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한겨레21은 왜 전철연을 죽이려 하는가?

  • 등록일
    2005/05/07 15:57
  • 수정일
    2005/05/07 15:57

* 간장 오타맨...님의 [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에 관련된 글.

한겨레21은 왜 수청동 사건의 글에 대한 보도를 통해 전철연을 죽이려 하는가? 글의 일방성에서 서슬퍼런 독기를 느낀다. 현재 전철연, 전철협, 주거연합이라는 진영의 철거민 대책활동에 대해 한쪽을 마치 죽이기 위한 의도가 서려 있는 듯한 독기를 느끼는 글이다.

 

전철연과 함께하는 철거민들이 왜 전철연의 그 투쟁을 전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이해는 커녕 전철연을 마치 전위조직으로 매도하여 대중으로 부터의 고립을 시키기 위한 시도라는 적기를 느끼게 한다.

 

왜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주거권과 그리고 잘못되어 있는 주택공사와 토지공사의 주거정책에 반하여 투쟁하면 안되는 것인가?

이 글을 보면 노동조합 운동 또한 강성이면 문제가 된다는 식의 오보는 철거민의 본질적인 투쟁을 왜곡하는 것을 넘어 현재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국철거민연합이라는 단체에 대한 일방적 매도로 이어지는 것 같아 글을 읽으면서 한겨레21 기자의 생각이 사뭇 궁금해 진다.

 

내가 본 서철연 그리고 전철연 내가 철거투쟁에 결합하게 된 것은 학생시절 당시 서철연(서울지역철거민연합)이라는 단체와 신내동, 종암동에서 함께 투쟁을 하였고, 금호동, 전농동 철대위 등 지역에서 후배들과 함께 투쟁을 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1999년 인천 송림동에서 전철연과 함께 투쟁이 마지막이다. 지금 수청동철대위 투쟁으로 다시금 전철연이라는 단체와 만나게 되었다.

 

기자는 전위조직이라고 칭하고 그들의 투쟁이 왜 강성이며, 비타협적이고 일방주의를 갖는다고 매도한다. 그러나 철거탑을 세우고 그 투쟁을 전개하는 입장에서 그 철거탑은 골리앗이라 불린다. 철거민의 마지막 투쟁의 거점이다. 이 과정은 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가? 철거민에게 있어 주거지역은 주거권 확보에 있어서 중요하다. 지역을 점유하고 있지 못한다면 철거투쟁은 거의 끝났다고 보는 것이 맞다. 주거연합은 이전 철거용역이 들어오면 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환대를 하였다. 주거연합이라는 조직이 바라는 것은 전철연이 바라는 가수용단지와 영구임대아파트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주비를 더 받기 위한 보상투쟁이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연합의 투쟁전술에 반대하여 진행한 서철연은 비타협 투쟁으로 서울지역 돈암지구에 가수용단지와 영구임대아파트라는 주거권을 쟁취하였다. 이 서막은 잘못된 주거정책에 대한 철거민의 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고, 전철연 전신인 서철연은 이 투쟁을 자신의 주요한 투쟁으로 세워나갔다. 철거지역에 있어서 협상이라는 것은 주거권을 쟁취하는 투쟁이 아니라 협상으로 이주비 몇푼을 받아내는 전술임을 수많은 철대위 사례에서 전철연은 잘 알고 있다. 내가 결합한 신내동 또한 마지막 협상을 통해 이주비를 받고 나가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전철연은 이러한 무수한 현장에서 많은 철거민의 벗이요 투쟁의 구심이 되기까지 눈물 흘리는 날들을 보냈다. 철거용역으로부터 당하는 서러움 보다는 이주비 몇푼에 철거민 대책위 위원장이 도망가벼려 철거투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철거대책위가 와해되는 경험을 많이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몇곳의 철대위를 결합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사례가 서철연 있을 당시 비일비재하게 나왔다. 그리고 주거연합이 망쳐놓은 철거투쟁에 대하여 서철연을 찾아온 철거민에게 따뜻히 환대하며 그 당사자들이 투쟁의 의지가 꺽이지 않았다면 끝까지 투쟁을 책임지는 활동을 전개하였던 조직이다.

 

세월이 흘러 어떻게 변하였는지 알수는 없지만,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전철연은 몇푼의 협상안을 만들기 위해 저열한 투쟁을 한 조직은 아니다. 전철협이라는 조직 그 자체가 철거민 투쟁에 대하여 철거민들의 마지막 투쟁을 협상이라는 것을 통해 몇푼의 이주비를 받아내기 위해 만들어 가는 것이 있으면 있었지, 전철연이 그러한 협상을 통해 주공이나 민간아파트 건설업체에 구걸이나 보상따위의 협상카드를 드리미는 행위를 하였다면 아마도 철거대책위원회 조합원 중심으로 일심단결하는 전철연은 아마 조직하기 힘들 것이다.

 

전철연이 1천만원 넘는 골리앗을 세운다. 이 비용에 대해 의구심을 이야기 한다. 이 비용 여전히 그/녀들은 철거민들의 조합비와 그리고 자체 연대사업(대학 축제 연대주점을 통해 수익금을 낸다. 일정정도 투쟁의 기금은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있다.)으로 충당하고, 자체 조합원들의 품앗씨와 연대로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회계와 투쟁지원에 있어서 나름데로 원칙을 지켜가면서 사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전철연에게 혐의를 쒸우며 카더라 통신을 드리밀며 제보자 앞세워 가며 카더라 사례가 있다는 것은 일방주의적 보도라 할 수 있다.

 

조중동에서 볼만한 글을 한겨레21이라는 기사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 참으로 갑갑하다. 그래서 한겨레 너 마저라는 말보다 한겨레는 이제 제2의 창간은 기성언론으로서의 도약이라는 점... 그리고 지금 참여정부의 섹션지로서 보도의 포커스를 맞추는 점에 있어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다. 그래서 난 한겨레에 대한 애정을 끊는다. 한겨레 21일을 2년전까지 매일 구독하면서 남한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소식을 접한 나로서는 이 기사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사실보도라는 전제하에 편집실을 거쳐 기자의 기사가 송고되어 특집기사로 다루어졌겠지만.... 내가 서철연에서 철거용역의 투쟁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 전철연 조합원들의 마음... 철거민은 왜 강철이 되어야 하는가?를 바라본다면 삶의 벼랑끝에 내몰려 보지 못한 사람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 분들이 처한 상황이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기사를 써냈으면 한다.

 

그/녀들의 가슴 쓰림..... 말로한다면 내 짧은 경험이지만 책 한권을 족히 쓸 수 있는 분량이다. 아이들 눈망울 합의로 위원장이 도망가 철대위가 무너질때... 투쟁할 동력이 없어 스스로 철대위를 포기하고 이주비 몇푼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때 느끼는 철거민과 연대단위의 투쟁에 대한 마음은 헤아리고 있는지... 왜 연대단위 학생들이 폐 타이어를 치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구속을 각오한 철거투쟁에 결합하였는지... 시민단체.... 그들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결합할 수 있지만 철거민들에게 당장 동지가 필요한 상황은 알고나 있는지... 이렇듯 철거민들은 이땅의 철거민으로서 철거민을 넘어 바닥 노동자로서 스스로 투쟁 속에서 각인되고 강철로 단련되어왔다. 이에 전철연은 자신의 투쟁 즉, 정권의 잘못된 주거정책과 맞서 당당히 투쟁하는 조직이다. 그들은 폄하 받을 만큼 약삭바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늘 교도소를 오고가며 주거정책의 공공성을 외치는 그들이 왜 이렇게 질타를 받아야 하는가? 그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기에...

 

다른 사람들은 말지에 이은 한겨레21의 전철연 죽이기 위한 도발이라 본다. 내가 바라본 전철연 아니 서철연을 이어받은 전철연 그/녀들은 그런 사람들 아니다. 내가 지금 비대위에 결합하여 내가 속한 오산노동자문화센터가 전철연과 함께하는 것은 철거민의 주거권 쟁취가 이땅에서 정당한 권리이며, 잘못된 주거정책에 대해 올바르게 매김될 계기이기에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녀들은 한겨레 21 기자와 기자에게 제보한 제보자의 말처럼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다. 나는 확신한다. 아마 전철연이 이런 일을 하였다면 전철연 소속되었던 철대위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주공이나 민간업체와 결탁하고 철대위를 무너트린 것이 포함된다면 몰라도.... 기자에게 바라본 것 처럼 수청동 철대위 올라간 사람들에겐 강경과 온건이라는 말로 치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주거권이라는 자신의 생존권에서 벼랑끝에 내몰려 보고 말하라 그리고 누가 자신의 처한 권리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는가를 주지해 주었으면 한다. 그/녀들에게 어떠한 이론과 어떠한 보도가 제보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순수한 사람들의 입에서 욕이 나오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정확히 직시하기 바란다. 언론이라 함은 객관성이어야 하지 않던가? 왜 수청동 투쟁을 통해 붉어진 전철연 투쟁에서 전철연 당사자의 내용은 없던가? 왜 죽이기를 각오한 기사로 그/녀들의 투쟁을 폄하하는지 난 도저히 납득이 안간다.

 

네 공간에서 넋두리나 한다.

전철연이 철거민을 노동자라 말하며 계급운동세력으로 내세우는 것이 정녕 잘못된 일인가? 그/녀들 철거민 이전 이땅의 밑바닥 노동자들이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 등록일
    2005/05/07 15:21
  • 수정일
    2005/05/07 15:21
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서 내려 3215번 지선버스를 타면 10분이 채 못 돼 서울 전농 SK아파트에 닿는다.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20m쯤 걷다 왼쪽으로 마주치는 가파른 계단을 기준으로 위쪽 201~203동은 임대아파트, 아래쪽 101~116동은 분양아파트다. 젊은 사람들이 돈 벌러 떠나 텅 빈 대낮의 임대아파트는 코흘리개 손자·손녀의 손을 잡고 오가는 노인들의 헛기침 소리만 들릴 뿐 평온했다. ‘주거권’ 아닌 ‘계급적’시각에서 접근 8년 전 이곳에서 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철거민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1997년 7월25일, 서울 동대문구 ‘전농3동 전농4재개발구역’ 철거민들은 악명 높았던 철거용역업체 ‘적준’과 마지막 대결을 벌였다. 이날 오후 6시께 주민들이 “적준의 침탈을 막기 위해 만든” 고공 망루 ‘골리앗’에 불이 붙었다. 박씨 등 전국철거민연합 소속 주민 10명이 열기를 이기지 못해 10m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을 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바닥에 부딪쳐 ‘뇌사’ 상태에 빠진 박씨는 이튿날 숨을 거뒀다. 201동을 빙 돌아 후문으로 향하니 “여기 자본의 수탈, 관료들의 억압에 온몸으로 맞선 당당한 여인이 있었습니다”라고 쓰인 추모비가 남아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을 전한다. 지난 4월16일 새벽, 경기 오산시 수청동 세교택지개발지구 안에 있는 4층짜리 우성그린빌라 옥상에 또 하나의 ‘골리앗’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어, 저게 뭐지?” 철거민들에게 허를 찔린 철거용역들은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옥상 진입을 시도했다. 화염병과 골프공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철거작업을 벌이던 이아무개(26)씨가 화염병을 맞고 불에 타 숨졌다. 전국철거민연합 간부 성아무개(39)씨가 “내가 화염병을 던졌다”며 자수해 살인 혐의로 4월26일 구속됐지만, 모두 집주인으로 알려진 철거민 8가구 10여명은 농성을 풀지 않고 벼랑 끝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1987년 이후 도시 철거민의 가열찬 투쟁 속에는 늘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옛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이 있었다. 이들은 “철거민은 곧 노동자”라는 명제 아래 철거민 문제를 단순한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로 보지 않고, ‘계급적’인 시각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철거 뒤 주민들이 자유롭게 들어가 살 수 있는 영구임대아파트 수준의 싼 집과, 그 집을 지을 때까지 주민들이 임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가이주단지 제공’ 등이다. 남경남 전철연 의장은 “철거민 운동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주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며 “희생 속에서 운동이 발전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철연쪽은 그동안 “우리와 함께 투쟁해 50곳이 넘는 지역에서 공증된 문서로 요구사항을 관철해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민중진영 내부나 다른 철거민 단체들은 “전철연의 과격한 구호가 단지 구호로만 남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22일 전국철거민협의회 중앙회(전철협)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철연과 같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은 더 이상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호승 전철협 지도위원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으로 철거용역 회사에 돌아가는 용역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며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든다”고 말했다. 80년대 논리와 관성 바꾸지 않았다 폭력 대결도 불사하는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지도부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현재 전철연은 남경남(51) 의장, 고천만(47·구속) 부의장, 양해동(59) 집행위원장 등 3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전철연에 몸담았던 철거민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들은 모두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철거운동에 뛰어든 지역 철대위원장 출신으로,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의 전성기를 이끈 철거운동 1세대와 김수현 청와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기획운영실장 등 이른바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에게 교육을 받고 10년 넘게 전철연을 이끌어왔다. 1세대 운동가들은 운동을 접었거나 ‘주거권 실현을 위한 전국연합’(주거연합) 등 다른 운동단체나 학계로 진출했다. 남경남 의장은 경기 수지 풍덕지구 세입자대책위원회 위원장 출신으로 1991년 철거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경기도철거민협의회 의장으로 발돋움한 뒤, 1994년 만들어진 전철연 의장이 됐다. 부의장 고천만씨는 경기 용인구갈 세입자대책위원장 출신으로 남경남씨와 함께 경철협 부의장을 지냈다.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양해동(그는 몸이 아파 활동을 잠시 중단한 상태다)씨는 서울 청량리1동 철거민 출신으로 1989년 길거리에서 서울시철거민협의회 유인물 한장을 우연히 집어들면서 빈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한다. 그는 청계천 노점상 출신으로 민주노동당 후보로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2번이나 출마한 양연수씨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전국빈민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란히 1999년 경기 수원 권선4지구 사제총 사용 사건과 구리 최촌마을 화염병 투척 사건 등으로 한두 차례씩 옥고를 치렀다. 이들을 잘 아는 옛 동지들은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를 이끌던 1세대 활동가들이 빠져나간 뒤 아직도 80년대 운동 논리와 관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운동의 주체세력이 바뀌면서 서철협을 이끌었던 활동가들에게 교육받았던 논리와 투쟁 방법을 발전적으로 해체해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2002년 8~9월 <말>의 보도로 전철연 중앙이 지역 철거민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를 장악하기 위해 저지른 ‘악행’이 폭로되고, 돈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또는 ‘확인하기 힘든’) 추문들이 겹치면서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철연은 그야말로 수많은 사건·사고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들만 꼽아도 △1996년 신연숙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7년 민병일씨 폭행 사망·박순덕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9년 수원 권선4지구 사제총 사용 △2000년 민주당 화염방사기 난입 △2003년 서울 상도동 컨테이너 추락 △2004년 고양파출소 화염병 투척 등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투쟁중 숨진 35명, 전철연과 직·간접적 연관 한국도시연구소가 1998년 펴낸 <철거민이 본 철거>를 보면 1998년 현재까지 철거투쟁 과정에서 숨진 철거민은 모두 29명이고, 전철연은 이후 7년 동안 숨진 ‘열사’가 모두 6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동안 철거투쟁으로 숨진 35명 대부분이 전철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철거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갔는데도, 전철연은 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까. 경기 수원 권선3지구 철거대책위원장 홍경희(40)씨는 “전철연 같은 철거민 조직 말고는 철거민들이 기댈 데가 없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집회 때마다 앞장서 시위를 주도하는 전철연의 대표 ‘투사’다. 그는 1988년 울릉도에서 푸른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섬처녀’다. 울릉도 처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도시는 ‘이촌향도’ 마지막 세대인 홍씨를 반겨주지 않았다. 16년 전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딸 셋을 낳아 기르는 10년 동안 “이삿짐을 채 풀지도 못한 채” 수십번도 넘게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1996년 수원 권선동에서 보증금 100만원, 월세 15만원짜리 방에 살고 있을 무렵 “주변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갈 데가 없었다”는 홍씨는 자연스럽게 전철연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실천은 성과를 낳았다. 3개월 투쟁 끝에 8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가이주단지에 입주할 때는 감격에 겨워 엉엉 울었다. 그는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고통을 보면, 꼭 내 일 같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모두가 홍씨처럼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최국자(45·여)씨는 “이제는 전철연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경기 의왕시 내손택지개발지구 철거민인 최씨는 2000년 6월9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 소형 화염방사기를 들고 난입 농성을 벌여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아무리 투쟁을 해도 세상에서 관심을 안 가져주니까 항의집회를 하자는 것인 줄 알았죠. 그런데 현장에서 화염방사기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최씨는 “1999년 12월 한겨울에 강제철거가 됐는데도 관심 있게 지켜보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전철연에 많이 의지를 했었다”며 “생업을 포기하고 투쟁에 나서는 과정에서 수천만원씩 빚만 졌다”고 말했다. 최씨의 남편(42)은 최씨의 구속에 항의하다 잡혀 부부는 영등포 구치소 감방 동기가 됐다. 많은 지역에서 철거민들은 전철연식의 극단적 투쟁 전술에 혀를 내두른다. 안암동 재개발지구 철대위원장을 지낸 이영철씨는 “전철연의 의사결정 방식이 지나치게 폐쇄적이어서 불만을 품는 철거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골리앗 만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 넘어 “전철연 지도부가 지역 철거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하는 말이 뭐냐면, 평생 살 집을 만들어줄 테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럼 사람들이 생계가 막막해지니까 절반 정도 떨어져나가. 남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 다른 지역 집회에 쫓아다니라고 하거든. 그럼 사람들이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또 절반 정도 떨어져나간다고. 그 과정을 거치면 철대위에 남는 사람들은 5~10가구밖에 안 돼. 거기서 이제 골리앗을 만들어야 하니까 돈을 걷자고 한다고.” 골리앗은 만드는 데 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을 훌쩍 넘긴다. 철거민들이 카드빚을 내 그 비용을 댄다. 그가 속한 안암동에서도 2002년 2월 철대위가 꾸려질 때 50명이었던 주민들이 3개월 만에 20명대로 줄어들었다.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성실하게 따르다 보면, 생계를 포기한 주민들은 수천만원씩 빚이 쌓이고 곳곳에서 휘두른 폭력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투쟁에 더 매몰될 수밖에 없고, 점점 전철연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지금 경기 오산에서 ‘골리앗’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벼랑으로 몰린 철거민들에게 전철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제명’이다. 취재 중에 만난 철거민들은 “철거민에게 ‘제명’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특히 아직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의 경우, ‘제명’을 당하면 철거민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협상이 잘 끝나면 살 집과 약간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민사상의 고소·고발 사건이 모두 유야무야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는 상황에서 철대위에서 쫓겨나면, 철거민들은 수천만원의 빚을 떠안은 채 범죄자로 전국을 떠돌아야 한다. 그 와중에 사람이 죽기도 한다. 2001년께 최덕자(45·사망 당시)씨 등 경기 의왕 오전동 재개발 지역에 남은 철거민 3가구가 싸움이 붙었다. 주민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모아둔 운영자금 700여만원을 전철연 중앙에서 “간부 도피자금으로 사용한다”며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친 주민들은 전철연이 요구하는 연대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3가구 가운데 최씨네 가족을 뺀 나머지 2가구는 지역을 떠났다. 전철연은 이 지역 철대위원장이던 최씨를 ‘제명’했다. 최씨는 아파트 숲으로 뒤덮인 마을에서 움막을 지어놓고 3년 넘게 생활했다. 남편과 말다툼이 잦아졌고, 2003년 11월 최씨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씨가 죽을 때 그의 집은 300만원, 보증금 20만원짜리였다. 전철연은 이미 비민주적인 전위 조직으로 퇴화해 서철협 시절의 활력을 잃은 모습이었다. 현재 전국 35개 철대위와 공동 투쟁을 하고 있다지만, 적극적으로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100명 안팎에 불과하다. 경기 안양 유진상가 세입자대책위원장으로 전철연과 6년 동안 같이 활동해온 정동열(62)씨는 “운동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운동의 순수성이 결여돼 있다”고 말했다. “철대위원장이 중앙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철저하게 배제를 합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빨리 투쟁을 끝내고 생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큰데, 주민들이 직접 상대쪽과 협상을 못하게 하거든요. 철거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장 주민이고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는데, 비타협 투쟁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저마다 확인 불가능한 전철연 간부들의 비리를 제보해왔다. 그렇지만 전철연 때문에 고통을 겪은 이들도 대부분 이들의 결벽성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왜 전철연을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을까. 어렵게 수소문해 만난 옛 철거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운동을 진행하다 보면, 건설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는 건설자본들이 돈을 미끼로 협상을 제안해옵니다. 여기에 굴복하면 운동이 끝나는 거고, 이겨내더라도 주민들 사이에 분란이 생깁니다. 전철연도 중앙에서 나온 2~3명의 핵심간부가 건설회사나 재건축 조합과 밀실협상을 합니다. 돈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밝혀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비판에도 전철연은 아직 변화를 모색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변화를 이끌 내부 역량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4월24일 밤 어렵게 만난 남경남 의장(그는 지금 수배 중이다)은 “사람을 죽이는 정부의 철거민 대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흡사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반복해 듣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들었다. 200만 철거민 투쟁에 앞장서 피흘려온 전철연.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울 전농 SK아파트 201동 뒤. 박순덕씨 추모비에 한가롭게 내리쬐는 4월 봄 햇살이 무참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