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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금 말한 것을 설명하는 예로<신은 존재다>[1]라는 명제를 살펴보면, 이때 술어가 되는<존재>에 실체적인 의미가 있고, 주어는 술어 안에서 흐물흐물 녹아사라진다. [명제가 실지로 주장하는 것은] <존재>가 주어에 따라붙는 술어가 아니라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제상의 위치로 보면 견고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신이 더 이상 그런 주체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 이때[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본래] [과감하게] 주어에서 술어로 이행함으로써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런 이행의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주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소심하게 되어] 어찌할 줄 몰르고 망설이다가 결국 주체로서의 주어를 잊지 못해[주체를 인식주관으로 파악하는 형식주의] 사상으로[2]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유는 술어라는 것 그 자체가 주체의 속성을 남김없이 안고 있는<존재> 또는<본질>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술어 그 자체 안에서 [본질뿐만 아니라] 또한 주체를 찾게된다. 이때 사유는, [술어로 이행했지만 그 안에서 주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자신이 인식주관이라는 주체가 되어] 술어를 이리저리 따져보는 자유로운 입장에 들어가기보다는 아직 내용에 몰두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며 최소한 내용에 몰두해야 한다는 요구를 몸소 느끼는 상태에 있다. —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주어로서의 현실적인 것은 그 술어 안에서 사라진다. 이 명제에서 보편적인 것은 어떤 사실을 서술하는데 그치는 단지 술어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 이렇게 사유는 변함 없는 부동의 토대라고 여겼던 주체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상실은 술어로 이행한 뒤에 주체로 다시 복귀하는데 있어서 자기안으로 복귀하지 않고 내용의 주체 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주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1]원문<Gott ist das Sein>. <Gott ist Sein>이란 명제와 다른가?
[2]원문<Gedanken des Subjekts>. 의미가 부동(浮動)하는 표현이다. 우선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주체에 관한 사상이란 의미와 함께 주체, 즉 인식주관이 갖는 사상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 같다. <부동>한다고 하는데<부동>하는 가운데 역자의 생각도 뭔지 붕 떠있는 것같다. 이성이 자신을 찢어내는 칼을 빌려 헤겔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데카르트의<cogito [res] cogitans cogitum>에서와 같이 사유는 인식행위 <cogito/나는 생각한다>와 인식주관/주체<res cogitans/생각하는 실체>로 구별된다. 라이프니츠에 이어 칸트는 사유행위(cogito)를 <Apperzeption/통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단순하고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내용이 전혀 없는 표상으로서의 자아“(„die einfache und fuer sich selbst an Inhalt gänzlich leere Vorstellung: Ich“)다. 이 자아가 „의식외 아무것도 아닌 것“(blosses Bewusstsein), 즉 의식활동이전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개념을 동반하는 것이고, „[수학 공식에서의x와 같이 텅비어있는] „미지의 선험적 주관“(„transzendentales Subjekt=x“)이 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B404 참조). 선험적 주관이[의식의 내용물을] 하나로 엮어내는 가운데 하나로 머무르는, 다른 무엇을 전제하지 않는 „통각의 절대적 통일“ („die absolute Einheit der Apperzeption“)이 된다. 이렇게 „사유“(Denken/cogito)와 „사유주체로서의 주관“(das denkende Subjekt/res cogitans)은 „규정하는 자기“(„das bestimmende Selbst“=Denken)와 „규정되어지는 자기“(das bestimmbare Selbst=das denkende Subjekt)로 구별된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에서는 단지 통각에 의한 사상의 종합에서 나타나는 통일이 지각된 통일이 사상의 주관/주체(res cogitans)에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칸트는 이런 가상(Schein)이[단지 동반하는 행위일 뿐인] 의식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das hypostasierte Bewusstsein“/실체화된 의식) 여기는 한 자연스러운 것이고, 끌려가기에 알맞은 „기만“(„Subreption“)이라고 한다.(칸트, 순수이성비판A 401, 4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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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자연 발생적인 생각/natürliche Vorstellu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통일철학/Identitätsphilosophie>이 대려 자연적인 표상이고 기만이라고까지 비판한다. 헤겔의 <논리학>은 이런 칸트의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헤겔의 개념논리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서설 §57 역자주에서 헤겔이 개념논리학을 사태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대인논증으로 쉽게 넘어간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대인논증이, 즉 형식적 사유가 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런 비판은 헤겔이 이성을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과 같이 순수(이론=Theoria)이성과 실천이성(praktische Vernunft)으로 구별하지 않고 플라톤을 따르는데 기반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제쳐놓고 헤겔철학과 칸트철학도 통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 단지 <정신현상학> 서설의 <문체/Textkörper>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자면 이 문단에서와 같이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Das Allgemeine soll das Wesen des Wirklichen ausdrücken.)는 당위성을 표현하는 „Sollen“이라는 낱말에서 단지 감지한 것뿐이다. 칸트의 <통일철학>에 대한 비판이 헤겔의 논리학에도 적용된다면, 변증법에 대해서 숙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맑스의 실천개념과 칸트의 헤겔비판에 기대어 변증법을 실천이성으로 보다 정확하게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부가 정보