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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도종환] 노래하는 시인, 시 쓰는 가객

  • 등록일
    2010/03/09 15:14
  • 수정일
    2010/03/09 15:14

노래하는 시인, 시 쓰는 가객
--- 정태춘 시집을 읽고

                                                                                                                                                               도 종 환

올 초에 동갑내기 몇이 내가 기거하는 보은의 산방에 모인 적이 있었다. 지난 해 여름부터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를 해 오다가 겨우 겨울이 깊어져서야 자리를 같이 했다.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정태춘이었다.


오후 늦게야 도착할 것 같다는 시인 곽아무개를 기다리며 판화가 이아무개와 나와 정태춘은 두부를 만드는 일을 함께 했다. 사실은 동네에 두부 잘 만드는 아주머니를 모셔다가 그분이 만드시고 우리는 가마솥에 불이나 때고 장작 패고 물이나 퍼 나르는 허드렛일을 했지만 두부 맛에 해 지는 줄도 몰랐다. 방금 만들어낸 따끈따끈한 두부를 큼지막하게 잘라 간장에 찍어먹기도 하고 노릇노릇하게 구워먹기도 하는 동안 배가 가득 차, 내가 차린 저녁상은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쉰내 나는 남자들끼리 모여 뭐 하려고 하느냐고 판화가 이아무개의 부인은 전화로 걱정 반 놀림 반인 말을 하며 웃었지만 그냥 만나서 밤새워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열심히 산 삶의 끝에서 느껴지는 허전함, 답답함의 실체는 무엇인지. 남들도 그런 건지 나만 그런지, 그냥 답답해서 터놓고 이야기라도 했으면 싶은 심정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밤 깊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장 말을 많이 한 건 정태춘이었다.
 

사람과 능력을 바르게 보고 평가하지 않는 예술판, 학벌에 따른 차별, 권력의 모순, 물신숭배에 빠진 자본주의의 허상, 고향마을을 밀고 들어오는 외세의 거대한 폭력, 그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천박한 세태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때는 이런 삶의 대열에서 이탈하고 싶어하기도 했다. 중간 중간 그는 시를 꺼내 큰 소리로 읽거나 그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정태춘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때론 위로하기도 하고 때론 대신 대답을 해 보기도 하고 걱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몸이 신통치 않은 내가 제일 먼저 자리에 눕고 나머지는 새벽닭이 울 때쯤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다 아는 것처럼 정태춘은 지난 8, 90년대 내내 한 번도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짓밟히고 빼앗기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노래해온 가수이다.
 

1989년 가을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공연을 통해 노래가 그저 노래에 그치지 않고 공연과 집회가 결합된 일종의 전투무로서의 새로운 공연양식을 창출해 내었으며, 그 공연과 함께 했던 수십만 참가자들의 가슴을 두드리던 북소리는 한 시대를 새롭게 열어 간 북소리였다. 그의 노래에는 현장성이 살아 있었고 리얼리티와 서정성이 함께 녹아 들어가 있었다. 음악성과 서사가 하나 되어 있고 감동이 있었다. 절망과 비극도 아름다움과 용기로 바꾸는 힘이 있었다.
 

그가 ‘일어나라 열사여’를 부르면 우리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경찰저지선을 향해 달려갔고, ‘우리들의 죽음’을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노래테이프로 들으며 불에 타 죽은 세 살 다섯 살 어린 남매가 불쌍하여 울었다.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우리가 방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안고 떨기 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바닥을 긁어대기 전에.....,”이런 부분에 이르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노래는 노래 이상이었다. 그의 노래는 시였고 깃발이었고 진혼의 나팔소리였다.
 

한 시대가 치열하였다가 쇠잔해지다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들 때도 ‘촛불’과 ‘떠나가는 배’와 ‘봉숭아’를 불렀다. 그의 노래는 힘이 있었고 아름다움이 있었고 위안과 즐거움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을 “야무진 칼 한 자루도 없이 / 로맨틱한 비장감도 없이 / 실현성 있는 대안도 없이” 불뚝성질만 부리는 ‘외로운 전사’라고 말한다. ‘슬픈 이탈자’, ‘끌려가는 이탈자’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오로지 경제 / 경쟁력 / 새해벽두부터 또 신자유주의의 구호를 외치’는 권력 때문이라고 한다. 물신을 숭배하는 사회와 물신숭배의 강고한 조직이 끝내 허물어 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요, 국가주의, 수구냉전주의, 약육강식의 생존양식, 변할 것 같지 않은 계급 격차, 그것들이 온존하길 바라는 야만의 질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광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 계속 저들의 행렬에 발을 맞추기 위해서 종종걸음을 치거나 / 저들과의 동질성으로 확인시키기 위해서 / 거짓말을 하거나, 모호하게 말하거나, 둘러대거나 / 가짜에 박수를 치거나 /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탈을 꿈꾸는데 이탈을 할 수 없게 된다해도 ‘행렬의 끄트머리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며’ ‘투덜대고 욕지거리하고, / 소리치고, 궁시렁거릴 거’라고 한다. 우리도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쳤기 때문에, 화가 나기 때문에 이젠 노래를 그만 부를 것인가. 만약 지구상에 내일 다시 광기의 전쟁이 터지고, 남북관계는 파탄에 이르며, 권력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빈부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자본의 물결이 우리 농촌을 휩쓸어 노동자와 농민들이 몸에 불을 지르고 죽어간다면 이탈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시 안 쓰고 그림 안 그려도 편안할 것인가. 행복한 개인이 되어 생의 변두리를 돌며 한가하게 구름이나 올려다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과 불화하며 거기서 다시 시를 쓰고 노래하게 될 것이다.

불화. 세상과의 불화.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해 자꾸 싸움을 걸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 싸움 걸고 싶어하는 마음, 그 도전의식, 권력에 대한 저항, 그 뚝심이 불화를 창조의 에네르기로 옮겨가게 한다. 지금껏 그래왔다. 그걸 잘 보여주는 시 중의 하나가 「양양 장 무쇠 낫」이다.

--아하, 조놈들 가져다 숫돌에다 그저 벅벅 갈아
날만 그저 잘 세우면, 시퍼렇게 그저 잘 세우면
광문 앞에다 걸어놓고 보기만 해도 좋것다
..................
묵직한 도끼날,
세상 못된 거 퍽퍽 찍어낼 만한 놈으로 골라
잘 생긴 놈으로 골라
부르는 대로 돈 쥐어주고 사온
저것들
저것들을 한번 써먹어야 할 건데
---「양양 장 무쇠 낫」중에서

한 번 써먹어 보고 싶어하는 이 도끼는 저돌성, 민중적 저항, 공격성의 등가물이다. 그러나 이 시는 공격성, 공격 심리의 직접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질박하면서도 힘이 있고 시대와 불화하고 불의에 저항하면서도 여유와 해학이 있다. 그게 이 시의 또 다른 힘이다. 민중적 삶이 있고, 뚝심이 있고, 토속적인 정취가 있고, 왁자지껄한 흥과 신명이 있고, 사설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있다. 정태춘 시와 노래의 힘도 바로 이런 힘과 연결되어 있다. 저항권력에 대한 넉넉한 믿음, 그러면서 “아, 도끼들고, 도끼들고.......”하다가 “(어쩔건데?)” 하고 묻는 여유, 한 템포 쉬어 갈 줄 아는 여유를 우리가 믿음직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고 보잘 것 없고 버림받은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 시심을 미더워 하는 것이다.

변두리 지방도로 언덕배기 휴게소
조그만 이삿짐 차가 쉬고 있는데
싸구려 찬장에 붙은
칼라 사진 한 장
아빠와 딸이 뽀뽀하는

그 사진 모쪼록 떨어지지 않기를,
이 이삿짐 차가 세상 끝까지 달려도
그 사진 떨어지지 않기를
---「시골 이삿짐 차」중에서

허름한 살림살이 가재도구 등을 싣고 가는 고물차를 바라보다 거기서 발견한 사진 한 장이 주는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우리도 피부 깊숙이 느낀다. 시인의 눈이 발견한 이런 따뜻함, 이런 따뜻함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는 정태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그저 무너지는 바다’, ‘벼랑의 바다’, ‘단애의 바다’가 아니라 저물면서도 빛나는 길을 찾고자 하는 물결이라고 생각한다. 지는 노을빛을 열정의 빛깔로 바꾸어 색칠하는 저녁하늘 같은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체게바라를 이야기하는「은재호씨」같은 시가 그 증거다.

그가 티토와 소련에 대해 참지 못하고 내뱉었던 비판들과
그 바탕의 순수한 혁명 열정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요?
무덥고 침침한 작업실에서
다시 한 불온서적을 보듯이 흥분하며
그의 영혼을 사랑했다오
위대한 영혼의 인간은
타인의 삶에 가슴 뛰는 영감을 훨훨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달으며
사무실 문을 잠그고
차를 몰고 큰길로 나왔다오
.................
이미 도시에서는 져버린 붉은 햇살을 아직도
넉넉하게 받아
그쪽 하늘을 훤히 반사하고 있는
거대한 구름 산을 보았다오
---「은재호씨」중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혁명에 몸을 던진 사람, 혁명의 좌절에 실망하지 않고, 혁명의 성취에 자만하지 않는 사람, 혁명의 과정에 목숨을 바쳤고 순수한 혁명의 열정으로 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슴 뛰는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 그 사람의 삶을 대하면서 아직도 뛰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그저 단순히 아나키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혁명가의 삶을 생각하며 팔뚝에서 묵직한 힘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위대한 영혼과 아름다운 죽음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하는 아나키즘은 어찌 보면 이상적인 삶과 사회에 대한 동경의 반어이기도 하다.

거기 가서 살았으면 싶더라는 거야
아래쪽 베트남에 붙어 있는 장족 자치구도 좋고,
북쪽의 내몽고 자치구도 좋고
설마 그 자치구 오지 깊숙이까지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는 못하겠지 싶어서 말야
.....................
거기 어디쯤
국가란 것도 없고, 정부란 것도 없고, 자본이나 그 하수인,
인간의 대표란 것들도 없는
그런
사람 세상이 있을 수 있지 않겠어?
---「노독일처」중에서

그가 숨막힌다고 말하는 야만의 문명, 물샐틈없는 사회조직과 획일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리도 늘 답답해하면서 산다. 인간을 지배하는 인간의 힘이 이렇게 강력했던 적이 없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 이탈하여 전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꿈을 꾼다. 국가주의, 전체주의, 획일주의처럼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어머니,
저 야만의 행렬은 해산돼야 해요
일사분란한 명령 체계와 조직도 해산되고
모두 개인으로 돌아가야 해요
가족으로
최소한의 자급 공동체 마을로 돌아가야 해요
---「어머니」중에서

그러나 그가 해체 뒤에 가야한다고 말하는 곳은 무정부주의의 밀실이라기보다 최소한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공동체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공동체는 지구상에 존재할까? 나는 그 날 정태춘의 시를 보며 라다크 이야기를 꺼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라다크에서 보았던 이상적인 공동체.
 

히말라야 북쪽 티베트 고원에 인접한 산맥에 자리 잡은 라다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보리와 밀농사를 지으며 경쟁과 탐욕과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800년 동안을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어머니 할머니에게 유순하고 다정하게 대하며, 아이들은 노인을 공경하고, 또래집단으로부터 격리되는 일이 없으며,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남성과 여성, 노인과 젊은이 사이의 차별이 없고, 삶의 질에 차이가 없다고 한다. 여성이 생활의 중심에 서 있고, 각자 다 공동체에서 자기 역할이 있으며, 높은 수준의 협력이 있고, 싸움과 범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고 밤에 혼자 걸어다닐 수 있으며, 술에 취한 뒤에도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일년에 여름 넉 달 동안 열심히 일해 의식주에 필요한 대부분을 마련하고 많은 여가가 주어지는 사회, 노동에는 유희가 따르며 결혼잔치를 2주간이나 계속하는 나라, 이야기와 음악이 있고 누구나 잘 먹고 건강하게 지내는 사회,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며 사는데, 자연자원을 주의 깊게 이용하되 모든 쓰레기는 재순환하기 때문에 쓰레기라는 것이 없는 사회.
 

정태춘이 살고 싶어하는 자급자족의 공동체도 이런 마을이 아닐까 싶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정태춘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그 동경과 기대의 눈빛을 깬 건 곽아무개의 말이었다. 거기도 미국 문화와 관광객의 지폐, 인도의 영화가 젊은이들을 도시로 몰려나가게 만들지 않았느냐는 지적이었다. 물론 그런 과정을 겪으며 다시 새로운 라다크를 만들어 가기 위한 그곳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내가 덧붙이는 말을 하긴 했지만 다른 담화 속에 라다크 이야기는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정태춘이나 내가 꿈꾸는 우리의 미래사회가 지구의 어느 곳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적인 일인가. 옛날부터 있어 왔다면 앞으로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노래하고 시를 써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세상, 그런 삶을 위해 우리가 지금까지 시를 쓰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려오지 않았는가. 우리가 다시 또 노래하고 시를 쓰고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지 않은가.

유협이 지은 고대 중국의 문학이론서 『문심조룡』에 보면 “시란 음악의 마음이요, 소리는 음악의 몸”이라는 말이 나온다. “음악의 몸은 소리이기 때문에 악관들은 악기를 조율해야만 했고, 음악의 마음은 시이기 때문에 시인들은 그 가사를 고쳐야 만 했던 것”이고 말하고 있다. 음악의 마음인 시를 지어 시의 몸을 찾아주고, 음악의 마음인 시에 소리를 갖게 해주어 노래가 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한 달란트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정태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요. 시를 쓰는 가객이다. 그의 노래말은 시 아닌 것이 없고, 그가 쓰는 시는 노래가 되어 사랑을 받는다. 이번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 중에도 노래가 되어 불려질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래가 되지 않고 그냥 시로 있는 것이 더 좋은 작품들도 참 많다.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의기소침하여 자리를 비운 무대 위에 아직도 순수한 열정을 품고 다니며,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길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이 부럽기 그지없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타인의 삶에 가슴 뛰는 영감을 훨훨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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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희덕] 그런 저녁이 있다

  • 등록일
    2010/03/07 16:11
  • 수정일
    2010/03/07 16:11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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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아저씨의 귀향

  • 등록일
    2010/03/07 16:04
  • 수정일
    2010/03/07 16:04

중국조선족 아저씨.... 1년이 넘게 건설현장의 체불임금으로 인하여 여러 상담소를 거쳤지만 번번히 해결되지 않아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법률원을 찾아 저희 센터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년이 넘게 걸린 상담.... 한국에서 법을 몰라 물어물어 간곳에서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무심코 집회장에서 도와달라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부탁을 하여 법률원에서 저희센터로 상담을 의뢰해서 지난달 14일 만나게 되었다. 

 

아내의 죽음에도 체불임금을 받지 못해 떠나지 못했다며 연실 눈시울에 눈물을 흘리는 아저씨....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코리아 드림을 꿈꾸었지만 돌아온것은 아내의 지병과 체불임금으로 황폐해진 몸덩어리.... 매일 쑤시는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아내의 지병을 걱정하며 열심히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내의 치료비를 벌기위해... 그리고 자식들의 학자금을 송금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업친데 덥친격이듯 아내는 병으로 쓰려져 아이들의 학자금을 송금하기는 커녕 학업을 중단시켰다. 6개월의 치료로 벌은 돈은 거의 탕진하였다. 그러나 더더욱 문제는 아저씨가 다녔던 회사가 공사 부채를 이기지 못하고 공사가 중단되면서 일거리가 없어지고, 체불임금이 발생하였다. 

 

작년 3월, 4월 밀린 임금 310만원.... 그리고 이 와중에 아내는 지병이 도져 중국에서 작년 4월 15일 사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자식들에게는 돈을 받으면 곧 돌아갈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며 다녔던 현장소장에게 애원을 하며 밀린 체불임금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장이 곧 준다는 말을 믿고 기다렸지만 소장은 이내 연락이 되지 않아 노동부에 진정을 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노동부에서 이리가라 저리가서 도움을 요청하다. 마지막 심정으로 민주노총 경기도본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돈을 못받으면 가지도 못하겠구나 하며, 이를 꽉물고 부인의 곁으로 갈 생각가지 가졌다며 연실 눈물을 흘리는 아저씨.... 아저씨가 가져온 쪽지와 내용을 잃고, 담당 근로감독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당근로감독관은 회사를 수소문하여 강원도 원주로 회사가 이전하였다며, 서울지방노동청 원주지청에 사건을 이감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4일을 기다리고 원주지청에 전화를 걸어 출석요구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5월 29일 원주지청에 함께 동행을 하여 근로감독관을 면담하였다. 아저씨는 온몸을 불불 떨면서 체불임금으로 기간 겪었던 이야기를 근로감독관에게 털어놓았다. 나에게 이야기하였던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야기 내내 눈에서는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근로감독관도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건에 대하여 꼭 받을 수 있도록 처리해주겠다며 아저씨를 위로하며, 좋은 소식을 기다리라며 아저씨를 위로해 주었다. 

 

한국에 와서 이렇게 고마운 말은 처음 듣는다며 연실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과 인사를 하는 아저씨의 모습.... 모든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심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몰라서 당하고, 이주민이라는 천대로 인해 마음을 술로 달래는 그/녀들은 오늘도 이 아저씨 처럼 상념과 마음의 고통을 간직하며 코리아에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오늘 아저씨가 밝은 얼굴로 왔다.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며 돈이 입금되었다며 드디어 치루지 못한 아내의 장례식을 치루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보낼 수 있게 됐다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다들 이렇게 해피엔딩만은 아니다. 

 

저번달 평화시장 수선공장에서 10년을 일한 필리핀 이주여성이 폐병을 얻어 그만 기숙사에서 사망하여 고국으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천안에서는 이주노동자 한분이 기계에 산재를 당해 사망하였다. 연실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지만 여전히 현실은 개선되기는 커녕 기계부품 하나가 없어진 것으로 치부된다. 

 

산재를 신청하더라도 위임장을 받는 것도 어렵기에 상담을 통하여 산재승인을 받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렇듯 우리의 이웃이며, 아시아 가족인 이주민은 한국에서 위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단지 꿈 나와 같지 않는 삶을 가족과 나라에 주기 위한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바램은 막다른 형태로 치닫지 않으면, 강제추방이라는 불안한 삶에 노출되어있다. 

 

지원을 한다거나 도움을 주는 곳, 쉼터를 제공하지만 근본적인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자유로운 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우리의 이웃이요 친구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함께해나가면서 차별를 극복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한국에서의 제도 개선은 이주민 지원단체만의 몫이 아닌 우리모두의 과제이며, 아시아로 다가가기 위한 한국사회의 발전모습이며 한국이 아시아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역할이다,

 

오늘 아저씨의 웃음으로 그나마 작은 기쁨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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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이주노동자의 눈물....

  • 등록일
    2010/03/04 16:59
  • 수정일
    2010/03/04 16:59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환송회를 해주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주해온 노동자에 대한 환송회를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 속해 있는 인도네시아 모임 대표를 위시한 회원들이 모여 조촐하게 진행하였다.

 

5년 기간의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의 모습에서 난 과거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해외 이국타향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제 그 환송회 자리 조촐하지만 의미깊은 자리였다.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는 떠나면서 남아있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에게 남기는 말을 하는 도중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말문이 막혀서 말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서글프고 힘든 한국 생활이었지만 정든 이들과 떠나는 자리인지라 격정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 짐작만 해본다.

 

이 인도세시아 이주노동자는 짤막하지만 의미 깊은 말을 우리에게 남겼다.

연수생 2년 동안 힘들었는데 불법취업하고 받은 첫월급 그리고 불법취업생활이 제일 기뻣다는 말...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고 연수생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지금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우린 곧 있으면 떠날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모습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참 마음이 아리고 쓰렸다.

말로만 노동비자 쟁취! 이주노동자 연수생제도 철폐! 를 외치지만 지금도 멀리 타국땅에서 설움과 기숙사에서 고된 노동에 지친 을 추수릴  많은 이주노동자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린다.

 

돈을 벌러왔다고는 하나 이국타향에서 받았을 설움이 얼마나 서글펐을까?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타박하거나 이주노동자라는 미명하에 취해졌을 노동착취와 억압은 어떠했으랴....

 

이곳 오산엔 용역회사를 나가면 중국, 카자흐스탄, 우스베키스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용역 일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들과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고 말이 많고, 이들이 용역일을 많이 해서 용역에서 한국 건설일용직노동자가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다고 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용역일은 대부분 한국 건설일용직노동자가 가지 않는 곳이다. 주로 공단지역에서 힘든 노동과 용역에서 가기를 꺼려하는 위험한 일에 그들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작 자신들이 가기꺼려하는 곳에서 힘든 노역을 하는 이들에게 힘은 주지 못할 망정,... 타국인이라 배척하는 우리내 모습에서 세상 각박함을 느낀다.

 

어제 이주노동자의 눈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20년전 아니 과거 수십년전 그리고 만주지역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고원에서 겪였을 고독이며,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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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이주민들과 지낸 사진들을 열어봅니다.

  • 등록일
    2010/03/04 12:30
  • 수정일
    2010/03/04 12:30

이주노동자, 이주민들과 지낸 사진들을 열어봅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고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주노동자 그/녀들과 보낸 시간들을 회상해 봅니다. 만남은 그리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와 인연을 맺게된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 입니다. 호소할 곳,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그/녀들은 친구의 소개로 아름아름 찾아왔습니다. 모든 센터가 그러할 것입니다.

 

임금체불, 산재, 폭행 등 한국에서 처한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에 도움을 청하고, 하소연하며, 억울함을 센터에 있는 저희들에게 이야기하고 해결에 실마리를 찾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과 올해도 어김없이 한해살이를 하였습니다.

 

많은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진출국하는 이의 환한 미소도 보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공장에서 강제단속으로 연행되어 강제출국한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 또한 많았습니다.

 

 

조촐한 환송회도 해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에게 미안함을 마음으로 나마 전해봅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떠나야 하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의 봅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보호소에서 죄수복을 입고 있어야 하는 그/녀들의 모습 그리고 한국에 체류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그/녀들의 떨리는 목소리로 환송을 하는 것이 저희 일상이었습니다.

 

 

이런 그/녀들.... 사진속에서는 한결같이 웃고 있습니다. 추억에 기대어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과 보낸 소중한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떠나야 하는 그/녀들.... 그러나 욕심이 과한 것인가요. 그/녀들과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만 시간은 무한하지 않았습니다.

 

유한한 시간속에서 그/녀들과 웃고 지낸 시간.....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 소통의 어려움으로 그/녀들과 잦은 다툼도 있었으나 그/녀들은 한결같이 맑고, 순수하였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해 하소연하였고, 부모님이 아프면 같이 아파했고, 기쁠때 마음껏 웃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도, 친구가 죽어도, 아이가 아파도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은 하루면 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그/녀들의 몸은 개인이 아닌 가족을 부양해 하는 기계이며, 가족의 미래를 짊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사망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이주노동자, 아이가 아파서 야후 인터넷 메신져로 하염없이 걱정하며 사랑한다는 목소리를 아이와 아이를 부양하는 친지에게 이야기하는 그/녀들이 한 없이 덧없게 느껴질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이 왜 이렇까지 하며 한국에 체류해야 하는지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주운동을 하면서 이주한 이주노동자, 이주여성의 삶의 단면을 접하면서 이주한 그/녀들의 삶을 보았답니다. 더 나은 세상, 미래를 꿈꾸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웠듯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또한 코리안 드림을 꿈꿔왔습니다.

 

코리안 드림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들이 브로커에 속아 막대한 빛을 지고 한국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고용허가제, 산업연수생이 아닌 관광비자 3개월, 6개월짜리를 받고 들어온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고용정책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브로커에 속아 한국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강제출국되는 이도 있습니다. 관광비자의 가격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중국과 태국의 경우 다른 나라에 비해 그 횡포가 심각합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들어온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그/녀들이 자주는 아니지만 어려울때나 고민스러울때 고국에서 큰 일이 있을때 찾아와 마음을 가다듬고 갑니다.

 

 

그래서 저녁이면 기쁠때도 있었지만 마음을 쓸어내릴 때도 많았습니다. 이런 그/녀들과 웃고 지낸지도 언 5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함께한다기 보다 많이 배울 수 있고, 그/녀들의 삶에서 우리 아버님들의 고충을 잠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우리 또한 이주노동을 하였지만 급속한 경제성장은 우리사회는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센터에서 함께하면서 그/녀들에게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 센터는 한가족 같이 그.녀들이 언제나 방문하고 쉬고, 기대고, 외로움을 달래고, 어려움을 풀거나 함께 기뻐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녁 늦은 시간에 간혹 오는 그/녀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거나 살아가는 이야기.... 술한잔 기울이고, 웃고 떠드는 것이 참 행복하게 다가왔습니다. 함께 있기에 고된 노동을 잠시 잊고 고국의 소식을 접하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참 정겨웠습니다. 행복하였습니다.  

 

저녁이면 몇 안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인근에서 아름아름 와서 인터넷을 보며 자국의 소식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공간.... 그 속에 제가 함께 있었고, 많은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그/녀들이 함께하였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 사진속에 웃고만 있네요.

 

이주노동자, 이주여성을 회상해 봅니다.

 

다들 잘지내고 있는지.... 전화해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저는 정작 함께 있어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함께하였기에 고마웠다고..... 당신들이 있어주었기에 내가 세상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었고, 마음이 풍요롭고 정작 행복하였다고,,,, 늘 걱정해주고 안부를 물어주는 그/녀들....

 

 

베트남 이주노동자 라이쾅 타오 화성 건설현장에서 반장의 횡포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3년을 해메이다 우리와 만나서 눈치료를 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간 그..... 억울함은 해소되었지만 눈에 상처는 치료하지 못한 그... 그러나 마지막 돈을 벌어서 비행기표를 사서 출국한 타오씨..... 새벽 베트남 쌀국수를 끓어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갔습니다.

 

카자흐스탄 자나라씨... 아이가 아파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아파서 근심이 많았습니다, 출국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으나 이전 사업장에 임금을 주지 않아서 출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빨리 임금체불 건이 근로감독관의 노력으로 일찍 끝나 출국하였습니다. 출국당일 인천공항에서 센터에 찾아오지 못하여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행복하게 살라는 당부.... 더 이상 한국에 가족과 떨어져 살지말라는 이야기를 하였던 기억....

 

케냐의 페리씨.... 2008년 다솜공동체 후원의 밤에서 잠보 춤을 추면서 이주노동자, 지역주민을 흥겁게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을 하였지만 그래도 안정을 취하고 고향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그러하지만 외로움, 두려움,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배운 술과 담배가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삶을 갉아 먹거나 몸을 망가트립니다. 그래서 안타까울때가 많습니다. 상처를 치유할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이주노동자 그/녀들을 상처를 만들고 확대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린 페리씨가 지금 케냐에서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늘 수줍어 했는데....

 

 

올해 6월 전화로 형 집에 가요....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여자친구와 결혼할 거에요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갔습니다.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늘 어려울때면 함께 있어주었는데.... 스리랑카 헤러드가 보고싶네요.  초기 스리랑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던 이주노동자입니다.

스리랑카 친구들은 대부분 헤러드가 있었기 때문에 왔고, 헤러드는 회사에 있는 할아버지에 의해 잔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먼 타향에서 온 헤러드가 돈을 벌고 건강히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어려운 일과 힘든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님들 처럼 중동의 열사 땅에서 힘들게 일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에 헤러드가 건강히 돈을 벌어 고국에 가기를 바램하며 잔업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헤러드는 잔업을 하여 고국에 돈을 많이 보내는 것을 원하였습니다.

이런 헤러드가 이제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자진출국을 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 봅니다.

 

몽골 오트후.... 잉크, 오트후, 바이라 3인은 임금체불과 바이라 상해건으로 상담을 맞게 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바이라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여 팔, 등, 어깨를 180바늘 꼬메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병원비가 없어서 난처했습니다.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경찰에 붙잡혀서 병원비를 낼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화성 보건소에서 화성이주노동자 의료지원을 받아 병원비 전액을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 바이라가 다쳐 병원에 갔을때.... 살아 있는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바이라 또한 한국의 고용체류 3아웃제도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어 강제출국 당했다는 소식을 잉흐에게 들었습니다.

 

오트후는 다른 남자와 가출을 하여 술에 쪄들었는데.... 잉흐에게 지금 들었더니 부인과 재회하여 울반바토르에서 조그마한 가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네요. 잉흐 빼놓고는 사업장의 상습적 임금체불, 폐업으로 3아웃되어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오트후, 바이라는 2년의 한국생활을 하고 강제출국당하였습니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참 냉혹합니다.

 

늘 저녁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센터에서 있습니다. 서류정리와 일도 있지만 이주노동자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고 삶을 나누는 것이 참 정겹게 다가옵니다. 이런 설레인 만남은 다른 곳에서는 없었던 것이라 매우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별과 만남이 번갈아가는 센터생활이지만 그래도 인연은 이어지겠지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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