 박탈 당한 사람들이 많다. 입바름을 지껄이며 현장의 버거움을 조직화하지 못하고 희망이 없다고 돌아선 학출과는 다르게 그 현장 노조 깃발이 꺽일때까지 끝까지 지키던 분들.... 무기력하게 당했지만 그래도 그 때의 순간의 삶의 좌우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이들에 대한 불신으로 얼룩진 분들.... 그들이 밑바닥이고 민주노총의 골간이지만 지금 형태 그 정신을 잃고 썩어 문들어져 가고 있다.(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 말한다. 그러나 난 그 맥락에 노동자 와 민중이 있는가? 반문하고 싶다. 있다손 치더라도 몇명 있는가? 민주노동당 면면을 보자 반 이상이 노동자 민중인가? 왜 노동자 민중정치세력화에서 밑바닥 노동자들은 당원이나 조직원 이상으로 치닫지 않은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일구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손으로 그들의 투쟁으로 그들의 실천으로...) 답답하지 않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이비(난 사이비라 지칭하고 싶다. 더이상 어떠한 말로 그들을 동지라 부르기 어렵다. 오늘 신문을 보는데... 가슴이 막혀온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참 갑갑하다.)이기 때문이다.(이 말을 하지만 난 정말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사태때 한노사연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를 외치면서 강성노조가 노동운동을 마치 망치고 있다는 자본의 이야기를 합리화 시켜주는 논의를 보면서 과연 노동자가 강성일 수 없는 조건이 빠져있고, 투쟁의 조건이 서유럽과 다른게 기계적으로 동일화시키고자 하는 모습에서 노동운동의 제도권 진입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노동조합운동은 강성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다채로운 사업이 없고, 늘 벌어지는 현상을 쫓아올 결과이기 때문에 벌어진 현실이 아닐까? 그리고 전노협에서 그 모범으로 자리잡았던 조합원 대상의 교육이 사라짐이 아쉽다. 그 당시도 선진활동가 대회였지만 참여에 있어서는 조합원의 참여도 가능하였다. 이제 보다 조합원들을 위한 실질적 교육과 투쟁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강성은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투쟁하면서 그 힘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소소한 투쟁이 큰 파도가 되지 않았던가? 이제 밑바닥 노동자의 삶을 봐야 한다. 함께가자 우리 이길이라는 것을...) 난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하였지만 그들의 의도를 추측하면 안되지만 난 그들이 민주노총이라는 것을 발판으로 정치권에 투신하고자 하는 사이비 노동자로 비춰진다. 그렇지 않고는 사회적 교섭안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절규를 이처럼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비 노동자라 함은 노동자 정신을 잃었다면 그건 더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의 투쟁이 언제 교섭으로 사회적 쟁점화를 시켰는가? 투쟁하기 어렵다. 왜 어려운지 한번 가슴 손에 얹고 생각해 보았는가? 조합원들을 대상화 시켰기에 벌어진 상황 아니던가? 임단협과 집회에 조합원 동원하는 것 이외엔 조합활동이 난무한 시기이지 않던가? 민주노총의 정신 그 투쟁의 역사는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세워내지 않았다. 현장의 밑바닥 노동자들의 땀과 피 그리고 열사들의 투쟁으로 하나둘씩 세워져 나갔다. 그러나 민주노총 출범 10년을 갓 넘긴 지금 우리는 아주 오래된 과거로 그 눈물 흘려고 가슴의 아픔이 가시지 않는 상황들을 잊어버리고 만 것 같다. 지금 민주노조 사수의 시기를 넘어서 민주노조라는 깃발을 부여잡았다. 민주노조 깃발을 넘어서 밑바닥 노동자들의 정서를 위한 투쟁에 나서기 위한 조건이 성숙되었지만 선진노동자운동에 매몰된 나머지 선진노동자들에 의한 활동으로만 비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합원들이 신명나게 조합활동을 할 수 있는 바닥의 문화가 사라졌다. 개인의 취미로 모든것이 환원되어 활동이 이루어진다. 우리내 남아 있는 운동문화라면 뒷풀이 정도밖에 없지 않은가? 그 당시 어린 내가 현장에 가보았을때 신명나게 풍물을 치거나 신명나게 육자배기 가락을 읖조리는 조합원들이 있었다. 다들 잔업의 혹독함에도 노동조합활동을 위해 학습하고 함께 어울리던 그 당시 풍경... 선배들이 마냥 경이롭게 느껴졌다. 나도 그 대열에 꼭 참여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조건이 되어도 선동의 문구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조건으로 치닫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토론 그리고 선전 찌라시하나 속시원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음이 안타깝고 우리내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조건이 없음이 안타깝다. 아직도 선진노동자라는 깃발을 부여잡고 지도를 획득하여야 하는 시기인가? 아니다. 이제는 밑바닥의 정서가 무엇이고, 우리에게 놓인 화두는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자. 다양한 영역으로 노동운동이 분화되었다. 그러나 보자 그 영역이 분화되었지만 영역 하나하나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밑바닥 노동자들의 상태에서 이탈하고 있지 않은가? 난 노동운동의 위기의 시대라고 본다. 노동운동의 골간이 그 자리를 보전하기 힘든 상태이다. 조합원과 지도부의 소통의 문제일 수 있으나 일상화된 내용에서 지도부와 조합원과의 유일한 소통 창구가 임단협 이외엔 없다는 것이 답답하다. 소통과 연대를 말하지만 소통과 연대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난 실패하더라도 총파업 한번 불질러 보고 그 조직을 다시금 추스리기 위해 몇년의 시련의 시기를 복구의 시간으로 갖는다 해도 의미있는 투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큰 파업 이외엔 소소한 투쟁으로 일관하여 연대투쟁에 인색한 현실... 중소영세사업장 투쟁의 깃발이 꺽이면서 민주노총 조합원 수가 줄어들어도 아랑곳 하지 않는 현실.... 전체 노동자들의 문제이지만 한 개별사업장의 문제로 치부된다. 그렇다고 절망만은 있지 않다. 희망도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오래된다는 보장은 없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조장하는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왜 소통과 연대... 그리고 노동운동의 변화... 전체조합원들의 총의를 모으는 총투표 그리고 노동조합이 정치와 경제투쟁의 중심으로 나가는 길 등에 대한 모색이 무엇인지.... 고민해도 현찮을 판에 우리는 탁상공론으로 비춰지는 사회적 교섭안에 대해 왜 중요성을 부여잡고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교섭이라는 것이 차선의 선택이지 최선의 선택인가? 그런데 뒤빠껴서 차선을 최선으로 주장하는 모습은 어떤 의미일까? 정부와 빅딜이라고 할 것인가? 정리해고의 칼날이 사업장을 가리지 않고 판을 치는데... 무엇으로 자본과 정권에게 요구할 것인가? 노동부가 과연 노동자들을 위한 편이었던가? 오산이라는 지역에서는 연일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 당하고 있고, 한원 CC 노동자들은 봄이 왔지만 본사앞 총력집중 투쟁을 전개하고 있고, 여타 많은 사업장들이 정리해고라는 내용으로 차츰차츰 현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정규직의 삶은 이제 장미빛 미래이다. 자리보전 보다는 언제 현장에서 내몰릴지 모르는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이렇듯 우리내 노동자의 삶... 밑바닥 노동자의 삶은 고임금이다 살기 좋아졌다 이야기 하지만 쫓겨날 생각을 하면서 현장에서 불안한 하루하루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삶은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비정규직에 비해 상여금과 일급이 높다는 것이 그나마 정규직 노동자가 누리는 혜택이다. 이 혜택을 두고 노동귀족이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든게 꼬이기 시작한다. 밑바닥 노동자의 정서와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서는 하나로 통하여야 하는데 하나로 통하지 않고 있음이 안타깝다. 대의원대회를 1주일 후에 다시금 개최하겠다. 이 소리는 감정에 대한 대응이다. 왜 날로 증폭되는 민주노총 조합원간의 대립을 지도부는 방기하는지 모르겠다. 지도부는 수습을 하여야 한다. 더이상 세력대 세력으로서의 대립이 그쳐져야 한다. 지도부는 당면 4월 투쟁의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한 활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사회적 교섭안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벌어지는 투쟁에 대해서는 방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4월 투쟁에 있어 계획이 4월 1일이 부분파업 이외에는 결정 된 것이 없다. 4월 금방 다가온다.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힘을 결집이 필요하다. 지도부는 어제 조합원의 생각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진 것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밑바닥 노동자들과 어떻게 함께하고 미조직 사업장들에 대한 방안이 더욱더 절실히 필요하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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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종환] 다시 떠나는 날

  • 등록일
    2005/03/15 22:17
  • 수정일
    2005/03/15 22:17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개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하지만은 않기로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두기로 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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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한잔을 하다.

  • 등록일
    2005/03/15 21:56
  • 수정일
    2005/03/15 21:56
언제 술 이야기를 끝낼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좋은 술자리 였던 것 만은 틀림없다. 술 약속을 하였지만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술을 피하던 터라.. 술약속을 더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산 대선배 아니 아저씨와 술을 마셨다. 지금 59세의 나이를 먹은 분... 그러나 늘 웃음을 잃지 않은 한솔이 아빠, 제일이 아빠라 부르는 우리 다솜공동체와 함께하는 아저씨 한분과 간만에 교회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당도할 남촌 순대집에서 술을 먹었다.


노동운동에 대해 이해는 못하지만, 우리 다솜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오목사님과 총회 파견목사이신 장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모든지 오른 일이라 생각하시는 분이다. 때론 입장이 달라 의견충돌을 할때가 간혹 있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이해가 간다고 오늘 오목사님도 아니 장목사님도 아닌 나에게 고백성사를 한다. 음 술기운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나로서는 당혹함이 들지만.... 그래도 좋은 아저씨를 얻는 느낌이다. 과거 국민학교때 읽었던 큰나무의 보은 같은 것과 맞물리고 키다리아저씨가 생각난다. 한 소녀를 위해 묵묵히 늘 지켜보면서 그 성장과정을 지키면서 커간 아저씨...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에게 사랑은 준 것만이 아니다. 키다리 아저씨도 세상을 맑게 살 수 있는 보은을 받은 대상이다. 아이에게 무한정 사랑을 주었다기보다는 아이들의 맑음과 창의력에 아저씨 또한 유년과 세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오늘 그런 만남이었다. 투박한 대화.... 내 시선은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텔레비젼 화면에 고정되었지만 귀 만큼은 텔레비젼에게 내주기 싫었다. 그래서 귀는 쫑긋하고, 아저씨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가면서 느낀 이야기가 레코드 가사처럼 쉼없이 나온다. 난 무엇하나 기억할 것 없다. 한 인간의 역사를 듣기에 난 부족한게 많은 인간이다. 장목사님과 오목사님이 들을 이야기이다. 난 이런 이야기를 들을만한 인식도 마음도 가슴도 없는 그냥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데 넘쳐나는 이야기.... 기분은 좋았다. 나를 그렇게 믿어준다는 것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된다. 아 참 나도 이런 따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따스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늘 나만을 위해 내가 추구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달려온 삶... 그러나 그 삶은 나를 되려 옥죄여 온다. 인과응보이지... 뭐 다른 말이 필요있겠어.... 흐흐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언가 가슴이 뭉클 함이 든다. 맞아 민중의 삶이 이런거지... 거대담론도 거대 욕망도 거대 포부도 없어... 단지 삶이 버거워 허우적일뿐이야... 그렇지만 무언가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 조금 배부르면 나부터 찾는 그런 류의 사람과는 좀 다른 느낌... 그게 내가 같이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맞아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난 왜 그동안 보지 못한거야... 그건 내가 마음이 번데기보다 못한 가슴을 가졌기 때문이야라고 내 가슴한편에서는 대답을 한다. 맞어 너 늘 새 가슴이었잖아 맞아 맞아 그래도 새 가슴에게 이런 좋은 사람이 생겼잖아 좋은 아저씨도 생겼잖아... 나 그래서 기분좋다 난 대답을 하였다. 모처럼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프라이버시라 들은 내용은 귀에 들어오자 마자 삭제... 기억해도 쓰지 않으련다. 그분이 고마우신 목사님에게 직접 해야 할 말을 산더미 처럼 풀어놓았기에... 난 그냥 방관자가 될련다. 혼나도 뭐 프라이버시로 일관해여지... 폐속 깊이부터 시작되는 막걸리 트름 참 기분좋게 느껴진다. 간만에 느끼는 청량음료 같은 트름... 배는 더부룩하지만 기분많은 만땅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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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 등록일
    2005/03/15 01:10
  • 수정일
    2005/03/15 01:10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고등학교 국어생활 / 한국교육미디어) 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


사람은 강한 것 같아도 실상은 약한 존재다. 힘차고 당당하고 굳건한 면을 가지고 있어도 돌아서서 혼자가 되었을 때는 참 약하기 그지없는 면이 있다는 것을 제일 잘 아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수없이 결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도 혼자서는 많이 흔들린다. 이 결정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꽃 한 송이가 피는 일도 그렇다. 어려서 아주 작을 때는 작은 대로 바람에 흔들리며, 자라고 조금 더 컸을 때는 그 만큼의 크기로 흔들린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는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젖으며 피는 것이다. 바람에 시달리고 비에 젖으며 시련 속에서 피는 것이다.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어 아름다운 꽃송이가 초라하게 변하고 외롭고 두렵고 비참한 모습이 되기도 하면서 꽃 한 송이가 피는 것이다. 사랑도 그렇다. 수없이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흔들리면서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저 순탄하게만 가는 사랑은 없다. ‘그만 두어 버릴까.’ ‘이쯤에서 돌아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수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 길이 사랑의 길이다. 이 땅에 곧게만 찍히는 발자국은 없다. 모래 위를 걸어간 내 발자국을 되돌아 보라. 눈 위를 곧게 걸어갔다고 생각한 내 발자국을 돌아 보라. 그 발자국은 아무리 똑바로 걸었다고 생각해도 비뚤비뚤 흔들려 있다. 그게 우리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늘 흔들리는 채로 있는 꽃은 없다는 것이다. 흔들리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줄기를 위로 올린다는 것이다. 줄기를 위로 올릴 때는 돌아와 있을 때이다. 늘 젖은 채로 피어 있는 꽃은 없다. 그 빗줄기, 그 이슬방울을 제 삶의 양식으로 바꾸어 그것이 아름다운 빛깔을 만드는 힘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보고 자신을 탓하지 말고 이게 솔직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나 흔들리는 채로 있지는 말자. 수없이 제 자리로 돌아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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