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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박기평] 손무덤

  • 등록일
    2004/08/15 19:04
  • 수정일
    2004/08/15 19:04

** 시인의 이름이 박노해라고 되어 있어 본명 박기평으로 정정한다. 그는 사노맹 조건사건으로 투옥된 후 전향서를 쓰고 나왔다. 전향서를 쓴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전 자신의 가명인 노해라는 이름 즉,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를 쓸 자격은 없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그는 더이상 박노해가 아니기에.... 쓸 자격은 그 스스로 박탈시켰다. 이에 내가 옮기고자 한 책에 박노해라고 되어있는 이름을 내 임의로 수정하여 그의 본명 박기평으로 쓰고자 한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사이에 끼여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주질 못하였다

환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더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누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의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충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지게 일할 시간에

느듯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에

나는 ET가 되어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짖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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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노동 계급적 관점에서 충실한 시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연대인 7*80년대는 자본과 노동이 격렬하게 날 선 각으로 대립하며 서로를 적으로 규정한 시대였다. 냉대와 모멸의 대상으로 떨쳐 일어나 노동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 당당히 설 수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세계 최장 시간에 최저 임금이라는 인간 이하의 부당한 차별 대우를 일방적으로 받아왔던 노동자들이 태풍으로 만나 바다의 성난 파다와 같이 그들의 적대 세력인 자본가 계급에 대해 자신들의 전 생을 걸고 온몸으로 투쟁했던 것이다. 즉, 즉자적 대중에서 대자적 민중으로 변모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개별 사업자 단위에서 벗어나 점차 전국적 수준으로 그 규모와 세력을 강화해 나갔고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점차 열악한 노동 현실의 개선이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은 철저하게 도시 중심이었다.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이농민들이 양산되었다. 야반도주한 그들은 도시 주변에 기생하면서 산업예비군으로 신분의 전락을 겪게 된다. 자본가 계급은 성장의 열매를 독점하고 사회적 분배에는 등한하였다. 또 그들은 노동자 ㅇ미금 착취로 얻은 부의 증식을 기술에 투자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치부하는데 몰두하였다. 따라서 당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은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그 당위성을 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기평의 시 "손무덤"은 각성한 노동자의 분노가 격정적으로 분출한 시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풍화 작용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읽어 봐도 가슴이 서늘해지고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 시에서 우리는 고상한 미학적 장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척박한 노동 현실 경험과 그 극복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발동기의 모터 소리처럼 박짐감 있게 읽힌다.

 

우리의 노동 현실은 점차 개선과 극복이라는 자기 발전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도 열악과 구태의 구습을 완전히 탈각했다고 보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으며 더욱이 한국에 진출한 동남아시아 노동자(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노동 실태는 우리의 양식와 지성을 참담하게 만든다. 상품과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 공동체 의식은 골동품 취급을 받으며 희박해져 가고 있다. 지난 연대의 고난한 역정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 이재무 -

 

69인의 좋은 시를 찾아서 "긍정적인 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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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은 과연 평화와 인류 축전의 장인가?

  • 등록일
    2004/08/15 11:18
  • 수정일
    2004/08/15 11:18

2004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이 어제 개막식이 열리고, 시작되었다.

프랑스 쿠베르텡 남작에 의해 복원된 올림픽은 인류의 평화를 염원하고, 스포츠 정신을 통해 인류번영이라는 명제를 갖고 출발하였다.

 

어찌보면 그럴싸하다. 그러나 영국/프랑스가 식민전쟁으로 아프라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유럽제국주의자들의 번영과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출발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1896년 첫해 그리스에서의 개최를 당시 시대상을 보자.



19세기말 제국주의의 식민지 영역 분할전쟁이 끝나고 식민지 약탈로 얻은 재화로 유럽제국(영국과 프랑스)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기이다.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분할전쟁으로 전지구가 그들의 영토로 분할되어진 윤곽이 확정되었다. 유럽제국주의자들은 전쟁으로 얼룩진 당시 유럽제국들의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발판이 필요하다였다. 그래서 쿠베르텡 남작은 새로운 평화와 번영 그리고 제국주의의 공교한 틀을 확정짖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을 차용하여 제국주의자들의 각축장을 출범하였다.

 

이렇듯 올림픽은 국가간의 힘을 과시하고,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가라는 기틀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정치선동의 장으로서 그 기능성을 공교히 해나갔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리에게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하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대회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던 손기정이 있었다. 손기정의 마라톤 제패는 어찌보면 일제식민시기 조선민들에게 조선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사건이었으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식민통치 식민의 굴욕이었다. 그러나 손기정 쾌거 손기정에 가려진 비운의 스타가 또하나 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3위를 한 남승용.... 손기정만 존재하고 남승용은 어디를 봐도 그의 쾌거에 대해서는 언론은 커녕 한국민들 또한 모른다. 나도 몰랐다가 1980년 중후반에 KBS에서 방영했던 특집드라마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에 대한 보면서 베를린올림픽에서 3위를 하였다는 남승용이라는 한국민의 가슴에 잊혀질 수 밖에 없는 비운의 스타를 알았다. 그러나 베를린 올림픽에서 3위를 한 남승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역사적 민족적 고취가 없다. 여기서 우린 올림픽의 영웅주의를 발견한다. 오직 1등만이 대접받는 풍토를 잘 드러낸다. 올림픽에 나가는 것도 어려운데 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것만으로도 그의 노고에 박수와 찬사를 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오직 1등만을 기록하게 각색되고 재편되어 가고 있다.

 

중동전쟁으로 피로 얼룩진 뮌헨 올림픽과 미*소 냉전에 의한 2번의 반쪽 올림픽....

1972년 독일의 뮌헨 올림픽은 중동전쟁(이스라엘 대중동국가간 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스라엘 축구선수단의 테러에 의한 죽음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은 올림픽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여실히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여기서 올림픽이 갖는 전지구적 평화와 인류번영이라는 명제는 여실히 정치적 관계에 의해 무참히 짖밟힌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올림픽이 갖는 의미를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올림픽에서의 스포츠 정신이라는 것이 갖는 허구성과 올림픽을 통한 국가의 이데올로기 단면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올림픽은 출범 당시부터 정치적 의미에 의해 태동되었듯이 제국주의자들은 이를 통한 자국의 이데올로기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하였다. 초기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들의 스포츠를 통한 자국의 우위성 확보, 그리고 20세기 초반 자유주의라고 자임하는 신진제국 미국 등장과 구 제국인 영국, 프랑스 대 파시스트인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일본의 대립이 올림픽에서 여실히 드러낳고 20세기 중반은 냉전에 의해 올림픽이 점절되었고, 20세기 후반 냉전시대의 종식으로 부터 파생된 올림픽의 상업공간으로서의 탈바꿈에서 우린 올림픽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볼 겨를 없이, TV와 올림픽 승전보에 국수주의가 되어간다.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스포츠를 즐기려는 내공있는 스포츠 광은 없고, 경기를 등안시 한채 메달과 승전보에만 온 집중을 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않느냐.... 월드컵의 광기는 어찌보면 한국민의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든다. 모든 사안이 올림픽 메달로 묻혀지는 이 기현상에서 우린 또다른 광신도가 되어져 가는 것은 아닐까? 집단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파시스트들의 광란이 월드컵을 보면서 드는것은 왜 일까? 그래서 에너지 속에 잠재된 그들의 국수주의와 파시스트적 집단 군중심리에 난 소스라 친다.

 

한번 보자 1984년 올림픽부터 일어난 사건들을....

1984년 학도호국단 폐지를 통한 전국 민주학생회 건설... 그리고 민주주의 요구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 그 당시 LA올림픽으로 민주화의 열기는 빛을 바랜다. 그래도 꾸준히 민주화 운동의 불을 지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지금 푸른영상의 김동원감독이 만든 상계동 올림픽(내 책장에는 대학때 읽었던 상계동올림픽이라는 책이 책장 한켠에 우둑커니 꽃여있다.).... 올림픽이라는 미명하에 개발독재에 의해 철저히 자신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쫒겨나야만 한 그들에 대핸 언론은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오직 그들과 함께한 한 다큐멘터리 감독에 의해 재조명 되었다. 그리고 지금 버스정류장 가판대들이 생기면서 거리노점상이 환경미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길거리에서 몰려나 생존권을 위협받아야 했다. 아무도 그들의 처지에 대해 항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하는 사업에 있어서 그들의 피해를 종용하였다. 그리고 민주노조 운동이 1987년 활화산 처럼 번지는 그 때 길거리는 온통 체루탄으로 얼룩져져 있었다. 그리고 연일 보도되는 노동자들의 분신... 난 그해 버스노동자의 분신... 구사대 폭력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들었다. 충격이었다. 그러나 난 무덤덤하게 나의 일상에 묻혀갔다. 그리고 학생들의 통일을 외치며 나갔던 홍제동의 통일물결 등.... 무수한 사회상이 있었으나 우리는 이 사안들을 무시한채 그렇제 뜨거웠던 서울올림픽이 끝났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행한 국풍이라는 행사가 낳은 씨의 잔재가 아닐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언론은 일제히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를 되새기겠지만 난 1991년 치떨리는 강경대, 김승희.....김귀정 열사정국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그 1992년 1991년의 패배를 딛고 민중들의 투쟁을 전열하던 그 시기이다. 그리고 민주자유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으로 통합으로 일커러지는 보수대연합 구축.... 진보대 보수의 쟁점시작.... 민중당의 1991년 패배와 1992년 백기완민중후보 전술의 실패.... 1989년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로 시작한 냉전종식과 이념운동의 후퇴기에 우린 운동 또한 서서히 모색이라는 자신모순적 도그마에 빠지는 무오류성을 범한다. 그러나 이 땅은 1992년 3당 야합과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 뜨거웠던 가두투쟁의 생생함은 우리 기억에 아련한 추억으로만 점철되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이 진행 시기 우리는 한 아리따운 청년하나를 잃었다. 그것도 길거리 가두투쟁의 장애서.... 연세대 노수석 열사.... 그리고 오늘 있을 통일축전에 대한 김영삼의 탄압...가뜩이나 퇴행기에 접어든 한총련은 이 사건으로 대중조직과 1987년 좌파에 의해 만들어진 서대협을 시발로한 전국대학생조직운동의 그 자임성을 잃어버린다. 한총련에 대해선 난 나름데로 할 말이 있지만 전국대학생조직의 쇠퇴는 학생운동권의 위기로 치닫는다. 대학 학생처의 강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학생들의 자치권은 일거에 무너지고 마는 사건이 발생한다. 투쟁으로 일구어낸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린 그 처절함이란.... 그렇다고 학생운동권이 문제점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이루었던 자신들의 성과를 송두리채 빼앗겼다는 사실에 난 소스라 친다. 우리의 피와 땀이 그들에 의해 무참히 짖밟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학을 보라 학교인가 학원인가... 정확히 말해 고시원이 아니더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외환위기 이후 맞은 올림픽 밀레니엄이니 신세기니 그 수많은 단어가 난무하였지만, 1998년 정리해고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그 시기를 얼마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올림픽은 민중들에게 희망이었을까? 생산의 현장에서 쫒겨나고 빛독촉에 내몰려져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 1998년 이전에 비해 한국사회는 이상하게 나가고 있다.

간혹 거리에서 거지라 통칭되는 사람들을 봐왔으나 노숙자들이 서울역, 2호선 시청역 지하도에서부터 동대문 지하도를 가득메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 곳에 가보라 얼마나 처절한가 삶이 전쟁이다. 그리고 종신고용이 서막을 내리는 시점.... 우리는 늘 구조조정이라는 말만 나오면 가슴을 졸이며 살아가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져 있다. 이것이 밀레니엄이다. 그러나 여전히 올림픽은 개최되었다.

2000년 대우기업의 몰락은 대우라는 업체에서 고용되었던 모든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대우자동차노조의 해외매각저지 투쟁.... 2001년도 대우자동차 폭력동영상을 보라 충격을 넘어 분노가 솟는다. 그리고 무수한 기업들의 도산과 부도로 한국은 해고와 공장들의 몰락의 길로 내몰렸다. 기업이 이렇다보니 청년실업은 당연지사....일자리가 없어 취업을 못하는 이들의 속출되고 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취업을 하면 무엇하랴 삼팔선(38세), 사오정(45세), 오륙도(56세) 해고의 연령을 말해준다. 한참 일한 나이에 생산의 현장에서 내몰린다는 것은 죽음으로 치닫는 길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김선일씨의 죽음 그리고 이라크 전투병 파병 등 사안이 굵직하다. 그러나 올림픽이라는 사안에 이 모든 사안은 파뭍힐 것이다. 금메달을 따는 순간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부대 병사의 죽음은 메달의 빛깔에 빛을 바랜다... 우리의 분노도 메달에 빛을 바랜다. 모든 민중들이 광신도와 열광에서 이성을 잃어버리는 올림픽.... 이게 올림픽이 갖고 있는 정치학의 의미이며, 이데올로기는 아닐까????? 모든 사람들을 우매하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비정치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섹션화 시키는 전락.... 고도의 정치술수이다.

 

우리에게 올림픽은 삼성이 광고하는 그 허울뿐인 오직 1등 주의만 존재한다.

1등은 존재하나 그렇지 못한 2, 3등은 존재못하는 현실... 우리는 무수히 봐왔다. 모든 방송에서도 스포츠 금메달을 딴 수만을 이야기하지 올림픽에서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선전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방송하지않고 있다. 방송에서 찾아보지도 않겠지.... 그리스 올림픽선전 기원 프로에서 보면 맨트를 하는 나레이터는 오직 대한민국 1976년 양정모의 첫 금메달 획득후 총 46개의 금메달을 올림픽에서 따냈다라는 말을 자랑스럽게하고 있다... 씁씁..

 

지금 현실을 보자 모든 방송들은 국내선수들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자유형에서 양정모가 첫 금메달을 딴것에만 촛점을 맞춘다. 이전에 복싱, 유도에서 비록 금메달은 아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이들의 이름은 가물가물 거린다. 어쩌다 올림픽 소식을 전하는 대한뉘우스(지금 표기는 대한뉴스)를 보면 올림픽에서 아깝게 은메달 그리고 동메달 딴 선수들 선전하는 모습과 메달딴 소식을 접할 수 있다.

 

그들의 피와 땀은 오직 1등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노력과 그 선수들의 쾌거는 묻히고 만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올림픽이 갖는 의미이다.

 

그리스 올림픽 스포츠를 사랑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스포츠라는 것을 편가르기 수단이 아닌 하나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의 보도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선전한 선수단에 대한 갈채와 박수를 독려하는 것이 아쉽다. 이 어찌 아쉽겠는가 이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대국민 선전방송을 하는데..... 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편가르기보다는 명승부 그리고 아무리 스포츠 사안이 중요하다 손 치더라도 한국내 상황에는 민감해 집시다. 스포츠라는 열광에서 광신도가 되지는 맙시다. 즐기는 이가 됩시다. 그리고 타 선수들의 선전에 박수를 보냅시다. 특히 비인기종목 선수들에게 보다 많은 갈채와 박수를...

 

우리만이라도 올림픽이 갖는 인류번영과 평화의 메세지를 몸소 실천해보자는 바램을 하며 뻘소리를 끝마칠까? 합니다.

 

지금 제 컴에서 아바의 My love, My Life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아바의 노래처럼 되기를 바라며...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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