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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도 잃어버렸다.

  • 등록일
    2004/08/17 01:24
  • 수정일
    2004/08/17 01:24

다이어리를 어제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다이어리는 다이어리 이상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다이어리는 죽은 군의문사로 죽은 후배가 군에 가기전에 자신은 필요없으니 선배 쓰라고 준 소중한 물건이다. 그 다이어리는 그와의 추억 그리고 그 다이어리를 볼때만다 후배를 떠올릴 수 있는 나에게 있어 과거, 현재를 잊는 소중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고 현재는 미래와의 대화라는 말을 하였듯 다이어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거울이었다. 그 소중한 것을 정신팔아먹으면서 잃어버린 것에 정말 죄스럽기까지 하다.

 

다이어리를 통해 후배와의 대화를 난 가끔 독백을 통해 이야기 한다. 나만의 대화 나만의 독배 그안엔 그 후배가 늘 살아있었다.



후배와의 만남 대학교 5학년(학기로 5학년 난 학기로 7학년까지 다님... 15학기 코스모스 수료 내가 생각해도 돈 무진장 대학에 퍼다날랐다....)때 과 선전부장이던 나의 후배를 동아리연합회(이하 동연)에서 만났다. 그는 좌파라고 자임하던 녀석들의 학내모임 선전부장 회의에 나타나서 나의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선전부장이 었으나 정작 글씨는 갈김체이기에 거의 선전물을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과에서 선전부장이라는 직함을 통해 운동이라는 것을 지향하고자 하였던 이였다.

 

93년 그 뜨거웠던 여름.... 우린 농활을 통해 서로를 알아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후배는 누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후배의 누나는 숙대를 다니고 있었고, 숙대에서 한가닥하던 운동권의 주동자였었다. 그의 집은 늘 누나의 학생운동으로 불안초조 그리고 경찰이 불시에 들이닥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그의 누나는 몇번의 조직사건으로 투옥이 되었고, 이를 통해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등학교때 부터 누나의 타고난 조직화에 후배는 쁘락션되고 말았다. 부모님을 생각한 후배는 운동에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92년 당시 강경대 1주기 추모식에서 어느정도 운동을 지향해야 겠다는 결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친구와 동아리연합회 노숙방에서 진한 술잔과 노래하나... 늘 후배는 내가 귀거하는 동아리연합회 노숙방에 찾아와 선배 술한잔 하죠... 하면서 술을 매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 후배와의 대화에서 난 그에게 진솔하지 않았다. 후배는 자신이 살아왔던 과정 운동을 머뭇거리게 된 배경 그리고 집안에 대해 나에게 가슴속 깊은 이야기까지 하였다. 난 그렇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만 들어줬다. 정작 나의 이야기를 그에게 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하러 운동이라는 것을 지향하게 되었는지.... 나는 어떻게 대학 오기까지 살아왔는지... 다른 동지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만이 숨기고 싶은 비밀 그리고 알리고 싶지 않은 나의 가족사가 있었기에 난 그들의 가슴에 담은 이야기를 정작들으면서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한심한 일이다. 누구나 받아주고 감싸줄 수 있는 이야기를 난 나의 쪽팔림과 나의 존심이라는 것을 내세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어느 노래가사처럼 그런 입으로 난 동지라 지껄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고민을 떨어놓았던 그들에게 지금 생각하면 얼굴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게 느껴진다. 나를 믿고, 나를 따르고,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준 동지와 후배들에게 난 정작 무엇을 해주었던가.... 후배가 떠나고서야 아쉬움이 남는다. 버스는 이미 떠났다.

 

후배는 참 맑은 녀석이었다. 늘 힘들어도 웃도 열받아도 웃고 술이 떡이 되도 웃었다. 늘 힘들다고 털어놓을 때 빼놓고는 그 후배는 웃음과 미소를 잃지 않았다. 늘 밝은 그.... 그가 군대간다고 형 저 군대가요 술한잔 건하게 사줄께요 형 내가 복학하면 형 졸업하겠죠... 그래서 미리 술한잔 대접하는 겁니다하고 술한잔 건하게 사주고 입대한 그가 7개월 후 뼈가루가 되어 돌아왔다. 사인은 군대에서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 맑던 후배가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후배가 형 면회와요 할때 면회하도 갈것을 그리고 형 편지보냅니다. 편지 받았을때 편지라도 붙여줄걸 왜 이리 귀찮은지 지금 후회가 막심하다. 이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와의 생활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준 다이어리.... 맑은 그를 다이어리속에서 발견하곤 하였는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난 내 학교시간 그 후배와 소중한 추억을 잊어버린 것과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술한잔 하고 난 후 이글을 쓰면서 조금은 진정되었지만.... 오후내내 일손은 커녕 화딱질이나서 혼자 씩씩대고 있었다. 참 미련한 놈 같으니라구.... 난 참 미련한 놈이다....

 

끝나지 않은 군의문사.... 난 운동이라는 것을 접하고 동지 3인 그리고 선배 3명 후배 1명을 군과 길거리에서 의문사로 보냈다. 그들의 장례식도 가보지 못하고 보냈다. 그들의 장례식은 군과 경찰에서 화장을 한 후 통보하였고, 죽어있는 현장사진을 보면서 오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과의 그 소중한 추억은 그 현장사진 한장에 더이상 만날 수 더이상 술먹을 수도 더이상 내가 이야기를 받아줄수도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을 그들에게 전달 할 수 없다는 것에,,,, 난 미치도록 서글프다. 내 마음속 이야기 하나도 그들에게 하지 못했건만 난 그들의 이야기만 받아 담았을 뿐.... 오늘 술한잔 하고 나니 서글프다....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젠장할....

 

후배와 동아리에 관한 추억.... 후배와 난 동아리 하나를 만들었다. 세미나와 학습을 하기 위한 동아리 내가 동아리연합회장이었을때 가동아리로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2년만에 편법으로 중앙동아리로 인준을 받았다. 후배들에게 운동은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던 동아리 그리고 조직활동을 위한 안정적 공간확보를 위해 동아리를 만들었다. 무수히 후배와 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면서 채워나갔다. 중앙동아리로 인준 받고 그와 난 동아리방에 찾았다. 감격이 었다. 우린 둘이 얼싸않고 엉엉 울었다. 우리가 해냈어 하면서.... 참 포부도 있었도 운동이 꼬이지만 원칙만 건실하면 잘 될것이라는 믿음으로 같이 만들었던 동아리.... 난 집에서 붙여주는 돈을 모아 헌책방에서 책을 구입하고 후배는 자신의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몰래 훔쳐가지고 와서 동아리방에 하나둘 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우린 종종 함께 술한잔 하면서 밤을 지세웠다. 비록 우리는 소수이지만 나중엔 창대하리라.... 학교를 제대로 바꿔보자고 포부도 열정도 가능성도 우리 앞에는 그 당시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와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술을 얼마까지 먹을 수 있을까... 학교앞 당골집 전부다 돌자고 결의하고 한달 생활비를 털어 우린 무작정 술집을 돌았다... 내 생전 이렇게 하루에 술집을 많이 돌아보기는 처음이다. 무려 8차까지 갔다. 그 결과는 참담하였지만... 후배는 병원에 실려가고 난 동아리방에서 1주일을 칩거하여야 했다. 동기와 선배들이 병원에 가라는 것도 마다하고 동아리방에서 쓰린 배를 잡고 1주일간 구토와 설사와의 사투.... 무모하지만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 후배와 몸이 쾌유된 후 만나서 서로가 10차까지 도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 행동을 준비하자는 말만 남겼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무모한 행동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

 

후배가 단과대 학생회장 당선되었을 때.... 정말 뛸 듯이 좋았다. 우리도 단과대 하나를 잡았다는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도 운동을 위한 대중적 발판 마련... 늘 양지를 지향하지만 음지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고충이라하면 다들 알 것이다. 우리도 양지바른 곳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후배의 당선 소감을 듣는데... 이놈의 눈에서는 이슬이 처음엔 맺히더니 나중엔 소나기가 되어 퍼붙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기쁜 환희의 소나기.... 감격 그자체였다. 후배가 대견하였다. 처음으로 단과대를 잡았던 그 희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한총련 사태로 전국대학이 온통 한총련 탈퇴를 감행할 때 후배는 조용히 동아리로 찾아와 나에게 물었다. 형 우리 한총련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는 왜 그러나고 물었다. 형 한총련의 노선을 비판받아 마땅하나 한총련 자체는 우리의 역사적 성과물 아니냐고, 한총련 자체는 학생운동이 이루어놓은 결정물이 아니냐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외면하고 이에 대한 한총련 개혁, 한총련 강화에서 우린 무엇을 하였냐고,,,, 한총련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면 다음차례는 우리가 아니겠냐고.... 학원민주화 투쟁은 더이상 공염불이 되지 않겠냐고 말하며 자신은 한총련 대의원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한 자신의 결의와 다짐을 나에게 협박 비스무리하게 주장하였다.

 

후배와 짧지만 소중한 6개월의 동아리 동거생활.... 동아리는 내가 먹고자고 살아가는 생활공간겸 우리 진영 회의장소 였다. 후배는 수배가 떨어진 후 나와 함께 이공간에서 같이 살아갔다. 군대 끌려가기 전까지.... 후배와 애틀란타 올림픽도 같이 보았고, 그래서 술먹고 종종 둘이 레슬링 흉내고 냈다.... 후배의 별명을 타이거 마스크 대 난 그대로 간장 오타맨... 타이틀 매치도 하고, 비오는 날 팬티만 입고 술이 턱이되 학교 정문에서 동아리방까지 뜀박질도 해보고 갖은 꼴통 짖은 죄다 해보았다. 그 당시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생각만 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후배와 나는 참 인연이 질겼다. 6개월 동안 참 좋은 시간이 었다.

 

후배는 나에게 한가질 부탁하였다, 형.... 난 사람을 만날때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빛춰줘여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동지라는게 별건가요 서로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누굴 만나든지 남을 알려고 하기전에 자신을 먼저 보여주라고... 꼭 꼭 당부하였다. 난 후배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질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 노력하고자 한다. 동지라 신심을 같이하는 이들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도 그가 없기에 더 말하기 신명나질 않는다.

난 다이어리 분실.... 나의 추억도 송두리채 앗아간것 같다. 꼭 찾아야겠다. 나의 추억이 고스란히 뭇히고 내 후배의 손때가 묻힌 그 다이어리를....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후배가 슬퍼스 우지짖나.... 나 그대 안 잊었다. 그대 잊는날 그날은 내가 그대곁에 다가가는 날이리라.... 미안타 니 소중한 다이어리 지키지 못해서...

 

술한잔 하니 참 이상타.... 술이나 더 먹고 그냥 오늘 자야 겠다... 내일 회의 늦지않게 조금만 먹어야지.... 지금 한 두병을 먹었으니 한 두명 더 먹고 푹 자야 겠다. 아무생각없이...

 

간장 오타맨이....

 

비야 제발 서글프게 우짖지 말라..... 내 후배 눈물 같아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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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상념

  • 등록일
    2004/08/16 20:03
  • 수정일
    2004/08/16 20:03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고, 슬퍼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이들을 보면서 참 많이 부러웠다. 난 그들처럼 사랑이라는 것에 집착하지도 집착할 생각도 없었나 요즘 들어 한강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연인들 모습을 보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과 조금 질투썩인 부러움이 느껴진다.
 
 나도 잠시나마 짝사랑에 속알이를 한적이 있었다. 그때를 지금 생각하면 웃음과 부끄러움에 몸이 화들짝 달구어져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그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심각한것 같았다. 그 사람앞에 서면 내 초라한 모습에 움츠려야 했고, 그 사람만 바라보면 가슴이 꿍딱꿍딱 뛰는 것이 느껴지고 얼굴이 화들짝 달구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서 난 참 가슴졸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짝사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하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바로 내 후배인 그녀를  외사랑한 것이 나에게 있어 유일한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중학생때 이성에 대한 눈을 떳지만 그 이성적 감정은 금방 식었다. 여교생의 호의에 헤벌레 하였다. 그러나 여교생이 교생실습을 끝난 후 편지를 꼭 준다고 하였으나 편지는 받아 보질 못했다. 그런 후 난 교생들의 선심성 말레 주목하지 않았다. 나의 유일한 사춘기 호기심이었지 이성적 감정은 아니었음... 교생들이 있다면 보낸 편지 꼭 답장 주세요. 저 같이 여린이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 하지 말고... )
 
좀더 용기를 내었으면, 좀더 적극적이었으면, 좀더 그녀에게 일상사에서 잘 해주었어야 하는게 그러질 못했다. 해바라기 처럼 바라보고만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같은 공간에 있기에 행복하였다. 짧지만 그래도 내 대학생활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같다.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랑은  혁명의 적"이라 말하며, 늘 벌어지는 정세에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임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용기를 적극적으로 표현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변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위기니 침체니하는 분위기가 나를  보다 이성에 눈을 뜨게하는데 방해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난 바보였다.

 

선배들의 말은 정말 말뿐이였다. 나는 정말 바보인가 보였다. 선배들은 나에게 사랑은 혁명의 적이라고 말했지만, 자신들은 그런 혁명의 적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이다. 학교졸업후 선배결혼식에 가서 안사실이다. 정말 난 바보이다.
 
요즘 처럼 날씨가 궂은 날에는 내가 짝사랑 했던 그녀가 보고싶다. 더이상 볼 수 없는 그녀이기에..... 내 가장 친한 친구(대학같은과 동기)의 부인이 되어있는 그녀를 만나는게 부담스러워 친구가 집에 초대해도 집근처 술집에서 술을 먹는다. 나는 취기에 간혹 그녀의 안부만 묻곤하지만... 그 친구도 내가 그녀를 짝사랑한 것을 알고있기에... 흔쾌히 전달해 준다. 그나마 졸업 후에 유일하게 만나는 친구기에 만나면 늘 만취가 되어 정신을 술에 퐁당 집어 담 말지만.....
 
짝사랑 그녀와 어색한 만남....
나의 대학 후배이자, 친구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를 우연찮게 월드컵 경기장에 입주한 까르프 상암지점에서 만났다. 난 그녀가 결혼한 후 한번도 만나지 않았고, 만날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성에 이끌릴까봐 어색한 몇마디를 나누곤 나는 급할 일이있어 가야한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황급히 빠져 나왔다.

어색한 인사, 잘 지내냐 친구는 일찍 들어오냐 아이들은 잘 크냐 정도의 통상적 인사말을 나누곤 그냥 돌아섰다. 피천득이 "인연"에서 아싸코와의 두번째 만남에서 기대와 변해진 아사꼬(일본계미군인 남편과 결혼 후 만남)만남에서 느꼈을 감정이 이해가 된다.
 
그녀에게 감사한다. 사랑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변변치 않은 나로서 그나마 짝사랑이라도 할 수 있던 그녀가 있었기에 행복하였다. 앞으로도 이런 짝사랑과 이성간 사랑이 나에게 없을 것이다. 난 지금 살아오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시간허비가 규정(잘못된 판단이다. 그러나 나같이 돈없는 사랑에겐 사랑이란 정말 무의미 한것 같다. 나 혼자 먹고 살기도 버겁다.)하고 있다.

난 앞으로 그때의 감정과 느낌을 고이 간직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요즘들어 연인을 볼때 몇마디의 단어가 떠오론다. "좋을 때다"라는 말.... 모든 사람이 좋은 감정을 갖고 평생 함께 같은 방향을 함께보면서 나가기를....
 
신영복 선생님의 사랑이라는 몇마디 문구가 생각나 위에 몇글자로 적어 놓았습니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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