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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다는 것은...

  • 등록일
    2004/08/07 13:03
  • 수정일
    2004/08/07 13:03

누군가의 고등학교 때 생활기록부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행위이겠지만 자서전적 수필을 대할때면 한 사람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어 글을 읽는 행위 그 자체가 역사서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때가 많다.
 
고등학교 시절 누군가 하나쯤 간직하고 숨기고 싶은 비밀들이 어린 추억의 보물상자 일 것이다. 누군가의 그런 소중하고 그때의 회상을  읽으면서 문득 나의 고등학교 시절과 지금을 회자해 본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지금의 모습....
꿈과 사랑과 그리고 낭만이라는 잔잔하지만 가슴이 미어터질 듯한 그 때를 생각하면 혼자 웃음으로 일관하던 나를 오늘 누군가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라는 회자적 글을 읽으면서 진지하게 되돌아 본다.
 
그때의 포부 그리고 희망은 다소 다른 미래로 현실을 살고 있지만... 꿈이 있었고 미래가 있었던 그 시절... 정확히 말해 철이없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그 시절... 세상과는 동떨어진 매스미디어의 영향에  의하여 가공되고 헛된 꿈들을 꾸었던 그 시절에 나는 현실의 탈출구로 미래라는 대상과 꿈이라는 허망을 쫓아 앞만보고 달렸으며, 친구가 좋았고 늘  새롭게 펼쳐지는 일상이 좋았다. 누구는 국민윤리 책에서 나오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말하며 먼 미래를 의해 공부를 통한 미래의 가치를  증식하기 위한 시기라며 공부에만 전념하던 녀석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친구 그리고 늘 새로운 일들속에서 세상을 알아나가는 과정이 었기에 무엇보다 좋았다. 그리고 늘 공부라는 중압감보다는 아침햇살 처럼 하루하루가 새로운 나날의 연속이 었다. 그때  설레임과 기다림 그리고 일상의 행복이라는 작은 씨앗들이 나에게는  존재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또한 변하고 나의 주변을 감싸주었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고등학교때 늘 함께할거라 믿었던 친구는 진로가 다르고 사고가 다르기에 점점 시간의 흐름과 동질성이라는 인식의 차이로 인하여 하나둘 먼대상이 되었다. 정확히 말해 시간이 없어 만남의  시간이 줄다보니 자연스레 친구 또한 멀어지는 대상이 었다.


세상에 무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녁 누군가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라는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문득 회자되었던 나의 고등학교 때의 자화상을 하나둘 기억이라는 노트에  다시금 담아본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것이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그시대의 나는 존재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기억될 것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밤 여행스케치의 노래와 고등학교때의 나의 모습이 교차되어져 간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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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끝자락에....

  • 등록일
    2004/08/07 12:58
  • 수정일
    2004/08/07 12:58

2002년 8월이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시작으로 접어들어가는 계절의 마디에서 올 상반기를 둘러보게 됩니다. 가을로 접어들어가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농민의 심정처럼 노동운동또한 수확이 있는가라는 반문이 듭니다. 수확보다 올해 무엇을 하고 내년에는 보다 알찬 열매를 맺기위한 토양을 다지고  내년을 준비할 수 있을지.... 화전민 화전으로 일구어낸 땅에 한해 두해 붙혀먹다가 토양의 지대가 마모되면 다른 땅으로 이전하는 화전민으로 노동운동이 전락하고 있지는 아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과야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나 결과에서 실패를 거울 삼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이후에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저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노동자들의 투쟁이야 자본주의라는 적대적 모순속의 계급투쟁은 필연적 투쟁이니까요.
 
초반의 뜨거웠던 철도, 가스, 발전노조의 공공 3사 사유화 저지투쟁 그리고 5월 한통계약직노조의 500일 가까운 투쟁이 마무리 등 노동운동의 굴직한 일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한해의 끝자락으로 치닫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비단 올해 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늘 한해 나이가 먹을수록 저에게는 초조함만을 증폭시킵니다. 정리를 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투쟁이 승리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저의 초조함은 과연 노동자계급이라는 계급성이 이 시간의 흐름속에 존재할  수 있느냐는 초보적인 고민입니다.



노동운동의 도화선 그리고 민주노조 쟁취투쟁이라는 당위속에서 많은이들이 근로자, 공돌이와 공순이이란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인  노동자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이를 통 해 계급으로 전화하는 진일보를 일구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이름들이 차차 노동조합의 당위로서만 노동자 를 지칭할 뿐 이제 사회곳곳을 보면 시민이니 서민이니 하며 노동자들과  민중들을 갈라치기 하고 있습니다. 시민, 서민, 민중들의 근간은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민중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라 할 수 있습니다. 노점상과  농민들은  민중들의 근간일 수 있겠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농민이 도시빈민 최하층 노동자로  전락되어진 한국근현대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필연적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착취계급인 것입니다.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속에는 노동자라는 계급의 이름은 어느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노동운동이 유일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러나 운동의 주체와 핵심세력은 노동자계급이라고 보며, 이에 저는 학생운동 시절 맑스-레닌주의에 의거한 활동을 전개하였죠. 지금은 저의 학생때와 다른 또다른 운동이 89년 동구사회주의권 몰락으로 전개되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저는 맑스-레닌주의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르, 네그리, 들뢰즈, 푸코, 하버마스, 까따리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지금 사상계에 대두되어지고 있지만, 그들의 책에는 여전히  관심이 가지 않는 이유는 맑스-레닌주의는 난해한 책이 아닌 혁명적 실천속에 일구어낸 혁명적 이론이기고 20세기 노동자 국가의 가능성을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맑스의 이론이 단지 이론이 아니라 현실가능한 실천적 무기였음을 각인하는 노동자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의 범람을 통해 사상계의 양적팽창을 하였지만, 사상의 질적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죠. 변증법적 유물론의 양질의 전화법칙에 의거한 사상계의 발전은 통일성은 이루어내기 어렵다 하더라도 비판적 논쟁의 토양을 저해하고 난해한  학문적 용어와 수사를 통해 노동자들의 책들을 지식인의 전서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행위야 필연적으로 서구유럽 사회주의의 옹호로 동구 사회주의를 몰락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의 미성숙에서 발생한 결과이지만 결과치고는 혹독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포스트주의와 싸우고 이제는 서구유럽  사민주의 형태로 운동의 정형으로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90년대 들어서면서 포스트주의와 서유럽 사회주의 사상의 조류는 주모순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한 인식을 파괴하는 형태를 낳았습니다. 특히 그람시의 시민 사회혁명론과 수동적혁명론에서 들어나듯이 부문의 강화를 통한 진지전을 전개는 기존 노동조합 및 사회운동세력의 투쟁을  바리케이트전의 기동전에 대한  비판을 잉태하는 모순을 낳았습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처한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유효한 전술일 수 있으나 장기적 관점과 계급투쟁에서 볼때 계급의 주체를 세우고 사회변혁운동을 다양한 분화를 통해 인식의 일치성을 저해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환경, 여성, 농민운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운동적 관점과 사회내적 모순이라는 필연적 모순은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세련되어집니다. 주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계별운동으로 운동이 그친다면  운동은 비젼보다는 그 당시 화두와 이슈에만 매몰된 반항적 운동일 뿐 대중적 헤게모니는 장악하기 힘듭니다.
 
프랑스의 알튀세르의 경우 그의 사상적 논쟁은 프랑스에서 80년말 정리된  학계의 논지입니다. 그러나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로 한국사회에서는 알튀세로 이론이 급부상하게 됩니다. 이유는 동구사회주의와 알튀세르와의 대립에서 알튀세르가 취한 소련에 대한 비판의식과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의 성공으로 인한  마오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특이할 만한 것은 알튀세르는  스탈린=레닌으로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어 맑스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맑스-레닌에 비판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애피소드로 알튀세로는 레닌에 의해 주창된  변증법적 유물론을 폐기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맑스의 자본론 2, 3권의 저자가 엥겔스가 저작하였다는 이유로 알튀세르 "자본을 읽자"라는 책에서 2, 3권을 배재 한 상태에서 맑스 자본론 1권을 중심으로 자본을 대두시켰다, 이렇듯  서구사회주의의 경향은 자신들의 토대에 대한 우위와 동구권에 대한 사회주의  이행기에 강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혁명에 있어 발전을 가져다 주지 못하였으며, 퇴행만을 가져왔다.
 
지금 프랑스 68혁명을 화두로 신좌파가 급격히 대두되어지고 있으며, 서점에 가면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이 학생운동권의 독서목록으로 읽히고 있다.  그러나 과연 구좌파라고 속칭하는 이들이 권위만을 내세우고 독재를 행하였는지  난 그 동시대 사람이 아니기에 모르지만, 여러 평가중 동구사회주의권의  사회내적 문제점만을 싸잡아 비판하는 형태는 평가에 있어 협소함과 편협함만 가져온다.


권위와 독재의 타파는 자신의 독선과 오만에 대한 편견의 타파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과연 한국사회의 미래는 있는가?
한국의 상황을 보면 중소사업장, 장기파업투쟁사업장, 비정규,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이 첨예하게 대립이 가시화 되어지고 있는 작금의 시기에 어느 누구도 그들의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맑스시대의 영국의 노동자계급과  상황은 다르겠지만 여전히 착취와 억압이라는 굴레와 레닌에 의해 주창된 적대적 모순인 자본가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계급인 노동자계급들의 단결은 과연 이땅에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1930년대 조선공산당사에서 뼈아픈 경험이 있지 않은가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 지부를 건설하였으나 정파투쟁으로 인하여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조선공산당 지부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모습을 보면 계급투쟁속에서 정파들의 분파투쟁이 얼마나 운동을 저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는 사상이 아닌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구호이다.  혁명적 실천없이 혁명적 이론이 없다는 다소 당연한  말에  우린 이제 의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다. 혁명적 이론없이 혁명적 실천이 없다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실천은 없고, 성숙되지 않은 낮은수위의 이론많이 난무하고 있다.
 
80년대 초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라는 대표되는  강철철학과 혁명철학은 이제 노동자들에게 무의미한 존재로 치부되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판단을 해본다.
 
운동도 조금꼬여 버렸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 인가가 아니라 자신의 비판을 통해 무엇이 올바름인지를 인지할 때만이  운동이라는 토양이 양분을 머금을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을 의한 비판, 대안이 없는 공허한 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공간에서 이야기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중요한 것은 말에 대한 책임 그리고 행동이 따르는 구체적 실천을  제시하여 야 한다. 과거의 오류처럼 선언과 오만으로 제단과 다름만을 강조한다면 지금있는 토양도 송두리채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운동은 거대 담론도 어려운 수식어로된 이론지도 아니다. 운동을 하면서 느끼고 고민하고 행동하면서 만들어낸 철두철미한 실천철학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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