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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12
    [시/윤동주] 별 헤는 밤
    간장 오타맨...
  2. 2004/08/12
    지구와 자연의 반격
    간장 오타맨...
  3. 2004/08/12
    함께가는 토끼와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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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08/11
    밤의 독백
    간장 오타맨...
  5. 2004/08/11
    자연의 보고 아마존
    간장 오타맨...

인천에서의 가장 기뻣던 추억....

  • 등록일
    2004/08/07 16:15
  • 수정일
    2004/08/07 16:15
인천을 떠나온지도 언 1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아직도 내가 왜 인천에서 서울로 황급히 떠나왔을까라는 생각만 하면 가슴한 구석에 웬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 옵니다. 나는 과연 운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지도 요즘 헤깔리고 있는 지금 제가 인천에서 제일 행복했던 일들을 써 놓았던 글을 올려 봅니다.
 
그리고 제가 인천에 있을때 제일 도움을 많이 받았던 형의 편지또한 올려봅니다.
떠난다는 생각이외에는 하지 못했는데.... 정말 이 죄스러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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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와서야 승만씨가 인천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배노릇을 못했다는 미안함이 앞섭니다. 그래도 형이라고 찾아주고 했던 사람인데..
가슴이 조금은 아프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렇게 사람을 떠나게 하는지... 그리고 승만씨는 왜 그렇게 연락도  없이 떠나야 했는지 궁금 하기도 합니다.
 
경험이 일천한 저로서는 한가지만 하기도 벅찹니다.
어떨때는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면서도 그것이 잘 안됩니다.
조만간에 또 만남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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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뻣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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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정보화사업단 인천지부 여름 수련회 추억을 떠올리며
 
지난 7월 31- 8월 2일까지 강화도 석모도에서 2박 3일이라는 기간동안  진행하였습니다.
 
전체 참석인원은 총 7인정도 참석하여 이런저런 이야기와 술자리를 가지며  휴가를 겸비한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좀 아쉬운것은 원래 계획를 수정하여 진행하였다는 것인데 수정을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적 요소가 많아 아쉬움을 남기면서 돌아왔습니다.
 
 1. 석모도 도착 하루
그날따라 그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가 내리면서 출발부터 수련회가 잘 진행되어질 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출발을 감행하였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더니 갑자기 강화터미널에 도착하면서 부터 비는 장대비로 바뀌어 수련회가는 우리들을 불안케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와 석모도간의  배편은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가 표를 끊고 석모도에 들어오자 마자 비는 비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소방 호수로 물을 뿜어내듯이 비는 그칠줄 모르게 좔좔하늘에서 내리는게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배로 도착한후 강화도와 석모도간의 배편이 운행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정말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좀 늦게 도착하였다면 우린 아마도 석모도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냥 강화도 이름모를 어느곳에서 수련회를 보냈을 것이다.
 
비가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비가 계속해서 내려 우리 일행들이 비로 인해 온 몸이 젖어 버릴 지경이 었다. 그러나 어느 자상한 석모도 유원지 식당겸 횟집을 하시는 아주머니 한분이 비를 피해 들어오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일행은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가 비를 피해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그집에 들어가서 비를 잠시 피하기로 하였다.
 
시장기가 감돌고 있던 일행들은 김밥을 안주삼아 소주를 먹기로 하였다. 비도 좔좔 하늘에서 내리고 시장기는 감돌고 요기차 몇잔의 소주를 먹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주와 김밥만 먹기에는 너무나 미안하였다. 그래서 일행중 비상금을  가지고 있었던 여러명의 사람들이 새우와 쑥 튀김과 인삼대추막걸리를 시켰다.  소주는 우리가 가져온 米ZOZU(경월에서 나온 미색소주.   월-마트에 있던 상점원의 꼬임에 빠져 술보다는 경품을 많이 준다기에 米ZOZU를 구입하였다.  경품은 무려 소주값과 같았다. 한박스를 구입했는데 구입한 가격과 경품가격이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미색소주 20병 한box 1만5백원. 경품 1만원 상당 히히^^)를 먹기 시작하였다. 우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비를 피해 있기로 하였으나  일정은 여기서 부터 수정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주머니의 자상함과 하늘에서 내린 소방 호수 같은 장대 비에 의해 우린  계획을 수정하였다. 도저히 2박 3일간 이 폭우속에서 텐트를 치고 수련회를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의해....


원래 계획은 석모도 민머루해수욕장에 들어가 텐트를 치고 2박3일 음주가무를 감행하려 하였으나 비의 상태와 아주머니의 자상함에 우린 계획을 수정하고 민박집을 잡고 석모도를 차근차근 둘러보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리고 지부장님의 민박집 가격흥정.... 유원지의 상인들은 고단수라는 것을  새삼 석모도에서 느낄수 있었다. 비도오고 민박집 구하기도 힘들다는 핑계호  우리 일행들에게 더이상 가격을 내려 받을 수 없다는 민박집 주인의 단호한 태도에 우리 일행들은 그냥 2박 3일 6만원에 흥정을 마치고 민박집을 구했다.


그리고 민박집으로의 출발.....

내평생 이런 집에서 민박하기는 처음이다.(너무 환상적인 집이다. 전통가옥을 개조해 겉과 속이 전혀 딴판의 집이었다.) 6만원에 별장을 빌려 쓰는 기분이  들었다. 방 두개와 거실 그리고 주방이 딸린 집이었다.  독채를 우리가 6만원에 빌렸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너무나 좋은 집에었다. 그리고 모든 주방기기가 갖추어져 있는 집이었다. 먹을 것만가져가면 모든것이 해결될수 있다.   우린 인천에서 강화도 석모도 까지 무거운 주방기기와 그리고 잠동사니를  가져왔는데 하나로 이집에서는 필요치 않았다. 오로지 먹을 것과 음주가무를 할 수 있는  술만 있으면 된다. 전기밥통, 가스레인지, 그릇, 퐁퐁 등 다 가추고 있었다.  한 가지 없는 것은 수저와 젖가락이었다.
 
민박집에서 석모도에 새로난 농수로로 출발....

주인집 아저씨는 물고기를 잡기위해 그물을 치러 간다고 하였다. 우린  아저씨와 함께 그물을 쳐주는 대신 물고기 몇마리를 매운탕 끌여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무조건 아저씨를 따라가서 그물 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바다의 짠기운이 감도는 바람을 가르면 우린 검은 하늘에도 굴하지 않고  그물을 쳤다. 서해 바다이지만 정말로 바람의 시원함은 지금도 잊기 못하게 느껴지고 있다. 더위를 날려 버릴 바다의 거센바람들 정말로 생각만해도 시원하다...

그물을 다치고 다시 민박집으로 들어와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나서 우린  본격적으로 술먹기에 들어갔다. 술을 먹고 있는 도중 민박 주인집 할머니가 찾아와  직접 수확한 토마토를 우리에게 건내면서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우린 직접  수확한 토마토와 숫불에 익혀지는 삽겹살에 술을 물먹듯 위장으로 집어 넣었다.  공기의 상쾌함과 술의 알딸딸함에 취해 우린 석모도 하루를 술과 함께 보냈다....
 
담배가 없어 진석이와 난(간장 오타맨) 폭우를 속에 석모도 시내를 비를 쫄딱 맞아가며 담배를 사러갔다. 정말 비가 많이 내려 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의  폭우였다. 그러나 진석이와 나는 담배를 피워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푹우를 해치면서 담배를 사왔다. 그러나 담배를 사오라는 사람들은 다 잠을 자고 우린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샤워실에서 샤워를 한후 옷을 갈아입고 담배를 피려는 순간 오면서 뜯어 놓은 담배가 비에 젖어 거의 회생불능 상태가 되어있었다.   어찌 구한 담배인데 식당에 한개 남아 있다는 담배를 애걸복걸하면서 사온 담배인데 제대로 필수  있는 담배가 없다니... 오호통제라.........
 
이에 우 린 이와중에도 담배를 피워야 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중 양호한 담배들을 골라 가스랜지에 구워 놓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 피는 사람의 고충이 이리도 서러울 줄이야...... 흐흐 T.T

 
석모도 이틀째.....
비가 많이 내렸는지 텔레비젼에서는 수재상황이 특보와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석모도를 둘러봐도 비 피해상황은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경기도 북부의 비 피해가 아주 심각함을 느낄수 있었다. 우린 이런 와중 한 누군가가 우린 수련회(야유회)온게 아니라 피난 왔다라는 말을 하면서 비피해 상황을 예의 주시하였다.


그리고 아침식사 겸 점심 식사........ 곰돌이는 전문 요리사였다. 정말로  요리 솜씨가 가공할 정도로 굉장하였다. 장인의 정신을 엿보이듯 도마에 야채를  넣고 정성스럽게 썰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일류 요리가 저리가라 였다.  우린  맛있게 진석이가 요리한 카레와 여러가지 반찬을 가지고 아침겸 점심식사를 마쳤다.  정말로 맛있는 카레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진석(곰돌이)  요리강연회를 열어야 겠다. 히히^^
 
비피해가 좀 몸으로 느껴 지기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지이시면서 밤새 비로인해 떨어진 고추들을 손질하고 쓰러진 고추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으셨다. 지부장님 친구이신 박동호형이 할머니를 도와 우리가 쉬고 있는  동안 고추밭 일을 도와주고 오셨다. 그리고 양손에 탐스러운 만큼 먹음직스러운  수박 2개를 앉고 오시면서 할머니를 도와주었더니  수박을 주셨다고 하시면서  수박을 먹자고 하였다. 우린 해장술을 겸해 수박에 소주한잔을 곁들어 먹었다.
 
그리고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어제 쳐놓은 그물 하나를 걷어오셨다.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정말로 고기들이 많았다... 메기, 잉어, 붕어, 강 준치 등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그물에 엉켜 있었다. 우린 아저씨와 함께 그물에 걸려있는  고기들을 하나하나 끌어내서 고르고 있었다.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서 꿈뻑꿈뻑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물을 다 겉어내고 난후 아저씨가 가져간 물고기를   골라서  우린 죽어있는 강 준치를 4마리 정도를 골라 매운탕을 끌여 먹었다. 난 알레르기가 있어 매운탕을 못먹어 맛있다는 강 준치 매운탕을 먹지 못하였다. 그러나 먹은  사람들의 이구동성은 정말로 맛있다는 찬사를 어끼지 않았다. 흐흐 난  민물고기를 못먹는게 한탄스럽기 까지 했다.(민박주인집 아저씨는 정말로 야속하게도 메기 한 마리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다. 민물고기를 잘 먹는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메기매운탕이 맛있다고 하는데 우린 메기매운탕 대신 붕어와 준치매운탕으로  물고기 맛을 달래야 했다....
 
 그리고 휴식과 비피해상황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휴식을 하였다.
 휴식을 마치고 난 후 우린 석모도 시내로 다시 나가기로 하였다.  석모도에 들어와서 어찌 조개구이를 먹지 않고 그냥 갈 수 있으랴... 우린 조개를 사러 석모도 시내로 나가보았지만 석모도 시내에서는 오로지 새우젓과 여러종의 젓갈만을  팔고 있을뿐, 조개는 구경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 사람들은 조개를 갯벌에서 케자고 하였으나 지역주민들이 지형을 모르면서  조개를 케는 것은 의험하다고  말해 우린 배타고 나가기로 하였다. 강화도 선착장에 가면 조개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가지고 강화도로 나가보았지만 정말로 조개를 찾기가 영 힘들었다.  여러번 주변을 돌와보았지만 강화도 외포리에는 조개가 없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다시 석모도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선착장에서 작게 식당을 하시는 아주머니가 주변을 잘 둘러보면 있을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그래서 다시금 우린 조개 찾기에  나섰다.. 그런데 정말로 조개가 있었다... 여러 종의 조개는 아니었지만 두 종류의 조개가 있었다. 요즘 병균이 심해 조개를 잘 팔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조개를 왜 먹냐고 하기에 우린 조개 구워 먹을 려고 한다고 말을 하면서  조개구이를 할 조개를 2kg, 만원 어치를 사서 들어왔다....
 
그리고 저녁식사후 최후의 만찬....
번개탄에 조개를 지글지글 구우면서 우린 조개구이의 맛에 다시금 감탄사를 연발 하면서 술을 먹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조개구이를 먹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져온 소주 20병이 금새 바닥이 나서 우린 다시금  술찾기에 나섰다. 술을 사러갈 사람들을 정해 술을 사러 시내로 나가려고 하는데  민박집 주인아저씨가 차를 몰고 오셨다.(술이 만취한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하고 나타 나시더니 술이 있다면서 얼마나 필요하냐고 우리에게 물으셨다. 그래 우린 한 4병 정도의 술이 필요하다고 말한 후 술을 받아왔다. 그리고 4병의 술과 함께  우리의 기억은 가물가물 사라지기 시작하면 석모도의 이틀을 보냈다.
 
석모도의 마지막 날.....
정말로 비피해가 장난아니었다.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다 사상자도 많이 났고  재산 피해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하였다. 강화도 석모도에는 비만 많이 왔다.  그리고 그렇게 비 피해가 심하다는 생각을 못하였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난후 우린 낮잠과 휴식을 취한 후 오후 2시경에 짐을 다챙기고 석모도 시내로 나왔다.(민박집 주인 아저씨의 자가용을 타왔다.) 배를타고 나와 외포리에서 강화도 터미널에 나와 인천 송림동에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오는데 김포 일대의 논과 밭들이 비에 잠겨 있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린 이제서야 비가 장난아니게 많이 내렸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도착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난후 노정단 인천지부 야유회는  막을 내렸다....
 
작년 여름의 석모도 햇볕은 쨍쨍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멋있는 섬 풍경과   좋은 술과 많은 이야기들속에서 여름의 추억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나 생각이 되어  이글을 뛰어 본다.. 정말 멋있는 한여름을 보냈다... 이 겨울 정말 외롭고  쓸쓸한 지금 여름날이 었다... 여름날의 더움을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며 이 글을 다시금 편집하여 올려 보았음....
 
내년도 여름엔 멋있는 여행그리고 수련회를 기획하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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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칼럼을 보고나서

  • 등록일
    2004/08/07 16:07
  • 수정일
    2004/08/07 16:07

진보넷에 입주한 게시판중 가장 읽을 만한 게시판을 꼽으라면 전 단호히 하종강 칼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게시판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고자 하는 하종강  선생님의 글속에 뭍혀 있는 흔적과 지금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신심어린 열정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분의 현재 모습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날 사무실에 홀로나와 하는 일 없이 빈둥대고 있다. 게시판에 있는 글  모두를 읽으면서, 전 아직도 열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발견과 무엇보다도 존경스러운 것은 스스로 활동가임을 자임하지 않는 그분의 성품을 보면서 무한한 경의감과 존경심이 우러나오더군요.


현재 스스로 운동가임을 자임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종강 선생님처럼 스스로 현장노동자들을 위해 365일 불철주야 몸소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노동운동 발전에 이바지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개인적으로 판단을 해봅니다.
 
우선 매우 놀라운 것은 87년 울산의 노동자 대투쟁을 시발로한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노동조합의 초기적 고민을 보면서 매우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현재  노동운동의 상태에 대하여 재고찰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 제가 매우 놀란것은 87년 노동운동의 역사적 페이지를 장식한 투쟁의 요구 안에 대한 놀라움입니다.

 

당연히 현재상태를 보면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권리라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사항들이 나열되었겠구나하는 생각들에 쇠망치를 두드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연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막연한 생각속에 투쟁에 대하여 미학화  시켰다라는 반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87년 울산 노동자대투쟁의 요구안 즉슨(하종강 선생님 칼럼에 기재된 내용)  첫번째 요구안이 두발자율화, 두번째 요구안이 복장자율화,,,, 그리고 현재  임단협안에서 주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내용인 임금인상 내용과 노동자 복지후생이라는 내용은 순번이 그리 높지 않게 한 10번째 나열되었다고 하더군요..(하종강선생님도 친구에게 전해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내용에 대하여 믿기지가 않아제차확인을 하였으며, 이것도 믿기지 않았는지 직접 유인물에 쓰인 문구를 보고서야 확인하였다고 하더군요.)


현재 노동자들에게 있어 대공장의 상징과 노동자들의 상징물로 여겨져 있는 작업복이 그 당시에는 중고등학생의 교복처럼 공돌이의 표상이었다는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쉽게도 작업복이 노동자들에게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을 나뉘어주는 갈림길이 서있는 지금... 그전의 당시의  생각과는 너무 상반되어 있어 좀 머리가 복잡하더군요...
 
하여튼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다름이 아니라....
이만큼 노동운동 자체가 역사적 발전을 해왔다는 사실이며,,, 현재 투쟁이 공세적 수세적으로 몰리고 있더라도 노동운동은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 같이 조급증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단비와 같은 좋은 말들이 있숩니다...
 
설날에 사무실에 나와 하종강선생님의 칼럼을 하루종일 보면서 간만에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갑갑한 사무실에 벗어나 노동자들의 함성속에 파뭍혀 함께 지지와 연대를  통하여 이땅의 진보라는 씨앗을 한아름 길거리에 심어 놓았으면 합니다...
 
  진보는 한자풀이처럼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밀리더라도 일보후퇴 이보전진의 자세로요...
 
  이게 일치단결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함께 전진할 때이니 까요... 10사람의 한 걸음 보다 한 사람의 열걸음이 더욱더 필요한 시기인 이마당에요...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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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숲

  • 등록일
    2004/08/07 16:01
  • 수정일
    2004/08/07 16:01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때 세상의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자 어느 깨어있던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한 쇠가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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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中

  • 등록일
    2004/08/07 15:58
  • 수정일
    2004/08/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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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공 속에 평행하는 비로 떨어지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들이 서로 마주친다 할  때, 이는 클리나멘(clinamen)을  산출하는 편의 속에서  필연성의 세계  바로  그 안에 인간의 자유가 실존함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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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탕은 녹아야 하며"(베르그송), 만사가 무르익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여기서 가장 나쁜 것은 미숙화 일 것이다. 미숙화는 모두에게 재난을 초래한다. 1792년과 1871년 이래 프랑스는 이점을 잘 알고 있다. 마침내,  그러나 걸릴 만큼 걸려서, 때가 오기를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인민적 지혜와  기억 속에서 말이다. 프랑스는 기다린다. 해 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확신하면서, 모 든 것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음을 잘 알면서, 그러나  예상  밖이지만 오래 생각하고 준비해 온 이 경험을  프랑스에 더욱 확실한 복지, 안전, 평등,  평화의 세계를-노력 후에- 열어 줄 수 있는 이경험을 적어도 시도해야 함을  확 신하면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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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창조

  • 등록일
    2004/08/07 15:55
  • 수정일
    2004/08/07 15:55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中...
( http://www.shinyoungbok.pe.kr/ ; 신영복 선생님 홈페이지)
 
그들을 말미 암음으로써 우리가 사는 시대를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주는 '응달의 사람들', 소외되고  억눌리고  버려진 사람들 속에 자기 자신을 심고 그들과 함께 고반(苦飯)을 드는 사람과 자비의 이야기들은 뜻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의 뇌리를 줄곧 떠나지 않는 것은 "우리 시대의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 사회의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집요한 자문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민중의 든든한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민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 그 시대, 그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민중, 특히 격변기의 역사무대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낸 경우의 민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의  생생한 현재 상황 속에서 민중의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내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착종(錯綜)하는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현실의 왜곡, 사실의 과장, 진실의 은폐 등 격렬한 싸움의 현장에서 민중의 참모습을 발견해내고 그것의 합당한 역량을 신뢰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껏 잡은 것이 민중의 '그림자'에 불과하거나 '그때 그곳의 우연'에다 보편적인 의미를 입히고 있는 등……, 감상과 연민이 만들어낸 민중이란 이름의 허상이 우리들을 한없이 피곤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그것은 '왜 불행한가?'라는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질문에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눈물의 예술'로 그 격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위안을 줌으로써 삶을 상실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수년의 징역살이 그 일인칭의 상황을 살아오면서 민중이란 결코 어디엔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민중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교(假橋)가 되어주지도 않습니다. 민중을 불우한 존재로  선험(先驗)하려는 데에 바로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基底)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입니다.  어떠한 시냇물을 따라서도 우리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듯이 아무리 작고 외로운 골목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민중의 뿌리가 뻗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 특유의 민중성입니다. 부족한 것은 당사자들의  투철한  시대정신과 유연한 예술성입니다.
 
그 허상의 주변을 서성이며 민중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실패가 설령 그들 각인의 의식과 역량의 부족에 연유된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들  개인의 한계에 앞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자체의 역사적 미숙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인식과 역량은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획득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온 지 두 달입니다만 아직도 쓸고 닦고 파고 메우고 고르고……,  크고 작은 일들로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새벽의 여름산에서 들려오는 산새소리,  때묻지 않은 자연의 육성은 갖가지 인조음에 시달려온 우리의 심신을 5월의 신록처럼 싱싱하게 되살려줍니다.
 
198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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