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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0

§60) 이것으로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논변 위주의 사유에 대한 고찰이 마무리 된 것이 아니다.[1] 위의 고찰에 덧붙여 논변 위주의 사유가 내용을 갖는다는 것 자체를[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때 논변 위주 사유의 다른 면이 부각된다. 그가 내용으로 하는 것을, 그것이 표상에 속한 것이든, 사상에 속한 것이든, 아니면 양자를 혼합한 것이든 하여간 그가 내용으로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로하여금[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면이 분명해진다. 논변 위주의 사유가 갖는 이런[서커스에서 어릿광대가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일로 불거지는지 모르는 체 뭔가를 계속 해서 관중을 웃기듯이] 가관할 만한 꼴은[2]사실 위에서 이념이라고 했던 본질[3]그 자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논변 위주의 웃기지도 않는 꼴이 바로 이념이 어떻게 운동으로 등장해서 파악하는 사유가[4]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논변 위주의 사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自己)가 되어 그 안에[모든] 내용을 함몰시킨다. 그런데 그가 여기선 앞과 달리 내용을 갖는 긍정적인 인식으로 등장한다. 이때 자기(自己)가[5]되는 것은[스스로 운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저] 앞자리에 갖다놓여진[6]주어와[7]같은 것이고, 내용이란 이런 주어에 따라붙는[8]술어일 뿐이다. 논변 위주의 사유에서는 이와 같은[주어로서의 막연한] 주체가 내용을 지탱하는 것이며, 여기서 나타나는 운동이란 내용을[술어로 하여] 이런 주체에 붙였다뗐다하는 것 뿐이다. 개념적인 사유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 여기서 자기란 대상 고유의 것으로서 대상이 생성되어가는 가운데 스스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가 바로 개념이[9]되기 때문에 여기서 자기란 딸린 것들을[10]묵묵히[11]그저 지탱하는 부동의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운동하고 자기에 딸린 규정들을[12]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운동 안에서는 논변위주의 사유가 기대고 있는 부동의 주체가 해체되어 정말 밑바닥으로 깔려 들어가[13]스스로 차이와 내용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때 주체는[따라붙어있는] 규정들 저편에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규정들을, 즉 구별된 내용과 내용에 구별을 주는 운동을 완성하는[동력인][14] 것이다. 이렇게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사유가 부동의 주체에 기대어 굳게 서 있다고 믿는 확고한 토대가 흔들리게 된다. 단지 이런 운동만이[개념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용으로 충만한주체는 더 이상의 내용을 찾아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Akzidenzen이나 술어로 채워질 여지도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내용이 이리저리 갈라지는 산만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통제아래 한묶음되어 있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게 어떤 주체에 묶여있기 때문에 속해있는 주체를 떠나서 여러 주체에 해당되는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내용은 사실 더 이상[주어에 갖다붙이는 술어가] 아니라[주체가 생동하는] 실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사유의 대상인 본질과 개념인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그 사실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표상적 사유는 말 그대로[15]뭔가 떠올리는 것을[주어에] 술어로 갖다붙이는 행위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고, 또 이렇게 갖다붙이는 것이 술어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땅히[16]그런 것들을 넘어서서[본질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유는 쭉 나아가지 못하고 멈칫거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명제에서[본질이 아니라] 고작 술어 형식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 실체이기 때문이다. 술어를 고작 주어에 딸려붙어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사유가[실체를 맞이하고] 붙잡히게 되는 셈이다. 주체가 무슨 불변하는 토대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던 차에 표상적 사유가 발견하는 것은- 술어가 사실 실체가 되기 때문에- 주체가 술어쪽으로 넘어가[이젠 더 이상] 주체구실을 못한다는[17]점이다. 단지 술어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이렇게 내용의 전반을 이루고[어디에 붙었다떨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심점을 갖는] 독립적인 질량이 되기 때문에 표상적인 사유는 더 이상 자유롭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못하고 그 질량의 중력에 의해서 제동을 받게되는 것이다. — 앞서 이야기했듯이 형식적 사유는 주체를 대상화하여 고정된 자기(自己)라는 토대로 삼는다. 그리고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유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규정으로, 달리 표현하면 술어로 나아간다. 이때 앞에서 이야기된 [자기 운동하는] 주체의 자리에 자아가 지적 주체로[18]들어서서 술어를 엮어내고 그것을 지탱하는 주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표상적 사유가 주어라고 생각했던] 주체가 규정에[속속들이] 스며들어가 그것의 혼이 되는 상황에서 지적 자아인 형식적 사유의 주체는 표상적 사유가 말하는 주체를 빨리 처리하고 나서 다시 자기 안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만 표상적 사유의 주체가 아직 술어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지적 자아는 더 이상 표상적 사유가 주어로 삼는 주체에 이런저런 술어를 붙였다떼었다하는 운동으로 일관하는 논변위주의 사유로 남을 수 없고, 오히려[그런 술어의 운동 속에서]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das Selbst]를 접하고 있는바, 더 이상[운동의 힘을 발휘하는] 자기는[das Selbst] 자기 혼자라고[fuer sich] 우쭐하지 못하고 내용의 자기[das Selbst]와 그 자리를 공유해야하는 외압적인 수모를 당하는 꼴이다.



[1]원문<aber>

[2]원문<merkwürdige Natur>. <특이한 성질/속성>. 좀 빈정대는 투가 들려서 위와 같이 번역했다.

[3]원문<Wesen der Idee>. 소유격을 성질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 이해하고 번였했다. 본질이 이념의 성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4]원문<denkendes Auffassen>

[5]원문<das Selbst/자기>. 이건 도대체 뭔가?

[6]원문<vorgestellt>. 관념적인 표상이라는 의미와 문장에서 주어를 앞에 갖다논다는<voranstellen>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낱말이 갖는 은유적인 의미와 직접적인 의미를 혼합봐여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subjekt>란 낱말에도 여러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Hypokeimenon>으로서 실체를 이루는<바탕>이라는 의미,  문장의<주어>란 의미, 주체란 의미가 있다.

[7]원문<Subjekt>.

[8]원문<Akzidens>. 어원<accidere>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9]원문<[…] der Begriff [ist] das eigene Selbst des Gegenstandes>. 강조 역자. <개념이란 대상 고유의 자기다.> <정신현상학> 서설 § 56에서 이야기된<die Natur dessen, was ist, in seinem Sein sein Begriff zu sein>를 뭔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인 것 같다. 헤겔은 „개념이야말로 참으로 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사물이 그 사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안에 내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개념의 활동을 통해서이다./Der Begriff ist vielmehr das wahrhaft Erste, und die Dinge sind das, was sie sind durch die Tätigkeit des ihnen innewohnenden und in ihnen sich offenbarenden Begriffs.“ (헤겔, 철학엔치클로페디아, § 163, 첨언2, 글로크너 판)라고 한다. 사물이 이런 식으로, <자기>의 계시로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정말 힘들다. 키에르케고르의<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야기되는<자기>란 것에 기대어 사물에서 활동하는<자기>를 이해할 수 있다면<관계하는 가운데 하나로 통일되어 완성되는 것과 그렇게 하는 힘> 정도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아무튼<das Selbst>로 명사화하여 찍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헤겔의<개념>에 대한 개념을, 소유개념을 예로 삼아 설명하기도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소유개념에서 소유에 관한 규정을 연역하고 또 역으로 이런 내용을 소유개념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개념이<애당초부터 아무런 내용이 없는 형식/bloss eine an sich inhaltslose Form>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념이 그저 형식이라면 거기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또 그런 텅 비어 있는 형식뿐인 개념으로 내용을 환원한다는 것은 내용의 규정성을 빼앗을뿐이지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 („Man spricht von der Ableitung eines Inhalts, so zum Beispiel der das Eigentum betreffenden Bestimmungen aus dem Begriff des Eigentums und ebenso umgekehrt von der Zurückführung eines solchen Inhalts auf den Begriff. Damit wird aber anerkannt, dass der Begriff nicht bloss eine an sich inhaltslose Form ist, da einerseits aus einer solchen nichts abzuleiten wäre und andererseits durch Zurückführung eines gegebenen Inhalts auf die leere Form des Begriffs derselbe nur seiner Bestimmtheit beraubt, aber nicht erkannt werden.“ (같은 책 § 160, 첨언). 이것은 수긍이 가지만 사물도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참 힘들다. 헤겔이 논리학은 신학의 변신 아니면 자기모습을 감춘 신학[Kryptotheologie]인 것같다. 논리학의 바탕엔<신에 관해서 알고있는 인간의 정신은 단지 신의 정신 그 자체일 뿐이다./Der Geist des Menschen, von Gott zu wissen, ist nur der Geist Gottes selbst.>(종교철학강의, WW. [글로크너 판, 1927] XII, 496쪽)란 표현에 스며있는[기독교적 교리의] 운동이 깔려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변증법이<가만히 바라보기만/reines Zusehen>해도 되는 이론적인(theoretisch=spekulativ=가만히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실천적인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변증법이 이론=아리스토텔레스의Theoria=헤겔의speculatio=Zusehen의 이론인가 아니면 실천의 이론인가 하는 문제다. 맑스를 따른다고 하면서 변증법을 운운했던/운운하는 사람들이 이점을 간과했던/하는 것 같다. 맑스가 실천이라고 했던  <gegenständliche Tätigkeit>를 좀더 살펴봐야 하겠다.

[10]원문<Akzidenzen>

[11]원문<unentwegt>

[12]원문<Bestimmungen>

[13]원문<zugrunde gehen>의 이중적인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해체되어 멸망하다>란 의미가 있는가 하면<Hypokeimenon/바탕으로 침강하다>란 의미가 있다. 진정한<Hypokeimenon/바탕/실체>가 된다는 이야기다.

[14]원문<ausmachen>

[15]원문<seine Natur>

[16]원문<mit Recht>

[17]원문<aufheben>. 형식적 사유가<aufheben>의 변증법적 운동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사라지다>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18]원문<das wissende 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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