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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쁜 날이다.

  • 등록일
    2005/05/05 23:15
  • 수정일
    2005/05/05 23:15
아침 5월 3일 이주노동자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어린이 날 행사라 전교조 오산지회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공부방 아이들이 참석하여 점심을 식사겸 어린이 날 축하 행사를 구경하기 위하여 오산대학에 갔다.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는지... 뛰어놀기에 여념이 없다. 이전 철거지역 아이들과 서울교대 총학생회에서 개최한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하고 언 10년이 넘은 세월 흘러보내고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해 본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 그리고 공부방에 있을때와 다르게 해맑은 웃음을 짖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보기 좋게 맑은 웃음이 잔잔히 온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날씨도 좋구... 흐른 날에 소나무 가루가 바람에 흩날려 혹시 황사현상이 아닌가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켰지만.... 잔디밭에 아이들과 함께 뛰어노는 학부용들을 보면서 세삼 부러움을 느껴보았다. 어린이 날은 나와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렇게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청동에 상황을 점검하러 수청동 철대위로 오후 4시경에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이전과 다르게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곳에 내려 상황들을 지켜보았다. 전경들이 입구에 즐비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용역반원 비스무리한 사람들(알고보니 화성경찰서 수사계 형사들이었다.) 꼭 진압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촉각을 세우고 그 곳의 상황을 예의주시하였다. 그리고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는 깍두기들도 보았다. 오늘 진입을 시도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다급히 핸드폰으로 이 상황을 센터에 알리고, 비대위 상황실장은 이 상황에 대하여 비대위 참여단체들에게 알리기 위해 분주하다. 전경은 대나무를 치켜세워 만들어놓은 그물망을 들고 폴리스라인을 걷어내고 들어갔다. 그리고 수청동철대위 농성자들이 일제히 진입저지를 위한 응사를 하였다. 그래도 여념없이 전경은 준비하여 가져온 콘테이너와 핸드볼 골대와 같은 감시용 초소를 들이밀고 앞으로 들어간다. 수청동철대위분들은 쉼없이 그들의 대응에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응사를 가한다. 경찰은 수청동철대위의 응상에 쫄았는지... 움추리며 일제히 방패와 그물망을 세우며 그들의 응사를 저지한다. 그리고 한 1시간이 흘렀을까? 콘테이너 초소가 설치가 마무리 되고 가져온 핸드폰 골대 모양의 투명 감시초소가 설치되자 밖으로 나간다. 소화기와 방패를 들이밀려 벌어졌던 1시간 가량의 상황은 긴장 그자체이다. 이전 그리고 깍두기인 용역반원과의 실랑이.... 수청동철대위 상황에 아랑곳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죽었다는 것을 부각하며 비대위에서 나온 우리에게 입에 담지 못한 말을 하며 연실 시비를 걸어온다. 나 또한 똑같이 응수를 하였다. 그리고 10분간의 말싸움이 끝난후 수청동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중간정도 되었을때 현장에 나온 인천일보 기자로부터 오늘 진입은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안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박한 상황이다. 오늘 혹시나 또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쩌나 초조함이 들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일단은 안심하였다. 사태가 끝난후 전철연 조합원들이 나와 어제 화성경찰서와 국가인권위 조사관 대동하여 구두로 합의(국가인권위에서는 사문화를 요구하였지만 화성경찰서장이 이를 거부하여... 화성경찰서장 직권으로 매일 20리터 물통 10개 기초생필품 반입을 하기로 하였다.)한 내용으로 물품을 넣어주기 위해 봉고차에 한가득 기초생필품을 집어 넣기 위하여 왔다. 전철연 연사국장은 상황을 들은 후 물과 기초생필품 반입을 위하여 경찰과 협의를 시작한다. 경찰은 어제 물건이 들어갔으니 옷들은 못들어간다고 하여 들여보내지 못하고, 물 10통 건어물과 짱아치, 고기 쌀 20킬로그램 2포를 전달해 주었다. 그 건물 앞까지 물을 건네주었는데, 참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을 그 건물 안쪽에 가서야 다시금 확인하였다. 그래도 그분들의 투쟁하는 모습은 일정 안정이 되어 안심하고, 고기를 넣게하고는 그래도 기분좋게 돌아섰다. 매일 물건반입이 가능해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국가인권위의 진정서를 제출하여 기초생필품 반입이 일정정도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5월 3일 무차별 폭력과 관련하여 여론을 전개한다. 이제 오산시민들에게 현재 상황을 올바로 알려내고 이 문제는 주택공사가 추진하는 주거정책에서 기인한 필연적 상황임을 호소하기 위한 작은 촛불을 또 적은 수가 들고자 한다. 이 사안의 문제를 이제 오산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관건이다. 수청동을 시발로 오산시 주변이 주공에 의한 주택사업이 시행될 것이기에 지금의 대응이 이후 오산시에 벌어질 주택정책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센터로 돌아왔다. 비가 내려 옷가지가 젖고 땀도 흘린터라 간만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식사를 하고 뉴스를 본다. 수청동의 긴장된 상황은 아무곳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오늘 어린이 날이라는 보도가 모든 언론을 도배하였다. 그래 그렇지 생각하고 맥주한잔 하면서 긴장된 순간을 털어버렸다. 9시 넘어서 이주노동자 회의.... 어떻게 이후 활동을 지역에서 전개할 것인가? 대략적 이후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앞으로 일정이 중요할 것 같다. 오후 10시 40분이 되어서야 어린이 날 나의 일은 일단 끝났다. 그리고 지금 그 흔적을 끄적여 본다. 내일도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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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 등록일
    2005/05/05 01:08
  • 수정일
    2005/05/05 01:08
2000년 06월 29일 16시 48분 24초 정말 간만에 고향집을 찾아갔더니 정말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고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고향은 나의 추억이 세긴 그런 아련한 공간을 모두 지워버렸더군요. 그렇게도 무성하던 산은 목장으로 바뀌어 있고, 내가 뛰놀던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거의 사람들의 인적이 뛰문 그런 음산한 곳으로 변해있더군요. 정말 오랫동안 찾아가보지 않은 그런 나의 고향이라는 곳은 정말 세월의 흔적을 다 잊어버린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나마 시골의 5일장이 폐쇄되지 않아 그 시골장터의 풍성함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이더군요. 기대를 하고 내려간 시골.... 그곳엔 벗들도 그리고 시골 어르신도 또 부모님도 없는 그런 그냥 시골의 한마을로 바뀌었다는게 요즘 저를 서글프게 하더군요. 시골에 내려가 그동안 힘들었던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고자 하였는데.... 나에게 있어 소중한 것들이 모두다 떠나버린 시골은 이제 나이 많이 드신 문중어른 몇분만이 농사를 짖고 있는 그런 아주 인적이 드문 그런 곳이 되어버렸더군요.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도 있더군요. 내가 살던 시골집 누가 그렇게 정성스레 관리를 해주어서 내가 그곳에서 살았을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더군요. 또 무성히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라도 하듯 하늘높이 치솟은 감나무와 땡자나무 나보다 키가 작던 탱자나무도 어느세 키가 훌쩍 커버렸더군요. 정말 그나마 내가 살던 집이라도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시골의 넉넉함이라도 위안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흔하디 흔한 농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인지 시골 어르신들의 농사일은 더욱 힘들게 보이더군요. 나이가 많이 들어 밭농사일만 하면 허리와 다리가 쑤신다던 당숙의 말을 듣고나서야 농촌에서 도시로 떠난 친구들이 생각이 나더군요. 열심히 일해도 남는것 하나 없는 그런 농사일 그래도 그게 천직인줄 알고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더군요. 돈이 많아서 도시의 사람들 처럼 공부라도 할 수 있었으면.. 아마도 지금 여름의 때앗볕 아래서 그리 힘들게 일하지 않을텐데... 도시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펜대를 굴리면서 밀려오는 낮잠도 자고, 어제 먹은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사우나 땅에서 땡땡이를 치면서 다른 도시의 그나이의 사람들 처럼 넉넉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그나이에 아직도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죄스러움들이 들더군요. 난 단지 나의 그런 안위만 생각하고 시골에 내려와 그냥 빈둥빈둥 놀생각만 했다는게 정말 미안하더군요. 미안함을 너머 정말 죄스럽더군요. 난 대학교때 농활은 가봤지만 시골일은 정작 도와주지도 못했다는 그런 죄스런 마음이 들더군요. 나의 주변 사람도 챙기지 못하면서 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그런 발상 자체를 했다는게 못내 저를 괘심한 놈으로 만들지 않을까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도 들더군요. 정말 삶이라는 작지만 큰 의미들을 배울 수 있었던 계기인것 같습니다. 자신을 보기전에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말을 사람들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제자리가 어디인지 좀 알 것 같습니다. 못내 미안해 그냥 일주일 동안 있다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온게 지금도 후회스럽 군요. 올 여름 추구의 기쁨을 고향에서 친지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땀의 진정한 의미를 일이라는 걸 통해 조금히 나마 알 수 있었으나 그 의미도 또 지나는 시간과 함꼐 잊어버리지 않게 늘 정진하여야 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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