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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2

§52) 이렇게[1][칸트가 제시한 삼중성이란] 탁월한 것이[형식주의의 사냥거리가 되어] 생명과 정신을 박탈당하고, [형식주의의] 생명 없는 지가[살아있는 삼중성을 때려잡아 그] 외피를 짐승의 가죽처럼 벗겨서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둘러쓰고 있는 것을 눈뜨고 봐야 하는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삼중성이] 이렇게 운명을 다하고[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삼중성이] 이렇게 가죽으로 남은 상태에서 생명 없는 지가[우리시대의] 정신에 행사하는 폭력을, 정신이 아니라면 최소한 심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폭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삼중성이] 일반적이고 엄밀한[2]형식으로 다듬어져 나가는 것을 또한 인식할 수 있다.1 이런 형식을 갖춤으로써 삼중성이 완성되고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서 그 일반성을[어떤 원리를 완전히 깨닫고 난 후에는 그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적용하듯이] 표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1]원문<aber/그러나>. 뭔가 더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aber>다. 이 <aber>를 제대로 이해해야 이 문단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 같다.

[2]원문<Allgemeinheit und Bestimmt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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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자가 보기엔 헤겔도 쉘링한테 뭔가 배운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51

§51) [자기 제한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규정은 내적 생명력을 갖고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인데, 형식주의가 말하는 단순한 규정은[1]그렇지 않고 다만 직관, [여기서는] 즉 감각적인 지에 의한 표면적인 유추를 통해서 표명될 따름이다. 그리고 이같이 공식을 외면적이고 공허하게 적용하는 것을 구성이라고[2]내놓는다. —[이 형식주의는 제법 의미심장하게 자기가 뭔가 별다른 것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것을 터득하는 일이란 다른 형식주의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질병을 무력증, 강력증, 간접무력증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이 각기 있다는 형식주의적인 이론을15분내에 주입시키지 못할 만큼 주름 없는 뇌가 있을까?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교과과정을 수료하면 평범한 의사가 충분히 이론에 정통한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그 과정이 어렵다고] 그것을 포기한 의사가 있다면 그는 과연 얼마나 멍청한 의사일까? 자연철학적 형식주의가 가르치는 내용을 한번 들춰 보면 지성은 전기니, 동물은 질소니 하는가 하면, {지성은?? 전기는??} 남[극], 북[극]과 일치한다는 등 이런저런 비교를 하는가 하면{무엇이??} 그것을{지성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3], 이런 형식주의는 위와 같이 허술하게 표현되든 아니면 보다 많은 전문용어를 첨부하여 뒤범벅 해 놓든 아무튼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이 뚝 떨어져 있어 보이는 것을 한 묶음으로 싸매는 힘이다. [자기가 직관하는 것에] 푹 빠져 있는[4]감각에게는 이런 한 묶음이 폭력으로 다가오고, 이런 힘은 또 개념이 무슨 증서라도 되듯 개념증을[5]발급할 뿐 개념 그 자체,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표상이 갖는 의미를 표명하는 정작 해야 할 일은 방기하는 폭력이다. 이런 것을 처음 보는 사람이야 이런 힘과 폭력을 경탄한 나머지 감탄사를 터뜨릴 것이고, 그것이 마치 심오한 천재성이라도 되듯이 경의를 표할 것이며, 추상적인 개념을 직관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여 눈요기가 되는 것으로[6]만들기 때문에 그 힘과 폭력을 마치[자유자재 하는 그리스 신들의 조각된] 명쾌함을 보는 마냥 즐거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거침없는[7]행동을 어렴풋이나마 알겠다는 영감 속에서 그런 행동에 공감하고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듯한 기분이 되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찬(自讚)할 것이다. 이런 식의 영특함은 속임수와 같은 것으로서 금방 습득할 수 있고, 습득함과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속임수는 그 작동 방법이 한번 알려지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뻔한 요술로서 반복하기에 민망한 것이다. 이 단조로운 형식주의의 도구는 마치 두 가지 색깔, 예를 들어 빨간색과 녹색만을 가지고 인공적인 것을 그릴 때는 빨간색으로, 자연적인 풍경을 그릴 때는 녹색으로 화면을 칠하는 화가의 팔레트와 같은 것으로서 그 도구를 다루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여기서[우리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에 존재하는 만물을 두 가지 색으로 마음껏 범벅하고 덮어씌우면서 느끼는 자기만족과 이런 도구를 만능의 도구로 사용하는데 정말 하자가 없는 일품이라는 자만심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 그 어느 쪽이 더 큰지 가리기 쉽지 않게 서로 부추기면서 비등하게 작용하고 있다.천지간의 온갖 사물에, 그리고 자연적이거나 정신적인 온갖 형태에 일반도식의 양대규정[8]중 그 하나를 꼬리표로 붙이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그 어느 한쪽에 가지런히 정돈하는 방법이 산출해 내는 것이 우주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해맑은 보고>*라고, 아니 그 이하의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자만한다. 그러나 이런 보고는 사실 일람표와 같은 것으로서, 여기저기 쪽지를 단[교육용] 골격, 아니면 양념소매상 가게의 뚜껑 닫힌 양념통에 에티켓을 붙인 진열대와 흡사한 것이다. 이런[형식주의] 일람표는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구분하지만, 뼈에서 살과 피를 제거한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는 것을 통에 봉합하여 덮어버린 후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은 떼어 팽개쳐버리거나 은폐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판박이 수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대규정을 적용하다가 단색의 절대화로 발전하여 그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9], 이때 형식주의는 도식상의 차이까지 부끄럽게 여기는 가운데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반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여 이것 또한 절대의 공허 속으로 몰아넣어 아무런 형식이 없는 백색과 같은 순수한 동일성을 만들어낸다. 아무런 색상의 차이가 없는 도식과 이런 도식에 따라서 생명 없는 꼬리표를 다는 것과[10]절대적인 동일성, 그리고 어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진행하는 것 모두가 하나같이 죽어 있는 지성이며 외피적인 인식일 뿐이다.



[1]Bestimmtheit

[2]원문<Konstruktion>

[3]이부분 헤겔의 독어가 개판이다. 쉘링의 자연철학을 논평하는 것 같은데 문장구조와 함께 그 논평이 너무 막하는 논평인 것 같다. 쉘링의 철학체계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에 대한 사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쉘링은 피히테가 펼쳐 논 절대자아라는 지평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피히테식의 주관주의 철학이 도외시한 자연에 관심을 갖는 쉘링은 당시 자연과학이 달성한 성과에 주목하면서 죽어있는 물질과 살아있는 유기체간의 괴리를 자연철학으로 해결한다.  쉘링은 자연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것이 우리와 유사하게 정신으로 각인된 것이라고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자연의 체계>와<정신의 체계>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치하는 이유는 양 체계가 발전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물질에 스며있는 정신이 자기의식으로 발전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발전의 힘은 서로 대립하는 이중성, 혹은 양극성에서 기인한다. 쉘링은 이 양극성을 우주의 이치로 삼는데, 이 원칙으로 전기의 양극, 산성과 알칼리성 등 자연의 현상뿐만 아니라 의식의 주관과 객관 등도 설명한다. (칼 포랜더, 철학역사 참조 www.textlog.de/6565.html)

[4]원문<ruhend> <고정된>

[5]원문<Schein eines Begriffes> 명허증<Führerschein>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6]원문<erfreulich>

[7]원문<herrlich> <Herr/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주인>이란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8]원문<die paar Bestimmungen> 앞 내용, 즉 두 가지 색으로 모든 것을 칠한다는 내용의 연장선에서<몇 가지>로 번역하지 않고<양대규정>으로 번역하였다.

*) 이 표현은  피히테의 저작<최근 철학의 독특한 본질에 대한 독자에게 보내는 해맑은 보고>(1801)라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9]원문<sich vollenden>

[10]Bestimm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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