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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수학은 이와 같이 모자란 인식이 명료하다고 자랑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철학에게<너도 그럴 수 있어>하고 우쭐거리지만, 사실 그런 명료함은 수학적 인식의 목적이 빈약하고 그 소재가 불충분한데 근거할 뿐이다. 그래서 철학은 이런 유의 인식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 수학의 목적 또는 개념은 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사태의] 본질과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적 지의 운동은 표면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태 자체, 즉 사태의 본질이나 개념에 다다르는 법이 없어서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운동이라 할 수 없다. — 수학이 흐뭇해 하면서 이런저런 진리로 가득찬 보물창고를 의연하게 내놓는데, 그것의 소재는 <공간>과 <하나>라는 수다. 수학이 말하는 공간이란 공허하고 생명이 없는 터전으로서 [크기를 따지는] 개념이[크고 작음의] 차이를 새겨넣는 [종이쪽과 같은] 현장일 뿐이며, 이런 터전에 새겨진 차이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임도 생명도 없는 것이다. 공간의 실재는 수학에서 그러듯이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수학이 다루는 것들이 이와 같이 비실재적인 것들인데 구체적인 감각적 직관이나 철학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전전긍긍할 리가 없다. 이런 비실재적인 터전에 진리가 있다고 한들 이것 또한 단지 비실재적인 진리로서 박제한죽은 명제일 뿐이다. 그래서[인식의 운동을] 아무데서나 그만 둘 수 있다. 앞의 명제가 다음 명제로 스스로 전진하는 일이 없어서 사태의 속성 그 자체에 따른 명제와 명제간의 필연적인 연관이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명제로 넘어갈 때 앞의 명제와 아무런 상관없이 따로 새로 시작하게 된다. — 수학이 고수하는 공간과 하나라는 원리와 터전이 바로 형식적인 명료함이 존속하는 바탕이 된다. 여기서 수학적 지가 하는 일이란 일치라는 등식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렇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은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죽은 것이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 차이로 나아가 본질상의 대립 또는 불일치를 이루는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본질상의 대립관계에서] 대립자가 이편에서 다른 편으로 넘어가는 질적이고 내재적인 자기운동으로 나아가는 일이 없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이유는수학이 오직 크기, 즉 비본질적인 차이만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스스로 각 차원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이 운동하여 공간을 쪼개고 각 차원으로 나눔과 동시에 그들 간의 연관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의 연관을 규정한다는 사실은 사상해 버린다. 그래서 수학은 예컨대 선이 면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이런 수학적 개념을 넘어선 것들을 살펴보려고 해도] 원의 지름과 원주를 비교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 간에 불가양성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불가양성의 관계는[크기를 따지는] 수학적 개념에서 보자면<이것이다>라고 딱 잡아뗄 수가 없는 무한한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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