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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 오타맨...

남동공단 아침 출근 풍경....

  • 등록일
    2004/08/06 19:35
  • 수정일
    2004/08/06 19:35

아침 회사를 출근하는 모습들은 정말로 나에게 또다른 사회를 보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고등학교를 끝으로 아침에 일찍일어나서 거리를 활보하는게 언 11년만 에 맞는 아침의 풍경은 마치 인간시장을 방불케한다. 사람들이 이리도  많구나하는 생각을 해보게 하고 네가 얼마나 이사회와 동떨어져  게으 름을 부리면서 살아갔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내자신이 쑥스러워지기까지한다... 이러한 아침의 출근 모습 네가 공장을 출근한지도 언 2주를  넘기고 이번주가 3주차를 맞이할 즈음 출근전의 모습과 풍경들을 이 공간에 글로써 남기고자 한다. 정말 많은 생각들이 짧은 출근시간에  내 머리에서 교차하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나는 것들을 이  공간 에 끌적여 보려 한다.



첫출근의 시작의 두려움......

첫출근하는 그날 그전에 상섭, 석진씨, 진숙씨가 사무실에 나와  공장  출근 축하 파티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완젼히 술에 취해서 그날의 기억의 일부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술을 먹었다. 그리고  깨어 나보니 시계는 6시 1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황급히 화장실에 가서 머리와 이빨을 닦은 다음 사무실에서 커피한잔을 마시고 6시 30분 경에 어둠이 서서히 광명으로 바뀔즘 동암역까지 걸어갔다.


그시간 즈음 동암역 남광장은 차들보다는 사람들 인파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인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차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저마도 자신의 회사의 출근버스를 기다리면서 졸린눈을 비비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아침을 간단한 토스트와 우유로 때우고 있는 사람..술 먹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들.... 정말 내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세상에 왔다는 착각할 정도의 아침의 출근시간 동암역전의 풍경은 나의 상상과 고정관념을 깡그리 날려버리는 정말  쇼킹한 충격이었다. 얼마나 이사회와 동떨어져 살았구나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정도 였으니까....

 

그리고 각 회사의 출근버스가 즐비한 길을 걸으면서  시내버스 34번이  다니고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버스정휴장에 도착한 7시 05분을 핸드폰의 시계는 가르키고 있었다. 그 시각즘 회사통근버스를 놓친 여러명의 이름모를 노동자들의 모습들이 눈에   선하게 비쳐지곤하였다. 출근전 사람들의 모습들 또한 여러 형태들이다. 잠이 덜깨어 눈만 반쯤뜨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문을 읽고 있는사람. 자판기에서 커피를 뽐아 마시고 있는 사람 그리고 연실히  시계만 보면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제각치 다른 모습들이  나의 눈에는 비쳐쥔 모습과 생각은 그런 각기 다른 모습들이 어쩌면 사회라는 작은 하모니를 이루는데 자그마한 기초가 아닌가라는 생각과 이 사회의 지탱목들 그 자체는 아마도 이러한 모습들 이러한 사람들이 있기에 끊임없이 사회라는 틀이 유지존속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7시 15분 시내버스가 좀 늦게 도착하였다. 좀 늦게 도착한 시내버스를  탓하면서 연실히 난 핸드폰의 시계만을 바라보았다. 첫출근날 부터 지각하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들이 계속적으로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정말 초조하게 핸드폰 시계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늦게  온 버스를 탓하고 느린보처럼 운전하는 기사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욕 을 하면서... 독백 - 아저씨 신호 무시해도 좋으니까 버스좀 빨리몰아  주세요. 안그러면 저 지각한단 말이에요. 그것도 첫출근 날에  말이에 요-  이런 조급한 마음들이 계속적으로 나를 불안케 하였다.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버스는 계속 느린속도로 남동공단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차안의 사람들은 연실히 밀려오는 잠을 참지못하고  잠을  곤하게 자고 있었고 차안은 라디오 방송의 상쾌한 아침방송가  높지도  낮지도 않는 음성으로 연실히 노래와 아나운서의 맨트가 흘러나왔다.

나의 속은 거의 바짝탄 나무의 숯덩이와 비슷할 정도로 다타버릴 정도 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였다.  되는데로 되자라는 푸념을 하면서 차장밖을 바라보았다.


버스는 인천터미널을 지나서 남동공단에 거의 다달았을때 달구어진 쇠덩이보다 더 불디붉은  태양이 동을 트고 있었다. 정말 아침  태양이 동트는 모습을 간만에 보는 진풍경이었다. 그리고 곧 있다 남동공단 입구에 버스는 정차 나는 날렵한 행동으로 버스안에서 내려 내가 출근하게 될 회사로 향했다. 발걸음은 두려움과 그리고 새로운 일에 대한 기 대와 반심반의 한 상태로 일터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핸드폰 시계는 아침 7시 45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 사무실에 들어가 있었다. 낮설은 풍경들이 계속 나를  두 렵게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누군가 나에게 오더니 오늘 첫 출근한  사람이 아니냐고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는 잠시 있다가  나에게 사진하나와 등본을 달라는 말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안전감독이라는 완장을 찬 사람이 나의 앞 으로 오더니 두꺼운 책자와 함께 귀마개와 방진마스크를  건네 주면서  안전교육에 대한 기초상식 그리고 작업할때 주의할 상황들을 설명해주  었다. 그리고 난 후 곧바로 또다른 누군가가 오더니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현장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소음과 기계 음들이  나를  짖눌렀다. 이 공장에서 또다른 시작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은 나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정말 공장 생활을 잘 할 수있 을까?라는 반문을 난 계속적으로 마음속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 잘 할  수 있을거야 그전처럼 새롭게 또다시 해보는 거야... 나에게 내자신이  위안을 하였다.


그전 사무실에서 대리가 나에게 술을 얼마나 먹었길래 이리 술 냄새가  많이 나냐고 하면서 껌을 씹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난 껌을  씹으면서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정말 나의 공장생활의 시작 기대반 두려움반으로 시작하였지만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긴 후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었다. 잘 할 수 있다는 확신도 그것과 함께 나의 마음 한 구석에  밀려왔다.... 그래 화이팅이야....
 
인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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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생활을 돌아보며....

  • 등록일
    2004/08/06 19:26
  • 수정일
    2004/08/06 19:26
  정말 시간은 빠르게 흐르나 봅니다.
 
  동암역에서 터를 틀고 창립을 하고 사업을 시작한지가 어느세  2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98년 4월 12일 정식지부 창립 총회 후 노동정보화사업단 인천지부 출범. 저의 인천에서의 노동운동이라는 작은 진보운동의 첫발걸음 내딛던 순간이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두른반 세근반 하는 설레임. 그리고 부푼가슴을 안고 시작한 노정단 상근일.... 정말 세상의 그 무엇을 얻은듯한 기분이 들었죠.
  도저히 언어라는 수식어를 통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쁨들이 있었던  시기였죠. 또한 학교생활때 부터 늘 동경하면서 하고 싶어하던 운동적 삶이라는 것을 내가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뿌듯함들 그게 나의 2년 간의 힘이였고 이후 내가 또 가야할 길인것 같습니다. 늘 처음처럼 한걸음을 내딛듯이 말이죠.


노동정보화사업단 인천지부 출범과 나의 인천생활

 

백영민 대표의 정보화운동에 대한 가단하고도 명확한 강연과 지부창립 총회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군요. 시작은 정말 초라하고 사무실 한칸도 얻지 못해 지금은 한국노동자운동연대로 바뀐 인천노동정책연구센터의 사무실에  엊혀 사무실을 개소하고 어떠한 일들을 해야할지 막연한 고민들과 이후 활동들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고 좌충우돌하고 그러던 때의 모습들이 지금의 아주 우숩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은 낳아졌다는 안도와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희망들이 보이기에 그렇겟죠.
 
정말 할 일이 없어 노정단 방의 거의 출근하다시피하던 때가 눈앞에 선하군요.


그때는 지금에 비해 나우누리 노정단CUG가 회원들간의 의사소통의 장으로 발돋음 하지 못할때라 저의 거의 매일 횡설수설에 가까운 글들로 도배가 되어졌던  기억이 이제는 과거 추억으로 가물가물 사라져 가고 있죠. 그때는 그리 할일도  많지않아 사무실에 오면 늘 통신과 씨름을 하면서 거의 아침 10시부터 새벽 2시 까지 통신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죠. 지금보면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지만 그때  저의 하루 일과는 통신으로 시작하여 통신으로 끝나는 그런 생활들 상근인지  아닌지도 거의 규명할 수 없을 정도로 사무실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죠.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감옥속에서 컴통신하면서 배고프면 밥먹고 심심하면 통신하는 그런 경지에 이룰정도로 일과에 있어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죠. 그때 정말 내자신이 운동을 하고 있는지도 매우 의심스러운 정도로 정말 무료하고도 따분한  하루 하루의 매일 반복되는 생활에 찌들여 갔죠.(지역에서 할 일이라는 자체가 없었던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조건과 지역에 있어서의 단체로서 자리매김이 되어지지 못한 상활이었죠. 그래서 늘 노동조합에 들어가면 퇴자맞기 일수였죠.)
 
정말 지난 일만 주어지면 일에 살고 일에 죽을 각오로 일을 열심히 하고 싶었죠.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였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사람들은 쉽게 돌아다니면 일이 생긴다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정말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조직적 일들을 만들어낸다는게 정말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쉽지만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늘 왜 우리는 이럴까? 하면서 하루에 한숨을 쉬지 않고 늘 쉬었죠. 휴~~~~~~~ 그래서 인천에 내려온지 한 4개월쯤 지나서 술에 찌들어 한 2달간 산적이 있습니다.

 

이게 뭐 운동이냐 이런거면 나 그냥 집에서 놀고 먹을 란다 하면서 투정도 많이 부리고 그리고 화도 많이 냈죠.  그때에 또 사람들이 하나둘씩 노정단을 떠나구요... 그래서 정말 무엇을 할지  깜깜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멍돌이가 된다는 기분들 정말 느껴보지 못하신 분들은 잘 모를꺼죠. 그래서 괜히 인천에 내려와서 일하는게 실수였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서울에 있었으면 그래도 이렇게 멍하니 시간축내지는 않을텐데 하는 생각에 잠겨서요....
 
그러던 어느날 실업극복 국민운동 인천본부라는 곳에서 연락이 오더라구요 엑셀로 실업자정보를 데이터 베이스화 할려는데 노정단 인천지부에서 도와 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이 들어왔죠. 정말 하늘에서 구세주가 내려와 우리를 구원해주는 구세주 나라는 생각에 전 잠시 머뭇걸임도 없이 그냥 달려가서 무작정 일을 도와주었죠.  그래서 조금조금씩 지역의 분들도 알고 차차 지역활동에 대한 여러 활동의 조언들을 많이 들었죠. 어찌보면 실업극복 국민운동 인천본부가 없었다면 아마도 전 지금 현재의 노정단이라는 공간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었죠. 그러면서 한층한층 나갔죠. 그러면서 조금조금씩 컴퓨터 조립법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답니다. 이리 저리 실업본부일로 현장을 방문하거나 몇몇분의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면서 아 직도 인천의 노동조합들은 386과 486 컴퓨터를 주로 사용하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천천히 노동조합을 방문면서 컴을 업그레이드, 노동조합 상임간부  교육 등 약간의 교육사업과 컴 조립을 하였죠... 그리고 배상훈 지부장님이 오시면서 사업은 날개에 닻을 달은듯이 훨훨 날아다녔죠. 정말 일때문에 정신이 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습니다. 그때의 희열이란 눈물이 나도록 기뻤죠... 히히^^

이렇듯 짧은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여러 잡스러운 생각들과 비애와 기쁨들이  교차하면서 작지만 그래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지부일드을 하였습니다.
 
아직도 나아가야 할 길은 머나 멀지만 그래도 자리매김 되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도전욕 그리고 더욱더 미약한 나에 대한 부족함들을 하나 둘 보충하면서 늘 정진할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들이 솟구칩니다.
 
그동안 저를 믿어주시고 늘 아껴주신 노정단 분들 마음이 아프거나 늘 힘들때면 한번도 거르지 않고 위로와 격려 그리고 늘 힌내라는 말들 그게 저에게는  정말 큰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운동이라는 것을 놓지않도록 만들어준 사랑의  매일 수돌 있구요. 종종 힘들다보면 사람들이 개인적 고민으로 치부하면서 책임성 없이 떠나버리는 그런 일들이 있는데... 노정단 분들은 그렇지 않도록 늘  곁에는 없었지만 늘 마음과 통신상으로 아껴주고 도닥겨려주어서 지금 제가  편안하게 노정단을 잠시 떠나 노동현장이라는 공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군요....
 
아마도 이런 노정단 모든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공장에 들어가는 것  조차 엄두고 못내고 중도에 포기하고 어디선가 그냥 내 안에 안주하면서 살아갔을 것 입니다. 늘 부족한 저에게 격려와 위로보다는 늘 따끔한 충를 해줄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늘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내일 결정이 날 것 같은데 아마 월요일 2월 21일 부터는 남동공단에서 공장노동자로 또다른 삶을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그날까지 저의  위치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욕심없이 서두르지 않으면서요.


돌아올때 더 큰 무엇인가를 얻기보다는 한 노동자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늘 변함 없이 살아가는 그런 모습으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떠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글을 횡설수설 막 섰군요.. 늘 충고부탁드립니다.)
 
인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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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등록일
    2004/08/06 18:57
  • 수정일
    2004/08/06 18:57

삶이라는 것들....

정말 삶이라는 말 그자체는 어찌보면 단순 할 수도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난 삶이라는 것이 주는 무게 그리고 삶의 목적이 부합되어졌을 때는 삶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는 새롭게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삶들이 천차만별로 다 다르겠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찌보면 공통분모가 많았을수도 적을 수도 있다.



운동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  어려운 일이다. 삶이라는 것이 단지 자신의 의지와 결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에 운동적 삶은 참 어렵다.
 
운동적 삶에 대해서는 내가 규정 내릴수 있는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삶의 깊이와 기간이 적기에 뭐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운동을 하면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논리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노동의 대가인 돈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돈이  없이 자본주의를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홀로 살아간다고 하여도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기본 생활조차도 누리지 못하는게 현실 아닌가. 그런데 결혼 그리고 자식들 그리고 자식이 성장과 함께 오는 교육과 부양적 책임을 다하면서 운동을 한다는 것 그건 아마 신이 아니고서야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면 아예 불가능 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활동가들이 자신의 이념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서 운동을 떠나는 것도 어찌보면 사상과 이념이라는 것에 대한 부재가아니라 삶이 주는 버거움이 버티기가 어려워 떠나는 것이지 않는지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단지 남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이니까.
 
또한 이러한 삶의 무게를 견딘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대부분  부인이 생계전반을 책임지는 형태라든지 아니면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이나 아니면 민주노총의 여러 산별조직의 상근자로 일을 하면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운동이라는 것 자체를 지탱할 수 있는 물건토대가 없다. 그래서 단체 활동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과거 정치조직활동을 하였을 때 민주노조 건설과 이땅의 전위적 혁명정당을 건설하자는 이념정당의 내용들이 남한운동을 뒤 엎었을때만 해도 운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지원(보투,,bt)이  선진노동자 학생 그리고 진보적 인텔리에 의해 잘 이루어졌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러한 지형이 아니다. 진보정당 또한 과거의 그런 이념정당도 아니고 선도투를 할 만한 세력 또한 이땅에 없다. 없는것이 아니라 사라진거겠지만, 있다고 해도 자신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골방에 앉아 책과 씨름만 하는 교조주의자들이 전부일 것이다.
 
이렇듯 삶의 무게에서 운동적 삶을 바라보았을 때, 운동적으로 삶을 지탱한다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운동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정정도의 운동권 같은 식구들의 공동체적 삶이 뒷받침되거나 돈이 많은 후원자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운동적 삶이라는 것 자체를 영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의. 식. 주 중에서 의.주 부분은 어찌 해 볼 수 있지만 식(食)을 해결하기 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노후때를 운동을 하면서 일정정도 설계해 놓아야 하는게 그러한 생각보다는 현실을 견디기에 더욱더 급급한 나머지 현실 오늘을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겁다. 그게 주는 무게는 정말 당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참으로 모르지만, 현재 나도 그러한 어려움에 대해 경험을 해보았거나 그러한 고민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고민하지는 못하였다. 현재는 그나마 버틸수 있다. 그러나 현재보다는 먼 미래가 아니 가까운 미래에 어찌 될지 아마도 모르는 것이기에 더욱더 불안하다.
 
운동적 삶이 주는 무게에서 이탈하지 않는 고민들을 천천히 해봐야 겠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돈걱정을 하면서 운동을 하는 상근자 특히 사무국장을 보면서 늘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전체가 같이 고민하면서 함께 재정적 어려움과 조직적 확장을 함께 도모하여야 하는데 그러한 위치에 있지 못하다고 해서 혼자만 쓱빠져있는 느낌이 들어 정말로 마음으로나마 미안함을 표시하고 싶다.

돈걱정 보다는 조직의 발전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고민들이 서로들 논의하고 합의하면서 상호보완적으로 같이 보충하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에서 어려움을 혼자만으로 고민하게끔 만들지 않도록(최소한의 돈문제 만큼은) 좀 도와주고 싶다.
 
조만간 공장에 들어갈 수 있을것 같다. 언제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동안 나의 고민도 더욱더 풍부히 만들어 무엇을 할지에 대한 구체적 고민들을 하고 나름대로 인생의 방향성에서 나의 삶적 운동과 운동에 대한 선택을 다시금 시간을 두고 하여야 겠다.
 
2년이란 시기는 나에게 새로운것들을 많이 줄거라 믿는다.

또한 내가 속한 노동정보화사업단은 언제나 내 운동의 징표고 나의 운동의 처음으로 자리매김 되어질 것이다. 어디가더라도 난 늘 노정단이 였다는 것에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

현시기 운동에 있어 노정단 운동이 비추어 지는 모습은 참  하찮게 보일 수 있으나 이 운동의 유의미성은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도 하며 이 새로운 운동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의미는 정말 큰 것 같다.
 
  인천 간장 오타맨이....
 
  P.S 진석아 훈련소 잘 있겠지, 연휴라 그런지 니가 더 보고 잡구나 니가 오면 말도 몇마디 하지 않았지.. 그러나 나도 할말이 별로 없더구나 니가 오면, 뭐 자신감의 결여에서 오는 것일 수도... 늘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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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다녀오면서...

  • 등록일
    2004/08/06 18:49
  • 수정일
    2004/08/06 18:49

아침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절에 다녀왔다....
네가 다니는 절은 그리 크지도 않은 비구니 스님이 있는 오산의 작은 절간이다. 살아 생전 어머님이 그리 잘 가시던 절간. 그래서 아마 나는 그절에 늘 가는지도 모르겠다.



형과 아버지가 있는곳이기도 하니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생활과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자주 찾아 뵙지 못한다.

그래서 늘 명절에만 찾아가 제사 지내는 일외에는 전혀 간적이 없다,  정말 무심하다고 생각 할 정도로....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와 형이라는 존재가 그러했다.  정말 늘 상상으로만 그리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커서 형과 아버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에는 난 우리 아버지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을때 형과 아버지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난 무지 섭했다.
늘 양부 밑에서 살다가 형과 아버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후 난 그들이 매우 미웠다... 그래도 한번 보고는 싶어했다.
그리고 지금 인천 부평지역에 고모라는 분이 살고 있다.

아버지가 죽었을때 한번 만나고 내가 인천에 내려와 몇번 가본 고모집 그런데 그들이 나의 피붙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전혀 낯설다 그들과의 만남이 적어서 그럴수도 있지만 그들에 대한 섭함과 어머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나의 가슴 한구석에 아직도 어려있어서 그런것 같다.
 
뭐 이야기를 하다보니 딴데로 빠졌군,,,, 흐흐

오늘 아버지와 형의 제사 정말 고맙다 난 돈이 없어서 제사를 어떻게 지낼까 고민했는데... 스님이 돈은 있으면 있는데로 없으면 연락이라도 하란다 늘 제사는 잘 모셔주겠다고... 돈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고맙게 느껴진다.. 스님이..   다만 자주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 듣고 가란다.

아직 돈도 못벌고 있는 걸로 스님은 알고 있어서인지 내가 직장에 잘 취직해서 다른 사람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살아생전의 어머니의 모습과도 같다.

그래서 정말 뭐라 그럴까 할말이 없다. 어머님의 뜻을 저버린 불효자 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 노동자 들을 위한 길. 그게 내가 살고 싶은 길이다. 참 그길은 어렵다. 버겁고..단지 할 수 있는 말은 최선을 다하고 닥친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이외에는....
 
오늘 새벽 절에 갔다 왔는데... 오산도 그전과 많이 다르게 확연히 달라져 있다. 매년 다르게 느껴진다. 오산이라는 곳도 도시화가 빨리 되어지고 있다. 사람도 그전에 비해 많아졌고 아파트라는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구... 그전의 절의 적막함과 고요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절아래서 보는 풍경은 정말 산속의 암자가 아닌 도시속의 작은 동산속의 작은 절... 도시의 하나의 공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오는 길도 많이 변해져 있었다. 그전에는 오산에 갈려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원에서 차를 타고 들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차들이 많아진 연휴에서도 그런것인지 모르겠지만 가는 방법도 예전에 비해 훨씬 수월해 졌다.
돈만 있으면 쉽게 갈수 있는 곳이다.
오늘 오면서 정말 나라는 놈이 무심한 놈이라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면서 사무실에 왔다. 올해는 아버지, 형의 생일이나마 절에게 풍성히 치루어 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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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버린 종로 거리....

  • 등록일
    2004/08/06 18:41
  • 수정일
    2004/08/06 18:41

이제는 거리로 바뀌어버린 종로....
사람들의 인파로 거리가 부산하더군요...
4월 5월의 종로의 풍경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죠...

저의 과거의 추억에 기인한 4월 5월의 종로의 거리는 늘 매퀘한 채루탄 가스 냄세가 연일 코를 진동하던 그때와 지금은 판이하게 다르더군요...



  늘 시위군중들에 의해 해방공간으로 자리매김하던 종로의 거리는 이제는 과거의 풍경으로 상상속에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는 지금의 모습...
  아마 깃발을 들고 군중들을 향해 해방이라는 말 하는 것 조차 힘들어진 요즘의 풍경은 아마 시위문화자체가 이제는 사라지는게 아닌가라는 두려움 또한 일게 하더군요...
 
  이제 종로의 거리는 시위군중들의 장소가 아닌것 같더군요...
 
  여러 연인, 사춘기소년/소녀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는 그런 공간으로 바뀌어버린 종로의 거리를 어제 우둑히 쳐다보면서 많은 회상이 교차하더군요...
 
  그래 나도 이세상에서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고 있는 놈이라는 생각 그래 미쳤도 단단히 미친놈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90년 종로의 거리에서 연일 외쳐되어던 소리는 나만의 소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치기가 두려워 떠난게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기위해 떠났으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미쳐지는 가 봅니다.
 
  지금은 미친짓 하는 이들이 하나둘 자신의 둥지로 떠나고 있더군요.
  언제 나의 미친짓은 끝난런지 저도 알 수 없지만 늘 미쳐서 지내고 싶더군요. 혼자가 아닌 여럿이 미쳐지내고  싶군요....
 
  p.s 92년 장마 종로에서 인가라는 정태춘 박은옥 노래테이프의 그런 소리들이 점점더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더군요...
      저도 집회보다는 주로 아는 이들을 만나러 종로바닥을 가고 있으니까요....
 
  인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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