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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자연의 반격

  • 등록일
    2004/08/12 15:40
  • 수정일
    2004/08/12 15:40

날씨는 장난 꾸러기이다.

94년만의 폭염.... 그리고 몇해전 40년만의 대형태풍 매미의 기습.... 기록은 갈아치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 삶에 큰 재앙을 몰고오는 기록들은 목숨을 앗아간다.

 

필연적 자연의 공격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환경의 경각심을 일깨우기위해 초기 장난 꾸러기였다. 그러나 장난 꾸러기인 자연은 인간의 산림파괴를 통한 환경오염에 분노를 하고 장난 꾸러기에서 재앙의 신(월령공주에서 다다로부치인가 재앙의 신이 인간을 보고하는 말 역거운 인간은 의미심장한 말이라 할 수 있다.)으로 탈바꿈하였다. 아마도 인간에 대한 직접적 피해를 통해 자연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기위해 비/바람/구름/태양을 동원하여 인간에서 무언의 메세지를 타전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경고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산업자본주의(1884년 산업혁명인간 1894년 산업혁명인가 헤깔린다.) 대두 100년하고도 몇십년이 지난 지금.... 인간은 자연의 순환을 뒤바꿔 놓았다. 수백만년에 1도(度)가 오른다는 온도를 100년이 조금 지난 현실에 올려놓았다. 이는 엘리뇨 라니뇨라는 지구 이상 기온현상(온논화)로 이어졌다.

 

애꿎은 민중만이 자연의 재앙에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다.

 

지구의 3대 태풍이라 일커러 지는 서인도제도 근처인 버뮤다와 멕시코만에서 일어나는 허리케인, 인도양 뱅골만을 기습하는 사이클론, 동남아 해양에서 일어나는 태풍은 무지막지하게 사람에게 재해를 입힌다. 그러나 이 재앙을 입는 사람들은 민중들이다. 이들은 자연앞에 무력하기 그지 없다. 자신의 삶의 터전은 물론 소중한 이들을 자연재해로 잃어버린다. 정작 죽어야 할 놈들은 그들에게 돈 몇푼의 적선하며 자선사업가로 변질되는 모습에.... 과연 자연은 공평한가 반문해 본다.

 

왜 자본이 일으킨 재앙에 무고한 민중이 죽어야 하는가?

 

민중들은 먹고살기위해 자신의 육체노동으로 번돈으로 이 어지러운 세상을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러킬한 대목이다. 자본가들에게 직격탄을 난리지 않고 왜 무고한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가는가? 우리가 사는 이 지구라는 곳 우주 밖에서 보면 평온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 평온한 지구의 역사 정확히 말해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평온치 많은 않았다. 권력을 위해 무수한 학살극인 전쟁을 통해 무수한 군인들과 민중들이 죽어갔고, 권력의 정쟁에서 혈육간의 피흘리는 죽임이 연속이었다. 역사는 어찌보면 피로 얼룩져진 역사다. 그러나 대지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욕구에 대지는 크게 분노하였다.

 

개발과 더많은 자연을 확보하기 위한 발전논리는 지구가 수만년을 거쳐 간직한 고귀한 것들을 파괴시켰다. 그것도 불과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난 환경주의자도 환경운동가도 아니다. 환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난 안다. 어린 시절 뛰놀면서 쳐다보던 푸른하늘... 동요를 부르면서 느끼는 뭉게구름름 몽실구름 등을 외치며 보던 청명하고 푸른 하늘... 무수히 빼곡한 나무들.... 맑은 개울가 등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다. 다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죽어갔다. 더이상 도시 근교의 냇가에는 고기들이 서로 뛰놀지 못한다. 그리고 고기가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의 욕망으로 고기는 돈벌이 또는 보신용으로 인간에게 대량학살되고 있는 현실....

 

우리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줄껏인가?

 

생명력을 다한 땅과 악취가 가득한 시냇가 매연이 자욱한 공기 등을 유산이라고 물려줄 것인가. 더이상 이상기온 타령만 하지 말고 지구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선진국 몇국가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의 환경생태 공간으로 가꾸어보았자 무엇하랴... 공해산업이 여전히 돈벌이 수단으로 각광받는 이상 전지구는 병들고 그 수명을 다할 것이다.


어디 영구적인게 있겠냐만은..... 살아있는 동안 이 공간을 아껴야 하지 않을까?

중학교 물상시간 4번의 빙하기와 3번의 간빙기는 지구 자신의 안식년이지 않았을까?.... 우린 지구의 안식년을 무엇하러 재촉시키는가?

 

지구가 지구답고 아름답게 사는 세상이 그립다.

 

어릴적 뛰어놀던 동산과 푸른하늘 산의 뺴곡함이 그립다. 산에 놀러가 산림욕이라는 것에 기대기 보다는 온누리가 산림욕 공간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무더위는 우리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일뿐이다. 덥다라 하기전에 얼마나 환경에 무관심하였던가에 우리한번 곰곰히 생각해 봐야 겠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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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는 토끼와 거북이....

  • 등록일
    2004/08/12 03:06
  • 수정일
    2004/08/12 03:06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성적 등수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함께 공존하고 상대방의 가치와 상대방의 장점은 교육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경쟁 이전에 사람이 사람으로서 그리고 서로가 서로일때 어울리는 문화가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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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독백

  • 등록일
    2004/08/11 23:39
  • 수정일
    2004/08/11 23:39

밤은 고요의 바다이다.

 

밤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둠뒤의 불안감이 휘돌지만 불빛 아래에서는 고요를 우리에게 준다.

 

난 이러한 밤을 좋아한다. 낮의 시끌벅절함보다는 잔잔한 소리를 우리에게 주기에 난 이러한 밤에 많은 상념에 휩싸인다. 인터넷음악사이트에서 나오는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자주가는 인터넷 사이트 글귀에 주목하기도 하고, 상념에 젖어 과거 회상에 잡겨보기도 한다. 그래서 나에게 밤은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의 공간이며, 과거의 나를 발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간혹 다른사람들이 있어 밤의 고요함을 방해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밤에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면서 밤이 주는 두 얼굴에서 나의 마음의 거울을 비춰본다.



달 빛 밝은 밤은 검은 거리에서 희미한 달 빛 안개에 젖어보고, 흐른 밤에는 깜깜한 어둠의 두려움에 가슴을 졸여보기고 한다. 특히 희미한 달빛의 안개에 젖어오는 그런 날이면 난 술이아른 매개체르 그리워하거나 술에 나를 의지한다. 그런날 난 희미한 가로등 빛이 내리는 곳에 가서 술취한 나를 발견하곤 한다. 서울 가로등이 없어지고 네온사인이 온 도시를 휘감는 그런 도시지만 내가 살고있는 곳은 가로등 희미한 불빛이 사푼히 내려앉은 광경을 느낄 수 있다.

 

밤은 나에게 또다른 상상의 공간이다.

밤은 모두가 잠든 고요의 바다. 그 고요의 바다에서 난 남들이 잠든 시간 혼자 세상의 불을 지핀다. 불을 지피면서 짧지만 그래도 살아온 날들을 회상해 본다.

 

과거와의 대화 그건 나의 또다른 발견이기도 하다. 늘 순간에 충실하고자한 나는 나라는 존재자체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때가 많다. 사람들에 휩쓸리고 시간에 흐름에 순응하면서 나라는 존재는 세상과 타협을 하면서 이승의 버거운 삶을 하루하루 지탱해 나가고 있다. 존재로서 삶을 향유하는 것인지 유희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나라는 존재의 발견에서 난 절망을 느낀다.

그 많았던 꿈과 희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엿장수에게 팔아먹지도 않았는데 시간의 흐름에 순종한 댓가로 난 꿈과 희망을 송두리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난 새가슴이다. 용기도 당당함도 없이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나의 독설에 난 나를 훈육시켜간다. 마치 진리인양....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독설에서 훈육되어져가는 시대.... 지금 이 시대가 그러하지 않을까?

 

순간에 충실하고자 순간의 희열에 열광하며, 우린 또다른 파시스트 제국주의가의 길들여진 병정으로 전락되어진 것은 아닌가? 목적없이 의지없이 주장없이 다들 자신의 삶에 길들여진다. 삶이라는 테두리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직장이라는 훈련원에서 우린 인간이 아닌 기계임을 강요받고 있다.

 

집단이라는 이름에 개인이 묻혀야 하고, 개인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존재한다. 난 이를 거부한다. 그렇지만 나도 나의 도그마에 빠진 어항의 물고기이다.

 

나의 주장은 있으나 남의 주장에 대한 배려는 없다. 자신의 사상은 존재하나 남의 사상에 대한 존재를 거부한다. 거부는 연대가 아닌 단절로 이어진다. 우린 토막난 단절속에 고립되고 파편화되어져 간다. 일률적으로 그리고 그 단절은 또다른 세상을 만들어낸다. 독설과 오만을 낳고 과하면 편견을 파생시킨다. 이것이 우리 운동권이 처한 조건이다. 나의 주장은 있으나 상호합의는 없는 이상한 논의구조에서 우린 구조화되어져 간다. 어항의 물고기 비상을 꿈꾸지만 주인이 먹이와 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죽고만다. 우린 이런 필연적 진리에 대해 잘 알면서도 순응에 대한 반평향에 길들여져 왔다. 늘 반대를 위한 반대.... 거부를 위한 거부에 우린 익숙해져 왔다.

 

나를 깨버리고 싶다. 그러나 난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 또다른 존재(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하였던가...).... 내가 혼자 순응을 거부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일이다.

 

싸움은 있으돼 논쟁이 없고, 사상은 있으되 이념이 없는 이세기 우리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이 밤 고민하게 된다. 나에 대한 독설을 지껄여 보았다.

 

밤은 무수한 잡념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나도 무수한 단어의 조각들을 나의 기분에 맞추어 끄집어 놓아 이 공간에 퍼즐마추기를 해보았다. 이 말은 내가 느낀 오늘의 풍경이다. 난 거부를 위한 거부자가 되기는 싫다 그러나 형태가 없는 것에 대한 논의 이것은 합의 도출이 아닌 또다른 헤깔림을 늘어놓은 독설은 아닐까? 오늘 잡념에 대한 단어들을 이 공간에 다 털어놓았다. 마음은 시원하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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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보고 아마존

  • 등록일
    2004/08/11 16:15
  • 수정일
    2004/08/11 16:15

행인님의 글을 보면서.... 자연에 대한 단상과 흔적을 남겨봅니다.

 

아마존을 녹색의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기피해온 우리의 문명사가 만들어낸 잘못된 文語이며
우리의 부끄러운 얼굴입니다. 아마존은 녹색의 희망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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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래

  • 등록일
    2004/08/11 13:04
  • 수정일
    2004/08/11 13:04

한용운 시인의 시집을 샀습니다.

나의 노래가 있기에 여기에 적어봅니다. 

 

나의 노래

 

                                                                                                 한용운

 

 

나의 노랫가사의 고저당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닯아 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랑의 망상으로 도막쳐놓는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험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점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쥡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는 천국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가서는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랫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루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光榮(광영)에 넘치는 나의 적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音譜(음보)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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